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조선 마지막 불꽃 정조>

[청년개혁군주 정조]

[정조의 탕평책]

[규장각]

[정조와 신하들의 단합]

[실학자 양성]

[기독교에 대한 정조의 입장]

[서얼을 중용한 정조]

[만천명월주인옹]

[군사부일체]

[신해통공]

[정조의 , 수원화성]

[조선 마지막 불꽃 정조]

<라봉봉>

 

[청년개혁군주 정조]

그렇게 정조 이산은

할아버지 영조가 사망하자

25세의 젊은 나이로 뒤를 이어

조선 22대왕 정조로 즉위합니다

 

정조 표준 영정

 

정조 , 선원보감

 

효자였던 정조는 즉위 당시

영조시절 금기어였던 자신의 아버지 사도세자를 언급하며

아버지의 은혜를 끊을 수 없음을 분명히 했습니다

 

<정조>아 ! 과인은 사도 세자(思悼世子) 아들이다.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는

영조시절 궁인들을 살해한 미친 세자로서

정치적 이유 + 사실상 역적죄로 죽은것이었기에

정조의 폭탄발언에

당시 사도세자의 죽음에 관여했던 영조대에 신하들은 크게 당혹합니다

 

정조는 할아버지 영조와 더불어 조선후기 최고 명군답게

뛰어난 할아버지 영조에게 각종 국정스킬 + 노하우를 전수받았고

 

실제로도 할아버지의 국왕수업+여러 숙제들을 소화시킬 수 있을 정도로

독서광 + 총명했던 엄친아 , 잘난 임금이었기에

자신만만한 청년 개혁군주이자

신하들도 무시할정도로 자뻑이 심했던 인물이었습니다

 

세손시절 독서광이었던 정조

 

[정조의 탕평책]

정조는 자신만만한 성격도 그렇고 아주 직선적이고 당돌한 인물이었고

정조는 영조의 정치를 계승해 국가개혁에 돌입하는데

 

할아버지 영조가 펼친 탕평책을 계승해

신하들을 당파에 상관없이 고루고루 등용하나

정조는 할아버지와는 다른 탕평책을 시행합니다

 

영조 말기부터는 탕평책이 점차 무너지며

왕실 인척(친척) 일가들이 주도하는 국정이 되었고

영조 부인 정순왕후 김씨와

정조 엄마 혜경궁 홍씨네 구도로

 

경주 김씨 VS 풍산 홍씨네 일가가 맞다이를 뜨자

 

정조는 이러한 척신(왕실과 친척인 신하들) 들이 나서면

주도적인 개혁정책을 시행할 수 없다 판단해

척신들을 철저히 정치에서 배제시키고

내각을 설치해 척신들이 아닌

사대부들과 자신의 인물들에게 권력을 주었습니다

 

<정조가 대신들에게 내각설치 이유를 일러주다>

대저(대체로) 당일 국가를 마음대로 해치고

군부(임금과 아버지) 원수로 여긴 것은 척리(척신 , 임금의 친척들)들이었고 ,

국본(나라의 근본) 모위(남을 해치려함)하여

기필코 저희(방해)시키려 것도 척리였으며 ,

필경에는 하늘이 우리 나라를 도와주시어 차례로 이멸(멸망) 것도 또한 척리였다

...

진실로 척리 가운데 왕실에 마음을 바쳐 다시 번병으로 삼을 만한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결단코 다시 진용(추천 임명)하지 않겠다는 것이

나의 하나의 집념인 것으로 ,

변역(고쳐 바꿈)시킬래도 변역시킬 없고

동요시킬래도 동요시킬 없는 것이다

...

아조(우리 왕조)는 나라를 세우고서부터 오로지 사대부를 숭상하였으니 ,

임금이 정치를 함에 있어 사대부들을 버리고 어떻게 있겠는가 ?

내가 때문에 두려운 마음을 지니고

제일 먼저 내각(內閣) 건립하고 정신(벼슬하는 신하) 선발하여

직책을 맡기게 했던 것인데

...

내가 내각을 건립한 본의는 오로지 여기에 연유한 것이니 ,

등은 이런 뜻을 알아주기 바란다.

 

그렇게 두루두루 온건파들과 친하게 지냈지만

신하들을 힘으로 찍어내린다거나

말년에 가서 척신들의 대두를 막을 수 없었던 영조의 탕평책을 보완하기 위해

정조는 척신들을 정치에서 배제시키고 사대부 , 학자 , 자신의 인물들을 등용하는 

새로운 탕평책을 실시했고

 

이렇게 영조와 정조의 탕평책은 성격이 약간은 다릅니다

 

영조와 정조의 탕평책 비교

 

[규장각]

한창 피끓던 청년개혁군주 정조는

이전 고려 공민왕이나 조선 세종대왕이

국가개혁을 위해 신진사대부 , 집현전 학자들을 키운것처럼

 

정조 역시 국가개혁을 위해

신진 관료 , 학자들을 양성하려 했고

 

정조는 즉위년부터 집현전 격인 학술기관 규장각을 세우고

박제가 , 유득공 등 서얼출신들까지 등용해

서양학문인 서학까지 익히게 합니다

 

규장각

 

또한 정조는 규장각 관료들에게 막강한 권력을 부여해

이전 삼사인 홍문관 , 사헌부 , 사간원이 가지고 있던 권한들을

규장각 신하들에게 부여해주었고

 

그렇게 정조가 키워낸 규장각 신하 , 학자들은 

조선 후기를 빛내는

실학자(조선 후기부터 나온 기술이나 서학 등 실질적 학문을 연구하는 학자)

들이 됩니다

 

규장각 신하들은 정조의 기대에 힘입어

당시 조선에서 구할 수 있는 신식 , 주요 도서들을 모두 갖추어 놓고 학문을 연구하며

조선 개혁방안을 내놓기 시작했고

 

규장각은 

인재들의 가문 , 당파 , 지역 , 신분을 가리지 않는 초당적 연구를 하고

연구 결과나 성과 역시 가장 깔끔한 활자로 출판해내서

조선 후기 빛나는 문화수준을 과시해냈고

 

또한 이러한 규장각 엘리트 학자들의 자부심들 또한 대단했기에

정조대에는 감히 핏줄 , 혈통 , 인맥으로 주도되는

척신 , 세도가들이 나설 수 없는 분위기가 형성됩니다

 

규장각 학자들

 

규장각도 , 단원 김홍도

 

[정조와 신하들의 단합]

정조는 규장각 신하들을 자신의 친구 , 가족처럼 아끼었고

정조 19년에는

영의정 및 규장각 신하들 54명을 데리고 내원(궁궐 정원 , 창덕궁 후원)에서

꽃구경과 낚시를 했는데

 

동자 조어도 , 단원 김홍도 추정

 

창덕궁 후원은 궁궐안에 있다하여 내원 內苑 이라고도 불리고

또한 일반인이 함부로 출입할 수 없기에 금원 禁苑 이라고도 불렸는데

 

정조가 신하들과 연회를 즐긴 한국 최고의 정원 창덕궁 후원 '부용정'

 

정조가 내원에 매년 신하들을 초대하는 것은

신하들과의 단합을 도모하는 것 이외에도

자신이 직접 키운 엘리트 신하임을 확실히 하며

다른 척신들과 구분하기 위한 정조의 행동(쉬운말로 좆목)이었습니다

 

정조는 직접 부른 대신과 규장각 신하들에게

술병과 안주그릇을 하사하며

각자 마음대로 경치 좋은 곳에서 놀며 쉬게하였고

정조가 이르기를

 

<정조>예로부터 내원의 놀이에는 척리(척신) 아니고서는 들어와 참여할 수가 없었으니

외신(다른 신하) 내연(내원 놀이 , 잔치) 참여시킨 것은 특별한 은전(은혜)이라 하겠다.

 

동궐도의 부용정

 

정조는 신하들에게 덕담과

척신을 멀리하고 사대부들을 가까이 하는 이유들을 살명하며

한편으로는 척신들을 계속 경계하며 이르기를

 

<정조>그런데...

척신이 뒤를 이어 나아오지 않으리라고 어떻게 보장할 있겠는가.

그러나 사대부를 가까이 하려는 것이야말로 나의 평소의 성격인 동시에 내가 고심하는 것이니 ,

수십 동안 행해 일을 지금 중도에 그만둘 수는 없는 일이다.

이에 특별히 경들을 불러 나의 속마음을 펼쳐 보여주게 되었으니 ,

자리에 참석한 여러 신하들은 각자 두려운 마음을 갖고 경계하여

오늘 내가 유시한 것을 잊지 말도록 하라.

 

이에 신하 채제공이 아뢰기를

 

<채제공>전하께서 임금의 자리에 계신 20 동안 일찍이

척리로서 진출한 사람이 사람도 없었으니 ,

보고 듣는 이들치고 누가 우러러보며 칭송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신들로 말하면 직접 성대한 기회를 만나 특별한 은혜를 입고 있으니 ,

어찌 감히 스스로 순결한 마음을 지니고

만분의 일이라도 성상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노력하지 않을 있겠습니까.

 

정조대 영의정이자 명재상 채제공

 

신하들과 다시 술을 몇잔 한 정조는 신하들과 어울려 놀며 낚싯대를 드리웠고

신하들도 못가에 빙 둘러서서 낚싯대를 던집니다

 

이날 정조는 물고기 네마리를 낚았으며

신하와 유생들은 낚은 사람도 있었고 낚지 못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한마리를 낚아 올릴때마다 음악을 한 곡씩 연주했는데

다 끝나고 나서는 다시 못 속에 놓아주었고

밤이 되어서야 정조와 규장각 신하들의 잔치가 끝났습니다

 

 

그렇게 정조는 척신 경계 , 규장각+사대부 중용 정책을 실시했지만

그럼에도 척신들과 당파들이 꿈틀대는 조짐이 멈추지 않았고

정조는 재위기간 내내동안 , 또한 자신의 사후에 척신들이 다시 일어날까를 두려워했는데

정조의 생각은 정조 사후 현실이 됩니다

 

하여튼 , 그러나 그럼에도

정조대까지는 총명한 젊은 임금에 함부로 나서는 척신들은 없었고

정조는 신하 , 관료들이 다시 탕평을 어기고 파벌을 지어 서로를 공격할때마다

옳고 그름을 분명히 밝히고 조리있는 방식으로 양 파의 갈등을 중재 , 교통정리합니다

 

(문제는 정조사후엔 이게 안됬음)

 

[실학자 양성]

하여튼 정조가 워낙 닉값하듯이

바른 모습으로 나라를 다스리자

 

숨어살던 뜻있는 유생 , 선비들이 새로운 나라를 꿈꾸며

정조에게 몰려들었고

 

정조대에 이르러 기존 성리학 , 유교경전을 연구하는 학자가 아닌

서양 기술 , 학문 , 경제나 잡학 등 실질적이고 실생활에 필요한 학문을 말하는

'실학' 을 연구하는 실학자들이 정조대 양성됩니다

 

대표적으로 정조와 조선 후기 실학자들의 모든 정신을 계승한

한국의 위인이자 실학자 정약용이 정조대 키워진 대학자였고

정조는 정약용을 아끼며 크게 중용합니다

 

조선학문의 계보

 

[기독교에 대한 정조의 입장]

또한 깨어있던 임금이었던 정조는 

당대 한창 조선에 들어오고 있던 

서학(서학엔 두가지 의미가 있는데 하나는 서양학문이고 하나는 기독교) ,

즉 기독교 사상에 대해 관대한 입장이었는데

 

당시 성리학 , 주자학만이 조선의 국가 근본 이념이었기에

불교까지 탄압받던 시대에 기독교가 조선 후기에 와서야 조금씩 들어왔고

이에 사대부 , 유학자들은 서학을 공부한 정조가 키워낸 실학자들을 공격합니다

 

<좌의정 이병모>근년 이래로 불순한 학문(기독교)이 날로 성하게 번지고 있습니다.

...

가환 같은 자는 불순한 학문을 주장하는 세력의 괴수로서

제사를 폐지하여 윤리를 끊어지게까지 하였으니

 

(기독교는 유일신 사상이기에 제사를 지내지 않음)

 

그의 할아비와 아비에게 죄를 지은 자입니다. 

 

조선의 서학자 , 기독교인들

 

명절을 지내는 조선 양반가 , 풍속화

 

이에 정조는 기독교인들에게 유화적 입장을 보이며

기독교인들이 비록 (유교적 조선사회에서는) 문제가 있지만

회유하고 가르쳐서 고치면 된다는 모습을 보입니다

 

<정조>경의 말이 비록 이러하나 생각은 그렇지 않다.

설령 가환에게 참으로 그러한 죄를 범한 형적이 있다고 하더라도 ,

이미 스스로 사람이 되도록 허락하였고 보면 ,

굳이 이것으로 죄를 삼을 일이 아니다.

...

지난 일을 지금 와서 다스린다면 도리어 효과없는 임시 방편에 가까울 것이니 ,

차라리 바른 학문을 크게 밝혀 불순한 학설이 절로 수그러들도록 하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정조는 할아버지 영조처럼 공부를 많이했는데

영조와 달리 서학이나 근대적 사상도 받아들인 인물이라

한국사 최초이자 최후의 계몽 , 근대적 개혁군주이기도 했고

마지막 조선의 명군이었습니다

 

[서얼을 중용한 정조]

신분제 문제까지 생각하던 정조는

당시 양반과 평민 사이에 껴있었던

이도저도 아닌 신분이었던 중인(보통 양반 아버지와 첩이나 천민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서얼들이 함)

에 대해 통찰하는 발언도 했습니다

 

<정조>예로부터 데가 없는 사람들이

재주를 안고 한을 품고서 올바른 도리를 저버리고

문득 정도를 벗어나 다른 길로 빠져 들어가는 수가 많다.

이른바 중인(中人)이라는 자들은

나아가 사대부가 수도 없고

물러나 상민(평민) 수도 없어 스스로 불우한 처지에 절망하며 실제적인 일에는 뜻이 없다.

간혹 재능이 조금 있는 자들이 있는데 ,

이들은 기량을 펴보고 싶은 욕망을 이기지 못하고 문득 망녕된 생각을 하여

오로지 새로운 것만을 숭상하게 된다.

 

이에 정조는 서얼이나 중인 , 잡류 등 애매한 신분들에 대해서도

재주에 따라 공익을 위할 수 있는 기회를 주려 했고

박제가 , 유득공 등 서얼들을 등용합니다

 

조선 후기 실학자 박제가

 

조선 후기 실학자 유득공

 

<정조>서얼이라 해도 나라에 쓰임이 만한 사람이 어찌 없겠는가?

 

[만천명월주인옹]

자뻑이 있었지만 실제로도 잘난 인물이었던 정조는

자뻑에 취해서 자신을 스스로

 

'만천명월주인옹 萬川明月主人翁'

 

이라 일컬었는데

만천명월주인옹은 하늘에 떠있는 밝은 달이

만개의 강을 비추듯이

자신의 다스림이 만백성에게 두루 혜택이 미치기를 바라는 마음에 달은 것이었습니다

 

창덕궁의 달빛

 

만천명월주인옹은 정조가 재위 후반기에 지은 자신의 기나긴 호였는데

정조는 20여년의 재위기간동안

여러 사람들을 써보고 시험해보고 믿어보고 또 바로잡아도 보며

나름 사람들은 각자의 재능대로 써야한다는 이치를 터득했다 하고

 

정조는

용감한 자에겐 방패와 도끼를 주고

겁이 많은 자에겐 창과 갑옷을 주고 ,

총명한 자는 차분하게 ,

교활한 자는 강직하게 대하며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 , 시류의 변화에서

높은 하늘위에 고고하게 각기 다른 만개의 강을 비추는 하나의 달처럼

각자의 기량에 맞게 대하는 임금의 모습을 상징하는

자신의 호를 지었습니다

 

<정조>내가 바라는 것은 성인을 배우는 일이다.

비유하자면 달이 물속에 있어도 하늘에 있는 달은 그대로 밝다.

달이 아래로 비치면서 위에 빛을 발산할

용문의 물은 넓고도 빠르고 ,

안탕의 물은 맑고 여울지며 ,

염계의 물은 검푸르고 ,

무이의 물은 소리 내어 흐르고 ,

양자강의 물은 차갑고 ,

탕천의 물은 따뜻하고 ,

강물은 담담하고 바닷물은 짜고 ,

경수는 흐리고 위수는 맑지만 ,

달은 각기 형태에 따라 비춰 뿐이다.

 

달을 사랑한 정조

 

[군사부일체]

자신의 지적 자신감이 넘쳤던 정조는 자신을 일반적 임금이 아닌

신하들의 스승을 자처해

자신을 일반적 임금 군이아닌

군사 , 임금 스승을 자처했고

 

독일의 계몽군주 프리드리히 대왕이 자신을 국가의 제일가는 심부름꾼을 자처했다면

조선의 계몽군주 정조는 자신을 국가의 군주이자 스승을 자처했으며

 

이는 정조의 오만함의 표현이 아닌

정조는 백성들을 변화시키려면 임금은 일반적 군주의 모습뿐만 아닌

부지런하게 학문에 힘쓰는 스승이 되어야 한다 생각한 것이었고

계몽군주 정조는 스스로 제자들에 대한 스승의 책임감을 감당하려 노력합니다

 

<고사성어>

군사부일체 君師父一體

(임금과 스승과 아버지의 은혜는 모두 같다)

 

유교사회 조선에서 임금과 아버지 못지않게 중요시되었던 '스승' , 단원 김홍도의 '서당'

 

[신해통공]

정조는 고갈되가는 국가재정속에 경제개혁도 실시했는데

당시 유교+농업 몰빵국가였던 조선은

고려와 달리 상업을 천시했기에

필연적으로 가난할 수 밖에 없었고

 

이웃나라 청나라와 일본(에도막부) 이

한창 국내무역+국제무역으로 번영하며 발달하는 시대였기에

정조는 결국 상업에 대한 현실도 어느정도 인정하고

억제되있는 조선상업에 대해 규제를 완전히 풀어버립니다

 

당시까지 육의전의 시전상인들은 독점적 상권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로인해 경제의 경직+물가상승+도시의 폐쇄화 문제가 커져만갔고

도시 빈민층과 수공업자들의 생계 역시 위험해집니다

 

시전상인들의 횡포 , KBS 역사저널 그날

 

결국 정조는 '신해통공' 을 실시해

시전상인들의 특권을 폐지해

백성들 누구나 자유롭게 시장활동을 할 수 있도록 허가했고

정조의 규제 완화에 억눌려있던 조선 상업은 폭발적으로 발전합니다

 

[정조의 꿈 , 수원화성]

조선의 영원한 청년개혁군주 정조의 이상은

결국 한양이 아닌 새로운 수도건설로 응축되었는데

 

바로 신도시 화성을 건설하는 것으로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가 묻힌 화성을 새로운 왕궁으로 계획했고

세자가 15살이 되는 1804년에

정조는 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서 화성에 머물려 했습니다

 

(그러나 계획 4년전인 1800년에 정조 사망)

 

정조는 수원의 화성을 건설하면서

성곽을 쌓을때 비용을 줄이는 근대적 방식으로 성을 쌓으려 했고

정약용이 서학 기술에서 도입 , 개발한 거중기를 이용해

조선 양식과 서양식 축조방식이 혼합된 근대적 방식으로

수원화성이 건설됩니다

 

정약용이 고안한 거중기

 

수원화성

 

정조의 이상향이 모두 투입된 신도시 화성은

정조가 계획한 철저한 계획도시였고

정조는 화성을 자급자족할 도시로 키우기 위해

국영 농장 둔전까지 설치해 안정적 수입원을 확보하려 했고

화성 건설당시에도 백성들에게 품삯(일당) 을 합리적으로 지급하라 지시합니다

 

<정조>공사를 진행시킬 때에 품삯은 날수로 계산하지 말고

실적을 기준으로 삼되 원근(가깝고 멈)에 따라 차등을 두어야 할 것이니 ,

그렇게 하면 힘이 센 자는 넉넉히 백 전을 가져가고

약한 자도 한 몸은 충분히 먹고 살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어찌 부(오늘날 시의 개념 , 예를들면 고양시)의 백성들만 혜택을 받는 일이겠는가.

동서 남북 어디를 가도 마땅한 거처를 정하지 못한 채

품팔이로 생활을 꾸려나가는 자들 모두가 바람결에 소문을 듣고 다투어 달려올 것인데 ,

움집이나 상점을 차리고 술도 팔고 밥도 팔며 자기에게 있는 것으로 없는 것을 바꾸게 될 것이니 ,

이 또한 의지할 곳 없는 백성들에게 이로운 일이라 할 것이다.

 

대저 이와 같이 하면 ,

성은 만세토록 흔들리지 않는 안정의 기반을 구축하게 것이고 ,

백성은 1 가구가 기름진 땅을 얻게 것이며 ,

창고에는 1 사람을 충분히 먹일 있는 식량이 비축될 것이니 ,

하나로 여러 가지 긍정적인 효과가 파급될 것이다.

어찌 정말 아름답고 훌륭한 일이 되지 않겠는가

 

정조의 화성행차

 

그러나 ,

계몽군주 정조의 마지막꿈 수원화성건설 계획은

1804년 완성을 앞두고

정조가 1800년 갑작스럽게 사망해버리자

흐지부지하게 되었고

청년개혁군주 정조의 유교적 이상국가 건설의 꿈은 그렇게

오늘날 후손들에게 남겨졌습니다

 

[조선 마지막 불꽃 정조]

정조는 너무 이상적인 인물이기도 해서

현실성 인간의 욕구등에 대해서는 신경쓰지 못했던 인물이고

이에 그가 죽자마자

그가 우려했던대로 척신들이 어마어마하게 일어나며

조선을 잠식하기 시작했고

조선은 척신들의 세도정치로 완전히 나라의 기능을 잃어버리고

점차 멸망하기 시작합니다

 

또한 그러나 ,

청년개혁군주 정조는

조선 신하와 조선 백성들이 진심으로 인정하고 존경한 마지막 조선 국왕이었고

한국사 마지막 명군이자

조선의 마지막 불꽃이었습니다

 

<정조>물이 흐르면 달도 함께 흐르고 ,

물이 멎으면 달도 함께 멎고 ,

물이 거슬러 올라가면 달도 함께 거슬러 올라가고 ,

물이 소용돌이치면 달도 함께 소용돌이친다.

그러나 그 물의 원뿌리는 달의 정기이다.

거기에서 나는 ,

물이 세상 사람들이라면

달이 비춰 그 상태를 나타내는 것은 사람들 각자의 얼굴이고 달은 태극인데 ,

태극은 바로 나라는 것을 알고 있다.

 

<라봉봉>미완의 명군 정조 ,

정조의 글을 보면 상당히 많은 공부를 한 티가 나고

또한 그의 글 속에는 백성을 위한 '애민정신' 이 깊이 나타나 있기에

그는 조선 후기의 성군 , 명군이라 불리는 인물입니다

 

조선 건국자 태조 이성계가

신하로서 마지막으로 진심으로 모신 고려 국왕이 공민왕이었듯이

당시 조선 신하 , 백성들이 마지막으로 진심으로 모신 왕다운 왕이었던 인물이고

 

이후부터 조선은 세도정치로 모든게 무너지고 사실상 국가 멸망 테크를 밟습니다

 

굳이 흠을 잡아보자면

정조는 말은 되게 많은데 지적 허영이나 핵심에서 벗어나는 언어들을 많이 사용해

같이 있는 신하들도 꽤 피로했을거 같기는 하지만

말속의 본질은 백성을 위한 애민정신과

근대인다운 뛰어나고 합리적인 그의 통찰력이 담겨있습니다

 

정조는 음침하고 쫌생이 기질이 강했던 할아버지 영조와 달리

명랑하고 착한 인싸성향의 학자형 인물이었고

 

(제가 영조 같은 성격이라 정조같은 성격도 은근 마음에 듭니다)

 

달을 사랑한 정조는 

달과 같이 백성들을 비추는 아름답고 밝은 왕이 되길 꿈꾸었고

과연 정조는 비상한 인물이었습니다

 

반응형

'어린이 한국역사 > 2집 Humanism'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정조를 흠모한 조선 헌종  (0) 2020.09.26
순조와 세도정치  (0) 2020.09.24
즉위 전의 세손 정조  (2) 2020.09.12
조선후기 최고명군 영조  (0) 2020.09.09
즉위 전의 연잉군 영조  (0) 2020.09.06
Posted by 라봉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