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즉위 전의 세손 정조>
[조선후기 최고명군 영조와 정조]
[사도세자]
[뒤주에서 죽은 사도세자]
[잘난 세손 정조]
[죄인의 아들이 왕이 될 수 있는가 ?]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라봉봉>
[조선후기 최고명군 영조와 정조]
조선 후기 최고의 명군이라면
영조와 그의 손자 정조가 바로 꼽히고 있고
이전 조선 후기 번영을 연 명군인
효종 , 현종 , 숙종이 '삼종혈맥' 이라 불린다면
제가 지어낸 말이지만
영조 , 정조 , 순조라는
세명의 조로 끝나는 임금들인 '삼조혈맥' 은
명군 , 조선 후기 조선의 마지막 불꽃들 ,
조선 후기 최전성기 임금을 상징합니다
[사도세자]
정조는
어머니가 천민이었던 할아버지 영조와 달리
적통 혈통의 임금이긴 했지만
일반적 왕실의 계통을 이은 인물이 아니었는데
바로 아버지가 '사도세자' 였기 때문입니다
영조는 학자성향의 임금으로서
총명한 임금이었고
백성들에겐 관대했지만
자기 자신과 신하들에게 매우 엄격한 인물이었고
이는 아들에게까지 적용됩니다
영조의 아들 사도세자는
영조와는 정반대로
놀기 좋아하고 호방한 성향이 강했으며
평소 음식을 적게먹는 소식을 해서 여우처럼 날렵했던 영조와 달리
사도세자는 몸이 매우 뚱땡이 체격에
학문보다는 병정놀이나 놀러다니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영조의 사도세자 외모 디스>
잘못해서 넘어지기라도 하면 몸이 무거워 다치기 쉬우니 걱정 ,
이 아이의 배 좀 보라 ,
지난 번 가마 탈 때 보니 가마가 좁아 세자가 탈 수 없었다.
그것은 내가 동궁(세자) 시절에 타던 것이다
아들에 대한 기대가 너무 컸던 영조는
4살때부터 사도세자를 계속 구박하고 갈구기 시작했고
교육열이 지나쳤던 영조는 사도세자에게 자신처럼
열공하는 모습을 보이기를 강요합니다
이에 사도세자는 9살때부터 영조만나기를 두려워했는데
물론 영조는 ㅈㄴ 꼰대성향이 강해서
사도세자 뿐만 아니라
가까이서 모시는 사람들이 다 무서워했던 인물이라
멀리서 보면 좋은 임금인데
바로 옆에있는 신하 , 가족들이 다 고통이었던 임금이었습니다
하여튼 이런 아버지를 사도세자는 더욱 두려워했고
그럴수록 영조는 사도세자를 계속 질책하고 갈구어댔고 학대했는데
이에 사도세자는 갈수록 아버지를 피하며 엇나갑니다
(숙종도 장희빈 아들이었던 경종을 미워하고 영조를 편애했지만
그렇다고 경종에게 하는게
영조가 사도세자 갈구듯이 학대한 수준은 아니었음)
이에 사도세자는 점차 강박증과 극도의 정신병에 걸리다
폭행 , 성폭행 , 살인 범죄를 저질렀고
궁녀들을 잡아서 때리고 성폭행하거나
내시와 궁녀들을 살해하기도 합니다
<사도세자가 장인 홍봉한에게 보낸 편지>
나는 원래 남모르는 울화의 증세가 있는 데다 ,
지금 또 더위를 먹은 가운데 임금을 모시고 나오니 ,
(긴장돼) 열은 높고 울증은 극도로 달해 답답하기가 미칠 듯합니다.
이런 증세는 의관과 함께 말할 수 없습니다.
경이 우울증을 씻어 내는 약에 대해 익히 알고 있으니
약을 지어 남몰래 보내 주면 어떻겠습니까
사도세자는 학문을 좋아한 현종 , 영조보다는
호방하고 국방에 관심이 많았던 효종의 기질을 닮은 인물이었고
표정이 엄숙하고 백성들에겐 자애로워
나름 백성들의 사랑을 받는 세자이기도 했는데
문제는 영조는 사도세자가 그저 자신처럼 되기를 원했고
아들과 자신의 '다름' 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반대로 영조는
사도세자의 아들인 어린 세손(정조)은 자신과 같이
학문을 좋아하고 영민해서 매우 좋아했고
이에 아들은 더욱 모질게 대하고
손자에겐 한없이 온화했습니다
이에 사도세자는 점차 정신병에 시달려 살인 , 강간을 저지르며
영조와 신하들과 극단적인 갈등을 겪게 되었고
급기야 사도세자는 후궁까지 폭행하고 살해했고
영조의 시해(죽임) 까지 운운하는 패륜을 저질렀고
이에 사도세자의 어머니 영빈 이씨마저
친아들의 단죄를 결심하며
나라의 미래를 위해
사도세자와 총명한 세손 정조를 분리시켜야 한다 생각했고
총명한 세손을 살리기 위해
영조에게 사도세자의 비행을 고했습니다
사도세자의 범죄는
아무리 세자여도 영조와 당대 사람들이
용납할 수 없는 죄악을 저지른 것이었습니다
결국 권력앞에서 냉정했던 영조는
사도세자의 아들이었던 세손(정조) 은 자신처럼 학문을 좋아하고 총명하기에
나라의 운명을 세자가 아닌 세손에게 걸기로 결정했고
미쳐버린 자신의 아들 사도세자를 죽이기로 결정합니다
[뒤주에서 죽은 사도세자]
결국
1762년 5월 13일 여름날
영조는 창덕궁에서 갑자기 사도세자를 불러냈고
이때 사도세자의 시종들은 모두 자취를 감췄는데
홀로 남겨진 사도세자는 자신의 운명을 직감하고
아버지의 귀여움을 받기 위해 ,
아버지가 그토록 아끼는 세손의 아버지임을 어필하기 위해서
아버지가 아까는 자신의 아들 , 세손 정조의 털모자를 쓰고 아버지를 뵈려했는데
이에 사도세자는
부인 혜경궁 홍씨에게 세손의 휘항(털모자) 을 달라 했는데
당시 궁중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몰랐던
혜경궁 홍씨는 작은 세손의 것을 어찌 쓰겠냐며
세자의 것을 가져옵니다
결국 사도세자는 영조와 마주하게 됬고
영조는 사도세자를 데리고 자신의 아버지 숙종의 위패가 모셔진
창덕궁 선원전에 가서
절을 올렸고
영조는 순식간에 군사들을 시켜
4겹 , 5겹으로 궐문을 막고 궁궐에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합니다
죽음을 직감한 사도세자는 이에 영조에게
<사도세자>제가 죄는 많지만 죽을 죄는 무엇입니까 ? ,
아버님 , 아버님.
잘못했습니다
앞으로는 글도 잘 읽고 말씀도 잘 들을테니
제발 이러지 마소서 !
하고 살려달라 애걸하는데
이미 마음을 굳힌 영조는 사도세자에게 자결을 강요합니다
이에 사도세자는 자결을 시도하지만 신하들이 달려나와 막아냈고
이에 영조는 분노하며 세자를 폐하는 교지를 내렸고
원래부터 무서운 임금이었던 영조가 극도로 분노하자
신하들도 서슬퍼런 영조의 명을 감히 어길 수 없었습니다
영조는
세손 정조와 사도세자를 분리시키기 위해
세손 정조과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는
혜경궁 홍씨의 아버지네 집 ,
친정 홍봉한의 집으로 보내버립니다
성종이나 숙종도 부부싸움 등으로
왕비에게 역적죄로 사약을 내려 죽였지만
그렇다고 왕비들이 낳은 아들인
연산군이나 경종을 차마 죽이지는 않았는데
왕이 자신의 친아들인 세자를 죽인다는 것은
워낙 비상식적이고 말도 안되는 상황이었기에
당시 역사를 기록하는 사관들마저
영조가 두려워서 차마 그 상황들을 기록하지 못했고
당시 사도세자가 칼로 두차례나 자결하려 했음에도 주변 사람들이 칼을 빼앗아 실패했기에
극대노한 영조는 사도세자를
뒤주 , 쌀 보관통에 가둬버립니다
처음엔 신하들도 영조가 사도세자를 곧 풀어줄것이라 생각하고
뒤주속의 사도세자에 대해 별다른 감시를 하지 않았고
이에 사도세자는 뒤주에서 잠깐 나와서 바람을 쐬기도 했고
궁녀들도 사도세자에게 갈증해소에 좋은 음료수 및
부채와 음식을 주기도 했는데
이 사실을 안 영조는 분노하며
뒤주 위에 큰 돌을 올려놓아 사도세자가 다시는 뒤주에서 나오지 못하게 합니다
결국 사도세자는 한여름날 뒤주에 갇혀
물도 , 밥도 먹지 못하고 자신의 오줌을 받아 마시며 버티다가
8일만에 뒤주에서 시체가 되어 나왔고
영조의 아들이자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는 그렇게
28세의 한창의 나이에
뒤주속에서 생애를 마감합니다
사도세자의 죽음을 확인한 영조는
사도세자의 주변 사람들을
사도세자를 타락시킨 죄로 처형 , 유배보냈고
그럼에도 사도세자의 아들인 세손은 사도세자와 분리시킵니다
영조는 혹시라도 자신이 죽어버리면
광증(미친 병 , 정신병)에 시달리던 사도세자가
연산군이나 광해군처럼 되어
자신이 오랫동안 일궈온 나라를 망칠 것이라 생각했기에
영조는 선대왕이었던 성종이나 선조의 선례를 되풀이 하지 않으려
사도세자를 죽여버린것이었고
특히나 성종의 경우 정치와 학문은 잘했지만
아들관리에 완전히 실패한 인물이라
아들 연산군이 왕위를 이어
개차반짓을 하다가
신하들에게 중종반정 , 쿠데타를 받고
성종의 직계혈통이 끊겨버렸기에
영조 역시 사도세자가 개판짓하다가
총명한 세손 정조까지 아버지와 함께 폐위되어
삼종혈맥 , 효종의 직계혈통대가 끊길까 두려웠고
또한 영조는 자신이 아들 사도세자를 학대했기에
사도세자가 왕이 되버리면
사도세자 역시 학대를 되물림해
자신과 닮은 총명한 세손 정조에게 해코지할것이라 생각했기에
아예 그 싹을 차단해버리려
정치적인 목적으로 사적 감정을 모두 배제시키고
자신의 아들 사도세자를 냉정하게 죽여버린 것이었습니다
이에 영조는 사도세자를 역적으로 몰았지만
반대로 역적의 아들인 총명한 세손 정조는
사도세자와 완전히 분리 , 차단시키려 했고
조선 후기 최고 명군이자 조선 최장수왕 영조는
자신이 수십년간 일궈온 조선의 미래를
총명한 어린 세손에게 맡기기로 결정합니다
영조와 더불어 조선 후기 최고 명군으로 손꼽히는 정조는 그렇게
어린시절 아버지가 할아버지에게 학대당하고
죽게 되는 과정을 모두 목격하며 성장했고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어린 세손 정조에게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은
정조의 평생의 트라우마가 됩니다
[잘난 세손 정조]
자 사도세자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고 ..
정조의 이야기로 돌아가보면
정조는 태어날때부터 미친 아버지 사도세자와 정반대로
엘리트 , 엄친아 기질이 강했던 '잘난 임금' 이었습니다
영조는 새로 태어난 자신의 손자 정조의 얼굴을 보자마자
자신을 닮았다며 기뻐했고
정조는 어릴때부터 노는것도 , 공부도 잘한 만능 캐릭터였으며
돌잡이때도 다른 노리개나 보물들은 거들떠도 안보고
책을 집어 읽는 시늉을 했고
정조는 어릴때부터 책만 붙들고 보았을정도로 총명했습니다
이에 책을 멀리한
무예캐릭터의 사도세자와 정반대의
지능캐릭터의 후계자가 태어나버리자
영조는 너무 좋아서 기뻐했고
세손 정조가 태어날때부터 영조는 더욱 아들 사도세자를 미워하고
반대로 손자를 편애하게 됩니다
영조는 정조를 왕세손으로 책봉한 후
강서원(세자 교육기관) 을 설치해
교육을 전담하게 했습니다
<영조의 정조 왕세손 책봉>
왕은 말하노라.
왕손이 숙성(나이는 어리지만 어른스러움)하고 준수했으니
바야흐로 무릎에 앉히는 기쁨이 깊었고 ,
원손의 작호를 봉했으니
계체(대를 잇는 것)의 뜻을 밝혔다.
이는 진실로 드물게 보는 경사인데 ,
어찌 널리 반포하는 전례가 없겠는가 ?
돌이켜 보건대 양덕(덕이 부족)한 이 몸이
삼종(三宗 , 효종과 현종과 숙종)의 나머지를 이어받들었는데 ,
동궁(세자)에서는 한 가닥의 길조(좋은 조짐 , 정조)를 얻었도다
하루는 영조가 세손 정조에게
거리에 가득한 도성 사람들을 본 후
그들이 세손에게 바라는 바가 무엇인지 물었는데
세손은
<세손 정조>선하기를 바랍니다
라고 했습니다
이에 영조는
<영조>그렇다면 그 선을 행하기 쉬운가 어려운가 ?
하고 물었고
이에 정조는
<정조>선을 행하기 쉽습니다
라고 대답하는데
영조는 세손 정조에게 너무 자신감이 지나친게 아니냐 했지만
정조는
<정조>쉽다고 생각해야 용감하게 전진할 수 있는 것입니다
대답하니
영조는 기뻐했습니다
11살의 세손 정조는
할아버지에게 아버지가 뒤주에서 죽는 것을 목격했고
아버지가 사망하고 수십일 후 곧바로 왕세손 정조는
세자에 책봉됩니다
[죄인의 아들이 왕이 될 수 있는가 ?]
영조는 사도세자가 죽자마자 정조를 곧바로 세자에 임명해
역적이 된 사도세자와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를 구분 , 분리하는 것을 확실하게 했고
세손 정조 반대파들은
'죄인의 아들이 왕이 될 수 있는가 ?'
하며 세손의 왕위계승을 방해하려 했지만
영조는 그럼에도 세손 정조를 보호했고
총명했던 어린 정조 역시
권력의 생태를 빨리 파악하고
할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차기 국왕이 되기 위한 준비를 시작하였고
부지런히 학문에 임하며
노련한 여우 할바마마 영조에게 신하들 다루는 법 , 국정스킬들을 전수받습니다
그럼에도 영조는 훗날 정조가 사도세자의 죽음에 복수해
자신의 정파를 공격할까 염려해
정조를 사도세자의 아들이 아닌
사도세자보다 일찍 태어나고 9살에 요절했던
사도세자의 이복형 효장세자의 아들로 삼았습니다
효심이 깊었던 세손 , 세자 정조는
속으로는 할아버지와 반대파들에게
억울하게 죽은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에 깊게 생각하고 있었고
또한 , 그럼에도 할아버지가 자신을 살려주고 총애한 은혜를 생각하며
좋은 임금이 되기위해 노력했고
강력했던 임금 영조의 아낌없는 지지속에
총명했던 정조는 엘리트 국왕수업코스를 완벽하게 소화해나며
영조는 비록 아들을 죽이고나서야 뒤늦게 아차했지만
잘나도 너무 잘나고 뛰어난 세손의 모습에 한시름 덜게 됩니다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결국 영조는 유래없이 52년이라는 조선 최장기 집권의 재위기간으로
사망했고
영조가 사망하자 세자 정조가 왕위를 이어
조선 후기의 성군 ,
조선 22대왕 정조가 됩니다
사실 영조 역시
사도세자를 죽이고 나서야 뒤늦게 아차 했고
사도세자가 엇나간게
너무 자신이 기대치를 높히며 사도세자를 갈군게 너무 크기도 했기에
반대로 세손 정조에겐 한번도 꾸짖지 않고 칭찬만 했고
실제로 정조 역시 천성적으로 흠이 없다싶이한 모범생 , 엄친아였기에
영조의 높은 기대치에도 충족된 손자였습니다
그러나 ,
그럼에도 효자였던 정조는
어린시절부터 아버지가 할아버지한테
계속 별것도 아닌거로 조인트까이며 극도로 갈굼당하는 것을 직 , 간접적으로 목격했고
아버지 사도세자가 거의 자신의 욕받이 , 총알받이가 되기도 했기에
아버지에 대한 부채의식이 마음속 깊이 있었고
결국 정조는 왕으로 즉위하자마자
자신이 효장세자의 양아들이지만
엄연히 사도세자의 아들임을 조심스럽게 언급합니다
<정조 즉위 발언>
아 ! 과인은 사도 세자의 아들이다.
선대왕께서 종통의 중요함을 위하여
나에게 효장 세자를 이어받도록 명하셨거니와 ,
아 ! 전일에 선대왕께 올린 글에서
근본을 둘로 하지 않는 것에 관한 나의 뜻을 크게 볼 수 있었을 것이다
...
정조는 왕통을 잇는것도 중요하지만
아버지의 은혜도 끊을 수 없기에
도리를 다해야겠다 선언했고
사도세자의 죽음에 개입했었던 영조의 신하들은
정조의 즉위발언에
사도세자라는 금지된 단어가 직설적으로 나와버리자
또다시 피바람이 불까 당황하게 됩니다
그렇게
정조의 즉위 전 일생은
학문을 좋아한 모범생 , 사도세자의 죽음이라는 두가지 큰 부류로 볼 수 있고
이는 정조의 평생동안 큰 기억으로 자리잡게 되었고
그렇게 명군이었던 할아버지 영조와 더불어
조선 후기를 빛내며
조선 르네상스를 이끈
조선 후기 최고 명군 정조의 시대가 시작되게 됩니다
<라봉봉>정조 사후부터 조선은 완전히 몰락하고
왕은 제 구실을 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기에
정조의 시대는 사실상 마지막 조선시대라 해도 과언이 아니라 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죽음 당시
불호령을 내리는 할아버지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던 어린 정조는
다행히 엇나가지 않고 학문에 매진해 조선 후기 최고의 명군이 되었고
효심이 깊었던 정조는 평생동안 아버지 사도세자를 그리워하며
아버지를 위해 아버지가 묻힌 수원에 수원 화성을 쌓게 됩니다
그렇게 조선은
조선 마지막 명군 정조대에 이르러
마지막 불꽃을 내며 타오르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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