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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저 호황과 3S 정책>

[경제 대통령 김재익]

[3저 호황]

[3S 정책]

<라봉봉>

 

[경제 대통령 김재익]

전두환 신군부 정부는

이전 박정희 군부 정부의 후예로서

박정희 정부 시기 경제발전 정책을 계승했습니다

 

80년대는 이전 박정희 정부때 육성된 중화학공업들이 결실을 맺으며

한국 경제성장을 이끌었고

이외에도 전두환은 자신의 무식함을 인정하는 대신

능력있는 경제관료를 뽑아 믿고 맡겼는데

(사실 이렇게 좋은 사람을 뽑는 것을 무식하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바로 전두환 정부시기 경제 대통령이라 불렸던

김재익입니다

 

경제관료 김재익

 

김재익은 이전부터 경제계에서 유능한 인물로 인정받았고

전두환이 12.12 사태로 정권을 잡은 뒤 김재익은 전두환에게 발탁되어

전두환의 경제 과외 선생을 했습니다

 

전두환에게 매우 쉽게 설명하며 경제를 매우 잘 가르친 김재익의 능력에

전두환은 감탄하며 김재익에게 청와대 경제수석을 맡아달라 부탁했는데

김재익은 허수아비 자리가 아닌 실제 국정 경제업무에 뛰어들고 싶었고

전두환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김재익>각하 , 제가 제안하는 경제정책은 국민들에게 인기가 없을 것입니다.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

 

<전두환>여러 말 할거 없어. 경제는 당신이 대통령이야 !

 

(역사에서는

인기가 없으면서도 좋은 정책이 있고 ,

인기가 있으면서 나쁜 정책도 있고 [포퓰리즘] 다양한 정책들이 있습니다)

 

전두환은 이전부터 공부를 잘하지는 못했지만

싸움킹에 체력이 강인했고 넉살이 좋아 주변 사람들을

자기 사람으로 만드는 능력이 탁월했다 하고

이러한 모습들은 무리에서 그가 두목이 되기 매우 유리했다고 합니다

 

전두환 공식 초상화 (80년대의 상징 잠자리안경)

 

또 의외로 경제에 대해서 엄청난 능력이 있었다 하는데

어린시절부터 가난했던 전두환은

돈에 대해 집착이 강했던 인물로 보이는데

돈많은 친구들과 어울리며 돈의 위력을 맛보았고

쉽게 사람의 마음을 사는 돈의 힘을 사용하며

그 힘으로 더 큰 돈과 권력을 증식시켰다고 합니다

 

(이런 유형 사람들을 저도 사회에서 여럿 본거 같은데

뒤에서 욕먹는 경우들도 있고

저는 이런 사람들과 항상 선을 두었고 어딘가 찝찝함이 있습니다)

 

이로 인해 그는 군인 시절도

군내 사조직 하나회를 이끌며

인맥 , 돈의 힘을 활용하는 엄청난 정치군인 모습이 강했고

그의 넉살과 뛰어난 사교성으로 그의 주변 사람들과 맺어진 관계들의 뒷면에는

경제 공동체적 모습이 있다고 합니다

 

군인시절 전두환 사진중 크게 회자된 사진 , 대령임에도 장군들 뒤에서 팔장끼고 쩍벌다리를 하고 있습니다

 

장기적으로 본다면 돈에 대한 집착은 파멸을 불러온다고 생각하지만

하여튼 1980년대 일시적일 지언정 대한민국에 큰 경제 발전이 있었던 것은

결코 우연만은 아니었고 실제 전두환도 경제 능력은

꽤나(단 돈에 집착하느라 많은 것을 파괴하며 산 인물이라

매우 뛰어나다고는 차마 못하겠습니다) 있었던 인물이라 생각됩니다

 

[3저 호황]

하여튼 전두환 정부시기 경제가 크게 성장했는데

이 시기 3저호황으로 한국 경제는 큰 순풍을 타게됩니다

 

높았던 80년대 경제성장률

 

3저 호황이란 저환율 , 저유가 , 저금리를 말하는데

 

먼저 '저환율' 이야기를 하면

1980년대 이전부터 고속 경제성장을 겪은 일본은 점차

제조업 최강국이 되며 세계 시장을 일본산 제품들로 점령해가며

세계 곳곳에 잽머니(일본 돈) 를 뿌리고 있었고

이에 '돈에 미친놈들' 이라는 의미를 가진

'이코노믹 애니멀 (경제 짐승)' 이라 조롱받기도 했습니다

(근데 웃긴건 요즘 중국도 그렇고 한국도 IMF 전

까불다거나 졸부노릇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미국 다음으로 세계 2위의 엄청난 규모의 경제대국이 된 일본은

미국에 대한 엄청난 무역흑자를 바탕으로

미국 땅들을 사거나 부동산을 사들이며

미국인들에게 엄청난 위기의식을 가져다 주었고

2차 진주만 공습이라고 여기거나

앞으로 세계 경제를 일본이 장악할 것이라는 공포와

엄청난 반일감정을 일으키게 됩니다

 

당시 일본인이 구매한 뉴욕 맨하튼에 있는 미국인들의 자존심 '록펠러 센터' , 미국인들에게 있어 특히 상징성이 컸던 건물이라 이게 일본에 팔릴때 많은 미국인들이 착잡하게 여겼다 합니다

 

미국 제조기업과 농민들도 강한 보호무역을 하던지

다른 대책을 내놓던지 하라고 미 정부를 강하게 압박하고 있었고

이를 버티기 어려웠던 미국 레이건 대통령은 결국

1985년 뉴욕 플라자 호텔에서

'플라자 합의' 를 해서

일본과 독일에게 일본과 독일 돈의 가치를 높이라 요구했고

달러를 하락시켜 미국 제조업체들에게 가격 경쟁력을 회복하게 합니다

 

미국의 2차 참교육 '플라자 합의' , 일본의 '잃어버린 시대' 의 신호탄

 

달러가 하락하는데 왜 미국의 상황이 좋아지는 것이냐면

달러와 한국돈 원으로 비유하자면

미국산 1달러짜리 초콜렛을 원래 1000원에 샀다고 치면

달러 가치가 하락해 1달러가 500원이 될 경우

한국인들은 미국산 초콜렛을 고작 500원에 사먹을 수 가 있는 것입니다

한국인들에게

한국산 초콜렛이 1000원이고 미국산 초콜렛이 1000원이어서 그 전까지는

걍 적당히 비슷비슷한 가격으로 골라 먹었다면

미국산 초콜렛이 500원이라는 가격으로 급하게 떨어져버리면

한국 시장에서 미국산 초콜렛 구매 확률이 더욱 높아지는 것이라 할 수 있고

오늘날에도 세계 사회는 이런 환율에 대해 민감하고

환율전쟁을 '소리없는 공포의 전쟁' 이라고도 부른다고 합니다

 

사실 독일이나 일본은 이전부터 뛰어난 기술력을 가진 나라로서

세계 2차대전 시기 미국에게 한번 개기다가 참교육을 당한 적이 있었고

전쟁이 끝난 이후 미국은 양나라의 공산화를 막기위해

경제를 많이 키워준 모습이 있는데

다시금 1980년대들어서 미국을 경제적으로 위협하게 되자

미국은 이 플라자 호텔에서 열린 '플라자 합의' 를 통해

일본 엔화 등의 가치를 높여버렸고

한국은 이때 일본 엔화 가치가 상승하자

상대적으로 싼 원화가격으로 세계 시장에서 일본산 제품들과

경쟁하는데 유리해졌고 이에

'저환율' 이익이 나타났습니다

 

이번엔 저유가로

이전 석유파동등으로 유가가 폭등해 한국 물가가 엄청나게 치솟기도 했지만

1980년대 중반부터는 유가가 떨어지며 한국 경제에 호재로 작용하는

'저유가' 이익이 나타났습니다

 

마지막으로 이번에는 저금리로

한국경제는 경제발전을 하려 외국에 차관을 크게 도입해

외국에 진 빛이 막대해 국민들은 빚쟁이들과 이자걱정에 시달렸는데

국제금리가 하락하며 이자부담을 어느정도 잊을 수 있었다고 하는

'저금리' 이익이 나타났습니다

 

이렇게 3저호황(저환율 , 저유가 , 저금리) 로

한국경제는 연평균 8%이상의 높은성장 및 물가안정 , 낮은 실업률을 기록하며

고성장 , 저물가 , 저실업이라는 유토피아적 시대를 맞이하게 됩니다

 

당시 한국인들은 호황을 즐기며 더 빛나는 미래를 꿈꾸고 있었고

대학만 졸업하면 기업에서 모셔간다는 것은 과장된 말이 아니었고

 

(단 기업의 문어발식 과잉투자때문도 있고

너무 80년대를 미화해서도 안되는게

요즘 청년들 사이에서 나오는 말인 80년대 사람들이

개꿀빨고 요즘 사람들은 고생한다는 논리가 사실 말이 안되는게

80년대 사람들이 '개꿀' 을 정말 빨았으면 당연히 자식세대인

요즘 청년들도 넉넉히 살아야 하는게 정상인데

일단 빨던 그놈의 개꿀도 IMF 때 분해됬고

당시 고속 경제성장에도 어두운 일면등이 있었고

마치 모래위에 쌓은 성처럼 두려움속 호황을 즐기던 시기이기도 합니다)

 

무려 국민 90% 가 자신들을 중산층이라 생각했을 정도로

꿈과 행복의 시기이기도 합니다

 

[3S 정책]

이러한 경제성장은

국민들에게 반신군부적 감정을 일시적으로 줄여낼 수 있었고

전두환 정부는 한 술 더떠서

국민들의 관심에서 정치를 떨어트리고

국민들의 민주화 열기를 누르기 위해

국민들의 눈을 문화로 돌리려 했는데

(옛날부터 독재자들이 우민화[국민 바보화] 정책으로 주로 사용한 빵과 서커스와 비슷)

 

독재자들의 빵과 서커스의 상징인 로마의 '콜로세움' , 로마에서는 시민권을 가진 자들에 한정해 매달 한달치 분량의 빵과 콜로세움 경기 티켓을 줬고 로마인들도 이런 우민화 정책에 놀아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로마가 망해가던 시기였습니다

 

전두환 정부때부터 3S 정책이 시작됩니다

3S 정책은 스크린 (Screen) , 스포츠 (Sports) , 섹스 (Sex)

의 앞글자를 딴 것으로

 

전두환 집권대부터 컬러방송이 시행되었고

두발자유화 , 교복 폐지 등 획기적인 조치들도 여럿 시행됬고

 

(저도 헤어스타일이나 의복을 강제하는 것을 싫어하는데

다시 두발제한 , 교복을 입어야하는 오늘날 학생들을 보면

어찌 요즘이 더 퇴보하는 느낌입니다)

 

80년대 여고생들의 추억 이야기로 향수를 불러 일으킨 영화 '써니 (2011)' , 써니 영화속 여학생들은 모두 교복을 안입고 있습니다

 

박정희 정부시기 엄격한 정책으로 피로가 컸던

국민의 불만을 누르거나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여러 제한들이 풀리기 시작했고

여러 문화 진흥정책 혹은 우민화 정책이 시작됩니다

 

다시 3S 정책에 대해 이야기해보면

먼저 스크린 (Screen) 으로

영화 상영 규제 검열이 정치적 검열을 제외하고는

과거보다 더 완화됬고 이에따라 여러 만화영화들도 나왔고

 

한국 만화 전성기였던 80년대 나온 '아기공룡 둘리' , 이외에도 '달려라 하니' 도 유명합니다 (재밌는건 모두 박근혜 전 대통령이 이사장 자리로 있던 보물섬 잡지 출신입니다)

 

무분별한 저예산 에로영화가 영화관에서 집중적으로 늘어나게 됩니다

가장 유명한 것은 애마부인(1982) 이라는 작품으로

1980년대 에로영화 및 3S 정책을 대표하는 영화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애마부인 포스터 , 직접적인 노출은 없고 저도 본적은 없지만 한눈에 봐도 엄청나게 야한 영화라는 느낌이 옵니다

 

단 웃긴이야기 한개는 (물론 당시는 안웃겼음)

전두환의 컴플렉스였던 대머리나

전두환의 영부인 이순자의 컴플렉스였던 주걱턱 등 때문에

대머리나 주걱턱이 개그소재로 삼아지는 것은 금지됬다 하며

당시 흔한 이름이었던 순자라는 이름이 비천한 역활을 맡으면 안된다거나

박용식이라는 배우는 전두환을 닮았다는 이유만으로 방송 출연이 금지 되었고

 

전두환을 닮아 출연이 금지됬던 고 박용식 배우

 

(단 박용식 배우 출연금지는 전두환도 몰랐다고 이후 직접 사과했다는데

일단 이걸 빼더라도 공포 분위기속에 방송인들도 그냥 자체검열을 하거나

과잉충성을 하거나 알아서 기던 시기였습니다)

 

치졸한 모습이 있는 전두환 정권이기도 했습니다

 

이번엔 스포츠 (Sports) 로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은 제 5공화국의 정당성을 세계에 알리려

1981년 엄청난 로비와 노력 끝에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유치하는데 성공했고

 

1981년 IOC 총회에서 개최지로 '쎄울 코리아 !' 가 발표되자 환호하는 한국측 대표단 및 현대 정주영 회장 (왼쪽)

 

'세계 행사인 서울 올림픽을 위해 국민들의 힘을 하나로 모아야 할 시기에

국가를 혼란스럽게 한다'

 

는 논리로 민주화 , 반독재 운동가들을 가혹하게 탄압합니다

 

1985년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물고문과 전기고문을 당한 민주화 운동가 '김근태'

 

일단 전두환은 본인부터가 스포츠를 되게 좋아했는데

이에 전두환 정부 시기 여러 프로리그가 개최됬고

 

1982년 한국에서는 프로야구가 , 1983년에는 프로축구 , 농구대잔치 등

여러 프로스포츠가 시작됬고

당시 한국에서 가장 대표적이고 인기를 끌었던 프로스포츠는 뭐니뭐니해도

'야구' 입니다

이에 전두환은 요즘 젊은이들에게

5.18 광주 민주화운동을 탱크로 무자비하게 진압한것 때문에

'전땅크(전탱크)' 라고도 불리지만

한국 프로야구의 아버지라는 뜻의 '야버지(야구의 아버지)' 라고도 불리고 있고

 

프로야구 창설때 시구하는 전두환

 

전두환 본인도 운동을 즐긴 인물이라

이에 3S 정책중에서 적어도 스포츠만은 나름 순수한 면이 있다고도 생각되고

3S 중에서 스포츠 비중이 가장컸는데 또 아이러니하게도 스포츠로 인해

전두환 독재정권이 몰락하게 됩니다

 

서울 올림픽이라는 세계대회 유치 명분으로 국민들을 탄압한 전두환 대통령은

점점 서울 올림픽 기간이 다가오자 세계 사회의 눈치를 볼 수 밖에 없었고

민주화 운동 , 시위대에게 유혈 진압을 하려했지만

진짜 유혈진압을 해버리면 올림픽 개최가 취소될 가능성이 있어

올림픽 개최지 대한민국에 대한 세계 사회의 훈훈한 관심속에

결국 전두환은 올림픽만큼은 어떻게든 개최하려 하려 유혈진압을 포기하게 되

1988년 서울 올림픽때문에

결국 1987년 민주화를 인정하는 6.29 선언이 발표된 것도 있습니다

 

가히 세계인의 축제 , 평화와 아마추어 정신으로 만들어진 올림픽이

독재자의 무릎을 꿇게했다 생각되고 (쿠베르탱 1승)

 

이번엔 3S 정책의 마지막인

섹스 (Sex) 입니다

1945년부터 한국에는 치안 유지 목적으로

'야간 통행금지' 가 있어 20시에서 새벽 5시까지 , 이후에는

22시부터 새벽 4시까지하다가

통상적으로 1961년부터 1982년까지

0시부터 새벽 4시까지 야간통행금지 (통금) 시간이 있었고

자정이 되면 사이렌 소리가 울렸다고 합니다

 

야간 통행금지 시기 도시검문

 

당시에는 나이 불문 전 연령층이 통금대상이었기에

밤중에 돌아다닐 수 가 없었고

이를 어기면 곧바로 거동 수상자로 체포되 파출소에서 조사를 받고

다음날 훈방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반성하는 모습이나 사정이 있다면 봐주기도 했고 중범죄라고 여기지는 않았지만

국민의 자유가 침해되는 것이었고

1982년부터는 3S 정책의 일환으로 전두환 정부에 의해 역사 속으로 사라져

사람들이 새벽 1시에 길거리에 나와 만세를 불렀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야간 통행금지가 폐지되자

여러 성관련 산업이 급속히 늘어났고

술집 , 모텔 , 유흥업소 , 성매매 업소 들이 엄청나게 늘어납니다

유흥가가 팽창하자 역시 창녀와 뺄래야 뺄 수 없는 ,,

조폭들도 엄청나게 성장했고

전국 3대 조직 OB 동재파(이동재) , 양은이파(조양은) , 서방파(김태촌) 들이 생겨납니다

 

이렇게 스크린 (Screen) , 스포츠 (Sports) , 섹스 (Sex) 산업인

3S 산업이 시작됬고

의도는 12.12 사태로 인한 집권으로 정통성 없는 전두환 정부의 약점을 감추고

국민들의 정치에 대한 관심 돌리기 , 민주주의 탄압이었지만

나름 그전까지 있어왔던 비상식적인 제한조치들이 해제되기도 했고

3S 산업에 대한 옹호론도 소수 있어

오늘날 대한민국 대중산업 기초가 이당시부터 만들어졌다고도 하고

특히 프로 스포츠 , 프로야구는

이시기부터 오늘날까지 성장한 산업중 하나라 이야기합니다

 

<라봉봉>보통 표면적으로

 

'1980년대 전두환 정부시기

3저호황으로 경제가 성장하고 민주화를 요구하는 국민의 눈을 돌리기 위해

3S 정책이 펼쳐졌다'

 

이런 이야기가 나오지만

나름 더 깊게보면 당시에도 한국경제는 오랬동안 외화를 끌어와 경제발전을 해

취약한 구조였다는 점이나 전두환에 대한 깊은 이야기 등

여러 흥미로운 부분도 많습니다

 

당대 3S 정책으로 문화발전이 됬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80년대가 겉으로 보기에 70년대보다 화려해졌음에도

그때에도 노동문제 , 정치문제는 철저히 스크린에서 검열 , 제재됬고

이러한 사회문제 , 현실을 망각한 예술은 저는 예술이 아니라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저는 예술을 위한 예술 (예술지상주의) , 근본없는 것들을 혐오하고

이 시기 3S 정책을 보면 상당히 음란한 느낌이 강해

오늘날에도 그렇게 살아가는 예술가 놀음에 빠진 자들이 생각나

불편한 느낌도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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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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