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그렇게 임오군란 이후

조선에는 청과 일본 군대가 들어와 내정을 간섭하기 시작했고

이 와중에 젊은 청년 개화파들은

일본의 지원을 얻어 정변을 일으킵니다

 

조선 개화파에는 김홍집같은 '온건 개화파' 이외에도

김옥균 , 박영효 , 서재필 같은 젊은 청년 '급진 개화파' 가 있었고

김옥균 등은 1884년 일본의 지원을 얻어

조선 최초의 우체국인 '우정국' 개국 축하연에서

정변을 일으켰습니다

 

갑신정변의 주역들인 왼쪽부터 박영효 , 서광범 , 서재필 , 김옥균

 

갑신정변 및 급진개혁파의 수뇌 '김옥균'

 

개화파 행동대원은 우정국에 참여한 관리를 칼로 찌르고

연회가 아수라장이 된 틈을 타

김옥균 등은 창덕궁에 들어갔는데

때마침 대궐 곳곳에서 화약이 터지고

김옥균은 고종에게 청나라 군대가 쳐들어왔다 거짓 보고를 하며

고종을 피신하게 하고 일본 공사에게 군대를 보내서 보호 할 것을 요청했습니다

 

얼떨결에 고종은 김옥균의 말을 듣게 되었고

수구파(개화파의 반대 , 보수파) 인물들은 개화파들에게 살해당합니다

 

갑신정변 지도

 

김옥균은 청나라군이 쳐들어왔다고 고종에게 거짓 보고를 하고

대신들을 소집했는데

내시 유재현은 개화파 일행들에게

국왕을 위협한다고 호통쳤다가

김옥균의 명령을 받은 장정이 휘두른 몽둥이에 살해당했습니다

 

대신들은 국왕의 명령인줄 알고 입궐하려다

개화파에게 차례로 타살 혹은 총에 맞아 죽었고

서재필 등의 지휘아래 개화파 사관생도들은

도성 주변 집과 숲들에 불을 지르고

수구파 대신들을 처단하는 역활을 했습니다

 

정변에 성공한 개화파들은

새로운 조정을 만들겠다며

주변 사람들 및 외국 공사관들에 지지를 요청했고

다시 조정에 돌아와 논공행상을 해서

개화파 인사들을 조선 요직 및 고위직들에 앉힙니다

 

그러나 갑신정변으로 급진개화파들이 조정을 장악했음에도

조선 민중들은 급진개화파들이 일본과 손잡은 것을 알고서는

정변에 호응을 보이지 않았고

(아 ! 현명하신 한국 조상님들 ,,)

 

급진개화파들은 나름 새로운 조선을 만들려는 개혁의지를 보였지만

그들이 불린 이름처럼 너무 급진적으로 급하고 , 과격하게 했던 정변이었기에

급진 개화파들은 주변 사람들을 모두 적으로 돌리게 되었고

결국 갑신정변때 달아난 민씨세력들은

다시 청나라에 도움을 청해 청나라는 군대를 파견했고

고종 역시 급진개화파들에게 창덕궁으로 돌아갈 것을 주장해

환궁해버립니다

 

결국 급진개화파들은 김옥균의 주도아래

혁신 개혁안들을 발표했는데 (정강 14조)

그 내용에는 청에 대한 사대관계 폐지 ,

문벌과 양반제도 폐지 , 재정개혁 등이 있었습니다

 

급진개화파들이 당시

나름 신분제 폐지를 주장했다는 의미가 있으나

당시 조선 양반과 유생들의 반발을 받게 되었고

이미 정변 처음부터 일본 이외에 그 어떤 세력의 지지도 받지 못한

급진개화파였다 할 수 있기에

아무리 좋은 개혁안을 내놓아도 실행할 힘도 , 지원해주는 세력도

없었다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청군은 급진개화파를 몰아내려 창덕궁으로 출동했고

수많은 청군이 쏟아져 밀려오자

결국 위기를 느낀 김옥균 등은 도망쳤고

 

김옥균의 갑신정변 , 이 모든게 고작 3일만에 끝나버렸습니다

이에 갑신정변은 '삼일천하' 혹은 '김옥균의 삼일천하' 라고도 이야기 하는

사건이 되어버렸습니다

 

갑신정변이 3일만에 끝난 이후

급진개화파 세력들은 조선에서 다시는 힘을 못쓸 정도로 숙청되었고

그나마 남은 세력들은 독립운동을 한다거나 (서재필)

친일파로 전향해버렸고 (박영효)

갑신정변의 수뇌였던 김옥균은 일본으로 망명했고

일본정부의 보호를 받다가

청나라 정치인 이홍장에게 한중일 세나라가 힘을 합쳐

서구에 맞서자는 삼화주의를 설파하려 청나라에 건너갔는데

상하이 호텔에서 수구당이 보낸 자객 홍종우의 권총을 맞고

사망합니다

 

암살당하는 김옥균을 묘사한 그림

 

김옥균의 시신은 조선으로 송환되서

몸이 찢긴 후 목만 따로 효수해

 

'대역부도옥균 (大逆不道玉均 임금이나 나라에 큰 죄를 지어 도리에 크게 어긋난 김옥균)

 

이라 쓰인 천이 붙게 되었고

평소 김옥균을 지원했던

일제는 자국민들에게 유능한 개혁가 김옥균을 죽인 조선은 희망이 없고

우리가 조선을 개화시켜야 한다는 여론몰이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김옥균 역시 영민했지만

너무 일본을 믿었다는 점 (일본은 친일 조선관료가 나와서

자국 이익을 확대하려 김옥균을 밀어준 것도 있습니다)

, 조선 정서나 기존 세력들을 완전히 무시하거나 죽이는 등

과격한 방법을 사용했다는 점 등으로

조선 내부에서도 역적으로 취급된 인물이고

하여튼 김옥균은 친일파였지만 일찍 근대화된 일본을 동경했던 인물이라

그렇다고 매국노는 아닌 ,

현실을 모른 급진적인 몽상가 혹은 이상가였다 할 수 있고

당대에도 유능하다고 사람들이 인정은 했지만

덕이 없거나 모략이 없다는 등 역시 그에게는 너무 과격하거나

앞뒤 가리지 않고 내딛는 성품등이 스스로의 목을 졸랐다고 생각됩니다

(요즘말로는 똑똑한데 싸가지가 없는 ?)

 

하여튼 갑신정변으로

일본 공사관이 불탄 일본은 조선에 배상금을 지급하라 요구했고

조선은 일본이 갑신정변 주동자들을 지원했다며 교섭과 배상을 거부했지만

일본은 이에 7척의 군함과 2개 대대병력을 보내 무력시위를 했고

결국 굴복한 조선정부는

김홍집을 필두로 1885년 1월 9일 일본과 '한성조약' 을 체결해 배상합니다

 

또 일본은 1885년 4월 청의 이홍장과 일본 이토 히로부미는

조선에 대한 이권을 두고 '톈진 조약' 을 체결했고

톈진 조약 내용은

일단 청과 일본 양국은 조선에서 군대를 철수시키되

둘 중 한 나라가 조선에 군대를 보낼 경우

다른 나라도 군대를 보낼 수 있다는 내용으로 조약을 체결했습니다

 

하여튼 당시 일본도 워낙 전통적으로 오랫동안 조선을 간섭했던

청나라를 쉽게 밀어낼 수는 없었기에

야금야금 조선의 이권을 가져가는 것을 택한 것이고

일단 갑신정변 이후부터는 청나라가 조선에 대해

노골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고

 

이당시 고종은 일단 육영공원같은 근대식 학교 ,

제중원 등 근대식 병원 , 전신(통신) , 전기 등을 도입하며

나름 변화하는 시대에 맞추어 새로운 서구 , 근대식 문물들을 들여왔습니다

 

1886년 전화하는 고종의 상상도 , 당시 신하들은 고종의 전화를 받기전 절을 세번하고 전화를 받았다고 하는 우스꽝스러운 에피소드가 있고 고종의 전화는 한국인들이 존경하는 인물인 '백범 김구' 선생이 일본군을 죽인 혐의로 사형선고를 받자 고종이 전화로 김구를 사면하기도 해 역사를 바꾼 전화였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 출처 : 한국통신박물관

 

1887년 3월 6일 우리나라 최초로 경복궁에 들어온 전등에 불을 밝히는 모습의 '전기시등도' , 당시 전등은 경복궁 연못물을 끌어들여 증기로 발전해서 자주 꺼졌는데 이에 사람들은 전등을 '도깨비불' 혹은 '건달불' 이라 불렀습니다 , 조선에 전등이 민가에 보급됬을때 조선 사람들은 전깃불은 오랑캐의 것이니 그 아래에서는 제사를 지내면 안된다 생각하거나 노인들이 담뱃불을 붙이러 불빛이 나오는 전구를 빼고 소켓에 담배를 꽂았다는 등 고종시기에는 새로 들어온 서구문물을 희한해하거나 우스꽝스러운 에피소드가 많이 있습니다

 

<라봉봉>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노래 4절에는

 

'못 살겠다 홍경래 ~ 삼일천하 김옥균 ~

안중근은 애국 ! 이완용은 매국 !

역사는 흐른다 ~'

 

라 나올정도로

갑신정변은 '김옥균의 삼일천하' 로 불리게 됬고

그의 사후에도 급진 개화파의 세력들은

암살되거나 일제에 붙거나

독립운동을 하는 등 여러 세력으로 분파되었고

하여튼 단 3일만에 끝난 정변이었지만

한국 근현대사에서 크나큰 파편을 남긴 인물이었다 할 수 있습니다

 

일단 김옥균은 이완용처럼 일본에 나라를 팔려했던 인물은 아니었고

당시 조선 및 동양 지식인들은 서구열강들에 중국의 처참한 몰락을 보아

중화사상등은 무너져버린 상태였고

서구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강성해진 일본을 점차 아시아의 no.1 으로 인정하며

같은 아시아 국가인 일본이 서구열강의 침탈에서 지켜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 +

빠르게 발전하며 강대해진 일본에 대한 동경감 때문에

동경했던 상태여서 김옥균 역시 그러한 당시 일본을 동경했던

수많은 동양 지식인 중 한명이었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일본은 당대 일본이 아시아를 이끌고 지켜줄거란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있었던

수많은 아시아인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서구 열강들과 똑같이 아시아를 정복하려는 야심을 키우며

 

(사실 당시 일본 역시 서구열강에 먹히지 않으려 발버둥 치던 시기였고

그 결과 만만한 동양에서 깡패짓을 했음)

 

제국주의 국가의 길로 나아가고 있었던 시기고

오늘날로 치면 주변 사람들을 괴롭히는 '일진' 에 대한

막연한 기대감과 환상(쟤는 엄청 쎄겠쥐 ? 혹은 일진이 되고싶은 ,,) 을 가지는 '평범한 사람들' 의 상태가

당시 아시아(평범한 사람들) 인들의 상태였다 할 수 있고

역시 일본(일진)은 그런 기대에 부흥하는 것과 달리 자국의 이익에만 신경써가며

점차 제국주의 국가화되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그러한 상태에서 김옥균 역시 막연한 환상과 동경으로

일본을 너무 믿거나 급진적인 모습을 보이다

주변인들을 모두 적으로 돌리게 되었고

갑신정변(3일천하) 실패 후 조선에서 매장됬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는

조선에 '매우 급진적' 인 변화를 요구하고 있었고

그러한 거대한 시대의 물결과 흐름속에서

조선인들은 수많은 혼란과 사건들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됩니다

 

반응형

'어린이 한국역사 > 1집 First Story'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독립협회와 대한제국  (0) 2019.09.25
동학 농민 운동과 을미사변  (0) 2019.09.23
강화도 조약과 임오군란  (0) 2019.09.22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치  (0) 2019.09.22
강화도령 이원범  (0) 2019.09.20
Posted by 라봉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