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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선개헌 후 부정선거를 통해 김대중 후보를 겨우 누르고

1971년부터 3번째 집권을 한 박정희 대통령은

떨어지는 경제성장률이나 신민당(민주당)의 김대중 , 김영삼이라는 인물들의 등장 등

점차 정치적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는데

 

당시 세계적으로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의

냉전이 점차 완화되는 평화무드가 돌자

 

1972년 2월 21일 미국 대통령 닉슨과 중국 주석 마오쩌둥의 역사적인 만남 , 냉전 완화 및 평화 기류가 흐른 당시 세계

 

박정희도 이에 발맞춰

1971년부터 이산가족 상봉을 위한 남북 적십자 회담을 가지고

1972년 7월 4일

대한민국 박정희와 북한 김일성은 역사적인 공동성명을 발표하는데

분단 이후 최초의 남북합의라는 '7.4 남북 공동성명' 으로서

7.4남북 공동성명에는 자주 , 평화 , 민족적 대단결이라는 평화통일 3대원칙이

들어가있고

남북이 자주적 통일을 해야한다는 것 ,

무력(군사력) 사용을 지양해야 한다는 것이 확립된

한국 현대사의 중요한 순간이며

박정희 정권때 이루어졌기에 이북에 강경한 대한민국 보수계 인사들 역시

부정하지 못하고 대한민국 진보계에서도 이 선언의 내용만은 인정한다고도 합니다

 

7.4 남북 공동성명을 발표하고 있는 이후락 중앙정보부장

 

1972년은 그렇게 좋은 평화의 해가 '될 뻔' 했는데

대한민국 박정희와 북한 김일성은 이 평화선언들을

앞으로 이어질 강력한 독재에 대한 밑밥깔기 및

정치적 정당성 및  자신의 권력기반 강화에 이용했고

 

1972년 10월 17일

야당의 강세에 정치적 위기를 느낀 정희팍은

결국 '한국식 민주주의 (더 정확히 말하면 박정희 마음대로 주의)' 라는 미명아래

'10월 유신' 을 일으켰는데

 

박정희는 7대 대선 승리 다음날 김대중을 겨우 이긴 이후 이렇게 말했습니다

 

<박정희>이것 봐. 

내가 그래도 그동안 잠자고 있던 국민이 일어서서 일하게 하는 세상을 만들고 

나라를 위해 열심히 기여했다고 생각을 하는데 , 

김대중씨가 뭐를 했다고 95만 표 차이밖에 안 나 ? 

 

내가 이름이 나도 김대중보다 더 났고 , 

선거비용을 써도 김대중보다 훨씬 더 많이 썼는데 말이야. 

행정력은 또 얼마나 사용했나. 

선거라는 게 민주주의를 위해 불가피한 것이긴 하지만 이게 큰일 날 수도 있어. 

 

다음엔 김대중이 될지도 몰라. 

선거를 하다 보면 앞날을 제대로 내다보고 건전하게 나라를 열어 갈 위인이 아닌 

엉뚱한 사람이 뽑힐 수 있어 

그럴 땐 조국 근대화라는 혁명 과업에 지장이 생길 수 있어. 

그러니 내 좀 특수한 것(유신독재)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어

 

-출처 김종필 증언록-

 

뭔가 '아나 내가 걔(김대중) 보다 못한게 뭐야 ?' 로 요약되는 느낌같고,,

아집에 빠진 당시 박정희 대통령 말투가 그의 딸인

박근혜 대통령과 비슷한 느낌도 있는데

박근혜 대통령도 정치인 및 대통령시절

'그애비에 그딸' 이라는 말을 자주 들었기에 부전여전 느낌도 나고

 

하여튼 위기감을 크게 느낀 박정희는

이전 5.16 군사정변때처럼 또다시 반헌법적 무력사용을 결심하는데

바로 10월 유신으로서

1972년 10월 , 박정희는 국회를 해산하고 모든 정치활동을 금지시켰고

(거의 판타지 소설에서나 있을 법한 일들이 대한민국사 초기에는 자주 일어났습니다)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모든 출판 , 언론활동을 검열하고

단체활동도 제한시켰고 (5.16이 쿠데타라면 10월 유신은 친위쿠데타격)

 

10월 유신을 보도한 당시 동아일보 1면
서울에 진주한 계엄군 (친위 쿠데타라 할 수 있는 10월 유신)

 

박정희는 제 3공화국 헌법을 폐기하고

대통령에게 초법적인 권한을 주는 유신헌법을 통과시켰고

1972년 12월 15일 장충체육관에서

2359명의 통일주체국민회의 의원(박정희가 뽑은 사람들) 에게

사실상 만장일치 표를 얻어 8대 대통령에 당선됬고

체육관에서 선거(사실상 박정희를 위한 환장의 축제) 가 진행됬기에

8대대선은 비꼬아 '체육관 선거' 라 불리게 됬습니다

 

어용단체로 이루어진 '체육관 선거'

 

8대 대통령이 된 박정희는 이전 5.16때처럼 다시금

모든 권력을 장악했고 이 시기부터 그가 죽을때까지의 시기를

'유신 독재' 시기 혹은 '유신시대' 라고 부릅니다

 

참고로 유신은 일본 근대화의 상징사건인 메이지유신(명치유신)의

그 유신과 한자가 같으며

박정희는 이전부터 일본제국 만주국군에 몸담은 친일전력도 있고

5.16 군사정변도 일본의 2.26 쿠데타 사건의 영향을 받은 것도 있고

유신도 메이지 유신의 영향을 받은게 많아

일본과 관련이 매우 깊은 인물인데

 

하여튼 유신 역시 메이지 유신처럼 조국근대화를 성공적으로 완수한다라는 의미로

지은 이름이기는 하지만

결국 독재의 허울뿐인 포장어일 뿐이었습니다

 

유신정권이 들어설때 북한 역시 발맞추어

주체사상을 확립하고 김일성 1인 영구독재체제를 만들었으며

결국 7.4 남북 공동성명은 남북 양 독재자들의

본격적인 독재시동 전 평화쇼였다고도 이야기 됩니다

 

1980년 완공된 북한의 주체사상 탑 , 유신과 주체 둘다 말은 좋은 말인데 ,,

 

제 3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72~1976) 도 이때 진행되어

중화학 공업등이 육성됬다는 이야기는 이 전 이야기에서 쓴 바가 있고

나름 경제는 성장했지만 물가도 고공행진 했다 하고

유신독재로 대한민국 국민들이 유신정권에 가지는 공포심 및 반발감은

엄청나게 커진 상태였고

 

그러다 1972년 10월 유신 이후

1973년 , 박정희의 개인 무력기관이라 할 수 있는

대한민국 중앙정보부는 유신 반대운동을 주도하던 정치인 김대중을

일본 도쿄 호텔앞에서 괴한 5명을 시켜 납치시켰고

 

괴한들은 오사카 혹은 고베쪽에서 김대중 옷을 작업복으로 갈아입히고

눈과 입을 포장용 테이프로 막은 후

다시 차에 태운 후 바닷가로 이르렀고

모터보트에 태워 항해 후

정박해 있던 중앙정보부 공작선 용금호에 김대중을 인계합니다

 

용금호에 있던 자들은 김대중에게 테이프와 붕대를 감고

몸에 수십 kg 돌을 매달고 수장시키려 했는데

 

용금호가 전속력으로 항해할때

김대중은 눈이 번쩍하는 불빛과 굉음을 느꼈고

선실에 있던 자들은 비행기다 하며 뛰쳐갔고

이는 미국이 박정희에게

 

'김대중을 죽이지 말라'

 

고 경고하며 보낸 비행기였고

(유력한 추측일 뿐 정확히는 누가 보낸 비행긴지 아직도 모른다 합니다)

 

결국 미국의 압력에

박정희는 김대중을 풀어주라 하고

김대중은 죽을 고비를 넘기다

겨우 부산항으로 추정되는 항구에 도착해 구급차에 태워지고

수면제를 먹고 잠들었고 이후 겨우 자택 근처로 풀려났습니다

 

<당시 김대중을 납치한 배의 선원>당신은 왜 해외에서 반국가적인 행동을 하고 다니는가 ?

 

<김대중>나는 박정희 정권을 반대한 것이지 국가를 반대한 적이 없다

 

<배의 선원>정부는 국가와 같다 (박정희 각하가 곧 국가라는 말)

 

납치사건 이후 언론과 인터뷰를 하는 김대중

 

하여튼 박정희는 이 사건을 처음부터 끝가지 부정했고

미국이 김대중을 살렸다는 이야기가 정설로 이야기 되고 있는데

미스터리의 '김대중 납치사건' 이 1973년 일어났고

이 사건은 한국인들 및 당사자 김대중에게도 큰 트라우마를 남긴 사건으로

김대중 전 대통령은 훗날 회고에서

 

<김대중>바닷물에 던져지기 직전, 이제 죽는구나 생각했어요. 

밧줄을 뜯을 수가 없나 손에 힘도 줘봤어요. 

그 때 갑자기 예수님이 옆에 서시더라고요. 

그래서 예수님 소매, 로브를 붙잡고 예수님 저를 살려주십시오 , 

제가 국민들에게 할 일도 많다고 기도했죠

 

라고 말했는데

김대중 대통령은 노벨평화상 수상 연설에도 세계 인사들 앞에서

예수님이 나타났다고 말할 정도로

예수님 목격설은

언변과 쇼맨십이 강했던 그의 성격상

서양 및 기독교계의 지지를 얻기위한

사실상 그의 거짓말이라 생각하지만

 

인간이 죽음의 공포를 느낄때 신이라는 절대자나 종교등에 의지하는 심리는

충분히 이해된다 생각하고

김대중 납치 사건이 한국도 아닌 일본에서 일어났다는 점은 엄청난 사건인데

슬슬 국내의 비판 뿐만 아니라

외국의 비판도 생겨나고 있었던 박정희 정부였고

독재자 이승만의 말년의 행보를 그대로 따라가던 박정희였습니다

(역사를 통해 배우지 못한 자의 모습)

 

그러다

1974년 8월 15일 광복절 기념행사에서 박정희 저격사건이 일어나는데

박정희 대통령이 경축사를 읽을 때

갑자기 청중석에서 문세광이라는 자가 쏜 총성이 울렸고

박정희는 연설대 뒤로 몸을 피해 무사했지만

뒤이어 문세광이 발사한 총탄 중 하나가

단상 옆에 앉아있던 영부인 육영수 여사에게 명중됬고

(이 사건을 육영수 저격 사건이라고 합니다)

 

육영수 저격사건 , 일본 정치계에 '도쿄 찌르기 사건' 이 큰 트라우마를 남겼다면 한국 정치계에는 '육영수 저격사건' 이 큰 트라우마를 남겼다 할 수 있습니다

 

문세광은 잡혔는데 그는 재일 한국인으로서 공산주의자였고

결국 체포되어 조사를 받고 사형을 선고받아 사망했고

점차 박수칠때 떠나지 못하고 아집과 욕심으로 가득차

야심차게 유신을 시행한 박정희 정권에도 또다시 빨간불이 켜지게 됬습니다

 

육영수 여사가 사망하자

박정희와 박정희 일가는 이 사건 이후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극단적인 행보를 보이게 됬고

엽색과 마약범죄 , 사이비종교 , 부정부패에 빠지게 됬습니다

 

겉으로는 근엄하고 딱딱해보인 남자 박정희도

내적으로는 아내 육영수에게 굉장히 의지했다 하고

문세광의 테러 이후부터는 마음이 극도로 약해져

여러 측근들에게 휘둘리게 됬다고도 하고

이후부터는 프랑스에서 유학중이던 육영수의 장녀 박근혜가

한국에 돌아와 어머니처럼 올림머리를 하고 다니며

박정희의 영부인(퍼스트레이디) 노릇을 하게 됬습니다

 

육영수 여사 사후 퍼스트레이디 역활을 했던 박근혜 (맨 오른쪽)

 

또 박정희는 육영수 여사 생전에도

여성편력으로 육영수 여사와 자주 부부싸움을 했다고도 하고

육영수 여사가 현장을 덮쳤다거나

손찌검으로 육영수 여사 얼굴에 멍이 들정도였다고도 하니 (에효)

 

박정희는 육영수 여사 생전부터 여러 풍문을 남기며

여러 엽색 문제가 있었던 인물이었고

육영수 여사 사후부터는 정신적으로도 더 피폐해지고

또 브레이크가 사라지다 싶이 해

더욱 엽색에 몰두했고

 

유명 여성 탤런트의 아파트에 드나들다

엘레베이터에 같이 탄 가정주부에게

경호원이 뒤돌아보지 마세요 ! 라 했다 한 사건 ,

탤런트 옆집 사는 B씨에게 남자 3~4명이 찾아와

입막음을 하라 협박했다는 사건 ,

 

궁정동 안가를 다녀간 연예인이 100명정도 되고

임신해서 낙태한 사람도 있다거나

웬만한 일류 연예인들은 박정희에게 다 불려갔다거나

점차 소박한 이전의 초심을 잃고 갈수록 봉건적 황제생활에 빠진 박정희였고 ,,

하여튼 제 친척중에 서울대 나오셔서

영화 '돈의 맛' 처럼 차 트렁크에 박정희 대통령이 마실 술나른 분도 계시고

당시 풍문도 그렇고

이외에도 많은데 워낙 문란하고 막장이라

죽을때도 여성들끼고 놀다 죽은 오명을 남긴 인물이고,,

박정희 빠돌이들이나 일간베스트 저장소같은 극렬 박정희 친애 사이트 등에서도

박정희 대통령이

 

'여대생(혹은 여성)이랑 술마시다 죽었다'

 

는 점은 부정과 의심의 여지가 없는 박정희의 죄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박정희가 암살된 사건인 10.26 사건을 수사할때도

수사국장은 박정희의 여자관계가 지나칠 정도로 난잡해

결국 대상이 너무 광범위해 중간에 그만두고 말았다고 합니다

 

<라봉봉>대배우 찰리 채플린은 '위대한 독재자' 라는 영화에서

유명한 연설을 했는데

 

'훌륭한 세계를 건설하기 위하여 싸웁시다 ,

짐승같은 무리들도 이것들을 약속하며 권력을 키웠지만

그들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으며 ,

앞으로도 절대 지켜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자유롭게 하면서

민중은 노예로 전락시켰습니다

이제는 그들이 했던 그 약속을 이행하기 위해 싸웁시다'

 

라고 하는 명장면이 있는데

원래 당시 히틀러를 까기 위해서 많은 영화였지만

사실 박정희 역시 히틀러가 쓴 나의투쟁에 큰 영향을 받았다는 설도 있고

 

박정희가 10.26 사건으로 죽지 않았으면

한국 경제는 더 발전했을 것이다라는 이야기도 있지만

반면으로는 더욱 독재가 심화되 히틀러의 길을 걸었을 지도 모르는 인물입니다,,

 

박정희 역시 경제성장을 미끼로 국민들을 현혹시켰고

실제 경제성과를 낸 유능한 모습도 보였지만

독재자의 말이 지켜지겠냐는 위대한 독재자라는 영화속 말처럼

독재자라는 한계를 보여준 인물이기도 하고

주변 측근들이 인정할 정도로 사생활이 워낙 문란하고 더러운 인물이기도 했고

총칼로 정권을 잡은 인물로서 권력으로 위협하는 대통령의 말을 거역하기도 어렵기에

가히 권력형 성범죄의 끝판왕이었다 할 수 있습니다

 

당시 육영수 여사는 나름 국민적 호감이 큰 인물이었고

박정희가 욕을 먹어도 육영수의 좋은 , '국모' 같은 이미지는

박정희의 비판을 중화시키는 역활도 했다 할 수 있는데

박정희는 육영수 생전에도 나쁜 남편이었으며

사후부터는 더욱 심각한 인물이었고

 

하여튼 박근혜도 어머니 사후부터

사이비 종교 수장 최태민에 깊게 의지한 사건은

훗날 그녀가 대통령이 된 이후 탄핵의 원인이 되기도 했으며

(박근혜-최순실[최태민 딸] 게이트 등은 정론적으로 팩트라고 하나

단 최근 사건이라 함부로 단정짓기보다는 조심스러운 입장을 가져야 한다 생각합니다)

 

하여튼 그가 뿌린 불행의 씨앗들은 그 뿐만 아닌

그의 주변사람 , 가족들까지 고통스럽게 했다고도 할 수 있고

박정희는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점차 공포와 두려움의 대상이 됬으며

유신독재의 폐해는 참으로 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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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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