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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은 고려 조정을 강화도에서 개경으로 환도시킨 후부터

친원 조정을 세웠고 일본원정으로 고려인들을 동원하는 등

고려에 대한 간섭을 강화합니다

이때부터 고려는 원나라 몽골풍습들이 많이 생활 곳곳에 들어왔는데

몽골인들이 비록 문화력 등은 발달하지 못했지만

유목민족 특유의 실용적인 생활습관과

옛날 유목민족이었던 부여 · 고구려의 후예인

한민족(고려 , 한국)과도 유사성이 많았고

이 시기부터 고려, 한국인들은 제도적인 면에서는 중국 한족의 것들을 많이 따왔지만

생활속 깊은곳 구석구석에는 원간섭기 시절의 흔적 , 생활문화들이 오늘날까지 남아있습니다

 

원나라는 고려를 멸망시키지는 않았고 고려가 항복하는 대신

고려의 독립, 자치를 보장해 주었지만

고려에 대한 내정간섭을 실시해

고려왕실에는 호칭을 격하시켜

고려왕은 자신을 지칭할때 짐을 고로

폐하는 전하로

태자는 세자로

만세를 천세로(대한독립 만세의 그 만세)

격하시켜 고려 왕실의 관례를 외왕내제(외부에는 왕을 , 내부적으로는 황제를 칭함)

에서 왕국이나 제후국 수준으로 격하시켰습니다

 

원 간섭기 시기 고려왕실의 격하

 

또 고려 세자들은 원에 가서 살며 원나라 황실의 공주와 결혼해

부마국이 되는 등

고려 왕자는 원황실의 공주와 결혼시키는

'부마국' 이 되어 혈연적으로 원황실과 고려왕실은 묶이게 됩니다

 

원나라 공주인 노국대장공주와 결혼한 고려 공민왕 , 출처 : 경기도박물관 소장

 

또 원종 이후부터 고려 국왕은 원나라에 황실에 충성을 다하라고

종이나 조 같은 시호를 올리지 못하고

'충O왕' 이런식의 이름을 가지게 되었고

당시 원종의 세자였던 충렬왕은

원종이 죽자 고려왕이 되기 위해 원나라에서 귀국했는데

그가 돌아올때 몽골식 변발에 몽골식 옷을 입고 귀국하자

고려 백성들은 어이가 없어 통곡하거나 기절했다고 합니다

 

원 간섭기 시기 충자돌림의 고려왕

 

당시

당시 고려 왕실은 아슬아슬하게 원나라와 고려를 왔다갔다 하며

줄타기를 하고 있었고

당연 고려 백성들 역시 수많은 원의 수탈을 받았습니다

 

원나라인들은 고려인들이 매사냥을 잘하는 것을 보고

당시 상류층의 엄청난 사치품이었던 사냥매를 공물로 바치라 요구했고

이에 '응방' 이라는 기관을 설치해 고려인들에게 매를 훈련시키게 했습니다

또 제주도에 '탐라총관부' 를 설치해 몽골의 말을 기른다 했고

이 영향을 받은 오늘날 제주도는 말로 유명한 섬이 되었다 할 수 있습니다

 

탐라총관부 및 원이 고려에 설치한 내정간섭기구

 

제주도의 말

 

또 몽골은 '결혼도감' 을 설치해 고려 처녀들을 요구했고

이에 고려백성들은 원나라에 자신의 딸을 끌려가지 않게 하기 위해

어린 나이에 빨리 결혼시키는 '조혼' 풍습이 유행했습니다

결국 끌려가는 것은 과부의 딸 , 승려의 딸 , 역적의 처 같은

고려 사회에서 천대받는 여인들이었고 또 원나라의 요구에 의해

집안좋은 고려 귀족가의 여인들까지 보내졌습니다

고려 여인들은 공녀로 끌려가면서 곡소리가 하늘에 울릴정도였다고 합니다

 

원간섭기동안 고려 공녀는 50여차례에 걸쳐 2000명정도가 끌려갔고

공식기록외에 사사로히 데려간 여인까지 하면 실제 수는 더 많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원에가서 이름날린 고려여인들도 있었고

기황후 같은 경우는 궁녀로 끌려가 원황제의 총애를 받아

원나라 황후 자리에까지 오르게 됬고

고려에 남은 그의 일가들은 원나라의 보호를 받는

'권문세족' 이 되어 고려의 세도가문이 되었습니다

 

기황후

 

기황후를 소재로 한 드라마 '기황후' , 출처 : MBC 월화 드라마 기황후 奇皇后 (2013~2014)

 

그러나 원나라는 고려에 이것저것 요구하기도 했지만

고려가 망하는 것 자체는 원치 않았고

고려에 대한 지불은 확실히 했다 하며

고려에 기근이 들자 쌀 10만석을 보내주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는 분명 나라가 어려운 와중에도 고려인들의 보이지 않는 치밀한

정치적 , 외교적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으로 보이고

그러한 노력이 가능했던 것은 고려인들에게

자랑스럽고 영광스러운 유구한 한국의 역사가

있어서 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여튼 고려인들은 몽골에서 들어온 몽골풍 머리 변발도 하고

몽골식 복장 , '몽골풍'도 유행했지만

수많은 고려 공녀와 환관들로 채워진 원나라 황실에서도

고려인들의 풍습인 '고려양' 이 유행했고

고려양은 한류의 원조격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고려에는 원나라의 유목풍습과 순대, 소주 , 연지곤지 등이

고려로 들어왔고

원나라에서는 고려청자와 나전칠기 및

고려만두와 고려약과(과자) 가 유행했고

특히나 원황실에 끌려간 고려 공녀들은

궁중 뜰에서 상추를 심어 먹으며 고향에 대한 향수를 달랬는데

이때 고려의 상추쌈이 원상류층에서 유행해서

원나라 시인 양윤부는 ,,

 

<양윤부>해당화는 꽃이 붉어 좋고 살구는 누래서 보기 좋구나 , 

더 좋은 것은 고려의 상추로서 마고의 향기보다 그윽하구려

 

라고 시를 읊었고 먹는 재미도 있고 맛도 좋고 건강에도 좋은

고려 상추는 질이 좋아

중국에서 고가로 팔리기도 했습니다

 

몽골에서 유례된 오늘날 한국인의 소울푸드 '순대'

 

몽골에서 유례된 한국 전통결혼식때 신부의 두 볼에 찍는 '연지곤지'

 

원래 한국 풍습이었던 손위에 채소를 얹고 고기를 올려서 싸먹는 한국인들의 전통 음식 '쌈' , 출처 : pixabay

 

원 간섭기는 여러 혼란과 공포의 시기이기도 했지만

그속에서도 고려인들은 치밀한 외교적 노력으로

문화력이 부족해 중국을 지배하면서도 중국인들에게 위기감을 느끼는

원나라와 몽골족의 약점들을 파고들려 노력했고

틈새시장을 공략하며 선조들이 그랬던 것처럼 현명하게 점차 원나라의

지배권과 영향력을 고려 내부에서 축출하기 시작합니다

당시 고려시기 지배층인 '무인' 들은

원나라와 연줄이 있는 '권문세족' 으로 교체 되어

그들은 원나라의 힘으로 고려 백성들의 땅을 빼앗고

고려에서 떵떵거리며 살았는데

점차 고려 내부에서도 그들을 고깝게 보는 세력들이 나타났고

원 간섭기의 고려는 또다른 변화를 요구하게 되었습니다

 

<라봉봉>원 간섭기는 한국의 중세시대라고 불리는 고려시대의

중세 느낌의 정점을 찍은 시기라 생각되며

이성과 상식보다는 무력과 힘 , 권력에 의해 움직이던

한국사의 마지막급 야성의 시기라 생각됩니다

 

원나라가 고려를 특별 대우한 것은 있지만

결국 그럼에도 자존심 강한 고려인들은 큰 타격을 입었고

계속해서 기회를 노리던 시기였다 할 수 있고

대신 한국에 몽골 풍습들이 많이 들어왔고

 

오늘날에도 한국을 직접지배한 중국과 일본에 대한

한국인들의 반중감정이나 반일감정에 비해

그나마 고려인들에 간섭만 하며 주권국 지위는 유지해주고

큰 우대가 있었던 몽골에 대해

반몽감정같은 것은 거의 없다고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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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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