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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적으로 경부고속도로 건설이라는 성과가 있었던

제 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67~1971) 을 성공적으로 해낸 박정희 정부였는데

이전까지 북한이 소련등 공산국가들의 적극적 지원으로 남한보다 잘살았다면

1969년부터는 대한민국(남한)이 1인당 GDP에서 북한을 추월하게 됬습니다

 

경제성장도 순조로웠지만 정경유착 , 소득양극화나 환경오염문제 등 여러 문제도 낳은

박정희 정부였고 이후 다음 대선시기가 다가오자

박정희는 같은 여당 내부의 반발(영원한 2인자 이미지의 '김종필' 중심 반발) 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정권을 잡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고

결국 3선이 가능하도록 헌법을 바꾸려 했고

야당 신민당(오늘날 더불어 민주당 , 민주당) 의 강력한 반발에 결국

민주공화당(오늘날 자유 한국당 , 자한당) 의원끼리 모여 기습적으로 날치기 통과시켰고

1969년 국민투표를 거쳐

65.1% 의 찬성률로 3선개헌(6차개헌) 이 통과됬습니다

 

삼선개헌 반대운동을 벌이는 사람들

 

대선이 다가오자

이전까지 무력한 야당에 불과했던 신민당(민주당) 에

새로운 인물들이 등장했는데

젊은 신인 정치인 김영삼과 김대중의 등장이었습니다

 

민주주의의 투사라 불리는 김대중(맨 왼쪽) 과 김영삼(맨 오른쪽) , 두 인물 모두 이후 대한민국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신민당에서 대선 출마를 선언할 당시 김영삼의원은 42세 , 김대중 의원은 45세였고

신민당 내부에서도 반감이 있었지만

젊은 40대 정치인들에 환호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이에 '40대 기수론(40대의 젊은 지도자가 나와야 한다는 의견)' 이 등장하게 됬는데

결국 전라도 출신의 뛰어난 정치인이었던 김대중이

신민당 대통령 후보로 공식 지명됬고 (한국 보수의 시초가 박정희면

한국 진보의 시초는 김대중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김대중에게 패배를 인정하고 지원을 약속하는 김영삼

 

젊은 김대중 후보는 박정희 대통령의 3선연임에 맞서 지방유세를 하며

파격적인 공약들을 내세웠고

 

박정희 , 김대중 후보의 유세

 

예비군 폐지 , 전쟁억제 , 노사공동위원회 설치 ,

남북사이 접촉시도 , 박정희 정부의 수출주도산업화를

수입대체산업화로 회귀할 것을 주장 (수출위주로 생산하는 것[수출주도]에서

수입에 의존하는 것을 국내에서 만들도록 이끄는 것[수입대체] 입니다)

 

등이었는데

특히 박정희가 만든 향토예비군(예비군) 제도는

당시 관제사업과 강제노역동원 등으로 물의를 많이 빚어 반발이 극심했고

또 박정희가 연임을 위해 공포분위기 형성의 일환으로 예비군을 갑자기 확대했다는 주장도

당시 많았기에 많은 환호를 받았고

김대중도 보통내기 인물은 아니었기에

오늘날 기준으로도 나름 선견지명 있는 정책 , 구상을 했던 인물이기도 하고

오늘날 봐도 예비군 문제는 저임금 동원 , 열악한 처우 및 방산비리 등으로

한국의 어려운 문제이기도 합니다

 

당시 대선 포스터를 바라보는 시민들

 

박정희는 쭉쭉 치고올라오는 김대중 후보의 위협에

이전 이승만의 부정선거같이 선거에 돈을 뿌리며 부정선거로 맞섰고

표 확보를 위해 정부가 뿌린 돈이 당시 국가예산의 1/7 이라 할 정도라 하니

이 역시 뭐라 할말이 없게 만드는 독재의 폐해이자 박정희의 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박정희는 당시 선거에서

 

<박정희>다시는 국민에게 표를 달라고 하지 않겠습니다

(더이상 출마하지 않겠다는 의미로 해석가능하지만,,)

 

라고 말했고

김대중은

 

<김대중>박정희가 이번에도 집권하면 총통제가 실시될 것입니다

 

라고 말했는데

두 한국현대사의 거인들의 발언은 모두 맞아떨어졌고

결국 박정희는 이 선거 이후

김재규의 총탄에 맞아 죽을때까지

대한민국의 종신 독재자가 됬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박정희 VS 김대중 구도의 7대 대선은

3.15 부정선거까지는 아닐지라도 상당히 불공평한 부정선거였고

그 와중에도 김대중 후보가 약진해 (그만큼 박정희에 대한 반감도 심했다는 의미)

박정희 53.19% , 김대중 45.25% 라는 근소한 차이로 박정희는 당선됩니다

 

7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선서하는 박정희 대통령

 

엄청난 돈을 뿌려도 표가 얼마 차이 안날정도라면

박정희의 반감이 상당했다는 것이고

당시에도

 

'(김대중이) 선거에서 이기고 개표에서 졌다'

 

라는 말이 유행처럼 나돌았습니다

 

단 김대중도 이 선거때 호남 소외론을 내세우며

지역감정을 부추겼고 이때부터

 

박정희의 고향 경상도 VS 김대중의 고향 전라도

 

구도의 영호남 지역감정이 시작되게 됬고

이로 인해 영호남 지역구 정치인들은

 

'개가 나와도 뽑아준다'

 

라는 말이 생길정도라

검증없는 후보들의 인맥정치가 활성화됬고

공무원들 역시 대통령의 정당에 따라

영남 , 호남지역 사람들이 승진에 차별받는 등

지역감정의 피해는 결국 영호남 출신 사람 ,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돌아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박정희가 3번째 집권에 성공하자

이후 제 3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72~1976) 이 시작되는데

이 시기즘부터는 점차 경제성장률도 떨어져갔지만

3차 경제 개발 5개년계획은 계속 진행되어

중화학 공업화를 추진하기 시작했고

 

1972년부터는 가발 , 옷 , 신발 판매 등 경공업 위주의 성장도 점차 한계를 보이기 시작해

박정희 정부는 중화학 공업 육성을 발표했고

대한민국은 이 시기부터

강철 , 기계 , 조선업 , 화학 등 선진국들이 독점해온 분야에 과감히 진출하게 됩니다

 

박정희의 명령을 받은 그의 비밀스러운 동지였던 박태준이

이전부터 건설을 시작한 포스코 제철(포항제철)은

일본에게서 받은 대일청구권 자금 등을 사업자금으로 투입하며

맨 땅에 헤딩하듯이 제철소를 만들려 했고

 

1970년 '민족고로' 인 포스코 포항제철소 착공식에서의 박태준(맨 왼쪽) 과 박정희(중간) 대통령

 

철강업은 경공업같이 단순조립이나 단순노동이 아닌

기술과 자본 , 지식등이 필요한 산업이었기에

당시 가난한 나라 대한민국에서는 어려움이 컸는데

 

박태준 회장은 건설 첫 삽을 뜰때

 

<박태준>이 돈은 우리 조상님들의 핏값(대일 청구권 자금으로 지은 제철소)이다. 

공사를 성공하지 못하면 우리 모두 다 우향우해서 저 포항 앞바다에 빠져 죽자

 

라 말하며 (우향우 정신이라고도 함) 비장한 각오로 제철소 건설을 시작했고

 

부실공사 현장이 발견되자 손수 다이너마이트를 가져와

폭파시킨 뒤 다시 짓게했다고 할 정도로

완벽하게 만들려 했습니다

 

결국 1973년부터 첫 쇳물이 나오기 시작했고

박정희와 박태준은 철은 산업의 쌀이라며

포항제철 건설시 박정희의 지원을 전폭적으로 받은 박태준은

제철보국 , 철을 만들어 나라에 보답한다는 신념으로

철 생산에 박차를 가했고

그의 완벽주의 정성답게 우수한 품질의 한국 철은

한국 인프라 건설 및 외국에 수출되었습니다

 

여러 이야기를 남긴 박태준 일화처럼

한국 경제발전사 이야기도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많은데

한국 기업가들도 처음에는

정경유착하며 국가의 지원을 받고 마구 돈을 벌어대는 재벌로 성장하다가

점차 사업보국 , 산업보국으로 사업 혹은 산업을 일으켜 나라의 은혜에 보답해야 된다는

마인드를 가지게 되었고

논란의 중심에 섰던 삼성 이병철 회장 역시

작업환경이 좋아야 능률도 오를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며

최상급의 환경을 갖춘 여공 기숙사를 만들라 지시하기도 했고

 

<이병철 발언>종업원의 생계 대책에 대해서 늘 경영자는 생각해야 한다. 

오늘날과 같은 극심한 인플레 상황에서는 월 10만원으로 생활하기가 어렵다. 

종업원들이 열심히 애사심을 가지고 정직하게 일하게 하는 방법은 

그들의 최저생활을 보장하는 것이다. 

그 다음 교육으로 그들을 가르쳐서 훌륭한 사원으로 만드는 것이다

 

대기업 집단으로 성장한 한국재벌들은

좋은 환경들을 만들며 여러 인재들이 모여들자

단순한 이익창출만이 아닌 직원교육에도 힘썼다는 훈훈한 이야기도 있습니다

 

단 한국경제는 일본경제를 많이 모방하며 발전했고

일본식 연공서열제 같은 수직적인 모습의 영향도 받아서인지

한국기업의 군대식 , 꼰대식 , 꼴통적 폐해도 점차 커졌고

특히나 박정희 정부시기부터 군대식 사회 , 군대식 기업문화가 강해져

한국 경제 , 이당시부터 이어진 대기업들은

오늘날까지 창의성면에서는 후진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오늘날 삼성이 한국경제를 이끌고 엄청나게 큰 규모의 기업이 됬다지만

정작 스티브잡스같은 정말 있어야 할 인물은

삼성에 입사하기 조차 어렵다 할 수 있고

 

또 스마트폰을 엄청나게 찍어내는 회사임에도

정작 자체 소프트웨어도 없고

이런 문제는 삼성뿐만 아니라

휴식과 노는것 등에 매우 인색하며

효율적인 것보다는 보여지기에 집중하느라

정장입고 넥타이 매기나

수직적 서열문화나 군대식 문화가 강한 한국에서

편히 대대로 놀고먹을 수 있는

좋은 소프트웨어 , 혁신 상품등이 나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이라 생각하며

 

국가의 비호속에 성장하다가

지구촌화와 세계화가 시작된 오늘날에 있어서

대한민국 대기업들 역시 창의적인 세계적 대기업들의 먹잇감이 될 수 있고

오늘날 대한민국 대기업들이 직면한 외면하기 어려운 현실이라 생각합니다)

 

또 1974년 오일쇼크가 발생해

원유도입값이 3배이상 폭등하자

한국 물가가 폭등했는데

 

오일쇼크

 

석유가 많이나던 중동지역은 석유자원을 무기화 하거나

자원 민족주의를 내세우며 세계사의 중요한 지역으로 떠오르게 됬고

 

당시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다른 방법도 생각한 불굴의 한국인들은

오일쇼크 , 석유값 폭등으로 중동에 돈(오일머니) 이 엄청나게 몰리자

과감하게 중동시장에 진출해 오일머니를 빨아먹으려 했고

 

대표적 기업으로는 역시 당시 한국 기업가를 대표하던 정주영 회장의 현대건설이

선두에 서서 중동에 진출해

타국 선진국 건설사의 반값 이하로 공사들을 따냈고

결과물 역시 선진국 건설사들과 차이가 없었기에

많은 공사를 맡게 되어 이때 벌어들인 오일머니는

오일쇼크로 위기에 빠진 대한민국 경제를 크게 도약시켜습니다

 

1976년 사우디 아라비아 주베일 항만 공사현장을 방문한 현대 정주영 회장 (맨 앞)

 

<라봉봉>하여튼 민주주의 무시로 점차 야당뿐만 아닌

김종필의 반발 등 내부적 반발도 생겨난 박정희였고

이후에도 부정한 방법으로 대통령에 당선되 점차 이승만이 간 길로 간 박정희였지만

그 와중에도 경제는 계속 발전했고 (그러면서 당시 국민들이 나름 박정희의 죄를 눈감아 준 면도 있음)

당시 한국의 창의적 인물이었던 정주영 회장의 활약이 눈부셨던 시기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이웃 등에 파독근로자 이외에도 중동건설에 참여한 근로자 출신 인물도 볼 수 있고

박정희의 하면된다 정신 같이 정주영의 '이봐 해봤어 ?' 정신은

상황을 위기로 보지 않고 끊임없이 생각해 기회를 찾으려 했던 불굴의 정신이자

현대 정주영 회장은 20세기 한국 기업가 정신을 대표하는 인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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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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