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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계는 위화도 회군으로 고려 조정을 장악했고

신진사대부와 결탁해 점점 새로운 나라를 만들려고 하고 있었습니다

 

이성계는 과전법을 실시했는데

과전법은 관리에게 토지 수조권을 준 제도였는데

당시 고려말 원나라와 결탁해 고려 내에서 떵떵거리며 살던

권문세족들은 대토지 소유를 하며

고려에서 자신들의 땅을 넓혀갔고

나라에 세금도 내지 않았는데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으로 정권을 잡고 난 후

권문세족이 가지고 있던 토지를 뺏어

자신의 세력과 신진사대부들에게 과전법을 통해

토지를 나눠주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차차 경제권까지 장악한 신진사대부들은

아예 고려를 멸망시키고 이성계를 왕으로 해서

새로운 나라를 건국하려 했는데

신진 사대부 내에서도

고려는 냅두고 썩은 것만 도려내자라는 '온건 사대부' 와

아니다 , 고려 자체를 멸망시키고 새로운 유교국가를 건설하자는 '급진 사대부' 로

파벌이 나뉘었고

온건 사대부의 대표적 인물은 당대 뛰어난 학자였던 '정몽주'가 있었고

급진 사대부의 대표적 인물은 이성계와 결탁한 '정도전'이 있었습니다

 

온건 사대부 정몽주

 

급진 사대부 정도전

 

이외에도 막후에서는 이성계의 아들들이 큰 활약을 하며

이성계를 도왔는데

대표적인 인물로 훗날 조선 3대왕이 되는 '이방원' 이 있습니다

 

태종 이방원의 상상화

 

고려의 마지막 충신이었던 정몽주는

이성계가 아예 고려를 멸망시키고 왕이 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이성계가 사냥할때 말에서 떨어져 다친 것을 알고

이성계를 죽이려 했지만 이방원에 의해 실패했고

이성계는 이방원에게 재능이 많았던 정몽주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라 지시합니다

이후 낙마해 드러누운 이성계의 상태를 살피기 위해 정몽주는 병문안을 핑계로

이성계의 집에 방문하는데 그곳에서 정몽주는 이방원과 술자리를 했습니다

 

술자리에서 이방원은 정몽주를 떠보기 위해

시조(한국 고유의 노래와 시가 섞인 리듬이 있는 시) 를

읊었습니다

 

<이방원의 시조 '하여가'>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어진들 그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져 백 년까지 누리리라 

 

(우리가 급진 사대부와 온건 사대부지만

같이 결탁해서 새로운 나라를 세워보장께 ?)

 

이에 그 뜻을 파악한 정몽주가 답가했습니다

 

<정몽주의 시조 '단심가'>

이 몸이 죽고 죽어 일 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어림없다 !

고려에 대한 나의 충심은 뼈가 흙이 되고

정신이 있던 없던 변하지 않을 것이다)

 

결국 정몽주의 뜻을 굽힐 수 없음을 안 이방원은

정몽주를 죽이려 결심했고

이후에도 정몽주 역시 이방원이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것을 눈치챘지만

그럼에도 계속해서 고려 조정에 새로운 나라를 세우려 준비중이었던

이성계와 정도전을 몰아내려고 했습니다

 

이후에도 이성계의 동태를 살피려 문병온 정몽주가

다시 집에 돌아가는 길에 결국 이방원은 자객을 시켜

선지교 다리를 건너는 정몽주를 철퇴로 때려 죽였고

고려 마지막 충신이자 고려의 대학자 정몽주는 그렇게

56세의 나이로 사망했습니다

 

정몽주의 피는 선지교에 묻었는데

선지교 돌틈에서는 충심을 상징하는

대나무가 솟아서 사람들은 그때부터 선지교를 대나무 죽자를 써서

'선죽교' 라 불렀습니다

 

오늘날 개성(북한) 에 있는 선죽교

 

이성계는 정몽주를 죽인 아들 이방원을 책망했습니다

 

<이성계>우리 집안은 본디 충효로 세상에 알려졌는데

너희가 마음대로 대신을 죽였으니 나라 사람들이 내가 이 일을 몰랐다고 여기겠는가 ? 

부모가 자식에게 경서를 가르친 것은 그 자식이 충성하고 효도하기를 원한 것인데 

네가 이렇게 불효한 짓을 감히 하니 내가 사약을 먹고 죽고 싶은 심정이다

 

사실 정치력이 높은 사람들의 특징은

누군가를 죽여도 자신의 손에 피를 묻히지 않는다고 할 수 있고

공민왕이 권문세족을 제거하려고 이름없는 승려 '신돈' 을 등용하고나서

신돈이 권문세족을 제거하자 곧 내친것이나

문화대혁명때 중국 도시의 청소년들을 조종해 권력을 탈환하고

청소년들을 시골에 보내버린 마오쩌둥 등의 사례들 같이

이성계는 계속해서

 

'크흠 나는 딱히 왕이 될 생각은 없었당께,, 그런데 너네들도 그렇고

백성들이 원하니께,,'

 

이런식으로 왕이 된 인물이라 할 수 있고

많은 야심가들이 왕위에 오르기전에

재차 사양한다거나 하는게

다 이런 양상을 띤다 할 수 있습니다

 

이성계는 이방원을 책망했지만

은연중에는 이방원이 대신 피를 묻혀서 정적들을 제거해주기를

바라고 있었고 그의 그런 심중을 눈치챈 이방원은

적극적으로 아버지의 행동대장이 되어

아버지 주변의 정적들을 제거했던 인물이라 보여집니다

 

하여튼 고려 마지막 버팀목이었던 정몽주마저

이방원에게 살해당하자

이성계와 급진 사대부들은 더이상 거릴것 없이

고려의 문,무를 모두 장악하고는

왕씨성이 아닌 이씨성이 왕이 되는 새로운 나라를 건국하는

'역성혁명' 으로 이성계 일파에 옹립된 허수아비 왕이었던

고려 마지막왕 공양왕의 양위를 받아

조선을 건국합니다

 

양반나라 조선 , 조선의 지배세력 '양반'

 

고려 장군 이성계는 그렇게

조선 1대왕 태조 이성계가 되었고

재상이 된 정도전 및 여러 급진 사대부들은 새로운 나라 조선의 수도를

한양으로 정하고 새로운 나라 건설에 집중합니다

 

왕씨나라 고려를 멸망시키고

새로운 왕조의 창립자가 된 태조 이성계는

고려의 잔재와 조선의 걸림돌을 없애려 했고

고려 왕족이었던 왕씨들을 좋은곳으로 이주시켜 편안히 살게 해준다 속이고

배에 태운뒤 배 밑에 구멍을 뚫어 수장시켜버립니다

 

결국 조선의 왕씨 탄압에

왕씨들은 왕 王 자에 점을 찍어

성을 왕에서

전 全 , 전 田 , 옥 玉 , 차 車 , 신 申

 

등으로 바꿨고

오늘날 한국에 신라 성씨인 김씨와 박씨 등이 많은 것에 비해

고려 성씨인 왕씨들이 거의 없는 이유가 되었다 할 수 있습니다

 

또 조선은 성리학 , 유교를 국가 근본이념으로 삼고

고려의 국가 이념이었던 불교를 적극적으로 탄압했고

이에 불교 사원이었던 '절' 들은 산속으로 탄압을 피해 옮겨갔고

오늘날에 한국의 산속에 절들이 많은 이유입니다

 

한국의 산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불교 사찰들

 

고려와 왕씨 탄압으로 여러 탄압과 학살을 당한 고려 왕도였던 개성 사람들은

이에 이성계와 조선을 싫어했고

돼지띠였던 이성계를 저주하며 돼지를 '성계' 라 부르며

최영 장군의 제사를 지내며 제사상의 성계육(돼지고기)을 잘근잘근 씹어먹었고

이성계에게 남편을 잃은 개성여인들 역시

떡을 이성계의 목이라 생각하고 비틀어서 눈사람 모양의 조랭이 떡을 만들어 먹었다 합니다

 

조랭이 떡국

 

조선은 건국부터 친명사대정책을 기조로 하며

고구려를 계승한 고려의 진취적인 기상보다는

당나라에 사대한 신라의 사대적인 기풍을 유지했고

이는 고려시대에 중국이 여러 갈래로 나뉘어있던 것과 달리

중국이 신라시대때 당나라처럼 조선시대에는

거대 통일제국 명이 등장한 시기이기도해서 였다고도 할 수 있지만

하여튼 조선 정부가 개성 사람들을 탄압하고

이시기부터 북방지역을 차별하고 진취적인 기풍이 줄었기에

오늘날에도 조선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정말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고

특히나 오늘날 북한에서는 자신들의 나라를 조선이라 부르지만

이성계의 조선이 사대주의 국가라며

매우 폄하하고 싫어합니다

 

그렇게 고려가 멸망하고

그러다 이성계의 조선도 나름 나라꼴을 갖추어가고 있었는데

슬슬 이성계의 다음 후계자 문제가 거론되고 있었고

 

이성계는 자신을 도와 건국에 큰 공을 세운 자신의 아들이었지만

정적들을 잔인하게 죽이는 등 잔인한 구석이 있었던

이방원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고

또 정도전 등 개국공신들은 이성계를 중심으로

신하들이 중심이 되는 조선을 만들려 했고

이에 강력한 왕권을 추구하며 야심을 보였던 이방원을 크게 경계했습니다

 

뜬금없이 이성계는 자신을 도와 조선을 건국하고 장성했던 아들들을 재쳐두고

다른 여인에게서 낳은 막내아들 이방석을 왕세자에 임명했고

이에 이방원은 큰 분노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러다 평소 이방원을 견제하던 정도전은

다시금 요동을 정벌하려 했고

사병(개인 군대) 을 혁파하고 군제를 개편하려 했는데

사실 정도전이 개입한 세자 책봉이나 사병혁파는 모두

이방원을 견제하려는 것이었기에

이방원은 결국 정도전을 제거하기로 결심했고 군사를 일으켜

정도전 및 배다른 동생이자 세자 이방석을 살해했고

이를 '왕자의 난(제 1차 왕자의 난)' 이라 부릅니다

 

왕자의 난으로 정권을 장악한 이방원은 장자승계원칙을 해야한다며

야심을 보이지 않으려 애써 왕위를 무능력한 형 이방과에게 넘겨주었고

결국 이방원에 의해 뒷방 늙은이로 밀려나고 충격을 받은 태조 이성계는

이방과를 세자에 책봉하고 곧 왕위를 물려주었고

이방과는 조선 2대왕 정종이 되어

아버지 태조 이성계와 동생 이방원의 눈치를 보며 조용히 지냈습니다

 

그러다 이방원의 또다른 형 이방간은 왕위에 대한 욕심에

군사를 일으켜 이방원을 제거하려 했지만

이방원의 군대에 제압당했고

이 사건을 '제 2차 왕자의 난' 이라 부릅니다

 

이런 사건들로 인해 오늘날 '왕자의 난' 이라는 말은

형제들의 다툼이나

재벌가 자녀들의 상속 다툼에 대한 비유적 표현 등으로 쓰여지게 되었습니다

 

두 차례에 걸친 왕자의 난에서 모두 승리를 거머 쥔

이방원을 견제하려는 세력은 조선에서 사라졌고

결국 두려움에 느끼던 정종 역시

동생 이방원에게 왕위를 사양했고

결국 이방원은 조선 3대왕 태종 이방원이 되었습니다

 

한편 이방원이 형제들을 살해하고 왕이 된 것에

분노한 이성계는 이방원을 인정하지 않고

옥새를 들고 고향인 함흥으로 떠나버렸습니다

 

<이성계>너같은 놈은 내 자식도 아니고, 이 나라의 임금도 아니다 !!

 

비록

 

'권력 앞에서는 피도 눈물도 없다'

 

는 말이 있는 것처럼

여러 정치적 이해관계가 얽히고 설킨 아버지와 아들이었지만

당시 태상왕이었던 태조 이성계의 태종 이방원에 대한 분노는 매우 컸습니다

 

태종 이방원은 아버지가 다시 옥새를 들고 한양에 돌아와 달라 간청하며

함흥에 왕의 명령을 전달하는 차사(왕이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라 보내는 벼슬아치)를 보냈는데

분노한 이성계는 한양에서 온 태종이 보낸 차사들을 활로 쏴죽였고

결국 함흥에 간 차사들은 돌아오지 않아

한국 사람들은

 

'어디에 뭘 하러 갔는데 도통 소식이 없는 사람'

 

들을 '함흥차사' 라 부르기 시작했고

함흥차사라는 말의 유례가 되었습니다

 

그러다 결국 태종임금 역시 아버지에게 왕의 자질을 보여 인정받기 위해

백성들을 위한 정책을 펴며 노력했고

이성계의 오랜 친구였던 무학대사가

이성계를 직접 찾아가

태종 임금 역시 현재 훌륭한 정치를 하고 있다 설득하자

그제서야 태상왕 이성계는 한양에 돌아왔고

태종 임금은 이성계 앞에 엎드려 통곡했고

이 모습을 본 이성계는 아들에게 옥새를 돌려주었습니다

 

함흥차사 이야기는 한국의 유명한 민간설화이지만 실제 당시

왕자의 난으로 왕이 된 태종 이방원과 태조 이성계의 부자 대립은

엄청나게 컸고 이러한 상황속에서 태종 역시 큰 노력을 해

아버지의 마음을 돌리려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태종 이방원은 조선을 건국하고 왕이 되기 위해

피를 엄청나게 흘린 인물이라 악업의 업보가 많은 인물이지만

고려시대때 무인집안이었던 이성계의 아들중

과거시험에 2등으로 합격한 수재였고

총명한 자질을 보여 무인 집안이었던 이성계의 집안을 빛내

이성계의 사랑을 받은 유능한 아들이었고

아버지를 지키고 도우며 조선을 건국한 개국공신이었습니다

 

이방원은 그렇게 왕이 되고나서는

정도전이 구상하던 신하중심 정치를 없애고

왕권을 강화시키려 노력했고

신하들의 기구인 '의정부' 권한을 약화시키고

왕에게 직접 보고가 가는 '6조 직계제' 를 실시해

왕권을 강화하려 했고

자신이 왕이 되자 사병(개인 군대)을 혁파해

반란의 불씨를 없애려 했습니다

 

또 16세 이상의 남성에게 오늘날 주민등록증 격인

호패를 가지고 다니게하는 '호패법' 을 실시했고

힘없고 억울한 백성들을 위해 신문고라는 북을 치면

억울한 백성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신문고 제도' 도 실시했습니다

 

조선시대의 주민등록증 격인 '호패'

 

신문고하면 떠오르는 이미지의 한국의 전통 북

 

태종 이방원은 잔인했지만 무능한 인물은 아니었고

왕이 되고나서는 여러 정책을 펼치며

조선의 건국 기틀을 잡으려 했습니다

 

고려말 조선 초(여말선초)의 이야기와 태종 이방원의 일대기를 다룬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 , 출처 : SBS 창사 25주년 특별기획 육룡이 나르샤 (2015~2016) Six Flying Dragons / Roots of the Throne

 

사실 그의 가장 큰 업적은 따로 있었는데

오늘날 한국사에서 한국인들에게 가장 존경받는 인물인

세종대왕을 낳은 것이었습니다

 

건국된지 얼마 안되 뒤숭숭했던 조선은

태종 이방원의 아들 세종대왕대에 이르러

찬란한 문화가 꽃피우게 되고

한국사의 태평성대이자 조선의 평화시대가 시작됩니다

 

<라봉봉>고려 마지막 명신이자 충신이었던

정몽주의 고려에 대한 충심은 지극했기에

비록 이성계 일파가 정몽주를 죽이기는 했지만

정몽주를 높이 여겼고

고려왕조에 충성한 정몽주같이 조선왕조에 충성하는 신하들이 많아지라고

특히나 정몽주 사후 그를 대우해줬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가 남긴 시조 단심가의

일백번 다시죽건 뼈가 흙이되던 정신이 있건없건

지조를 굽히지 않겠다는 내용등은

한국 정신과 한국 문학의 걸작이 되었다 할 수 있고

참으로 그가 뜻있고 뜻깊은 고려 말기의 대학자였음을 알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태종 이방원은 여러 논란이 있는 인물이지만

총명했던 인물이자 조선 건국의 핵심세력이었고

역사에서 국가 건국 초기 나타나는

'엄격한 지도자형' 인물이었다고 보여집니다

(고구려 대무신왕 , 고려 광종 , 대한민국 박정희)

 

그는 다른건 다 제쳐두더라도

세종대왕을 낳았다는 엄청난 업적이 있는데

이는 한국사의 크나큰 축복이었다 할 수 있습니다

(세종대왕도 태어나보니 아버지가 태종 이방원인 것도 신기하겠지만

태종 이방원 역시 자식 한명이 아인슈타인급 천재로 태어나니

참으로 신비로웠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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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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