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그렇게 몽골의 9차례에 걸친 침입으로

고려는 쑥대밭이 되었고

몽골의 압박에 무신정권은 무너졌고

고려는 다시 수도를 강화도에서 개경으로 환도하고

몽골의 간섭을 받는 나라가 되었고

이 시기를 '원 간섭기' 라고 합니다

 

그러나 유목민족 몽골인들은

역시 유목민족적 성향이 컸던 고구려의 후예였던

고려인들과 유사성이 많았고

한국인(고려)과 몽골인(원나라)은

이기때 몽고반점이 있고

말타기와 활쏘기 , 씨름을 즐겨하고

언어학적 유사성 (몽골 + 한국 + 일본 은

공통된 언어적 유사성을 지니고 있다고 하고

중국어와는 다르다고 합니다)

그리고 하늘의 후손이라는 '천손사상' 등

여러 고려와 몽골인간에 유사성이 있었고

이러한 모습들은 순수 농경민족이었던

중국인과는 차이가 있는 것이었기 때문에

몽골은 중국은 철저하게 지배하지만

고려는 고구려의 후손이라며 존중하는 태도를 보였습니다

 

말타고 활로 사냥하는 모습을 다음 고구려 벽화 '수렵도'

 

고구려 각저총 '씨름도'

 

몽골 전사들

 

몽골의 전통 씨름 (레슬링) '부흐' 복장을 한 강인한 몽골인들

 

<원나라 황제 쿠빌라이 칸>짐은 고려를 

일가(한 집안)로 본다

고려에 어려움이 있다면 

어찌 짐이 고려를 구하지 않겠는가?

 

쿠빌라이 칸

 

이외에도 몽골은 고려의 오랫동안의 대몽항전 및

고려의 외교적 노력 및

민족적 유사성 및 중국 견제 목적 등으로

주변국중 유일하게 고려만은 독립국의 지위로

유지시켜 놓았다고 할 수 있고

 

대신 고려에 대한 간섭을 실시해

고려의 왕실 예법을 황제국에서 왕국 수준으로

떨어트렸고

왕은 자신을 지칭할때 짐에서 고라고 해야됬고

폐하는 전하로

태자는 세자로

만세를 천세로 (대한독립 만세할때 그 만세)

각각 격을 낮춰 불리게 되었습니다

 

원간섭기 시기 고려 왕실의 격하

 

그렇게 원나라(몽골)는 개경 환도 이후

고려에 대한 간섭을 강화했는데

이게 잘못된 것이라면 잘못된 것이지만

대신 당시의 특수적인 상황을 고려해보면

다른 나라들은 민족 자체가 몽골군에 학살당하거나

노예국가가 된 판에

그래도 고려는 허수아비일 지라도

일단 독립국 지위는 보장해줬고

나름 고려인들도 이런 상황을 인정하고

적당히 원나라에 타협하거나 하며

생존을 모색하던 시기라 할 수 있씁니다

 

하여튼 무신정권이 종결되고

고려 조정이 다시 개경으로 환도하고

여러 친원 정책을 펼치자

역시 반대하는 세력도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무신정권의 후예들인

'삼별초'였습니다

 

삼별초의 구성

 

무신정권 마지막 지도자 임유무가 살해당한 후

고려 조정의 개경환도에 반발해

강화도에 남아있던 무신정권 시절

무인들의 친위군사집단 (경호원 혹은 권력자의 사병)

'삼별초' 는 역시 기존 무신정권 집권자들과 마찬가지로

 

'고려조정의 개경환도 = 무신들의 몰락'

 

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았기에

삼별초 지휘관 배중손 등은

강화도에서 고려 왕족을 왕으로 임명하고

반란을 일으켰고

삼별초들은 강화도는 더이상 지키기 어렵다 판단해

백성과 재물 , 자녀들을 배 1천여척에 싣고

남쪽으로 내려가 진도에 이르렀습니다

 

고려의 대몽항전 마지막 불꽃 '삼별초의 난'

 

삼별초는 그렇게 진도를 거점으로

고려 남부 해안을 장악하고

자신들의 왕국을 건설했고

친원정권이 수립된 고려 조정과

원나라 연합군의 공격을 받게 됩니다

 

삼별초의 대몽항전 , 출처 : 독립기념관의 김서봉-삼별초의 대몽항전 (1975)

 

일단 원나라군이 해전에는 약했지만

해전에 강했던 고려조정의 도움으로

수군력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고

여몽연합군이 삼별초를 공격해

배중손이 전사하고

남녀 1만여인 및 전합 수십 척이 포획되는 큰 피해를 입자

삼별초 지휘관 김통정은

삼별초를 이끌고 제주도(탐라도)로 도망쳤고

다시 여몽연합군이 제주도를 공격해오자

김통정은 70여 인을 거느리고 산 속에서 저항하다

김통정이 사망하며 삼별초의 난은 끝났습니다

 

삼별초의 난은 대한민국 군사정권 시절에는

대몽항전의 마지막 불꽃으로서 국난 극복의 상징으로

여겨지기도 했지만

결국 백성의 안위보다는 무신정권의 연장선이라는

무신정권의 후예가 삼별초였기에 여러 논란이 있는

사건이라고 이야기 되고 있지만

당시 개경으로 환도한 고려국왕 원종은

오랜 기간동안의 무신정권을 아예 부정하고

친원정책을 펼쳤으며

무신정권 기간 등으로

오랜 기간동안 고려 조정에 남아있었고

고려 왕실에 충성을 다하기도 했던

무신 세력 및 삼별초들을 끌어모으지 못하고

내쳐버렸기에 삼별초가 일어난 것도 있다 할 수 있고

자연히 고려의 국방력 및 내정 약화로 이어졌습니다

 

삼별초의 난 당시

삼별초를 진압한 고려 장수는 김방경이었는데

김방경은 진도 및 제주도의 삼별초 잔존 세력까지

모두 해치워 문하시중에 올랐습니다

 

김방경 (1212 ~ 1300)

 

삼별초까지 진압하고 고려 내에

반원세력을 모두 해치운 원 조정은

이번엔 더 눈을 돌려 아시아 맨 동쪽의

섬나라 일본을 공격하기로 결정했고

원나라는 유목민족 몽골족이었던 만큼

해전에 약했기 때문에

해전에 강했던 고려인들에게 전함을 만들라 지시했고

고려인들은 여몽전쟁과 삼별초의 난의 아픔이 가시기도 전에

그렇게 원의 명령에 따라

3만 5천명의 고려인이 동원되

4개월 동안 일본을 공격하기 위한 전선 900척을

꾸역꾸역 만들었습니다

 

원나라는 고려에 일본을 공격하기 위한 기구

 

'정동행성 (정동=동쪽을 정복한다 , 행성=파견기구)'

 

을 설치했고

원나라의 명령에 고려 김방경 장군과 여몽 연합군은 같은 배를 타고

일본을 공격했습니다

 

정동행성 및 원나라가 고려를 간섭하기 위해 세운 기구들

 

그렇게 일본에 상륙한 여몽연합군은

당시 낯선 일본환경에 적응하지 못했던

원나라 군사들은 도망치기 바빴지만

김방경이 이끄는 고려 군사들은 일본군에 용맹하게 싸웠고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당시 여몽연합군 총사령관이었던

원나라 장수 훈둔>비록 몽고군이 전투에 익숙하다고는 하나

어찌 고려군보다 더 낫겠느냐

 

일본에 상륙해 일본군에게 활을 쏘고 창을 던지는 고려군(추정) , 출처 : 몽고습래회사

 

당시 고려 대장 김방경은 일본군을 전멸시킨 뒤

원나라 대장 훈둔에게

더 들어가서 공격하면 일본을 이길 수 있다 했지만

훈둔은 피곤한데 더 들어가면 안된다 했고

당시 지속적인 태풍의 피해를 입기도 한 여몽연합군은

결국 퇴각했고 일단 일본인들은 여몽연합군의 압박과

우월성등에 큰 충격을 입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2차 여몽연합군의 일본원정이 있었는데

이번에도 태풍이 불어 실패했고

원나라는 3차까지 하려 했으나

남송에서 반란이 일어나 일본원정은 무산됬습니다

 

일본원정 중 여몽연합군에 들이닥친 태풍

 

당시 시기적절하게 태풍이 불어

여몽연합군에 피해를 주고 일본은 나라를 보존할 수 있었기에

일본인들은 이 태풍을

 

'카미카제 神風 (신이 일으킨 바람)'

 

라 부르는데 이후 일본은 2차 세계대전 태평양 전쟁때

미국을 공격할때 압도적인 양적 질적 차이에

전세가 기울고 자포자기 상태에 빠지자

최후의 발악 형식으로

자국민(일본인) 및 식민지인인 조선인 조종사들에게

폭탄이 실린 비행기에 태워 미국군 함대에

자폭공격하라 지시했고 이 전술을 '카미카제' 라 불렀습니다

(전쟁 자체가 비인륜적이지만

카미카제 전술은 조종사들에게 천황과 나라에 충성을 바치라며

자살공격을 강요했던

비인륜적 전쟁범죄중 하나임)

 

1945년 4월 11일 오키나와 전투 때 카미카제 전술로 미국 아이오와급 전함 미주리로 돌진하는 일본 전투기

 

여몽연합군의 일본원정으로 생겨난

카미카제라는 단어의 유례는 그렇게

일제의 2차 세계대전 태평양전쟁 시기 만행으로 인해

'자살공격' 을 뜻하는 말로 바뀌게 되었다 할 수 있습니다

 

<라봉봉>고려 조정은 개경 환도와 삼별초의 난을 끝으로

무신 정권의 잔재를 모두 청산하기는 했지만

대신 무신정권보다 더 악랄했다 할 수 있는

원제국이 고려를 간접통치하게 되었고

고려 백성들은 여러 고통에 시달렸지만

일단 몽골과의 전쟁도 멈추게 되었고

당시 시대상황을 고려하면

몽골 역시 고려를 나름 우대해 준 것이라 볼 수 있고

고려 백성들은 이당시부터 많은 몽골식 풍습을 받아들였고

오늘날에도 한국인들은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여기지만

실제 한국인들의 음식이나 생활등에는 몽골의 영향이 강하게 남아있고

피부를 접촉하는 것을 좋아하고 (예 : 친한 친구의 뒤통수를 가볍게 치는 한국식 인사)

남녀 가사업무 분리등 가정생활양식 등은 오늘날에도 몽골과 비슷하고

(유목생활같이 힘쓰고 고된일때문에 몽골은 남녀가 하는일이 분리되있음)

서로 피부 접촉을 싫어하고 남자가 집안일과 요리도 하는

순수 농경민족인 중국과 다릅니다

 

한국은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이 만나는 중심이나 교통로적 위치로

예로부터 오늘날까지 이런 특수적인 위치에 있기 때문에

민족성 역시 뭐라 정의하기 어려운 민족성을 지니고 있다 여겨지고

굳이 정의하자면 반골적이거나 반도형 민족성이라고 생각됩니다

이러한 성향은 대몽항전과 원 간섭기 시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결국 원간섭기부터 친원 고려조정이 시작되어

원의 명령으로 고려인들은 전쟁의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급하게 다시 일본원정을 위한 전선들을 만들어야했고

일본인들이 카미카제라 부르는 태풍으로 일본원정은 흐지부지됬지만

이 사건으로 섬이어서 외적의 침입에 비교적 자유로웠던

일본인들에게 대륙세력의 공격과 압도적인 격차, 힘 등은

엄청난 공포감과 충격을 주었다 할 수 있습니다

 

반응형
Posted by 라봉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