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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수아비 대통령 최규하>

[서울의 봄]

[과도기의 대통령]

[12.12 사태]

[허수아비 대통령]

[최규하의 침묵]

[최주사]

[청빈한 대통령]

<라봉봉>

 

[서울의 봄]

그렇게 ,

1979년 10월 26일 ,

10.26 사태로

갑작스럽게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게 살해당하자

급작스럽게 최규하 국무총리는 법에 의해

대통령권한대행(대통령 대리) 이 되었고

 

전두환이 나오기 전까지

 

경제대통령 박정희의 죽음으로 인한 대혼란 +

독재자 박정희의 죽음으로 다시 불타오르는 민주화에 대한 열망

 

이 섞여 엄청난 과도기가 생겨납니다

 

이 시기동안 박정희의 철권통치에 숨죽여있던 시민 ,

민주화 운동가들은 다시 일어서서

새로운 민주국가건설을 꿈꾸고 있었고

 

또한 ,

박정희의 철권통치의 근원이었던 군부 , 보수계 , 친일세력들은

이권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과

민주화 세력에 대해 심판 , 보복당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에 떨고 있었습니다

 

즉 ,

 

1979년 10.26 사건으로 박정희 암살 

~

12.12 사태로 등장한 신군부의 

1980년 5월 18일 광주 민주화운동 탄압

 

동안의 권력공백기인 1년 안되는 짧은 기간을

 

'서울의 봄'

 

이라 부릅니다

 

1980년 5월 15일 민주화를 열망하며 서울역에 모인 10만 시민 , 서울의 봄

 

[과도기의 대통령]

18년동안 박정희 독재에 익숙해져있었던

대한민국 관료들은

민간 , 군부 할 것없이

어느 누구하나 초법적 유신독재헌법에

대항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고

 

결국 가장 청렴하고 별다른 흠이 없었던

최규하 총리 ,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은

정치권에서

이런 상황에서 과도기의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는

암묵적 합의가 생겨나게 됬고

 

과도기에 갑자기 나서게된 최규하

 

최규하 역시

외교부 장관 및 허수아비 총리로 지내다가

갑작스럽게 맞이한 절대권력을 감당할 역량이 없었고

 

외교통 출신답게

그걸 스스로도 매우 잘 알았기에

여야의 양쪽 입장을 잘 견지하는 태도를 보이며

일단 야당의 반발에도

오랜 박정희 정권에 길들여진 여당의 입장도 알았기에

일단은 혼란을 막기위해

박정희 유신정권을 파기하지 않고 그대로 존속시킵니다

 

그리고 최규하는

1979년 11월 17일 특별담화를 발표합니다

 

<최규하 특별담화>새로 선출되는 대통령은

현행 헌법에 규정된 잔여 임기를 채우지 않고

현실적으로 가능한 빠른 기간 내에 각계각층의 의견을 광범위하게 들어서

헌법을 개정하고, 헌법에 따라 선거를 실시해야 한다

 

그리고 그해

12월 3일

통일주체국민회의(박정희가 만든 허수아비 회의) 에서

최규하는 거의 만장일치급으로 10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고

이에 최규하 대통령은 다음과 같이 자신의 입장을 밝혔습니다

 

<최규하>10.26 이후의 난국에 대해서

순시(삽시간)라도 헌정이 중단됨이 없이

대한민국의 계속성을 견지하고 국가의 보위와 국민의 생존권을 수호하면서

안정과 질서 속에 평화적 정부 이양을 기할 있는 기틀을 마련한다는 것이

본인에게 부여된 역사적 사명이라고 믿는다

 

최규하 대통령 취임식

 

선서하는 최규하 대통령

 

그렇게 최규하는 여당세력에는

그래도 박정희가 신임한 국무총리로서

무난한 느낌이었고

 

반군부 , 야당세력에게도

평소 청렴한 인물로서 공화당 세력들과는

반대의 인물이었기에

비록 민주선거로 뽑힌 대통령은 아니었지만

18년 박정희 독재의 과도기 대통령으로서는 최적임자이기도 했고

 

근데 하필

최규하는 대통령이 된지 일주일되 안되서

1979년 12월 12일 ,

12.12사태 , 전두환의 군사쿠데타가 터져버립니다

 

[12.12 사태]

10.26 사건을 수사하던 군부의 전두환 보안사령관이었는데

10.26 사건으로 차지철 경호실장이 죽고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무력화되자

정보기관들이 모두 마비되어

국가안의 정보기관은 국군보안사령부로 몰빵되었고

 

군정보기관인 보안사령부(이후 국군기무사령부)

 

이로 인해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순식간에 자신에게 국가권력이 집중 , 증폭되감을 느꼈고

비상상황에서 검찰 , 경찰 , 헌병까지 장악한

초헌법적 절대권력을 손에 넣게됩니다

 

전두환 보안사령관

 

전두환의 등장

 

이때 전두환이 대통령마냥 행세하자

이에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은 전두환을 견제하며 쫓아내려했는데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결국 궁지에 몰린 전두환은

최규하 대통령 승인 없이

상관이었던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대통령 시해범 김재규와 연관이 있다며 체포하며

1979년 12월 12일 ,

하극상 , 쿠데타를 일으켰고

군부 , 정권을 장악합니다

 

12.12 사태 주역들인 전두환과 노태우와 군내사조직 하나회 멤버들 

 

끌려가는 정승화 참모총장

 

이때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총리 공관에 들어가

최규하 대통령에게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체포에 대해 보고하자

최규하 대통령은

 

<최규하>국방부 장관은 알고 있느냐 ?

 

하며 노재현 국방부 장관을 불러오라 했는데

 

노재현 국방장관

 

노재현 장관은 총성이 들리자

잠적해있던 상황이었고

전두환 측 장성 5명은 최규하에게 정승화 총장 체포에 대한 재가를 요청했지만

최규하는

 

<최규하>관례가 어쨌든 나는 법에 규정된 절차대로 하려고 하니

국방장관을 찾아오라

 

했고

결국 최규하는 신군부 장성의 압력에 밤새 버티다가

노재현 국방장관이 나타난

다음날 5시 새벽에서야 정승화 총장 체포를 재가합니다

 

시민들은

박정희 군부정권이 끝나고

민주화 , 서울의 봄이 오는걸로 여겼지만

 

12.12사태로

곧바로 등장한 신군부 ,

전두환 , 노태우 등의 신군부 세력에게

다시 군부가 정치권에 난입하게 되었고

최규하 대통령은 신군부 세력에게 실권을 박탈당합니다

 

[허수아비 대통령]

권력은 빈자리를 용납하지 않았고

허수아비 총리였던 최규하 대통령을

진짜 대통령으로 인정하는 국민 , 관료 , 군인들은 없었기에

곧바로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신군부 전두환에게

모든 권력이 집중되었고

 

그렇게 허수아비 대통령으로 전락한 최규하 대통령은

바로 옆에서는 신군부 전두환의 압박을 , 

재야에서는 대권을 노리던

김영삼 , 김대중 , 김종필 3김의 압박을 박게 되었고

최규하는 양쪽으로 압박받게 됩니다

 

1980년 3월 1일 청와대 최규하 대통령에게 중장 진급신고를 하는 전두환

 

허수아비 대통령

 

1980년 5월 18일

광주에서 정부군의 시민 유혈진압 , 학살이 있었고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나며

최규하 대통령의 정치적 입지는 더욱 좁아지게 되었고

가뜩이나 이도저도 아니어서 우물쭈물했던 최규하는

결국 5.18 민주화운동 유혈진압에 대한 압박감 , 책임감등에

1980년 8월 16일 스스로 대통령 자리에서 사임했습니다

 

1980년 5월 25일 광주민주화운동에 특별담화하는 최규하 대통령

 

그러나 사람들은

최규하의 하야는 스스로 일어난 것이 아닌

신군부의 전두환의 겁박에 의한 강제하야라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최규하 대통령은 그렇게

1년도 안되는 짧은 허수아비 대통령직을 하며

곧 물러나게 되었고

 

비록 대한민국 허수아비 대통령이었지만

전두환이나 신군부 역시 대한민국을 부정한 인물들은 아니었기에

허수아비였던 윤보선 대통령과 더불어

최규하 대통령은 전직 대통령으로서의 예우를 받게 되었고

연금도 나왔지만

평소처럼 극도로 검소한 성품을 죽을때까지 유지합니다

 

1986년 전두환 대통령의 예우를 받는 두 허수아비 대통령 윤보선(가운데) 과 최규하

 

[최규하의 침묵]

이후 전두환 시대가 끝나고

민주화가 이루어지며

점차 10.26 사태 , 12.12사태 , 5.18 광주학살의 한가운데 있었던

최규하 전 대통령에게도 진장을 밝혀야한다는 요구 , 압박이 생겼고

 

조용히 침묵하고 있었던 전직 대통령 최규하는

1988년 광주사태 등에 대한 5공 청산청문회가 열리자

국회 청문회에 출석하라는 명령장을 받았는데

최규하는 이를 거부했고

지인들에게는

 

<최규하>그런 얘기 그만하자

 

라며 말을 돌렸습니다

 

결국 민주화운동가출신이었던

김영삼이 대통령이 되고나서

김영삼 대통령은

1996년 역사바로세우기를 내세우며

신군부 출신 전직대통령 전두환 , 노태우를 법정에 세웠고

최규하 역시 관련 사건들로 법정 증인으로 불려나갔는데

최규하는 증인선서에 앞서 입장발표를 하며

 

<최규하>전직 대통령이 재임 중에 행한 국정행위에 대해

후일 일일이 소명이나 증언을 하는 것은 국가원수의 지위와

삼권분립상의 독립성에도 영향을 줄 가능성이 있다 ,

 

일시적 비난이나 화살을 받는 한이 있더라도

선서나 증언을 할 수 없다

 

고 밝히며

침묵하는 모습으로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1996년 11월 14일 12.12사태 및 5.18 재판과 관련해 법정 증인출석한 최규하 , 그러나 증언을 거부한 최규하

 

[최주사]

최규하는 모범적 공무원이었지

위기를 대응하는 리더나 인재를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대통령도 아니었던

한계를 보인 인물이었고

 

대통령재임시에도 국민들이 그가 우유부단하고 지나치게 신중하기만해서

최대통령이 아니라 최주사(6급 공무원 정도 수준이라는 뜻) 라 조롱했는데

최규하 대통령은 '최주사' 라는 별명을 듣고

 

'뭐야 최주사 ?'

 

라며 불같이 화를 내던

찌질이 기질도 보였습니다

 

또한 결정적으로 최규하 대통령은

정작 중요한 12.12사태나 광주학살 등의 진상에 대해서는

침묵하며 역사의 의문을 남긴 인물입니다

 

아무리 처세 , 개인의 권리로서 묵비권이 존중된다 하더라도

역사적 사건에 대해서

무조건적인 침묵은 올바른 처세라 볼 수 없으며

그의 유일한 오점으로 기록되는 것이고

애초에 그런 인물이었기에

박정희가 김종필이 아닌 최규하를 국무총리 ,

2인자 직에 앉혀둔 것이기도 합니다

 

[청빈한 대통령]

근데 ,

최규하는 관료로서는 옛날 명문가 선비의 재림을 보여줬다 할 정도로

청빈한 모습을 보였는데

 

여러 비판에도 그의 청렴했던 공직생활에 대한 비판은 없고

국무총리 , 대통령을 지낸 사람이 맞나 싶을정도로

극도로 검소한 생활을 하다 서거한 인물입니다

 

그는 대통령까지 했음에도

2006년 87세로 자택에서 서거할때까지

국무총리때 강원도 태백시 광부들과 한 약속을 지키려

죽을때까지 연탄보일러를 사용했고

 

<최규하의 약속>광부들의 노고를 잊지 않고자 평생 연탄을 때겠다

 

최규하 대통령이 죽을때까지 사용한 연탄보일러

 

즐겨신던 태화고무신은 밑창이 달면

고무타이어 조각을 붙여 신었고

 

청와대에서 사용하던 가구들을 폐기하지 않고

사저에 들여와 재활용했으며

1953년 태어난 딸을 위해 장만한 선풍기를

2006년 서거때까지 사용했고

주황색 플라스틱 이쑤시개를 닦아서 계속 재활용 ,

달력 뒷면을 오려서 이면지로 사용했다는데

 

검소했던 최규하 대통령 , 최규하 대통령 자택

 

이건 검소가 아니라

좀 미련한 느낌도 드는데

딱 옛날 어른들이 하던 애끼는 모습들이었고

 

최규하는 한국사 대통령중 가장 짧은 재임의 비운의 인물이지만

가장 청렴한 대통령이라는 영광을 누린 인물이기도 하고

 

고위공직자의 사치는 곧 국민들의 피해로 돌아오기때문에

좋은 정책을 하는 것 못지않게

나쁜 사치를 안하는 것도 중요하고

 

그의 근검절약정신은

옛날 황희 설화의 청백리 황희정승이나

유학자 퇴계이황의 모습도 보이고

옛날 선비들이 그랬던 것처럼

오늘날까지 고위공직자들의 모범적 사례라 생각합니다

 

최규하 추도식에 참여한 전두환-이순자 부부

 

하여튼 ,

윤보선 대통령이나 최규하 대통령 사례를 보면

알 수 있듯이

허수아비질이라도 대통령 노릇을 하려면

역시 공부를 ㅈㄴ게 많이 해야되고

부패한 주변 사람들과 달리 청빈한 모습으로 살아야 합니다

 

<라봉봉>윤보선 대통령이나 최규하 대통령의 경우는

각각 민주 , 보수계의 허수아비 대통령이었으며

짧은 집권속에 곧바로 쿠데타를 맞았기에

딱히 한건 없는 인물들이고 국민들 기억속에서도 잊혀진 대통령들입니다

 

무능하고 무색무취한 인물들이기도 했으며

그럼에도 이들은 이런 혼란 , 격변기속에서

조용히 양쪽세력들의 압박속에서 중용의 자세를 보이며

대규모 유혈사태등은 막으려 노력했던 인물들이고

 

대부분 재임 혹은 퇴임후 거의 파멸하는 한국대통령들이지만

윤보선이나 최규하같은 대통령은 비록

존재감은 없을 지언정

평소 청빈한 모습들로 퇴임후 큰 화를 입는 것은 막은 인물들입니다

 

최규하는 온건보수정치인으로서

보수적 가치를 추구한 인물들이고

박정희정부의 대표 외교관으로 활약한 인물로서

서양에서 추구하는 고급스러운 보수정치인의 품격을 보여준 인물인데

 

서양 보수정치인들은 국민 , 민중들의 반대에도

포퓰리즘(대중주의 , 인기에 치중하는 정치) 에 휘둘리지 않고

끝까지 준법을 지키며 고고한 품위를 지키는 전통이 있고 

 

최규하도 나름 먹물먹은 정치인답게

자신 역시 서양정치인처럼

법치국가 대통령의 모습을 보이려 노력했는데

 

최규하의 의도는

대통령 , 행정부의 권력을 유지하며

퇴임후에도

후임 대통령들이 화를 입는 것을 막기 위해

전직 대통령으로서 묵비권을 행사한 인물인데

 

문제는 묵비권 , 시스템 법치주의 역시

상황에 따라 잘 사용해야 폼이 나는 것이지

최규하처럼 역사 , 국가적 중대사건 , 학살등에서 침묵하는 것은

결코 정의로운 정치인의 모습도 아니고

보수주의의 가치에도 어긋나는 모습입니다

 

나름 한국 정치사에서도 서구식 민주주의 제도를 흉내내려는 시도들은 있어왔지만

지리적 풍토와 본질을 망각하고 껍데기만 따라해서도 안되고

진실을 밝혀야할때는 밝혀야 되는 것인데

그역시 한계가 있는 유신 정치인이었으며

애초에 불의에 침묵하지 않는 정의로운 성향의 정치인이었으면

박정희가 허수아비 총리로 임명하지도 않았을 인물입니다

 

단 ,

오늘날 한국 정치인들의 사치와 부패는

가히 옛날 세도정치시기 안동김씨등 세도가문들의 그것과 다를 바 없어보이는데

최규하 대통령은 비록 허수아비였지만

퇴임후 한국 정치인 , 대통령이 가져야할

청렴한 자세의 본보기를 보여준 인물이고

전 지금도 제가 낸 세금으로 월급이 나오는

정치인 , 대통령 월급으로

거대한 집과 부동산들을 살 수 있다는거 자체가

이해가 되지 않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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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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