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태종 이방원은 조선 건국전부터

조선 건국의 걸림돌이었던 고려 마지막 충신 정몽주를 살해하는등

여러 피를 흘린 인물이고 왕이 되기전에도 '왕자의 난' 으로 정권을 잡았고

킬방원 , 킬러본능 등 여러 별명을 지닌 인물입니다

 

역사적으로 건국 초기에는 고구려 대무신왕 , 고려 광종 , 대한민국 박정희 등등

여러 '엄격한 지도자형' 인물이 나와 나라의 기틀을 다졌다 할 수 있고

이방원 역시 그런 형 인물에 속한 인물로 보이고

그의 킬러본능은 왕이 되고나서도 이어졌는데

강력한 왕권을 추구했던 그는 이번엔 권신과 외척들을 숙청하기 시작했고

대표적 사례가 자신의 처가이자 세자 양녕대군의 외가인 민씨일가를

숙청(정치 단체나 비밀 결사의 내부 또는 독재 국가 등에서 

정책이나 조직의 일체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반대파를 처단하거나 제거함)한 것입니다

 

조선시대의 숙청 이미지인 사형집행자 망나니 , 망나니는 큰 칼을 들고 춤을 추다 입에 담긴 술을 칼에 뿌리고 죄인의 목을 베는 이미지가 있습니다 , 출처 : SBS 드라마 스페셜 바람의 화원 (2008) The Painter of the Wind

 

외척은 왕의 부인의 집안으로서 역사적으로

왕의 비호를 받아 수많은 정계에 나서 사리사욕을 채우다

나라를 망치거나 한 사례들이 많았고

강력한 왕권을 추구하고 조선을 안정적인 나라로 만들려했던 이방원에겐

이런 외척이나 공신들을 몸에 두드러기가 일어날 정도로 싫어했고(비유적 표현)

이미 왕자의 난으로 형제들도 죽인 그의 칼날에는 외가던 가족도 예외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큰 고민이 있었는데

바로 세자 양녕대군이 계속 놀러만 다니고 음란한 짓만 하며

속을 썩인 것이었고

반대로 셋째아들 충녕대군은 부지런히 공부하고 우애있고 효도하는 모습을 보여

주변 사람들의 칭찬을 받았고

양녕대군의 비행이 날이 가며 커질수록

충녕대군의 자질은 더욱 돋보이게 되었습니다

 

태종 임금과 양녕대군

 

사실 이방원 역시 패륜적 인물이라 할 수는 있어도

자신의 아들인 양녕대군이 여러 패륜적 행위를 일삼자

골치가 아플 수밖에 없었고 (양녕대군은 아버지도 이랬는데 왜 난 안됨 ? 이러며

더욱 그의 가슴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이에 비해 묵묵하게 열심히 공부하며 근본있는 모습을 보이는

충녕대군이 계속 마음에 걸렸고

결국 건국 초 불안정한 조선을 위해 장자승계원칙을 삼고싶었지만

그렇다고 패륜적 모습을 보인 장자 양녕대군을 왕위에 앉히면

더욱 나라가 불안정해 질것이 눈에 보였기에

결국 태종 이방원은 신하들과 의논하다 양녕대군을 세자에서 폐하고

셋째아들 충녕대군을 세자에 앉히고

얼마후 왕위에 앉게하고 본인은 22세의 충녕대군에게 군사적 권력만 양도하지 않고

상왕으로 물러났습니다

 

<세종대왕의 즉위 교서>

그런데 (태종께서는) 근자에 오랜 병환으로 말미암아 

청정 聽政 (정치일) 하시기에 가쁘셔서 

나에게 명하여 왕위를 계승케 하시었다

 

나는 학문이 얕고 거칠며 나이 어리어 일에 경력이 없으므로 재삼 사양하였으나

마침내 윤허를 얻지 못하여

이에 영락 16년 무술 8월 초 10일에 경복궁 근정전에서 

위에 나아가 백관(신하들)의 조하 朝賀 (신하들의 인사) 를 받고

부왕을 상왕으로 높이고 모후를 대비로 높이었다

일체의 제도는 모두 태조와 우리 부왕께서 이루어 놓으신 법도를 따라 할 것이며

아무런 변경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 거룩한 의례에 부쳐서 마땅히 너그러이 사면하는 영을 선포하노니

··· 모반 대역이나 조부모나 부모를 때리거나 죽이거나 한 것과 

처첩이 남편을 죽인 것

노비가 주인을 죽인 것

독약이나 귀신에게 저주하게 하여 고의로 꾀를 내어 사람을 죽인 것을 제하고

다만 강도 외에는 이미 발각이 된 것이나 안 된 것이거나 

이미 판결된 것이거나 안 된 것이거나

모두 용서하되

감히 이 사면의 특지를 내리기 이전의 일로 고발하는 자가 있으면

이 사람을 그 죄로 다스릴 것이다

 

아아, 위 位 (자리 , 위치)를 바로잡고 그 처음을 삼가서

종사의 소중함을 받들어 어짊을 베풀어 정치를 행하여야 

바야흐로 땀흘려 이루어 주신 은택을 밀어 나아가게 되리라

 

저는 조선시대 22세의 인물의 글이라고 믿겨지기가 어려울 정도로

세종대왕의 즉위교서는 충녕대군 그가 뛰어난 학식이 있는 인물이라 여겨지는

한국사의 명문이라 생각되고

22세의 나이에도 이미 사회의 생리등을 파악하고 있었던

비범한 인물로 보여지는 글이라 생각됩니다

 

22세에 왕이 된 충녕대군은 한국사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인

'세종대왕' 이 되었고

세종대왕은 평생을 백성을 위한 정책을 폈고

어려운 한자로 인해 글에 무지해 매번 피해를 보는 백성들을 위해

'훈민정음' 오늘날 한글이라 불리는 현재 세계에서 가장 과학적이고 합리적이라는 글자를 만들어

인류사에 기여한 한국사의 축복이자 위인이라 할 수 있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세종대왕 , 한국사의 축복

 

세종대왕 역시 여러 비판이 있지만 하루같이

조선 건국 전부터 피바람에 숙청이 일상화되던 시대에 왕이 되어

당대 사람들 기준으로는 엄청나게 평화로운 시대를 열었다 할 수 있어

당대 사람들과 후세의 칭송을 받았고

왕정 시대의 인물이지만 오늘날 기준으로도 상당히 합리적 , 민주적인 정책을 펴며

백성들의 소리에 귀 귀울인 인물로 그의 시대는 태평성대라 불리고

조선의 문화가 꽃핀 평화시대를 연 인물입니다

 

그의 업적과 행보 , 뛰어난 기록들은 너무나 많아 요약해 쓰는 것 역시

부족하다 할 수 있지만 일단 다시 조선시대 역사 이야기로 넘어가서,,

 

태종 이방원은 총명하고 어진 자질을 보인 셋째아들 충녕대군을 왕위에 앉히고

참으로 든든한 마음이었습니다

그 역시 많은 피를 흘렸지만 스스로 충녕대군에게 왕위를 넘겨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태종 이방원>18년동안 호랑이 등에 탔으니 이것으로 족하다

 

그는 권력을 호랑이 등에 올라탄 것으로 여겼고

상왕으로 물러나 남은 일생을

총명했지만 권력기반이 취약해 불안정했던 셋째아들 충녕(세종) 을 위해

노력하려 했고 당시 초보임금 세종에게는 일상적인 일만 맡기고

실권과 군사권만은 직접 쥐고 있었는데

당시 세종대왕의 장인 심온은 세종대왕이 왕이 되자

조선 1등벼슬 영의정이 되었고

그가 명나라에 사신으로 떠나는 길에 많은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뤄 그를 전송했는데

가뜩이나 외척 , 권신들을 경계하던 태종 이방원의 눈 밖에 난 행동이었고

태종 이방원은 그러한 그의 행적에 의구심을 여기고

반란에 연루시켜 심온이 명나라에서 돌아와 압록강을 건너자마자

체포해서 서울에서 조사를 하고 사형시킵니다

 

사실 심온을 영의정에 임명한것도 태종 이방원이었는데

이는 그를 떠보기위해 일부로 높은벼슬인 영의정에 임명해

그의 주변 사람들까지 파악하려 했던 태종의 의도였다 할 수 있습니다

(고문방법에는 고통만 주는게 아니라

'일부로 잘해주기' 라는 것도 존재함)

 

당시 세종의 왕비이자 심온의 딸이었던 소헌왕후 심씨 역시

폐비시켜야 한다는 의견들이 있었지만

이미 심씨가문의 숙청이 종료됬고

임신중이었던 소헌왕후 심씨는 다른 야심을 보이거나 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아

숙청대상에서 벗어나게 됬고

소헌왕후는 그렇게 시아버지에게 친정이 숙청된 상황속에서

세종대왕을 내조하며 평생을 조용히 지내게 되었습니다

 

이외에도 상왕 태종은 대마도 정벌등을 지시해

세종대왕시기 직접 대마도 정벌을 계획 주도해

이종무 장군을 시켜

한국 고유 영토였지만

어느새 왜구(일본해적) 의 근거지가 되었던 대마도를 정벌했습니다

 

대마도 정벌 , 일본인의 항복을 받는 이종무 장군

 

점차 세종 역시 뛰어난 자질을 보이며 조선을 안정적을 운영하며

상왕에게 효도하자 더이상 걱정거리가 없다 판단한 태종은

집도 짓고 놀러다니고 사냥도 다니며 편안하게 여생을 보내다가

56세를 일기로 사망합니다

사망하며 세종에게 황희정승을 중요히 쓰라 했고

양녕대군이 비록 불효자지만 아들이고

세종에게 너가 왕이니 형제들을 잘 챙기라 부탁했고

마지막으로 세종에게 당부했습니다

 

<태종 이방원의 유언>모든 악업은 내가 지고갈터이니 주상은 성군이되시오

 

사실 이 말은 태종의 일대기를 다룬 드라마 용의 눈물 (KBS 대하드라마 龍의 눈물 1996)

에서 나온 말입니다

 

한국 사극의 걸작이라는 평가가 있는 조선건국사 이야기를 다룬 용의 눈물 , 출처 : KBS 대하드라마 龍의 눈물 (1996)

 

그러나 이 명대사는 그의 일생과 세종을 대하는 입장을 축약한 명대사라 할 수 있고

실제 태종 이방원은 태조 이성계의 아들 중 가장 총명하고 냉철했으며 대범했던 인물이었고

빛나는 다음 시대를 열기 위해 온갖 굳은 일을 마다하지 않았고

이에 500년 왕조 조선이 안정적인 나라로 가는 기반을 다졌다는 평가들이 있는 인물이고

물론 끔찍한 이야기지만 실제 세종대왕이 태어나지 않았다 하더라도

한국사의 뛰어난 인물로 이야기 되었을 인물이었지만

세종대왕으로 인해 더욱 유명해지게 된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태종 이방원 상상화

 

태종 이방원 사후 세종대왕은 본격적으로 왕의 시험대에 올랐고

태종 이방원대에 죽어간 신하들에 대해 더이상 함구하지 않고

성향이 다른 신하들 사이에서 그들의 차이를 인정하는 모습을 보였고

왕이 되고나서도 부지런히 공부하며 백성들을 위하는 모습과

우직하게 자신의 길을 걸어나가며 묵묵히 입지를 넓혀갔습니다

 

<라봉봉>태종 이방원의 일생들을 보면

 

예수님의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라는 말이 떠오르는데

오늘날 안타까운 점이

 

'한국인들은 역사를 드라마(혹은 영화) 로 배운다'

 

라는 말이 나오는 것인데

사실 역사책을 많이 읽은편이라 할 수 있는 저가 봐도

우리나라의 사극 , 역사영화 등의 고증은

잘못된 것 , 허점 , 감성팔이 , 정치선동 등에 엮인 것이 많다고 보여지고

정권이 바뀔때마다 정권의 입맛에 맞는 사극들이 출시되기도 하고

요새는 아예 점차 판타지화 되는 느낌도 있습니다

 

실제 역사는 냉혹하고 잔인하고 준엄한 사실들이 많은데

그러한 사실들이 멀어지고 보고싶은 이야기 , 달콤한 이야기 , 피상적인 이야기들만이

영상 매체에는 집중적으로 그려지는 것같아 안타깝고

그러한 영상을 본 사람들이 드라마 , 영화를 현실로 믿고

지나치게 나서는 듯한 모습이 안타까운 점들이 많습니다

 

태종 이방원은 태조 이성계를 제외하면 조선 건국사의 핵심중의 핵심인 인물이자

 

'역사는 냉혹하다'

 

라는 말에 어울리는 인물이라 할 수 있고

 

사람들은 자신의 행동과 말에 책임을 져야한다거나

책임을 지지 않으려면 자신이 행한 악업이 그 이상으로 되돌아온다는

것을 역사를 통해 알아야 할 것입니다

 

반응형
Posted by 라봉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