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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적의 난 (1198) 이후 최충헌은

교정도감을 설치해 (1208) 자신의 권력기구로 삼아

최씨정권을 공고히 하려 했고

교정도감은 사실상 고려 안의 최씨왕국의 조정격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무신정권 집권자와 집권기구

 

당시 북방 몽골에서는 '칭기즈칸' 이라는

인물이 나타나 부족을 통합하고 점차 남하해 세력을 확대하고 있었고

몽골군은 유목민족답게 우수한 기동력과 가벼운 경무장 등으로

강력한 궁기병과 빠른 행군속도등으로 세계에 영토를 넓혀갔습니다

 

칭기즈칸

 

몽골기병

 

이전 몽골군에 밀려 고려로 남하한 거란군을 고려군은 물리친 적이 있는데

몽골군은 당시 고려군과 연합해 거란군을 같이 소탕했고

이 구실로 몽골은 과중한 공물을 요구하는 등

점차 고려에도 내정간섭을 시작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몽골 사신 저고여가 고려를 방문하고 다시 몽골로 돌아갈때

국경부근에서 살해당했는데

이는 몽골에 세력이 밀렸던 여진족들이 고려인의 옷을 입어 변장하고

살해했다고도 합니다

 

이에 몽골은 고려인들이 저고여를 죽였다 했고

고려는 여진족이 저고여를 죽였다 주장해

양국의 관계는 험악해졌고

결국 몽골군은 고려를 공격하기 이릅니다

 

1231년 몽골 장수 살리타이는

몽골 군사 3만을 이끌고 고려를 침공했고 (몽골의 1차침입)

박서와 김경손 장군이 활약하기도 했지만

결국 몽골군은 개경을 포위했고

이에 고려 조정과 최씨정권은 몽골군과 강화를 맺고

다시 몽골군을 돌려보냈습니다

몽골군은 1차 침입때 강화 내용으로 고려에 내정간섭을 강화하기 위해

72명의 '다루가치(점령지 총독이라 이해하면 편함)' 를 파견했습니다

 

러시아 마을을 돌며 공물을 요구하는 몽골의 '다루가치'

 

몽골과 강화를 맺은 고려 최씨정권의 집권자 최우(최충헌의 아들)도

진짜 굴복한게 아니라 일단 전략상 강화를 맺은것이라

유목민족인 몽골군이 해전에 약한 것을 알고

곧바로 개경에서 강화도로 고려의 수도롤 옮겨버립니다

 

강화도 천도 , 고려의 대몽항전

 

천하의 몽골군도 바다나 물구경을 못하는 초원에서 자라

물에 대한 선천적인 두려움이 있었고

강화도에 수도를 옮겨 저항을 계속하는 고려정부에 항복을 권유하나

최우는 항복하지 않았고

이는 단순히 최우와 최씨정권 , 무신들의 애국심이어서가 아니라

몽골과 타협하면 무신들 자신의 권력이 약화되었기 때문이어서

애초에 본토의 고려 백성들은 나몰라라 내버려두고

주요 세력만 꾸려서 강화도로 수도를 옮긴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정말 백성들을 내버려 두었음,,)

 

결국 고려와 최씨정권이 강화도에 틀어박혀 항복하지 않자

열받은 몽골 살리타이 장군은 다시 고려를 침입했는데

고려 승려 김윤후가 처인성에서 살리타이를 화살로 저격해

화살로 살리타이의 머리를 꿰뚫었고 결국 몽골군은 대장을 잃고

허무하게 퇴각합니다 (처인성 전투)

 

처인성에서 몽골대장 살리타이를 저격하는 승려 김윤후 , 고려인의 대몽항전 민족기록화

 

<몽골군들>다른 민족들은 우리 말갈굽에 금방 무너지는데

얘네는 왜이리 독한겨 ;;

 

그러나 몽골군의 2차침입으로

초조대장경이 불타는 등 많은 문화재가 소실되었고

고려 역시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1234년 몽골은 금나라를 멸망시켰고

1235년 몽골은 남송을 공격하는 길에 고려를 공격했는데 (몽골의 3차침입)

최씨정권이 조정을 강화도로 옮기자 텅텅빈 육지의 고려인들을

몽골군은 마구 유린했고

몽골군은 경상도까지 내려와 옛 신라 천년수도 경주까지 불태웠고

이때 경주에 있던 한국의 문화재 황룡사와 황룡사 구층목탑이

몽골군에 의해 불탔습니다

 

신라시대의 대표적 유산인 '황룡사와 황룡사 구층목탑' 복원도 출처 : 경주의 <신라 왕궁 영상관> , 황룡사와 황룡사 구층목탑은 몽골의 침입으로 소실

 

결국 고려 왕실도 어쩔 수 없이 왕실 친척을 왕자라 속여

몽골군에 보내 화의를 맺었고 몽골군은 물러갔습니다

 

당시부터 고려인들은 부처님의 힘을 빌어

몽골군을 막겠다는 바람으로

불경을 종이에 인쇄하기 위한 목판인

팔만대장경을 만들기 시작합니다

비록 대장경 제조와 몽골군이 물러나는 것의

과학적인 연관성은 없다 할 수 있지만

역사에서 , 사람은 예로부터 위기 상황에 종교에 의지하는 것은

흔히 있어온 일이었고

 

당시 불법의 힘으로 몽골군을 물리치려는

고려인들의 호국수호의지는 간절해서

팔만대장경에 한 글자를 새길 때마다 세 번씩 절을 

올렸다고 합니다

 

합천 해인사 팔만대장경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민족 유산 해인사의 '팔만대장경'

 

이후 몽골군은 고려조정이 강화도에 나오고 몽골에 항복하라는 구실로

다시 고려를 침공했고 (몽골의 4차침입)

당시 몽골왕이 죽자 다시 돌아갔습니다

 

당시 최씨정권 집권자 최우도 죽어버려서

그의 아들이었던 최항이 3대째 최씨정권을 물려받게 되었습니다

 

이후 몽골군은 또 고려를 쳐들어왔습니다 (몽골의 5차침입)

 

<몽골군>또왔당께 ? 집에 맛있는거 없냐 ?

 

<고려군>지치지도 않냐 너넨 ?

 

결국 고려는 인질로 왕자를 보내는 조건으로

몽골은 고려와 강화를 맺고 다시 돌아갑니다

 

이후에도 왕자 입조만으로도 만족하지 않은

몽골왕 몽케칸은 최항과 고려왕의 입조를 요구하며

또다시 고려를 쳐들어왔고 (몽골의 6차침입)

지리산까지 내려와 고려를 약탈했고

돌연 몽케칸의 명령으로 다시돌아갔는데

고려인들은 몽골군에 포로로만 20만여명이 잡혀갔고

죽은 자는 셀 수 없이 많았습니다

 

이후에도 몽골은 7차 침입을 개시해

전라도를 쑥대밭으로 만들었습니다

 

또 몽골군은 8차 침입을 개시했는데

그 사이 최씨정권의 최항이 죽고 그의 어린 아들

최의가 뒤를 이엇고

최의는 현명한 선비들과 어울리지 않고

간신들과 어울리며 살육을 함부로했고

가뜩이나 몽골의 침입으로 혼란한 고려를

더욱 혼란하게 했고

이에 불만을 느낀 김준과 삼별초에게 살해당합니다

 

당시 최의는 삼별초의 공격을 받을때

도망치려고 담을 넘으려 했는데

너무 뚱뚱해서 담을 넘지 못했다고 하고 ,,

다락방에 숨었다가 붙잡혀 살해당하고

최씨정권은 최충헌, 최우, 최항, 최의로서 62년간

유지되다가 최의의 사망으로 막을 내리게 되었고

고구려 권신이었던 연개소문도

사후 곧바로 아들들의 분열로 고구려가 망했는데

한 나라에서 한 집안이 이렇게 대대로 이어져왔다는 것 역시

엄청난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강화도의 최씨정권도 최의 사망 이후 김준이 정권을 잡자

구심점을 잃었고 몽골이 9차침입을 감행했고

김준 역시 무신정권 집권자였던 만큼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해 몽골군에 저항했지만

결국 1259년 3월 몽골군과 강화를 맺었고

1259년 고려 고종이 죽고 원나라(몽골)에 있던 태자가

돌아와 고려국왕 '원종' 이 되자 원종은 몽골에 태자를 인질로 보내고

항복을 요청했지만

김준의 반대로 강화도에서 나오지는 못했고

이후 김준을 살해하고 새 무신 집권자가 된 임연은

역시 몽골과의 강화를 반대하고 원종을 폐위하고

새 인물을 왕위에 앉히나

임연 역시 몽골군을 두려워하다 곧 죽고

그러자 임연의 둘째아들 임유무는 무신정권 마지막 집권자인 인물로

임연의 뒤를 이어 무신 집권자가 됬는데

결국 원종에 회유된 삼별초에 살해당했고

100년 동안의 길고 긴 무신정권은 막을 내리고

고려는 원의 간섭을 받는 국가가 되지만

국가의 독립성을 인정받는다는 조건으로 원과 강화를 맺었고

무신정권이 그렇게 끝나자

고려의 실권은 고려국왕과 원나라에게 회수됬습니다

 

9차에 걸친 여몽전쟁의 결과로

한국 고대,중세시대 건물은 모조리 불타거나 없어졌다고 할 수 있으며

고려군은 세계 최강대국이었던 몽골제국의 말발굽을 온갖 외교 , 정책 , 항전 등으로 이겨냈고

비록 무신정권 역시 자신의 권력유지 목적의 항전이 있었지만

애초에 고구려의 후예라 생각한 고려인 , 고려 백성들은 '북방의 오랑캐' 라 여겼던

몽골군에 항복할 의사가 없었고

그들의 필사적인 항전 노력은 비록 몽골과의 강화로 끝이 나게 됬지만

몽골군은 고려군의 처절한 항전에 충격을 받아

고려인들은 특별히 완전 정복하지 않고 간섭을 하며

중국을 견제하는 목적의 독립국으로

내버려 두었다 할 수 있고 한국인들은 고려인들로 인해

길고 긴 유구한 역사를

보존해 이어가게 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고려인의 대몽항전 이후는 고려에게는 무신정권이 무너지고

주변국들은 사실상 몽골 하나인 거대한 초강대국 하나만 남게되는

특수한 상황을 가져다 주었고

이런 상황에서도 고려는 몽골의 간섭을 받았지만

고려인으로서의 자주성과 자존심을 지켜내려 노력하며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고 할 수 있고

허망하게 몽골에 무너지고 항복한 중국이나

섬나라라 몽골의 침입에서 비교적 자유로웠던 일본과는 달랐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고려의 대몽항전 시기가 배경인 일본의 역사 고전게임 '징기스칸 4' , 출처 : 코에이 칭기즈칸: 푸른 늑대와 흰 사슴 4 (1998년)

<라봉봉>고려인들은 몽골군에 고구려인들의 자주 , 진취적 기상과

백제의 장인정신(팔만대장경) , 신라 화랑의 임전무퇴의 정신으로

처절한 대몽항전을 전개했고

이 시기부터 고려인들은 더이상 옛 고구려인 , 백제인 , 신라인이 아닌

진정한 하나의 고려인으로 민족의식이 통합되었던 시기이기도 합니다

 

고려인들은 애초에 몽골군에 이길 수 없을지라도

그들의 마음속에는 그 어떤 민족적 자부심과 자존심이 매우 컸기에

지배층 , 피지배층이 비록 마음이 맞지 않던 무신정권 시기였음에도

고려인 모두가 질 전쟁일지언정 몽골의 발목이라도 끊어버리자는

심정으로 몽골에 맞선 시기라고 생각되며

 

몽골인들 역시 고려의 항전 이외에도 여러 숨은 외교적 노력등으로

결국 고려인들에게 마음을 열고 고려를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로 인정하며

같은 친구와 형제로 여기기로 했다 할 수 있고

몽골역시 고려와의 큰 전쟁으로 타격을 많이 입어

철저하게 지배하던 중국과 달리 고려인들은 몽골 다음가는 국민이나

사위국가 , 친구로서 대우해주었고 오늘날에도 한국인들은

한국을 지배한 경험이 있었던 중국과 일본과 달리

몽골에 대해서는 별다른 적개심같은게 없어보이고

결국 몽골시기대부터 소주 , 순대 , 설렁탕 , 연지곤지 등

몽골의 풍습이 한국에 전해지기도 했습니다

이게 오늘날 몽골이 단순히 개발도상국이나 가난한 나라여서가 아니라

아직도 서구세계나 다른 민족들은

몽골 제국의 약탈 등에 엄청난 피해를 입어서

당시 몽골에 대한 엄청난 반발 , 적개심등이 있다 하고

한국은 몽골간의 대몽항전 등으로 몽골인들에게 어떠한 큰 충격과

강렬한 인상을 남겼기에 전쟁이후부터는 나름 평화적 관계를 유지하며

고려인들은 몽골의 간섭을 받기는 했지만 다른 나라들과 달리

끝까지 자주국 지위를 유지하며

몽골에서 여러 대우를 받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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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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