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유럽의 크리스트교 문화>
[성상 파괴 운동]
[동서 교회 대분열]
[수도원 개혁 운동]
[카노사의 굴욕]
[보름스 협약]
[중세 서유럽 크리스트교 문화]
<라봉봉>
[성상 파괴 운동]
프랑크 왕국은 서유럽 세계에서 ,
동로마 제국은 동유럽 세계에서 각각 이슬람 제국을 격퇴해
유럽 기독교 세계의 수호자가 되었고
특히 사방이 이민족들에게 둘러쌓인
로마의 정통 후예이자 마지막 라틴 제국이었던 동로마 제국은
이런 이민족들을 방어하며
동유럽 , 기독교 세계의 방파제 역활을 톡톡히 했고
이슬람 제국의 대규모 침공을 막아냅니다
여기까진 좋았지만
하지만 이슬람 세계를 막아내고 한숨 돌린 동로마 황제
레온 3세는 국내 문제에 집중하게 되는데
동방교회의 성상공경을 문제하며
726년 '성상파괴령(성상 파괴운동)' 을 내립니다
모세의 십계명에는 이러한 이야기들이 써있는데 ..
<십계명 중에서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 그것들을 섬기지 마라.
줄이면
'우상을 숭배하지 말라'
이고
이에 레온 황제는
대중들 앞에서 십계명에 반하는
성상 숭배자들의 지나친 행동을 지적하며
성상파괴작업을 시행합니다
성상이란 초기 기독교 시절은 박해와 우상숭배 금지때문에
비둘기 , 물고기 , 닻 , 배 , 태양 등의 상징적 표현을 사용했고
이후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기독교를 공인할때부터
성서를 읽을 수 없는 자들을 위한
교리교육 수단으로 여러 성미술 작품가운데
예수나 성모 마리아 , 성인들의 모습을 그리거나 조각하기 시작했고
이후 서유럽은 무식한 게르만족들이 대이동하며 점거하자
서방 교회는 글읽을 줄 모르는 게르만 양놈들을 교화시키려
성상을 적극적으로 사용합니다
반면 이슬람제국과 근접해있었던 동로마는 이슬람교의 영향을 받아
성상파괴운동이 발생했고 (이슬람교는 우상숭배를 극단적으로 배격해
오늘날에도 이슬람교 창시자 무함마드[마호메트] 얼굴 묘사를 금지하는거도 있고
아예 인간 모습과 닮은 인형같은거도 가지면 안됩니다)
이는 이슬람교와 밀접한
제국 동부를 이슬람 제국에 맞서 효율적으로 통치하려 했던
동로마 황제들의 입장과도 엮여 대규모 성상파괴운동이 벌어집니다
동로마 황제들의 성상파괴주의는
포교의 수단으로 성상을 적극 사용한 로마 교황의 반발을 사서
동서교회 갈등을 유발했고
결국 1054년 동서교회 대분열의 시초가 됩니다
[동서 교회 대분열]
결국 1054년
빡돈 로마 교황과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는
서로를 파문 (신도 자격에서 쫓아냄) 해버렸고
유럽 기독교세계는
로마 교황중심의 로마 가톨릭교와
동로마 황제 중심의 그리스 정교회로 분리됩니다
당시 그리스 정교회와 오랫동안 로마 교회와 다른 길을 갔기에
문화적 차이도 컸는데
그리스 정교회는 로마 교황의 우선적 지위를 인정하지 않았고
성직자와 평신도간의 역활구분이나 상명하복적 위계질서가 없다싶이한
그리스 정교회와 달리 그런 구분이 엄격한 로마 가톨릭은 갈등을 빚었고
또 그리스 정교회가 프리한 면이 많아 결혼한 성직자에 대해서도
로마 가톨릭보다 관대한 편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정치적 요인이 가장 컸는데
동로마 제국 황제는 정교일치(제정일치) 사회의 수장으로서
교회에 대한 통제권을 지니고 있었기에
로마 교회에 대해서도 계속해서 간섭과 감독을 시도했고
이에 빡돈 로마 교회는 자신의 독립적 지위를 인정해주는
프랑크 왕국과 손잡고 동방 교회와 선을 긋게 됩니다
오늘날에는 그리스와 로마를 엮어 부르지만
애초에 사회·문화적으로 뿌리나 근본이 다른 그리스와 로마의 사회였고
똑같은 기독교가 들어왔어도 결국 서유럽 , 로마사회와
동유럽 , 헬레니즘 사회는 각기 다른 길을 걷게 된 것입니다
(동양으로치면 동북아시아에서 유행한 대승불교와
동남아시아에서 유행한 소승불교의 차이와 비슷하고
하여튼 유럽에서는 그럼에도 결국 최후의 승자는 '기독교'라 이야기됩니다)
구약성서의 내용에는
신바빌로니아 제국 이후 세 제국이 차례로 들어선 후
종말이 올것이라 써있었는데
당시 서양 기독교인들은 이 세 제국을
페르시아 , 헬레니즘 제국 , 로마제국으로 봤고
마땅히 로마제국이 세계 마지막 제국이라 생각했고
로마제국이 기독교 수호자가 된 이후로
로마제국은 기독교인들에게 세상 마지막 제국이라 여겨졌습니다
그런데 동로마에서 성상파괴령이 내려진 후
서양에서 신성로마제국이라는 새로운 로마제국이 탄생해
기독교인들 세계관은 돌이킬 수 없는 파괴를 겪었습니다
하여튼 성상숭배령은 이렇게
단순한 종교적 , 성상파괴 명령이 아닌
오랫동안 있어왔던 동서교회의 분쟁과 문화적 차이가 폭발한 사건이었고
단순 종교적 문제라기보다 정치 , 사회적 문제가 크기도 했습니다
[수도원 개혁 운동]
이번엔 서유럽 교회 이야기로 넘어가서 ..
10세기 초반 프랑스 클뤼니 수도원에서
기독교 , 수도원 개혁운동이 일어났는데
10~11세기는 클뤼니 뿐만 아닌 여러 서유럽 각지에서
수도원 개혁운동이 일어납니다
수도원 개혁운동으로
교회의 세속화(세상의 일반적인 풍속에 물들어가는 것 , 신성화의 반대개념으로
세속적인게 무조건적으로 나쁘다 보기는 어려울지언정
권력자에 입맛에 맞추거나 종교적 가치에 어긋나 돈과 권력만 추구하는 것에
대해 세속화됬다 이야기 됩니다) 를 바로잡았고
수도원 개혁운동에 앞장선 클뤼니파는
성직의 매매 금지 등 교회의 세속 , 퇴폐 현상을 바로잡으려 합니다
[카노사의 굴욕]
서유럽 교회는 동유럽 교회(동로마 제국) 와 달리
교황과 황제의 정교분리가 되있었고
이에 이후 교황과 서유럽 황제의 갈등이 빚어졌는데
가장 대표적인 사건이 '카노사의 굴욕(1077년)' 입니다
먼저 성직자 임명권을 둘러싸고
교황 그레고리오 7세는 원래 황제에게 있었던
성직자 임명권을 교황이 행사한다 주장했고
이에 신성로마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가 이를 거부하자
그레고리오 7세는 하인리히를 파문시켜 버립니다
원래 서임권(성직자 임명권) 은 프랑크 왕국시절부터
왕이 보유했지만
1073년 교황이 된 그레고리오 7세는
클뤼니 수도원 출신으로서
원칙주의와 교회의 개혁을 주장했고
하인리히 4세가 반란으로 내전을 겪는 상황을 이용해
성직자 서임권은 황제가 아닌 교황이 가지고 있다 주장합니다
처음 내전중의 황제는 이런것에 신경쓸 겨를이 없어 가만히 있다
내전 종결후 교황의 주장을 씹고 밀라노 주교선출을 자신이 주도했고
이에 빡돈 교황 그레고리오 7세가 반발해 1076년 황제를 파문에 처합니다
교황이 내린 결정은 단순한 기독교계에서 인정을 안하는게 아니라
하인리히가 이제 기독교 왕국의 왕이 아님을 선언한 것이었고
서유럽세계에서 기독교가 가지는 엄청난 권위를 생각하면
사실상 하인리히의 정치적 생명을 끝내버릴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물론 교황은 칼이없고
황제는 칼이 있기에
황제가 교황의 명령을 씹고 교황을 두둘겨 팰수도 있었지만
당시 독일 제후들은 하인리히 4세를 견제하려
서둘러 교황편을 들기 시작했고
제국 각지에서 교황의 파문을 구실로 황제에 반하는 반란이 일어납니다
하인리히 4세는 군사적 대응이 여의치 않다고 판단했고
제국내에 반란이 확산될 조짐을 보이자
우선 반란을 진압하려 교황과 일시적 화해를 결심했고
독일 남부에서 교황을 만나길 요청했지만
교황은 군사적 위협으로 생각해 거부합니다
이에 하인리히 4세는 친히 이탈리아로 내려갑니다
1076년 겨울 하인리히 4세가 이탈리아로 온다는 소식을 들은
교황 그레고리오 7세는 황제가 자신을 몰아내려 오는 것으로 생각하고
두려워하고 있었고
이에 교황의 가장 큰 후원자 카노사 백작은 교황에게
자신의 카노사 성으로 피신해 황제군을 방어하자 제의했고
이에 응한 교황은 일단 카노사 성으로 쨉니다(도망의 요즘말 ㅎ)
결국 교황을 보러
1077년 1월 25일 한겨울 카노사성에 다달은 황제 하인리히 4세는
누추한 옷으로 갈아입고 맨발로 카노사 성문앞에 섰고
그럼에도 교황은 황제와 만나기를 거부하지만
황제는 계속 무릎을 꿇고 기다렸고
결국 주위 성직자들이 계속해서 교황을 설득하자
교황은 3일후 성문을 열고 하인리히를 받아들이고
그의 파문을 취소합니다
이를 카노사의 굴욕 이라 부르고
황제가 교황에게 무릎을 꿇은 사건으로서
교황권이 절정에 이르렀고 황제권이 약했던 시대의
이야기로 이야기 되는 이야기인데
그럼에도 칼은 황제가 가지고 있었기에
실제로는 당시에도 그렇게 약한 황권도 아니었습니다
일단 교황과 일시적 타협을 해서
파문취소후 내란을 평정한 하인리히는 다시 빡돌아서
교황의 편을 들었던 인물을 제거했고
그레고리오 7세의 폐위를 선언하고
새 교황을 선출하고 이탈리아에 쳐들어가 로마를 함락시키고
그레고리오 7세를 성에 유폐시킵니다
하여튼 카노사의 굴욕은 황제(정치)와 교황(종교)이 대립하는 대표적 사건으로서
로마 가톨릭 교회나 독일에도 큰 충격을 준 사건이고
가톨릭 교회는 정의를 위해 했다 이야기 하고있고
독일에서는 난폭하고 억압적인 가톨릭 교회에 맞서싸웠다고
(카노사 굴욕 이후 황제의 보복) 이야기 되는
사건들입니다
[보름스 협약]
일단 카노사 굴욕 이후에도
교황권은 칼이 없음에도 이러한 종교와 정치적 권위는 있었기에
새로운 권력 , 정치적 주체로 떠올랐고 황제권은 실추되는데
결국
1122년 하인리히 5세와 교황 갈리스토 2세가
'보름스 협약' 을 맺어
성직자 서임권을 결국 가톨릭 교회에 양도하고
가톨릭 교회의 독립적 지위를 인정하게 됩니다
[중세 서유럽 크리스트교 문화]
중세 서유럽 기독교 문화로는
기독교 중심의 스콜라 철학이 발달했는데
그 대표로 토마스 아퀴나스는 기독교 신자들을 위한
백과사전같은 교리서적인 '신학대전' 이라는 책을 남깁니다
중세 서유럽 건축은 성당건축이 유명한데
뾰족한 탑과 아치 , 스테인드글라스(색유리 , 판유리 장식) 의
'고딕 양식' 의 건물이 유명하고
샤르트르 성당이나 퀼른 성당이 있습니다
<라봉봉>오늘날에도 서양 문화권에서는 기독교 , 가톨릭이 차지하는 비중이 참으로 크고
로마시대에 공인된 기독교는 점차 중세시대에 이르러 교리화 , 체계화되고 있었습니다
저도 어렸을때는 신이 어딨어 , 종교를 왜믿음 ㅋㅋ
이랬는데 20살때 외로움속에서 기독교를 믿게 되었고
기독교 사상이 상당히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사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를들면 그리스 로마신화의 다신교보다 기독교의 유일신 사상이 단순하고
또 인신공양 같은 생명경시도 없어
기독교나 불교등은 오늘날 보기에도 합리적 고등종교입니다)
그럼에도 단순한 보여주기식 종교나 교회를 꾸준히 다닌다는 것이
종교를 믿는다고 생각하지는 않고
서양은 철학의 본고장이자
역시 기독교 근원지답게
여러 합리적 의문 , 과학적 근거를 토대로 기독교를 연구한게 인상깊었고
오늘날 한국사회에서도 일제의 패망 이후
빠른속도로 기독교가 들어왔지만
한국인들은 단순히 큰 교회 , 신도 부풀리기 등
외형적인 면에만 집중하고 있다 생각하고
그것이 진정 하나님과 기독교 사상을 따르는 것이라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이제는 한국에도
이런 합리적 , 과학적인 서양식 기독교 개념도 들어왔으면 좋겠고
하여튼 중세 유럽시기 서양인들에게 기독교는 점차 생활에 자리잡았고
여러 종교 개혁운동이 일어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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