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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개혁군주였던 조선 22대왕 정조는

영조에 의해 뒤주에 갇혀 억울한 죽음(사도세자의 잘못도 크게 있음)을 당한

사도세자의 아들로 태어났고

원래같으면 아버지 사도세자가 왕이 되고

그 뒤를 이어 세자가 되고 왕이 되었어야겠지만

사도세자의 비행등에 분노한 영조는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잔인하게 죽여버렸고 대신 총명했던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 이산을 거두어 길렀습니다

 

조선 22대왕 정조 이산 영정 , 이길범 (1989년)

 

영조는 손자(세손) 이산이 총명한 모습을 보이자

기뻐하며 세손을 예뻐했고

사도세자와는 엮이지 않도록 보호하려 했습니다

 

영조 역시 사도세자를 죽이고나서 뒤늦게 큰 후회가 있었는지

마치 아들에게 주지 못한 사랑을

손자에게 주듯이 했습니다

 

정조 이산은 어린시절 사도세자가 살아있을 때부터도

유독 영조는 사도세자를 미워하고

심심하면 이산을 불러 손자를 칭찬만 하며 키웠고

 

그런 손자도 이후

할아버지에게 아버지를 살려달라 애원하기도 했을 정도였는데

결국 영조가 사도세자를 죽이게 되었고

그런 것을 보며 정조는 엄청난 충격을 받으며 자랐습니다

 

사도세자 사후부터 세손은 공부에 매진했는데

세손은 공부를 엄청 좋아하기도 했지만

냉혹한 학자형 할아버지 영조에게서 살아남기 위해

무예를 좋아하던 아버지와 다른 모습을 보이기 위해

생존형 공부를 했던 것도 있다고 합니다

 

<당시 세손 정조를 교육하던 김종수>임금은 통치자이자

아버지이며 동시에 스승이어야 합니다(군사부일체)

세손께서는 만개의 하천을 비추는 밝은 일월(태양과 달) 처럼

되셔야 할 것입니다

 

김종수의 가르침 '군사부일체 (임금과 스승과 아버지의 은혜는 다 같다)' 는

정조 평생의 철학이 되었다 할 수 있습니다

 

2000년대 초반 한국에서 조폭영화가 대흥행할때 한때 '군사부일체' 의 군을 두목의 두자로 바꾸어 조폭의 의협영화로 재해석해 흥행한 한국영화 '두사부일체' 로 한국식 정서가 많이 들어간 영화였습니다 , 출처 : 영화 두사부일체 (2001년)

 

영조가 조선 최장수왕으로서 오랜 재위기간을 지내다 사망하자

세손 이산은 왕위를 이어받았고

조선 22대왕 '정조' 가 되었습니다

 

왕이 된 정조는 즉위하자마자

억울하게 죽은 아버지 사도세자의 원한을 풀고싶어했고

즉위날 이렇게 말했습니다

 

<정조>아 ,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

 

(본심을 숨기기위해 애써 일부로 이 뒤에 형식적인 말을 했지만

앞에 말의 충격이 컸음)

 

즉위하는 군주의 이 말을 들은

대신들은 경악했고

특히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아갔던

노론 대신들은 공포에 휩싸였습니다

 

결국 이후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에 관련된 핵심인물들을 모두 죽이고

관련 사람들을 죽이거나 처벌했습니다

 

특히 사도세자의 죽음에는

정조의 어머니이자 사도세자의 부인이었던

혜경궁 홍씨가 연루되있었는데

그녀는 사도세자의 부인이었음에도 사도세자가 자신의 가문과

노론의 이익에 나쁜 행동을 할까 늘 지켜보며

남편의 행실을 친정(노론가문)에 알려주는 일도 했고

(단 사도세자도 잘한게 없고 영조가 분노했을때

함부로 나섰다간 집안이 망할 수 도 있었음)

 

그녀의 가문 역시 사도세자의 죽음에 깊이 관여되있어서

크게 처벌받았고

살아남은 혜경궁 홍씨는 이러한 조선 정치투쟁 이야기들을

'한중록' 이라는 기록을 남겨 써놓았습니다

 

효자였던 정조는 왕이되고나서

할아버지 생애동안 참아왔던 울분들을 토해냈고

아버지를 기리려

묘를 명당이라는 수원 화산(오늘날 수원시) 에 이장해

하루가 멀다하고 아버지의 무덤에 성묘하러 갔습니다

 

또 정조는 신하들 견제 및

수원을 자신의 이상적인 도시(+자신의 노후 주거지)로 만들기 위해

수원 화성을 지었고

당대 유능한 문신이었던 정약용에게

거중기를 제작하게 해서 정약용은

도르래의 원리가 이용된 거중기를 제작해

힘을 덜쓰고 수원화성을 지었고

자주 이곳에 행차해 아버지를 그리워했습니다

 

거중기를 이용해 만든 수원화성 , 오늘날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이외에도 정조는 공부를 많이해 자신감이 넘쳤는데

정조는 청년 개혁군주로서

'규장각' 이라는 궁궐도서관 설치해서

규장각 중심으로 유능한 인재들 양성했고

'초계 문신제' 를 시행해 젊은 관리들을 교육해

개혁정책을 시행했습니다

 

조선의 왕실도서관 '규장각'

 

이외에 정조는 세손시절 자신을 지켜주었던 홍국영에게 권력을 주었고

홍국영은 눈치가 빠르고 얼굴이 잘생겼다는데

정조의 신임을 얻자

이에 홍국영은 도승지(왕의 비서실장) 가 되서 조선 최강의 실세이자

세도가가 되서 권력을 휘두르려 했고 정조의 신임에

노론 벽파 수장 김종수는

 

<김종수>국영과 갈라서는 자는 역적이다

 

라고 까지 말했을 정도였습니다

홍국영은 여동생을 정조 후궁으로까지 들였으나

여동생이 1년만에 사망해서 그의 권력장악은 힘을 잃어갔고

이후에 너무 위세가 커지자 정조는 홍국영을 유배시켰고

갑작스럽게 몰락해 충격을 받은 홍국영은 미치광이로 살다

34세의 젊은나이로 요절합니다

 

조선 후기였던

정조시대에는 큰 사회변화가 있었는데

조선 후기부터

이전 청나라 오랑캐를 제압해야한다는 '북벌파(척화파)'와

강성한 청나라에 대한 패배 원인을 찾고

청(북방) 을 배워야 한다는 '북학파'로 나뉜 조선조정은

점차 번영하던 청나라의 강성한 힘을 깨닫게 됬고

이에 북학파를 계승한 성리학적 탁상공론이 아닌

서양 기술들을 받아 들이는 실질적인 학문을 배워야 한다고 주장하는

'실학자' 들이 생겨나

실학(실질적 학문)이 활발이 연구되

조선에 외국 과학기술들이 소개 , 연구되었습니다

 

조선 학문의 계보

 

또 상업이 발달하고 몰락양반들이 늘어나고

돈가진 평민들도 많아져 신분움직임이 활발해졌고

문학이나 서민예술들이 발달하게 되었습니다

 

청년 개혁군주 정조는

급격한 시대의 변화속에 실학자들을 중용했고

대표적인 사람이 정약용이었습니다

 

한국의 위인 '정약용'

 

정약용은 훌륭하고 뛰어난 선비였기에

정조의 믿음직한 정책자문관이 됬고

실학자로서 서구식 기술을 받아들여

거중기를 발명해서 수원화성을 쌓았습니다

 

정약용이 발명해 수원화성 건설에 사용한 '거중기'

 

그러나 천주교가 조선에 유입되자

조선 지배층인 성리학 사대부들은 천주교에 대한 거부반응을 일으켜

천주교를 탄압했고

정약용은 천주교를 믿었다는 이유로 유배되

긴 유배생활동안 조선의 부국강병 및

올바른 관리의 덕목에 대한 책들을 저술했고

대표적인 책으로 '목민심서' 를 남겼습니다

 

정약용이 저술한 목민심서와 책들

 

정약용은 백성들의 삶을 진정 걱정한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학자이자 한국의 위인으로 이야기 됬습니다

 

정조 시기에는 문화예술도 활발히 발달했는데

김홍도라는 천재화가가 나타나

조선의 온갖 그림을 그렸고

그는 임금의 초상화인 '어진' 부터

왕의 밀명을 받고 일본의 지도를 그리는 일 , 금강산의 절경 , 불화 등을 그렸고

백성들과 함께하며 백성들의 삶을 살피며

민중의 삶을 사실같이 그려낸 '풍속화' 를 그렸고

소박하고 담담한 그의 그림속에는 백성들의 삶 , 익살스러운 모습들까지

상세히 그려져 있고

그의 대표작 '서당' , '씨름' 등은

조선 후기 생활상을 알 수 있는

한국의 대표적인 그림이 되었습니다

 

한국의 위인이자 조선의 천재화가 '김홍도'

 

김홍도의 대표작이자 한국화를 대표하는 그림이 된 '씨름'

 

정조는 조선 후기 마지막 개혁군주였고

서양문물을 받아들이고

초계문신제로 젊은 선비들을 양성해 연구하게 했으며

할아버지 영조의 탕평책을 계승해 탕평정치로 신하들과 화합하려 했고

'신해통공'으로 독점상인들의 폐해를 막으려

시전상인들의 특권을 폐지해

조선 상업이 자유로워지게 했습니다

 

<정조>임금은 백성을 하늘로 삼는다

백성은 먹을 것 없이는 있을 수 없으니 먹을 것을 하늘로 삼는다

그러니 군주는 모름지기 군주의 하늘인 백성을 잘 섬기고

백성의 하늘 또한 잘 섬겨야 한다

 

정조는 자신감 넘치던 청년왕이었는데

술담배도 즐겼고

매우 다혈질에 급한성격이어서

신하들과 마찰이 잦았습니다

 

정조는 승하(사망) 하기 2년전에

새로운 호를 지었는데

 

'만천명월주인옹 萬川明月主人翁'

 

이라는 호를 지었고

그 호의 뜻은

만개의 내에 비추는 밝은 달의 주인이라는 뜻으로서

하늘에 뜬 밝은 달이 지상의 모든 시내를 비추듯

자신의 정치가 모든 백성들에게 고루 퍼져 혜택을 입는다는 뜻이었습니다

 

백성을 사랑했으나 직선적이고 다혈적인 성격으로

신하들과 마찰이 잦았던 정조였고

그래서 그런지 정조는 스트레스가 많았던 인물이라

젊은 나이에 사망했고

이에 그를 반대하던 신하들이 독살한게 아니냐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정조는 총명했던 임금이었고

조선 후기 상업을 크게 발달시킨 인물로 보여지는데

고려 공민왕은 고려의 마지막 왕은 아니지만

고려의 마지막 '왕다운 왕' 이었다고 할 수 있는데

정조 역시 조선의 마지막왕은 아니지만

패기넘치고 자신만만한 인물로서

'왕다운 왕' 이었고

사실상 조선의 마지막 왕이었다 생각됩니다

 

정조의 이야기를 다룬 드라마 '이산' , 출처 : MBC 월화 특별기획 이산 (2007년 9월 17일 ~ 2008년 6월 16일)

 

<라봉봉>정조는 자신이 대학자라 자신하며

신하들이나 학자들에게도 질타와 욕설을 퍼붓는 경우가 많았고

주변 학자들을 무시하고

평생 그가 생각했던 '군사부일체' 사상을 확대해석해

자신이 임금이며 신하와 백성의 스승이라 자처해

많은 신하들과 마찰도 잦았던

'자뻑형 인물' 이었다고도 할 수 있고

 

저(라봉봉)도 제목을 참 잘지은게

정조는 조선의 '청년개혁군주' 라는 말이 어울리는 인물입니다

 

청년, 청춘은 그 어떤 패기넘치는

피끓는 그런것이 있고

비록 그것이 완벽한 답은 아닐지라도

그 경험들이 모여 나이가 들며 지혜와 경험이 되는 것 같고

정조는 청년스러운 모습이 강했던 인물로 보여지고

정조 이야기를 쓰면서도 제가 19~20살일쯤이 생각나는데

피가 끓어오르고 아주 패기가 넘쳤던 시기였던거 같고

주변 또래들도 패기는 있어보였지만 저는 유독

더 패기가 넘쳤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현재의 저도 요즘 20~21세 청년들을 봐도 버릇은 없어보이지만

그 어떤 젊은 에너지가 느껴지는것을 본 거같고

글을 쓰다보니 다시 피끓는 무언가가 올라오는거 같아

아직도 나는 청년이구나 이런 생각이 듭니다 하하하하하

 

정조는 이런 청춘 , 청년같이 사는 사람들에게

특히 유독 찬양받는 인물같은데

그의 직선적이고 자유로운 기풍등은

조용하고 꼼꼼하고 냉정했던 할아버지 영조와 다른 모습이었으며

할아버지 영조가 농경사회 임금의 모범적 군왕이었다면

정조는 조선의 상업사회를 연 상업형 군주였다 생각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워낙 신하들과의 마찰이 잦았다는 점 등은

그 스스로도 정적들이 많아져

평생을 불안과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원인이 됬다 할 수 있고

이에 정조가 단명하게 되었다 생각됩니다

 

흔히 조선의 훌륭한 임금 하면

세종 , 영조 , 정조가 뽑히고

태조 이성계나 태종 이방원 , 세조는 능력이 있음에도

찬탈자 이미지때문에 '훌륭하다' 는 평은 못듣는거같고

선조와 인조는 전란 수습 실패때문에 크게 욕먹는 인물들이고 하여튼

조선의 마지막 굵직굵직한 임금이었다 할 수 있고

조선판 공민왕이라 생각되는데

정조가 사실상 조선 마지막 왕이나 마찬가지인게

정조 사후부터는 조선은 세도정치가 시작되

왕들은 실권을 잃었고 당파싸움에 결국

'신하들의 나라' 혹은 '양반나라' 로 고정됬다 할 수 있고

 

이미 조선왕들은 영조 정조 이전부터 차근차근 권위를 잃어오다

정조 사후부터 급격히 권위가 사라져감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저는 정조가 조선의 마지막 '왕다운 왕' 이라 생각하는데

'왕다운 왕' 이란 무엇인가 또 생각을 해보면

결국 '왕(오늘날로 치면 주인)'이란

무언가를 남기던가 본인의 의지로 하는 일이 있어야 한다 할 수 있고

정조 이후부터는 딱히 왕이 직접 전권을 행사하거나 무언가를 남기는 모습들이

급격히 줄어듬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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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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