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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왕 사후부터 고려사회는 권문세족의 힘이 약화되고

새로운 세력이 일어나 마지막 고려의 지배계층이 등장하는데

 

호족 - 문벌귀족 - 무신 - 권문세족 - 신진사대부

 

로 이어지는 마지막 고려의 지배세력

신진사대부의 등장입니다

 

신진사대부는 불교국가였던 고려와 달리

유교(유학) 를 핵심 이념으로 삼았고

당시 고려는 불교를 크게 지원해줘서 절에서는 나라의 비호를 받는

승려들이 고리대금업이나 여성들을 겁탈하는 등 여러 부정부폐와 폐단이 있어서

고려 지배층 내부에서도 불교에 대한 반발감이 생겨났고

또 원나라의 비호를 받는 권문세족세력에 대해

새로 떠오르는 명나라와 친해야 한다 주장하는 신진사대부는

새로운 시대 , 흐름을 타고 권문세족을 압박하고 자신들의 세력을 키워갔습니다

대표적인 신진사대부 인물에는

썩은나라 고려를 멸망시켜 새로운 나라를 건국해야 한다는

급진적 신진사대부 '정도전'과

고려를 유지하되 내부적인 개혁이 필요하다는

온건적 신진사대부 '정몽주'가 있습니다

 

급진 신진사대부 삼봉 정도전

 

온건 신진사대부 포은 정몽주

 

급진 신진사대부 정도전을 중심으로 고려 말과 조선 초 (여말선초) 이야기를 다룬 대하드라마 정도전 , 출처 : KBS 1TV 대하드라마 정도전 (2014) 鄭道傳

 

또 또다른 새로운 고려의 지배층이 등장하는데

공민왕대부터 북방민족과 왜구(일본해적) 과의 대결을 거치며

나라를 지켜 고려 백성들의 민심을 얻은

'신흥무인' 들이었고

대표적인 인물로는 은연중에 고려가 답이 없음을 느끼고 있던

급진적 신흥무인 이성계와

고려가 답이 없음에도 고려의 귀족으로서 의무를 다하고

나라와 백성에 충실하려 했던 온건적 신흥무인 최영장군

그리고 정치권에 개입하기보다는 당시 신기술이었던 화포개발에 집중해

백성의 안위를 수호하려 했던 중도적(??) 신흥무인 최무선 등이 있습니다

 

급진 신흥무인 이성계

 

온건 신흥무인 최영 , 출처 : 우심 최대명 선생 작품

 

중도적 신흥무인 최무선

 

일단 최영과 이성계 장군 이야기는 많이 나오니

최무선 이야기를 먼저 하겠습니다

 

최무선은 일찍부터 병법에 관심이 많았는데

허구한날 바다로 쳐들어와 백성과 민가등을 약탈하고

도망치는 왜구(일본해적) 들을 물리치려면

당시 중국에서 있었던 신기술이었던 '화약(화포 , 대포)' 만한게 없다고 판단해

고려에도 화약무기를 도입하려 노력했고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최무선>왜구를 제어함에는 화약만한 것이 없으나

국내에는 아는 사람이 없다

 

결국 최무선은

중국의 화포 기술서등을 모아서 분석해 읽고

자체적으로 화약을 만들어냈고

당시 원나라에서는 신기술이었던 화약 개발을 외부에 공개하려 하지 않았기에

최무선은 직접 만들며

도중에 원나라에서 온 기술자를 구슬려 정보들을 알아내기도 했습니다

 

화약과 화포를 만드는 최무선 장군 , 출처 : 최대섭-화포와 화약을 제조하는 최무선(1979)

 

결국 최무선은 화포무기 개발에 성공했고

진포(전라북도 군산시) 에 왜구가 쳐들어오자

자신이 개발한 화포로 왜구를 물리쳐

'진포해전' 을 승리로 장식하며 외적의 침입에서 나라를 구한

신흥무인이 되었습니다

 

진포해전(진포대첩)

 

고려말 왜구의 침입과 대첩들

 

신기술을 사용했던 인물이기에

어찌보면 신흥무인에 가장 잘 맞는 인물이라 생각되기도 하나

정치권에 개입보다는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가려 했던 인물같고

최영과 이성계 장군에 존재감은 밀리더라도

대신 그로인해 한국사의 위인으로 이야기되는 인물이자

고려 말기 조정의 피바람에서 자유로웠던 인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여튼 그의 후손도 대를이어 가업을 이어받아 조선의 화포개발자가 되었고

조선은 화포에 강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한국은 창이 유명한 대륙국가 중국 , 칼이 유명한 섬나라 일본에 비해

산지가 많고 반도국가로 사방의 외적이 몰려드는 위치라

잦은 전쟁등에 인구를 보존하기 유리한

활 , 화포같은 장거리 무기가 발달했다 생각되고

오늘날에도 대한민국 국군은 요즘말로 '화력덕후' 나 '포방부' 라고 불리며

해군이나 공군보다는 육군의 화력의 비중이 매우 높습니다

 

하여튼 이제 최무선 이야기는 뒤로하고,,

최영 장군은 홍산대첩(1376) , 이성계 장군은 황산대첩(1380)으로

고려에 침입한 왜구를 토벌해냈고

 

최영장군은 홍산대첩(오늘날 충청남도 부여군 홍산면) 때 노장이었음에도 직접 선봉에서서

병사들을 뒤로하고 앞으로 진격했고 이에 왜구들은 바람앞에 풀이 쓸리듰이

쓰러졌습니다

 

그때 왜구가 풀속에 숨어있다가 활로 최영장군의 입술을 맞췄는데

최영장군은 손으로 입술에 박힌 활을 뽑아내고 피를 흘리는 와중에도

힘껏 싸워 왜구를 완전히 물리치고 고려를 구했습니다

 

최영 장군과 홍산대첩 , 출처 : 박창돈-최영장군의 홍산전투(1976)

 

그러나 당시 동아시아는 모두 혼란스러운 난세급의 격변의 시대였고

고려 역시 잦은 전쟁등으로 해안가 방어선들이 모두 뚫리자

왜구들은 고려 전역을 침입해 약탈하고 유린했고

이후에도 이성계 장군은 황산대첩(오늘날 전라북도 남원인 지리산 부근 황산)

왜구를 물리쳤는데 당시 왜구를 이끄는 왜구대장은 '아기발도(아지발도)' 라는 인물로

나이는 겨우 15~16세였지만 용모가 단정하고 사납고 위엄이 있어

왜구대장으로 왜구들을 이끌었고

그가 흰 말을 타고다니며 창을 휘두르자

고려군이 무너지고 고려군은 그를 두려워해 피하기 바빴습니다

 

왜구의 소년무장 아기발도

 

그러나 고려의 신궁 (神弓  , 활을 쏘는 재주가 아주 뛰어난 사람) 이라 불리며

한국사에서 고주몽 동명성왕과 더불어 활을 매우 잘쏘는 사람으로 유명했던

이성계 장군은 그를 두려워하기보다는 그가 너무 사납기에

죽여야 되나 생포해야 되나를 고민하고 있었고

결국 생포하려면 많은 피해가 있을 것이라 판단해

결국 아기발도를 죽이려 했고

아기발도는 갑옷으로 온몸을 꽁꽁 둘러매고 있었기에

이성계 장군은 그의 부하 이지란에게

 

<이성계>내가 투구의 정자(꼭지)를 쏘아 투구를 벗길 것이니 

그대가 즉시 쏘아라

 

라고 말했고

결국 이성계는 활로 아기발도의 투구를 쏘아 적중시켜 투구를 떨어트렸고

이에 곧 이지란은 곧 아기발도를 맞춰 죽였고

이에 대장을 잃은 왜구들은 허무하게 무너졌습니다

 

이성계 장군의 황산대첩

 

그러나 황산대첩으로 이성계 장군 역시 부상을 입는 등

격렬한 전투였고 당시까지만 해도 이성계는 고려를 위해 싸우다 죽을 것을 각오할 정도로

아직까지는 자신을 믿어준 고려에 대한 충성심이 남아있었습니다

 

여러 전공을 세워 나라와 고려 백성을 구한 이성계 장군은

고려백성들의 새로운 스타로 떠올랐고

조정 내에서도 그의 세력은 커져만 갔습니다

(조선 정부가 말기에 워낙 답이없어서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에 대한 비판이 많지만

그것은 신라말기 , 고려말기도 마찬가지였고 이성계는 당대의 뛰어난 인물이자

한국사의 고주몽과 더불어 신궁이라 불리는 인물이자

이런 공들로 오늘날 한국사의 위인으로 이야기 됩니다)

 

그러다 최영 장군은 왜구의 피해가 가시기도 전에

당시 중국에서 새로 일어난 명나라가 철령위를 세워

요동을 지배하려 했고

함경도 부근을 내놓으라는 등

고려에 대한 영토간섭을 하자

명의 영토간섭도 어이없던 고려조정이었고

요동을 점거한 명나라가 고려에 대한 압박을 가하자

분노한 최영장군은 고려 국경에 온 명나라병사들을 살해했고

역시 분노한 우왕을 설득해 요동수복(요동정벌)을 명하게 했고

이성계 장군을 요동수복의 책임자로 정했습니다

 

그러나 이성계 장군은 명백한 반대의사를 표현하며

지금 요동을 공격해서는 안된다는

사불가론(요동을 치면 안된다는 네가지 이유)을 내세웠습니다

 

<이성계 장군의 사불가론>

지금 군사를 동원하는 것이 안 될 이유가 네 가지 있습니다

 

1.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공격하는 것은 안 될 일입니다

2. 여름철에 군사를 동원해서는 안 됩니다

3. 온 나라의 군사들이 원정에 나서면 왜적이 허점을 노려 침공할 것입니다

4. 때가 장마철이라 활을 붙여놓은 아교가 녹고 대군이 전염병에 걸릴 것입니다

 

라고 사불가론을 내세워 요동정벌을 반대했고

그럼에도 우왕이 요동정벌에 대한 의지를 꺾지 않자

결국 이성계 장군역시 고려의 장수로서

그렇다면 일단 서경(평양) 에 머물며 시기를 기다리다

가을철쯤에 요동을 정벌하는게 나을거 같다 했고

그럼에도 우왕은 이성계 장군을 살해하겠다는 듯이 협박하자

결국 이성계 장군은 하는 수 없이

왕명을 받들기로 했습니다

결국 이성계 장군은 물러나면서 말했습니다

 

<이성계>이제 참화가 시작되었다

(로마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주사위는 던져졌다' 가 생각납니다)

 

사실 이성계 장군도 고려 백성들의 기대를 받는 것과는 달리

고려에 대한 충심이 있었고 북방태생으로 북방에도 밝아

이미 한차례 공민왕의 명령으로

출병해 직접 요동을 점령한 적도 있었고

또 요동정벌을 완전히 반대한다기보다는

많은 전투경험이 있던 노련한 무장으로서 적절한 시기를 기다려보자는

입장일 뿐이었는데

계속되는 최영장군과 우왕의 등쌀에 밀려 억지로 5만대군을 이끌고

요동으로 출병한 것이었고

터벅터벅 힘없이 북진하던 이성계는

이대로가면 자신과 고려군이 개죽음을 당할 것임을 느끼고

결국 압록강의 위화도 부근에서

개경으로 회군을 결정합니다

 

위화도 회군

 

개경으로 회군한다는 것은 왕명을 거역한다는 것

즉 반란을 의미했고

터벅터벅 북진하던 이성계 군은

위화도에서부터 다시 어마어마하게 빠른 속도로 다시 남하해

개경으로 향합니다

 

이성계와 5만 고려군이 다시 개경에 도달하자

최영장군과 우왕은 요동정벌 출병으로 비어있었던 개경성에서 적은 군사를 이끌고

이성계와 맞섰지만 이미 고려 정예군은 모두 이성계군의 관할에 있었기에

금방 무너졌고

개경에 입성한 이성계의 대군은 최영을 수백겹으로 포위했고

이성계는 최영을 보며 눈물흘리며 말했습니다

 

<이성계>이 일은 내 본의가 아닙니다

국가가 편안하지 않고 백성이 피곤하여 

원망이 하늘에 사무쳐 부득이하게 일어난 일입니다

부디 잘 가십시오 잘 가십시오

 

이후 최영장군은 고봉현(오늘날 경기도 고양시[고봉산으로 유명]) 에 유배됬다가

옮겨다니며 심문을 받고

73세의 나이로 처형됬는데

죽기전에 낯빛하나 변하지않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최영>만약 내가 평생동안 한 번이라도 사사로운 욕심을 품었다면 

내 무덤에 풀이 날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풀이 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최영장군은 이성계에게 처형당하셨고

과연 최영장군의 무덤에서는 풀이 나지 않았습니다

 

최영장군은 살아생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최영장군>황금 보기를 돌 같이 하라

 

이는 최영장군의 아버지의 유훈이었는데

최영장군은 아버지의 말씀을 받들어 이렇게 살았고

평생을 나라와 백성을 위해 살은 인물입니다

 

고려의 마지막 충신 장수였던 최영장군 !

그는 나라와 백성을 수호한 한국사의 위인입니다

 

최영 장군의 죽음에 분노한 개경 사람들은

몰래 억울하게 죽은 최영 장군의 제사를 올리며

제사상에 올린 돼지고기를 이성계라 부르며

이성계를 저주하며 잘근잘근 씹어먹었고

이때 요리한 돼지탕은 돼지탕이라 부르지 않고

성계탕이라 불렀고 오늘날 성계탕(돼지국)과 성계육(돼지고기) 요리의 유례가 됬습니다

이성계는 돼지띠였기에

개성(개경) 지방에서는 돼지를 성계라고도 부른다고 합니다

또 개성사람들은 고려 멸망후 이성계에 의해 많은 죽임을 당하자

남편을 잃어 분노한 개성 아녀자들은 떡을

이성계의 목이라 생각하고 비틀었고

이에 눈사람 모양의 조랑떡이 만들어졌습니다

 

오늘날 순대를 넣은 돼지국밥

 

조랭이 떡국

 

결국 위화도 회군으로 모든 정적을 제거한 이성계는

우왕을 폐위시키고 허수아비 왕들을 앉혔고

신진사대부와 결탁해

차근차근 새로운 나라를 건국할 구상을 시작하기 시작합니다

 

<라봉봉>그렇게 점차 여말선초의 시대이자

이성계의 시대가 시작됬고

위화도 회군으로 최영장군까지 제거한 신흥무인 이성계는

견제 세력이 모두 사라지자 더이상 거칠게 없는

고려의 실권자가 됩니다

 

그가 무신정권 시절 무인집권자와 다른 점은

당시 고려 백성들도 잦은 외침과 권문세족의 수탈 ,

고려 내부와 불교의 문란과 혼란 등에 대해

고려에 대한 환멸감을 느끼고 있었고

이런 황속에서 이성계는 무력으로 정권을 장악하고

유학을 주요 이념으로 하는 신진사대부와 결탁해

아예 나라 를 바꿀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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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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