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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통이 끊겨 급하게 강화도에서 모셔온 왕족 강화도령 철종 역시

후사가 없이 요절하자

허수아비 왕들을 앉혀오며 권세를 장악했던 안동김씨는 또다시 위기를 느꼈는데

결국 안동김씨가 두려워했던 총명했던 왕족 이하응(흥선 대원군) 의 둘째아들

'이명복' 은 대왕대비 조씨(신정왕후) 의 후원아래

효명세자(익종)와 신정왕후의 양자로 입적되서

곧바로 왕으로 즉위했습니다

 

이 인물이 조선 마지막 '국왕'이자 대한제국 1대황제인

고종 , 광무황제 라 불리는 인물로

이명복은 그렇게 조선 26대왕이 되었습니다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

 

젊은 시절의 고종

 

이명복은 어린시절 조선시대 이름을 천하게 지어야

귀신이 질투를 안해서 무병장수한다는 미신에 따라

어렸을때는 '개똥이' 라 불렸으며

가난했던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아들로서

평범한 소년으로 자랐습니다

 

고종은 어렸을때부터 군밤을 좋아했는데

철종이 갑자기 죽어서 12살에 그렇게 고종이 왕이 되자

고종은 옛날에 공짜로 군밤을 주지 않은 군밤장수를 처형하라 했다는

야사가 있고

평소에도 실제로 군밤을 매우 좋아하다가 나중엔 커피에도 빠졌으나

죽을때까지 군밤을 좋아했던 인물이고

한일 강제합병 이후에도 아들 순종이 창덕궁 후원에서 주운 밤을

직접 구워 망국의 왕이었던 아버지 고종에게 바쳤고

고종은 그럴때마다 입버릇처럼

순종이 구워 온 밤이 이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밤이라 말했다고 합니다

 

한국인의 소울푸드 '군밤' , 한국인이라면 맛이 없을 수가 없는 군밤에 대한 추억 하나쯤은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에 무능했던 그의 모습을 비꼬아

오늘날 젊은이들은 고종을 '군밤왕' 이라 부르기도 하고

일제가 고종의 무능한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날조한 기록이라고도 하나

나름 군밤을 진짜 좋아했던 것은 사실이라

그의 군밤이야기에는 망국의 쓸쓸함도 담겨있고

나름 어울리는 별명인거 같기도 합니다

 

하여튼 고종은 12세의 나이에 왕위에 올랐는데

오랫동안 안동김씨들에게 '상갓집 개' 라 불릴 정도로

몸을 낮추며 기회를 엿보았던 흥선대원군은

아들 명복이 조선 국왕 고종이 되자

왕이 아닌 왕의 아버지 '대원군' 이 되서

살아있는 '흥선 대원군' 으로서 그동안 사가에서 생활하며

지켜보았던 썩어빠진 안동김씨의 전횡과

삼정의 문란등으로 도탄에 빠진 백성들의 삶을 바꾸기위해

적극적인 개혁정책을 시행해 나갔습니다

 

삼정의 문란은 전정 , 군정 , 환곡 세가지를 의미하는데

이 세개는 조선의 세금제도로서

전정은 토지세금 ,

군정은 군대세금 ,

환곡은 곡식이 부족한 봄에 나라에서 백성들에게 곡식을 꿔주고

가을에 갚게하는 제도였는데 고리대로 변질되는등 관리의 부정착복이 가능해서

삼정중 가장 폐단이 심했습니다

 

삼정의 문란

 

이 세가지 세금제도를 통틀어 삼정이라 했고

흥선대원군은 삼정의 문란을 개혁하고자

 

양전 사업(토지 조사사업) 을 실시함과 동시해

은결(숨은 토지) 을 찾아내 전정(토지세) 을 개혁했고

 

군정을 개혁하려

사람 기준이 아닌 집을 기준으로 하는

호포제를 실시했는데

원래 군대에 세금으로 내는 군포라는 옷감이 있었는데

조선에서 군역의 의무는 양인(평민) 남성에게만 존재했으나

이로 인해 양인들의 부담이 커졌고

흥선대원군의 호포제 실시로

양반층을 포함한 모든 가구에 호포(옷감) 을 동등히 내게 되었고

양반층의 반발이 심했으나

이로 인해 세금이 크게 늘었다 합니다

 

호포제 실시로 나타난 부담층 변화

 

또 환곡을 개혁하려

지방 수령들의 돈벌이 수단이었던 환곡제를 폐지하고

지방의 덕망있는 양반이 곡식을 빌려주게 하는 '사창제' 를 실시하게 했습니다

 

이로 인해 조정 재정은 엄청나게 늘었습니다

 

또 흥선대원군은 이전부터 집권하며 조선을 장악한

안동김씨 및 세도정치 세력들을 몰아내려

세도정치가문들의 권력기구가 된 비변사를 폐지하고

의정부와 삼군부를 부활시켰습니다

 

<흥선대원군이 대신들에게 한 말>

나는 천리(千里 먼 거리)를 끌어다 

지척(咫尺 가까운 거리)을 삼겠으며

태산(泰山 큰 산)을 깎아 내려 평지를 만들고 

또한 남대문을 3층으로 높이려 하는데

여러 공들은 어떠시오?

 

여기서 남대문은 남인을 의미함으로서

더이상 안동김씨 가문들 및 세도정치가가 아닌

왕권강화를 위해 새로운 정치세력을 등용하겠다는 대원군의 발언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 국보 1호 남대문(숭례문)

 

또 흥선대원군은 조선 지방 곳곳에 많아져 폐단이 컸던

'서원' 을 철폐시켰는데

서원은 지방 성리학 교육기관이었지만

국가의 비호를 받고 세금도 안내고 지역 농민과 백성들에게 행패가 심해

많은 폐단을 낳았고

결국 흥선대원군은 폐해를 막으려 600개나 불어난 조선 서원들을

47개소의 서원만 남기고 전부 없앴고

이에 유생들이 들고 일어나 집단 항의시위를 벌였지만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의지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흥선대원군>진실로 백성에게 해가 된다면

공자가 살아 돌아와도 내가 용서치 않을 것이다

 

한국 서원을 대표하는 퇴계 이황의 '도산서원' , 도산서원같은 메이저 서원을 제외한 부패와 비리의 온상이 된 지방서원들은 흥선대원군에 의해 싸그리 정리됩니다

 

이러한 개혁정치속에 백성들은 환호했는데

여기까지 하고 물러난 흥선대원군이었다면

그 역시 훌륭한 인물로 기억됬겠지만

흥선대원군 역시 광해군과 같이 훌륭함 이외에도 이중성이 있던 인물이었고

 

성공에 고무된 흥선대원군은 왕실의 권위를 높이려

임진왜란대 폐허가 된 경복궁을 새로 지엇는데

엄청난 크기의 경복궁을 짓느라 부족한 세수를 매꾸려

백성들을 착취했고

당백전이라는 고액화폐를 발행시켜 조선 물가를 엄청나게 폭등시킵니다

 

조선 물가를 폭등시킨 고액화폐 '당백전(만악의 근원)'

 

또 좋은 나무를 쓰겠다며 양반들의 조상들이 묻혀있는 묫자리의

나무들을 쓰는등 양반들의 반발도 엄청났고

이때부터 백성들 역시 흥선대원군에 의문을 갖고

그에게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할 수 있습니다

 

<경복궁 중건당시 나온 민요 '경복궁 타령'>우리 나라 좋은 나무는 

경복궁 짓는 데 다 들어간다

 

또 흥선대원군은 동학과 천주교 같이 평등사상을 외치며

조선에서 새로운 바람이 불던

종교들에 대해 무자비한 탄압을 했고

1866년 8000여명에 달하는 천주교 신자 및 9명의 프랑스 사제들을 잡아

처형했고 이것을 '병인박해' 라 부릅니다

 

병인박해

 

결국 분노한 프랑스는 이 사건때문에

강화도로 군대를 보냈고

신식 기술로 무장한 프랑스군은 구식 무기로 무장한 조선군을 압도하며

조선 장수 한성근이 지키던 강화도의 문수산성을 박살내고

양헌수가 지키던 정족산성을 점거하려다 조선군의 기습으로

사기가 꺾여 돌아갔는데 이 사건을 '병인양요(1866)'라 부르고

당시 프랑스군은 강화도에 있던 수많은 한국의 유산과 보물들을 강탈해갔고

이미 서양 기술이 뛰어남을 알았던 조선은 조선대로

나름 서양 오랑캐를 물리쳤다며 승리를 자축했습니다

 

병인양요 기록 삽화

 

1866년 이 해는 특히 중요한 해로서

병인박해 , 병인양요 이외에도

점차 서구 열강들은 동양에 식민지를 확대해가며

조선같은 극동아시아에도 세력을 넓혀가려 했던 시기라

1866년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는

평양으로 올라와 통상을 요구하다 뜻대로 안되자

행패를 불이며 평양 군민들을 살해했고

그러다 제너럴 셔먼호는 모래톱밭에 갇혀 배가 옴싹달싹 못하다

분노한 평양 군민들에 의해 제너럴 셔먼호는 불태워지고

선원들은 살해당했는데 (제너럴 셔먼호 사건 1866)

이렇게 조선에는 고종시기대부터 본격적으로 서구 열강들과의

충돌이 본격화 되었습니다

 

제너럴 셔먼호 사건

 

또 1868년에는 독일계 유대인 상인인 오페르트가

흥선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파헤치려 시도하다 실패하는

'오페르트 도굴사건' 이 일어났는데

대원군은 이전 사건들 및 이로 인해

점차 서구인들에 대한 분노심이 더 커져갔습니다

 

또 1871년에는 미국상선 제너럴 셔먼호 사건을 구실로

조선을 개항시키려

미국군이 강화도에 쳐들어왔고 (남북전쟁으로 미국도 외국에 간섭할 여력이 부족해서

뒤늦게 온것임)

어재연 등이 광성보에서 대항했으나

서양의 강력한 신식군대 앞에 재래식 군대로 무장한 조선군은 허망하게 무너졌습니다

그러나 조선군은 미군에 대항해 한명도 탈영하지 않고

무기가 없으면 돌이나 흙을 던지며 저항하는 등 엄청나게 처절하게 싸웠고

결과는 일방적인 미군의 조선군 '학살'이었지만

미군은 무섭도록 처절한 조선군의 항전에 깜짝 놀라며

이렇게해서는 조선을 개항시키지 못할 것이며

이곳에서 더이상 얻을 게 없다 판단하고

본국으로 돌아갔습니다

 

신미양요 민족기록화

 

이러한 처절한 항전으로 서양인들은 조선에서 물러났고

이에 흥선대원군은 오랑캐를 물리쳤다며

'척화비' 를 세우는 등

외국에 대한 반외세 정책을 더욱 강경하게 이어갔습니다

이러한 흥선대원군의 반외세정책을 나라 문을 닫는다는 의미로

'쇄국정치' 라고 하고

오늘날에도 누군가 고집이 세고

남과 대화하거나 타협하지 않으려하는 사람을 보고

'흥선대원군' 혹은 '쇄국정치' 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척화비의 내용>

서양 오랑캐가 침범해 올 때 싸우지 않음은 곧 화친을 주장하는 것이며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곧 나라를 파는 것이다

(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 양이침범 비전즉화 주화매국)

 

척화비

 

그러나 점차 고종도 성년기가 되가며

흥선대원군도 권력을 놓아야 할 때가 되었고

그의 무리한 개혁정책 등으로 부담을 느낀 백성들과

양반들은 그를 몰아내려 했고

 

결국 고종이 즉위 10년이 지나 22세가 되자

고종 역시 자신의 뜻을 펼쳐 보고 싶어해서

결국 흥선대원군은 실각하게 되 고종의 상왕행세를 그만두고

고종에게 권력을 이양하게 되었습니다

 

<라봉봉>어렸을때 어린이용 흥선대원군 위인전이 있었는데

그 위인전에는 흥선대원군이 안동김씨의 횡포와 위세아래 울분을 참다가

아들을 왕위에 앉혀 조선을 개혁했고

이후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는 내용을 기억하고 있고

 

물론 그 역시 비판받아야 할 점은 있었지만

그가 조선 말기 '큰 인물' 이었다는 점에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인물입니다

 

그의 집권기간동안 여러 개혁들이 일어났고

개인적으로 보기에 가장 인상적인것은

'서원 철폐' 인데

고려 말 국가의 지원과 비호아래 승려들의 타락이 극에 달해

불교 사원들의 부패가 엄청났고

조선 말기인 흥선대원군 시기 역시

국가의 지원과 비호아래 사대부 , 유림들의 횡포가 심했고

그 중심은 단연 사대부 양성기관이었던 '서원' 이었다 할 수 있습니다

 

인류가 만들어낸 '집단 지성' 이라 불린 것들은 역사적으로 큰 폐단이 많았는데

일단 서양 교회의 부패등은 말할 것도 없고

서원은 오늘날로 치면 학교나 대학이라 비유할 수 있는데

저는 제가 내는 세금들이 왜 학교들에 들어가는지 잘 이해가 안되는 점이 많고

(어느 학교던)

물론 교육활성화 등 그럴듯한 이유라면 만들어내라면 만들 수 있겠지만

지원받은 세금 사용(국비 사용)등이 투명하지 않다는 것 , 효율적이지 않다는 것도

매우 중요한 문제라고도 할 수 있고

이러한 폐단들을 많이 봤기에

저는 알지도 못하는 불특정 다수에게 눈먼돈 식으로 지원하는 것보다

그 분야에서 특출나게 뛰어나고

계속 학문을 이어갈 수 있는 사람에게 지원을 해주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인데

그렇다고 한국 학교만 문제됬다 생각하지 않고

외국이던 한국이던 '학교' 라는 것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점이 있다 생각합니다

 

흥선대원군 시기 서원의 부패는 극에 달했고

오늘날 한국사회의 매우 큰 문제점인 '학벌 카르텔' 과 마찬가지로

당시 조선 성리학 사대부들의 '카르텔' 화의 중심지가 바로 서원이었기에

나름 흥선대원군의 개혁중 의의가 있었다고 보여지는 개혁이라 생각했습니다

(한국에서는 고려 말기엔 절 , 조선 말기엔 서원 , 오늘날은 학교문제가 크다고 생각됩니다)

 

여러 조세개혁과

이런 정책들로 인해 백성들의 환호를 받은 흥선대원군이었지만

그러나 흥선대원군은 역시 그러다 경복궁 중건 및 외세에 대한 배타적 정책으로

조선의 근대화를 늦혀지게 만든 인물이기도 했고

그는 하여튼 격동하는 조선 말기의 마지막 '조선시대 정치인' 이었다고 할 수도 있는 인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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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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