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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는 장남 효장세자를 잃고

아들을 두지 못하다 42세에 얻은 늦둥이 왕자 이선의 탄생을 기뻐하고

곧 세자로 책봉해 아껴했는데

책을 좋아하던 영조는 세자가 읽을 책을 직접 밤새가며 필사(베껴 씀) 하기도 하고

세자(사도세자)를 지극정성으로 키웠고

세자 이선(사도세자)은 총명한 모습을 보이며

영리한 아버지 영조의 기대에 부합했는데

대신 영조는 어린 세자를

출생이 미천한 어머니 영빈이씨와 너무 일찍 떨어트려 지내게 했고

또 교육열이 엄청 높았던 영조는

어린 세자에게 유능했던 자신과 같이 될 것을 바라며

기대치를 너무 높였는데

4살때부터 세자를 구박하고 혼내는 모습을 보이며

엄격한 모습을 보였고

세자는 9세때부터 영조 만나기를 두려워했고

점차 영조는 세자에 대한 칭찬의 수를 급격히 줄였습니다

 

사도세자의 상상어진 , 우승우 화백

 

치밀하고 냉정했으며 재빨랐던 영조와

과묵하고 행동이 느렸던 세자의 성격은 매우 달랐는데

(단 스트레스가 심할경우 민첩성이 둔화된다고도 하는데

영조의 압박으로 인한 과도한 스트레스로 사도세자의

행동이 느려졌을 지도 모릅니다)

 

학문을 좋아해서 '문' 적인 성향이 강했던 영조는

무예를 좋아해서 '무' 적인 성향이 강했던 사도세자와 자주 충돌했고

 

세자는 영조를 매우 무서워했고 책을 볼때 어지럼증에 빠지거나했고

세자의 스승들은 영조에게 먼저 치료받게 하고 휴식을 취하게 하라했지만

영조는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고 세자가 꾀병을 부리는 것이라 생각하고

공부하라는 말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세자가 너무 멍청했냐하면 그것도 아니고

영조의 질문에도 조리있게 대답하기도 하고

총명한 모습도 보여주는데

영조 역시 세자를 공격하는게 이해하기 어려울정도로 도가 지나치게 됬습니다

 

당시 영조는 자신이 왕위에 욕심이 없다는 것을 신하들에게 어필하고

정국을 안정시키기 위해

자주 선위파동(왕위를 내려놓게다하는 정치적 쇼)을 벌였는데

그러다 세자에게 대리청정(세자 등에게 나라를 대신 통치하게 시킴) 을 시켰고

대리청정을 속에 세자와 영조는 큰 의견대립이 있었고

 

당시 신하들도 권력을 잡기위해 세자를 지지하기도 해서

조정은 영조파와 세자파로 나뉘었고

양 부자(아버지와 아들) 의 관계는 점차 파국으로 치달았습니다

 

세자는 점차 아버지의 의심과 학대속에

마음속이 황폐해져갔고 정신이 극도로 불안정한 상태로 변했지만

아무도 조선왕 다음 서열인 세자에게 바른말해줄 사람이 없었고

세자의 정신은 당시에는 정신의학같은게 없었지만

당시 기록을 보더라도 오늘날 우울증 및 여러 정신질환과 일치하다

이야기 되고 있습니다

 

<세자>나는 원래 남모르는 울화의 증세가 있는 데다

지금 또 더위를 먹은 가운데 임금을 모시고 나오니

(긴장돼) 열은 높고 울증은 극도로 달해 답답하기가 미칠 듯합니다

이런 증세는 의관과 함께 말할 수 없습니다

경이 우울증을 씻어내는 약에 대해 익히 알고 있으니 

약을 지어 남몰래 보내 주면 어떻겠습니까

 

점차 세자는 반인륜적 범죄를 일삼아

비구니(여자스님) 을 추행 , 폭행 , 강간 , 살임을 일삼아

궁녀들을 때리고 성폭행했고 내시와 나인들을 많게는

하루에 6명까지 직접 살해하기도 했습니다

 

(아무리 스트레스가 심해도 세자 역시 큰 문제가 있었다 보여지고

이런 거 보면 왜 영조가 세자를 싫어했는는 지도

알거 같습니다)

 

결국 세자 반대파들은 세자를 폐위시키려

노론대신 윤급의 종이었던 나경언을 시켜서

영조에게 세자의 잘못된 행위들을 고해바쳤고

나경언의 고변에는 세자가 일찍이 궁녀를 살해하고

여승을 궁중에 들여 풍기를 문란하게 하고

왕의 허락도 없이 평안도에 몰래 놀라갔고

멋대로 나가 돌아다니는 등 세자의 결점과 비행 등을

10조목으로 해서 고발했고

 

나경언의 고변을 들은 영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영조>오늘날 조정의 대신들은 모두 죄인이다

한 사람도 내게 고한 이가 없으니 어찌 부끄럽지 않은가 ?

 

영조는 나경언을 충직하다 봐서 살리려 했지만

신하들은 나경언이 세자를 모함했다며 나경언을 죽여야한다해서

결국 나경언은 참형당했고

 

대신 세자의 비행 문제는 더욱 확대되

결국 영조는 세자에게 자결을 명했습니다

그러나 자결하라는 영조의 명령을 세자는 듣지 않았고

결국 영조는 쌀상자인 뒤주를 가져오라 해서

세자를 뒤주에 집어넣었습니다

 

쌀을 보관하는 나무상자 '뒤주'

 

한여름 뜨거운 더윗속에

물도 안주고 밥도 안주고 가둬버렸고

세자는 안에서 울부짖다가

8일째부터는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해

갈증과 굶주림 속에서 죽었습니다

 

뒤주에 갇혀 죽은 사도세자

 

세자가 죽자 영조는 뒤늦게 세자의 죽음을 슬퍼했지만

이미 너무 늦어버렸고

세자의 죽음을 슬퍼한다는 뜻으로 '사도 思悼 (생각할 사 , 슬퍼할 도)' 라는 시호를 내려주고

세자는 '사도세자' 라 불리게 되었습니다

 

사도세자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 '사도' , 출처 : 사도 (2015) 思悼, The Throne

 

또 영조는 궐밖으로 쫓아낸 세자빈(혜경궁 홍씨 , 사도세자의 아내)과

세손(손자 , 사도세자의 아들)을 다시 궐로 들였고

총명했던 세손을 특히 아꼈습니다

총명했던 세손은 영조의 뒤를 이어 조선 청년 개혁군주 정조가 됬고

사도세자의 아내이자 정조의 어머니였던 혜경궁 홍씨는

일찍 궐에 들어와 남편을 잏고

사도세자의 죽음과 자신의 기구한 삶을 다룬 회고록인

'한중록' 을 썼는데

한중록은 궁중 여인의 시각으로서 조선후기 정치격변의 시대상을 담고 있고

우아하고 품위있는 궁중용어와 궁중과 사대부 사회의 풍속들이 나타나서

한중록은 인현왕후전 , 계축일기와 더불어

조선 궁중문학의 대표작으로 꼽히게 됬습니다

 

한중록

 

<라봉봉>사도세자 동정론 역시 없지않아 있지만

그렇다고 스트레스가 크다고 주변 사람들을 죽이거나 강간한다는 것은

당시 세자를 미워하던 영조뿐만 아니라 일반사람들 눈에도 이해하기가 어려운 일이었고

사도세자 역시 꼼꼼하고 냉철했던 아버지 앞에서 처신을 잘못하다

아버지와 불화를 겪고 결국 자기 관리도 실패해 광증으로 주변 사람들을 죽이다

뒤주에 갇혀 사망하게 됬다고 생각됩니다

 

조선사의 아버지와 아들의 갈등중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사도세자의 죽음 사례라 할 수 있으며

백성들은 사도세자의 억울한 죽음을 슬퍼해

그를 '뒤주대왕' 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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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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