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 간섭기때 여러 고려와 몽골의 문화들이 교류됬다 할 수 있고
이외에도 이시기 무너진 민족적 자존심을 되살리기 위해
고려인들은 역사서를 편찬했는데
일연 스님의 '삼국유사' 나
이승휴 '제왕운기' 등이 쓰여졌고
특히나 삼국유사에는 삼국사기에 다뤄지지 않았던
민간 전설등이 실리고 또 고조선이 한민족 최초의 국가라 이야기 하고 있어
어두운 원간섭기의 현실속에서 한민족을 통합하는데 큰 기여를 했고
이 책의 영향으로 고려 다음 나라는 한민족 최초의 국가 고조선을 계승한다는
'조선' 이 되었습니다
이외에도 원과 활발히 교류하며 여러 민족서적들이 출판되었고
문익점은 원나라에서 목화옷으로 옷을 지어입는 것을 보았고
당시 원나라는 목화씨를 외국으로 반출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었기에
문익점은 한겨울 추위에 떨며 지내는 고려백성들을 걱정하다가
길가에 핀 목화를 몰래 따서
몰래 붓뚜껑속에 목화씨 10알 정도를 숨겨서 귀국했고
집에서 장인어른과 함께 정성을 다해 목화를 키워냈고
그의 크나큰 노력 덕분에 고려에 질좋은 목화가 보급되고
고려인들은 한겨울에도 따뜻한 면화옷을 입고
겨울을 날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고려의 원 간섭기 시대에는
어두운 현실속에서도 또다른 고려의 민족문화가 꽃피워졌습니다
원간섭기도 점차 원황실 역시 시간이 지나며
수많은 중국의 정복왕조들이 그랬던 것처럼
점차 유목민적 풍습보다는 중국의 문화(한화) 에 젖어가며
사치와 향락을 누렸고
그러다 격렬한 황위쟁탈전같은 내부갈등 및
중국 한족에 대한 극심한 차별정책의 반발등으로 점차 쇠약해지고
내부에서는 붉은 두건을 쓴 홍건적이 일어나
나라가 크게 혼란스러워졌습니다
원나라 내부의 혼란으로 고려에 대한 원나라의 간섭이 약화되자
고려 내부에서도 점차 원나라에 부역해
권세를 누리던 새로운 고려 지배층인 '권문세족' 들에 대한
반발감들이 생겨나기 시작됬고
외부에서는 왜구(일본 해적) 들이 고려를 약탈하기 시작했습니다
1351년 고려에는 모처럼만에
원의 조종을 받는 고려국왕이 아닌
개혁군주 '공민왕' 이 등장하는데
공민왕은 사실상 고려의 마지막 왕다운 왕이었고
당대 원의 힘이 약해진 것을 알고 적극적으로 원 세력을 축출하려 했고
공민왕은 원의 풍습인 변발을 금지하고
원나라에 끌려간 고려여인이었는데 이후 원나라 황후가 된
기황후가 있었는데
기황후의 오빠로 고려에서 막강한 권세를 누리던
고려 권문세족('부원배' 라고도 합니다)의 대표격이었던 기철 및
기씨 일가를 숙청했고 기철이 빼앗은 백성들의 토지를 다시 백성들에게 돌려줍니다
또 공민왕은 원나라에 보내던 공녀 및 공물을 폐지하고
원의 복식과 제도등을 폐하고
왕명에 충자를 붙이는 것도 폐하고
하여튼 여러가지 '반원정책' 을 적극적으로 실시해
무너진 고려의 풍습을 되살리고 자존심을 회복하려 애썼던 인물입니다
공민왕 초기에는 중국에서 일어난 붉은 두건 도적인 홍건적들이
고려까지 넘어와 개경까지 함락시켜 공민왕이 안동까지 피난가기도 했지만
공민왕은 이런 시기 유능한 장수인 최영과 이성계를 적극 등용했고
홍건적을 물리친 이후에는
당시 고려 장군이었던 이성계를 시켜서
원나라에 맞서 압록강을 건너
요동을 정벌해 옛 고조선과 고구려의 땅이자
한민족의 본거지였던 만주땅을 수복했고
또 최영과 이성계 장군에게 왜구들을 물리치게 했고
모처럼만에 고려에 왕다운 당당한 왕이 나오자
이에 당시 고려 신료와 장수 및 고려 백성들은 공민왕을 깊게 존경하고 따랐습니다
공민왕 시기는 반원자주정책으로 무너진 고려의 자주성을 되찾는 시기이기도 했지만
대신 원나라 , 홍건적 같은 대륙세력 및 왜구 같은 해안세력 모두와
고려가 전쟁을 했던 시기이기도 해서
고려 내부에서도 극심한 피해와 혼란이 있었고
평소 그림그리기를 좋아하고 예술가 기질이 강했던 공민왕은
이런 상황에서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았습니다
그러다 옛날 원나라의 명령에 결혼했지만
진심으로 사랑했던 원나라 노국대장공주가 난산이 심해
공민왕의 아기를 낳다가 아기와 함께 죽어버리자
공민왕은 엄청난 상실감에 빠져들었고
정치에 대한 뜻을 잃자
공민왕은 나라의 권력을 권문세족이나 지배층과 연관이 없었던
승려 '신돈' 에게 맡기게 됩니다
신돈은 '전민변정도감' 을 설치해
토지제도를 개혁하고 노비를 해방시켰고
이 과정에서 부원배 및 권문세족같은 조정내 부패 세력들을 몰아내기도 했고
이에 고려 백성들은 그를 '성인' 이라 했습니다
신돈은 성균관을 부활시켜 유학자들을 길러내기도 했는데
이로 인해 성균관 출신 유학자 , 사대부들은 조선을 건국하는 중추가 되어
유교나라 조선의 건국핵심세력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점차 신돈은 공민왕에게 받은 권력으로
주변 사람들을 너무 엄격히 대하다가
주변 사람들의 반대를 받았고
그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경계한 공민왕 및
신하들의 반대로 신돈은 사형당했습니다
(사실상 공민왕이 정치적 목적으로
이름없는 승려를 행동대장겸 방패막이로 쓰다가
목적을 달성한 후[전민변정도감 및 권문세족 축출]
내친 것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신돈이 죽은 후부터 공민왕은 이제는 완전히
개혁정책등에 흥미를 잃고
삶 자체에 사는 의지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는 폐인이 되어 '자제위' 라는 젊은 미소년 집단을 뽑아놓고
음란한 엽색에 빠지다가 '자제위' 였던 홍륜에게 살해당합니다
공민왕 사후부터 고려는 혼돈의 시대가 다시 시작됬고
권문세족에 반대하고 유학을 숭상하며 새로운 세력으로 일어났던
'신진사대부' 및 최영이나 이성계 장군같은 '신흥무인' 세력이
새로운 세력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라봉봉>혼돈의 원간섭기 시기 고려국왕이 된 공민왕은
반원자주정책을 펼쳐 민심을 통합하고 사라져가는 옛 고려의 풍속을
되돌리려 노력했던 인물이고
최영과 이성계 같은 신진 인사들을 적극적으로 등용하는 등
여러 개혁군주 성향이 강했던 인물이자
사실상 고려의 마지막 왕이었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공민왕은 무리한 정책등으로 인한 반발속에 많은 정치적
위기감을 느꼈던 인물이라 할 수 있고
조선후기의 개혁군주 정조 임금이 생각나기도 합니다
'어린이 한국역사 > 1집 First Story'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선의 건국과 왕자의 난 (0) | 2019.07.29 |
---|---|
신진 사대부의 등장과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 (0) | 2019.07.29 |
원 간섭기의 고려의 문화 (0) | 2019.07.26 |
원 간섭기의 시작 , 삼별초의 난과 일본원정 (0) | 2019.07.25 |
고려의 대몽항전과 무신정권의 몰락 (0) | 2019.07.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