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순조와 세도정치>

[척신을 견제한 정조]

[정순왕후]

[척신의 발호]

[세도정치]

[순조 VS 안동 김씨]

[홍경래의 난]

[민심의 이반]

[순조의 멘붕]

[순조의 마지막 희망 효명세자]

[순조의 불행했던 말년]

<라봉봉>

 

[척신을 견제한 정조]

영조 말기부터 척신 ,

임금과 친척인 신하들 즉

외척 등의 척신들이 일어나기 시작했고

 

사도세자의 죽음 역시

정신병에 걸린 사도세자 스스로가 자기 자신을 통제하지 못하고

난폭한 행위를 하다가

영조가 죽인 것도 있었지만

 

영조가 탕평책을 폈음에도

신하들과 척신들은 서로를 견제하며 다투고 있었기에

사도세자의 죽음과도 관련이 있었고

 

이에 정조는 즉위 초반부터

척신들에 대해 알레르기 반응 수준으로 철저하게 척신들을 정치에서 배제시키고

사대부들과 서얼(서자) 들 중 유능한 인재는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학술연구기관 규장각에서 젊은 지식인 관료들을 양성하며

척신이 아닌 능력중심의 개혁정책을 펴나갑니다

 

그러나 정조가 간과한 문제는

왕정에선 혈통적으론 왕족들이 서열이 가장 높긴 하지만

 

임금의 직계 혈통이 아닌 

일반적 왕족들이나 임금의 친척들의 경우에는

 

척신으로서 나라를 농간한다거나

왕권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극단적인 감시나 역차별을 받기도 했고

 

정조 역시 어찌보면 척신들에 대한

분별없는 무조건적인 찍어누르기 정책을 시행했기에

 

재위기간 내내동안 척신들이 일어날 것을 두려워했는데

정조의 척신 억제 정책에 대한 그 반발작용도 엄청났기에

정조 사후 정조의 우려는 곧바로 현실이 됩니다

 

(즉 척신들이 왕과 워낙 가깝기에

삼국지의 내시들인 십상시처럼

국정농단 등 문제가 된 경우가 흔했지만

그럼에도 척신도 사람인데

능력이 있어도

무조건적으로 역차별을 받기도 했고

민주정이 아닌 왕정의 한계였음)

 

정조는 어린 아들 순조를 생각하며

순조가 장성할때까지 기다리다가

순조가 성년(15세 , 조선시대는 15~16세부터 성인취급)이 되면

순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이 되어 신도시 수원화성에서 머물며

순조를 위협하는 방해물 제거 , 척신들을 견제할 것을 생각했지만

 

안타깝게도 ,

정조는 평소 술담배를 즐기고

과격한 성격 + 과로를 심하게해

종기가 크게 나서

치료를 받다가

순조가 15세가 되기 4년전인

1800년에 47세라는 젊은 나이에 급사했고

 

정조가 뒤늦게 얻은 11세의 어린 세자는 급하게 왕위를 이어

조선 23대왕 순조로 즉위합니다

 

어린 임금 순조 , MBC 월화 드라마 : 이산(2007)

 

[정순왕후]

순조는 정조가 중전에게서 얻은 아들이 아닌

후궁에게서야 뒤늦게 얻은 유일한 아들이었는데

다행히 순조는 정조가 사망하기 직전인

1800년 1월에 왕세자로 책봉되었기에

정통성도 충분한 인물이었고

 

다만 ,

아버지 정조가 평소 과격한 언행으로 죽기 직전까지 신하들과

마찰을 겪은 상태였기에

순조는 총명한 세자였을지라도

그런 상황에서 왕위를 잇기엔

나이가 너무 어린게 문제였습니다

 

새 국왕 순조가 즉위하자

11세의 순조는 나이가 너무 어렸기에

영조의 부인이었던 정순왕후 김씨가 수렴청정을 시작했는데

 

수렴청정

 

영조도 어이없던게

66세의 나이에 15세의 어린 신부를 맞이한게 정순왕후 김씨였고

손자 정조보다 겨우 7살 많은 부인을 들인

지금 기준으론 큰일날 로리콘 임금이었고

 

하여튼 정순왕후 김씨는 영조 말기에 어린나이에 늙다리 임금 영조와 결혼해

어린 국모가 되어 영조 사후 , 정조 재위기간내에도 왕실 서열 1짱 여인으로 쭈욱 살아있다가

정조가 죽자

족보상 증손자였던 순조를 대신해

왕실 최고 어른으로서 수렴청정을 시행합니다

 

[척신의 발호]

정순왕후 김씨는 정조 생전 정조와 가깝지도 , 그렇다고 적대하지도 않는

그저그런 관계였는데

정조가 사망하자마자

수렴청정을 시행하며 정조 세력을 개박살내버리는데

 

정순왕후는 정조가 양성해낸 신식군대 장용영을 폐지시켰고

또한 정조가 양성한 학자 양성기관 규장각 역시 축소됩니다

 

또한 정순왕후는 평생동안 아버지 사도세자를 그리워하며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시키려 노력한 정조와 달리

사도세자의 죽음은 정당하다는 노론 벽파들과 손잡고

남인들을 제거하며

 

계몽군주 정조가 재위기간 내내동안 노력했던

조선의 근대화는 물거품이 되었고

다시 복고(옛것으로 돌아감)가 시작되고

조선 정치는 실력이 아닌 혈통 , 인맥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사실 정순왕후의 잘못만은 아니었는데

조선의 정치체계는 선조대부터

붕당이 형성되어 나름 오늘날

더불어민주당 VS 국민의힘(미통당) 구도처럼

서로를 비판 , 견제하는 구도가 형성되었는데

숙종은 자신의 왕권을 강화시키기 위해

환국(숙청) 을 남용하며

함부로 한쪽 붕당을 죽이고 살리고를 반복했고

이때부터 조선 붕당체계는 차례로 무너지며

영조 , 정조대에서는 유능한 왕이 약해진 신하들을 끌고가는 형태를 보였지만

 

정조마저 사망해버리고

어린 순조가 왕위를 있자

이미 이전부터 세력들이 대거 환국 , 숙청되버려.

체계적인 선후배시스템도 사라진 조선 조정 대신들은

별다른 구심점을 찾지 못하고 있었고

 

결국 정조가 우려했던대로

다시금 척신들이 발호 , 들고 일어나게 되며 순조대부터

왕실 척신들이 권력을 좌지우지하는 척신독재 , 세도정치 시대가 시작됩니다

 

[세도정치]

그렇게 정순왕후는 수렴청정을 하다가

4년만에 다시 순조에게 권력을 내주었고

 

이때부터

순조의 장인 김조순을 중심으로 하는 안동김씨와

조득영을 중심으로 하는 풍양조씨는

서로 힘을 연합해서 세도가문이 되어

다른 붕당 , 신하들을 차례로 짓밟고

권력을 확장합니다

 

김조순

 

세도정치

 

세도정치는 세력 , 권력이 길인 정치라는 뜻으로

조선에서 이상적인 정치로 여긴

왕과 신하들이 조화를 이루는 '왕도정치'와 달리

권력이 세도가 , 세력가에 집중되어 있는 정치를 말합니다

 

이로인해 세도정치는 임금이 있는 조정이 아닌

재상과 고위관료들이 모이는

의정부(비변사) 에서 실행됬고

 

세도가들의 권력독점으로

과거제나 다른 등용문은 이미 실력과 무관한 내정자가 정해져있는 식으로 막혀버렸기 때문에

조선 후기부터는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더이상 관직에 진출할 수 없어졌기에

너도나도 세도가에 뇌물을 준다거나 하는 등으로 붙어 벼슬을 구매했고

이에대한 보상심리로 본전을 뽑기위한 관료들의 부패는 더욱 심각해지고

이는 고스란히 백성들의 세금 , 고혈을 쥐어짜는 것으로 돌아옵니다

 

세도정치시기 관직을 산 관리들이 본전을 뽑기위해 백성들에게 쥐어짠 세금들 , 삼정의 문란

 

[순조 VS 안동 김씨]

순조는 점차 1808년(순조 8년) 부터

어엿한 성인이 되어

스스로 국정에 참여하려는 의지를 보였고

 

순조는 정조의 아들답게 총명한 인물이었기에

이때부터 순조는 나라의 재정 , 토지 , 군사들을 파악하고

전국 팔도에 암행어사를 파견하며

민생을 시찰하게 됩니다

 

순조 추정 어진

 

관복을 벗고 일반 백성으로 위장해 지방관의 부패를 감시했던 암행어사 , MBC 월화 드라마  어사 박문수 (2002~2003) 

 

순조는 점차 장인인 김조순과 안동김씨 가문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려 했는데

이미 김조순과 안동김씨들은 폐지된 장용영의 군사력까지 흡수해

군권까지 장악하고 있었고

이에 순조는 따로 호위군사를 늘리려하다

안동김씨의 반대 상소에 부딪혀 취소하게 됩니다

 

좆까지 마시옵소서 전하 !

 

자신의 정치를 펴고싶어하는 젊은왕 순조 ,

그런 순조에게 두루뭉술한 미소를 지으며

응큼하게 정권을 장악해가는 안동김씨들의 알수없는 공존이 시작되었고

 

순조는 이에 경연도 부지런히 열고

군사훈련도 열심히 행했지만

군권을 장악하고 있었던 안동김씨 뿐만 아닌 여러 신료들 역시

순조의 명을 고분고분하게 듣지 않았습니다

 

순조는 전국에 암행어사를 파견해 보고를 듣고서는

잘못된 병폐들을 바로잡으라 지시했는데

안동김씨 밑 신하들은 순조의 어명을 씹고

단 한건의 보고도 올리지 않습니다

 

<순조>재작년에 각도의 모든 백성들의 고통을 기록하여 아뢰도록 명이 있었으며 ,

여름에 차례로 등문(사실을 임금에게 알리는 것) 것들을

묘당(의정부) 내려 보내어 실질적인 효과가 있도록 하였는데 ,

지금 이미 해가 지났지만 아직도 가지 폐단이나 가지 고통을 바로잡거나

소복(고침)하도록 품처함(품처=보고해서 처리)이 없으니 ,

어떻게 처음 생각했던 본래의 뜻이 있다고 하겠는가 ?

 

순조는 어진 성향의 임금이었기에

왕말을 무시하는 안동김씨에 대해 별다른 분노나 숙청은 없었지만

 

'좀 말좀 들어 안동김씨 철밥통 새끼들아 ~ㅠ'

 

하는 수준의 순조의 요구였고

대신들은 민생문제를 해결하라는 순조의 요구에도 

아래에 수령들이 알아서 할거니

나서지 말라고 합니다

 

[홍경래의 난]

슬슬 순조도 청년이 되며 머리도 커지고 있고

'안동김씨 발련들아 보자보자하니깐' 하며

분노 게이지가 올라갈쯤이었는데

 

막 순조의 분노게이지가 올라갈쯤에

하필

 

'홍경래의 난(1811년 , 순조 11년)'

 

이 터져버립니다

 

홍경래의 난 , 조선 멸망의 신호탄

 

태생적으로 춥고 거칠어서

미개한 동네라고 한창 차별 받던 서북방지역 , 평안도 백성들은

사회적 모순 , 지역감정이 폭발해버려 홍경래를 중심으로

뭉쳐서 조선 후기 최대반란을 일으켜버렸고

 

홍경래의 난 세력도

 

겨우 진압에는 성공했지만

조선백성들의 민심은 홍경래의 난을 기점으로

전국적으로 폭발해버려

점차 조선 민중 , 백성들은

전국적으로 조선왕실에 대한 충성을 거두게 되었고

 

홍경래의 난이 진압되고 홍경래는 살해당했지만

조선 민중들은 홍경래를 조선왕실과 세도가들의 봉건 질서를 타파하고

민중을 구원할 영웅 , 초인으로 여기며

그가 죽었음에도 마치 홍길동처럼 그를 신처럼 여기게 됩니다

 

[민심의 이반]

이전까지 왕실끼리나 사대부끼리들

혹은 왕실과 사대부들의 싸움은 벌어진 조선이었지만

홍경래의 난은 처음으로 백성 , 민중들이 조선과 조선 지배층들에 반기를 들었다는

유래없는 상황이 일어났고

 

이전까지는 조선 왕실가 사대부들이 꾸준히 성리학 , 유교를 민중들에게 전파시키며

유교적 향촌 사회를 건설하며 지배력을 강화시켜나가며 민중들에게까지

성리학적 질서가 보급됬지만

 

숙종대부터 상평통보 도입 , 정조때 시장의 자유화(신해통공) 등으로

민중들은 부를 축적하기 시작했고

 

조선의 민주화를 촉진시킨 상평통보(화폐의 사용)

 

조선 후기부터 점차 민중들이 경제권을 키워나가기 시작하며

민중의 힘이 강해지고

공자왈 맹자왈만 읊어댔던 사대부들에 대해 민중들은

점차 각성하기 시작했고

 

정조 사후부터 이런 사회적 모순이 폭발한 분수령이 바로

 

'홍경래의 난'

 

이었습니다

 

그전까진 다들 가난하고 먹고살게 농경밖에 없었던 조선이었기에

양반들은 대부분 지방 등에 다수의 노비와 대농장을 거느리고

서울에 올라와서 관직을 가지고

서로 아옹다옹하며 자리를 지키며 살아가던게 보통이었지만

 

조선 후기부터는

백성들이 상평통보라는 돈을 사용하고

시장에서 물건을 거래하며 부를 축적하며

거대한 부를 가진 평민들도 나타나고

일반 백성들도 축적한 돈으로

점차 돈을 주고 양반들의 지배에서 벗어나거나 신분을 사서 양반이 되는 등

신분제가 크게 동요하기 시작했고

 

조선 후기부터 조선 민중들은 자신들만의 한글문학 , 서민문화들을 발전시켜나가고

서양에서 들어온 기독교나 새로운 근대사상들을 접하기 시작하며

수백년간 이어오던 조선의 봉건적 질서는 뿌리부터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백성들이 풍족해져서 점차 봉건질서가 흔들리고

민주주의가 발달하는 단계인 것이었음)

 

조선 후기부터 발달한 서민문화 , 가면(탈) 을 쓰고 양반들의 허장성세를 조롱하고 풍자하는 탈춤 , 봉산탈춤

 

[순조의 멘붕]

이러한 상황에서 

한창 성년이 되어 의욕적으로 개혁을 시행하려했던 순조는

안동김씨의 방해뿐만 아닌

조선 민중이라는 거대한 세력의 반기를 직감하게 되었고

 

일반적 역사에선 안동김씨의 방해로 순조가 좌절했다 하지만

저는 조선 후기대부터 민중의식이 폭발적으로 성장해

실체도 뚜렷하지 않지만 그저 파도나 태풍같은 민중의 성장에

순조도 멘붕이 와서 점차 자포자기한 것이지

안동김씨의 방해는 빙산의 일각이었을 뿐이라 생각됩니다

 

순조의 좌절

 

결국 순조는 홍경래의 난 이후부터는

어떠한 충격을 받아버리고

스스로 개혁을 해야한다거나 정책에 의욕적으로 참여하려는 모습을 상실해버리고 침묵했고

 

홍경래의 난 직후 순조의 의욕상실 뿐만 아닌

하필 풍양조씨까지 타 세력과 맞다이를 뜨다가

서로 자폭해버려서

안동김씨는 홍경래의 난 이후부터는

권력을 독점해버렸고

엎친데 덮친격으로 순조는 그런 상황에서 건강까지 악화되어

국정에서 물러나고

이후부터 순조는 침묵에 일관하며

결국 반강제적으로 안동김씨 중심으로 국정이 운영됩니다

 

(사실 무기력한 지도자 + 봉건제에 지쳐버린 조선 백성 , 민중때문에

조선은 순조대부터 망해가기 시작했는데

안동김씨가 이완용처럼 조선 왕실의 욕받이가 된 격이기도 합니다)

 

순조는 점차 급변하는 조선에

이전 선대왕들과는 전혀 다른 경험을 하기 시작하게 되었고

그저 멘붕이 오게 됩니다

 

이에 한 신하는 순조에게

 

<신하>지금 우리 전하께서는

하늘에서 허여(허락) 성덕(성스러운 덕)으로 일을 하여야 때를 당하여

선치(백성을 잘 다스리는 것) 바라는 정성이 지극하십니다만 ,

즉위하신 이후로 침묵이 너무 지나쳐 정령(정치상 명령)

사무를 일체로 신하에게 일임하시고 ...

 

할 정도였고

그럼에도 순조는 모호한 말로 답을 회피할 뿐 별다른 입장을 내놓지 않습니다

 

이전까지 조선왕국에 여러 반란들은 많이 있었고

중종반정이나 인조반정 등 신하들이 왕을 갈아치우는 사건도 두번이나 있었지만

그렇다고 민중 , 백성들이 직접적으로 반기를 든 적은 없었는데

 

민중들이 등을 돌린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모든 국가에서

국가 멸망시기에 나타나는 것으로

 

곧 국가 멸망을 의미했고

홍경래의 난은 민중들의 반란이었기에

순조는 어진 성품이었음에도

홍경래의 난부터는 그냥 멘붕과 현타가 오지게 와서

안동김씨들이 국정을 장악하건 말건

정치에 뜻을 잃고 자기보신하기에 바쁘게 됩니다

 

[순조의 마지막 희망 효명세자]

그러나 그런 순조에게 비장의 무기 ,

유일한 희망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총명했던 자신의 하나뿐인 아들 '효명세자' 였습니다

 

효명세자 복원어진 (상상화) , 권오창 화백

 

효명세자 , 선원보감

 

효명세자는 얼굴도 잘생기고 능력도 좋은

능력충이나 외모충들이 부들부들 열폭할 정도로

엄친아중의 엄친아였고 (다 가진 놈)

 

이에 효명세자는

안동김씨들에게 눌려지내던 순조가 다음 조선의 미래로서 크게 아꼈고

백성들과 신하들도 사랑한 세자이자

ㄹㅇ 조선의 희망이었습니다

 

순조가 아플때 효명세자는 20세도 안되는 나이에

대리청정을 시작해

단호한 일처리로 조정 기강을 바로잡고

수령이 백성을 괴롭히면 엄벌을 내리고

 

또한 아버지 순조에 대한 지극한 효심을 드러내며

조선 왕실 , 왕권강화를 노력했기에

순조는

마치 태종이 세종대왕에게 나라를 맡기고 상왕이 된 것처럼

마음놓고 아들에게 정치를 맡기고 꿀을 빨 수 있었고

 

이에 순조와 신하들도 , 백성들도

효명세자에게 기대를 크게 걸었습니다

 

근데 , 그런데 ..

하필 효명세자는 갑자기 병에 걸려 22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해버렸고

이에 순조와 백성들은 극도로 통곡하게 됩니다

 

<순조의 효명세자 애도문>

아 ! 하늘에서 너를 빼앗아감이 어찌 그렇게도 빠른가.

앞으로 네가 상제(하늘님) 섬길 것이라고 여겨서 그런 것인가 ,

장차 우리나라를 두드려서 망하게 하려고 그러는 것인가 ,

아니면 착하지 못하고 어질지 못하며

덕스럽지 못하여 신명(천지의 신령)에게 죄를 얻어

혹독한 처벌이 먼저 윤사(대를 이을 자손)에게 미쳐서 그런 것인가.

내가 장차 누구를 원망하고 누구를 허물하며 어디에 의지하고 어디에 호소할까.

말을 하려고 하면 기운이 먼저 맺히고 생각을 하려고 하면 마음이 먼저 막히며

곡을 하려고 하면 소리가 먼저 목이 메니 ,

천하와 고금(과거와 오늘)

혹시라도 국가를 소유(즉위)하고서

나의 정경(형편) 같은 자가 있겠는가.

슬프고 슬프다

 

금지옥엽 같은 귀한 아들이 한창의 나이에 요절해버린 것이었고

조선의 마지막 희망이었던 효명세자가 사망해버리자

조선 왕실은 부흥의 희망이 완전히 끊겨버립니다

 

[순조의 불행했던 말년]

순조는 가족운이 없어도 심각하게 없었던 인물인데

먼저 뛰어난 아버지 정조는 11살때 급사해버렸고

 

순조의 자식들도 연속으로 순조보다 먼저 떠나버리는데

효명세자 이전에 순조의 아들과 딸이 죽고

이후 효명세자가 죽고 곧이어 순조의 두 딸까지 세상을 떠나자

 

순조는

민중의 반란 + 안동김씨의 전횡 + 효명세자의 죽음 + 혈육들의 죽음

이라는 연속적인 악재가 터지며

스트레스가 겹겹으로 겹쳐버려

순조까지 끝내 효명세자 사후 4년만에 사망해버립니다

 

순조의 죽음

 

그나마 총명해서 안동김씨를 견제하진 못했지만

그렇다고 안동김씨에게 완전히 눌리지도 않았던 순조까지 사망해버리자

권력의 공백을 안동김씨 및 세도가문들이 빠르게 파고들었고

조선은 점차 정상적인 국가기능을 상실하고

관료들의 부패가 시작되며 멸망의 길을 밟게 됩니다

 

<라봉봉>조선까들이 흔히 말하는 조선의 부패 , 유교의 문제점은

보통 조선 후기대의 이미지라 할 수 있는데

 

조선 후기부터도 조선 내부에서도

상공업이 발달하며 농민들이 점차 각성하는 등

조선에도 서양같은 도시상공인 , 부르주아 계급이 등장하고 있었고

 

단지 조선은 중국과 일본 사이에 껴서

서구권과의 교류도 늦을 수밖에 없었고

 

해양국가의 특색답게

더 빨리 변화를 받아들이고 조선보다 영토와 인구 , 자원이 더 풍부했던 일본이

조선보다 더 빠른 속도로 근대화에 성공한 후 조선을 침략한 것이지

 

조선 말기 한국은 미개했고 일본은 훌륭했다는 

조선까들 , 식민지 근대화론 주장자들의 말에 선동되어서는 안됩니다

 

하여튼 당시 백성들의 민주의식이 점차 성장하자

결국 신하들도

 

'왜 이씨 혈통이라는 이유만으로 우리가 이런 어린 임금을 모셔야하지 ?'

 

하는 의문이 들었을 수도 있고

결국 세계적인 흐름도 그랬고

조선 신분질서의 해체는 필연적인 것이었습니다

 

하여튼 ,

정조대까지는 백성과 신하들이 정조의 개혁에 동참하고

반란은 커녕 평화로운 세월을 보냈는데

 

순조는 아버지 정조의 정책을 이어

공노비 해방 등 개혁정책을 펴기도 했고

기본적으로 어질고 순한 성품에

정조의 아들이라는 혈연적 정통성 및 왕권도 강한 임금이었지만

 

순조는 백성들의 봉기에

자괴감과 무기력감에 빠져

정치에 뜻을 잃고 안동김씨들에게 나라를 맡기고 나태하게 여생을 보냈고

 

이에 조선 왕실은 근대화와 멀어지고

제국주의가 들고 일어나고

격동하는 '근대' 시기로 가는 조선의 골든타임을 놓쳐버렸습니다

 

반응형

'어린이 한국역사 > 2집 Humanism' 카테고리의 다른 글

꼭두각시 임금 철종  (0) 2020.09.28
정조를 흠모한 조선 헌종  (0) 2020.09.26
조선 마지막 불꽃 정조  (0) 2020.09.15
즉위 전의 세손 정조  (2) 2020.09.12
조선후기 최고명군 영조  (0) 2020.09.09
Posted by 라봉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