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와 제3공화국>
[국가재건최고회의]
[화폐개혁]
[보수 윤보선 VS 진보 박정희]
[경제제일주의]
[한일국교정상화]
[베트남 전쟁 한국군 파병]
[경제개발 5개년 계획]
[경부고속도로]
[국산화]
[남북체제경쟁]
[3선 개헌]
[새마을운동]
[전태일 열사]
[김대중 VS 박정희]
<라봉봉>
[국가재건최고회의]
그렇게 군부의 박정희 소장은
5.16 군사정변을 성공시켜
수도 서울을 점령하고
박정희는 국가재건최고회의를 조직하여
자신이 의장이 되어
정치인들의 정치활동을 금지시키며
군정(군인이 하는 정치) 을 실행했고
구악일소 , 옛날의 악을 한거번에 싹 제거한다는 명분으로
혁명재판을 통해
3.15 부정선거 관련자 소탕 , 이정재 등 정치깡패 사형을 하며
국민과 지식인들의 지지를 얻게 되었고
농가부채 탕감 , 농산물 가격안정정책 , 빈민구휼을 시행해서
농민 , 빈민층들의 마음까지 얻어버리며
점차 사람들도 일반적 쿠데타라기보다
진짜 박정희가 주장하는대로
'군사혁명'
이 아닐까라 여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
총으로 불법적으로 권력을 잡은 자답게
억울하게 누명을 쓴 민간인이 사형당하기도 했고
동아일보 기자들을 연행하며
언론에 재갈을 물렸고
또 비밀리에 일본과 결탁해
일본재벌들에게 정치자금 6600만 달러를 받아옵니다
군정을 시행한 박정희는 불법적으로 정권을 잡은 자답게
국민들에게 인정을 받기 위해
당장에 눈에 보이는 성과를 내야했고
곧바로 낙후된 한국의 경제개발에 집중해
억압된 국민들의 불만을 빵으로 달래려 노력합니다
[화폐개혁]
박정희는 재정적자해소 , 경제개발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화폐개혁을 실시했고
1962년 6월 10일
지하경제를 없애겠다는 명분으로
긴급통화조치와 긴급금융조치를 단행해
환으로 쓰이던 화폐단위를 오늘날 사용하는 원으로 바꾸어버렸고
철저한 극비리에 진행했기에
이 개혁으로 사회에 큰 혼란이 생겼는데
일방적으로 진행된 이 정책에
재계와 미국이 극도로 반발했고
박정희의 예상보다 지하자금이 적어서 별다른 효과가 없었습니다
또 박정희는 외국인들의 부동산 소유를 금지하는 등으로
국내의 화교(중국인) 들이 자리잡지 못하게 했고
이로인해 아시아 경제를 쥐락펴락하던
화교들은 한국에서는 힘을 쓰지 못하고
(오늘날에도 특히 동남아는
화교들의 경제장악이 깊음)
한국내 화교들은 재산축적 , 부동산 중개업 등은 하지 못하게 되어
한국으로 귀화하는 등으로 한국사회에 동화되었고
그외에는 짜장면 장사를 하는 등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극단적 외국인에 대한 배타주의는 역시 문제가 되지만
아시아에서 중국자본 , 화교들이 끼치는 영향력이 상당하고
한국인들은 이전 구한말 화교자본 , 왕서방들의 갑질에 시달린 악몽때문에
(김동인 소설 감자에도
왕서방이 돈으로 조선처녀를 따먹는 등
악행들이 묘사됨)
박정희의 화교자본 배타 정책은 대게 잘한 것이라 평가됩니다
[보수 윤보선 VS 진보 박정희]
그렇게 박정희는 급진적 개혁으로 혼란도 일으켰지만
많은 개혁에서 성공해
국민들의 인기를 얻어가는데
점차 민정으로 이양할 시기가 다가오자
군인 박정희는
제 2공화국 시기 내각책임제가 아닌
대통령 중심제의 개헌을 단행하고
직접 민간인 신분으로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고
공화당으로 출마한 박정희는
민정당(민주당) 윤보선과 붙었는데
윤보선 등 야권인사들은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의 군정을 비판하고
박정희는 방어하는 형세였고
군부에 있던 박정희가 양지 , 민간인 신분으로 대선에 출마하자
그가 이전 남조선로동당에서 활동한 경력이 다시 드러나게 되었고
보수로 굳어진 오늘날 박정희의 이미지와 달리
당시는 오히려 민정당과 윤보선이 보수 스탠스를 취하며
박정희를 빨갱이라 디스하고
박정희는 매카시즘 , 빨갱이 몰이 공세라며 지금은
확실하게 전향했다 주장합니다
재밌는건 당식 군 내부에서는
박정희의 남로당 전적때문에
박정희를 불신했기에 의외로
현역 육군대장이었던 박정희가 아닌
윤보선을 압도적으로 지지했고
박정희는 결국 북한과 접경한 북부지역이나
보수적 성향이 높은 도시 지역에서는
윤보선에게 참패하고
이전 이념공세에서 좌익으로 몰려 큰 피해를 본
전라도 , 경상도 등 농촌지역에서
농심 , 농민들의 마음을 압도적으로 얻으며
15만표차이라는 아슬아슬한 차이로
겨우 윤보선을 따돌리고 당선됩니다
당시 윤보선이나 민정당(민주당) 이
사실 이승만 부하출신들이 독재자 이승만에 반발해 만든 정당이었기에
온건보수성향을 띄었고
4.19 혁명으로 정권을 잡은 민주당은
이런 전력때문에
이승만 정권 부역자들을 미적지근하게 처리했고
박정희는 반대로
이승만 정권 부역자들을 신속하게 처벌하며
반 이승만 세력들의 호응을 얻고
농촌과 빈민들을 적극 구휼하며 농민과 빈민 , 진보층들의 지지를 얻었고
또 친일파 집안 금수저출신으로서 귀족적 성향이 강했기에
구 정치인을 대표했던
윤보선과 달리 (단 윤보선은 친일집안에서 성장했지만 독립운동을 한 인물)
박정희는 일본군 장교 출신이지만
자신은 서민 ,
가난한 농촌 가정에서 성장했다는 이미지를 내세우며
젊음과 과단성 있는 이미지로
점차 혁명 , 진보의 아이콘으로 떡상합니다
또 다행히 미국의 우려와 달리
의외로 선거는 공정하게 치뤄졌기에
미국은 안심하게 되었고
박정희는 5.16 군사정변 ,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치명적 약점이 있었지만
결국 5대대선에서 간신히 승리하며 민주적 정통성까지 얻게되어
호랑이가 날개를 단 격이 됩니다
이로인해
박정희는 5대 대통령에 취임하며
제 3공화국을 출범시켰고
총선에서도 승리해
공화당이 의석의 62% 이상을 확보합니다
[경제제일주의]
박정희는 평생 주홍글씨가 된
일본군장교 , 남로당 , 쿠데타
등의 이미지에서
국민들의 눈을 돌리기 위해
경제제일주의를 내세우며
박정희는 경제에 올인하며
'경제제일주의'
를 내세웠고
당시 국민들은 굶주림 속에서
민주당이 주장한 굶주림 속의 공허 , 혼란의 민주주의보다는
군부독재자 박정희가 약속한 쌀밥에 고깃국 , 경제건설이 더 깊게 다가왔습니다
[한일국교정상화]
제 3공화국은
물가안정 , 장기 경제개발정책 , 수출진흥을 하려 했고
경제개발 자금을 끌어오기 위해
급하게 일본과의 국교 , 외교를 정상화하려 하는데
1945년 8월 15일 광복 이후
한국과 일본의 외교는 단절되있었고
이승만 대통령은 본인 스스로가 독립운동가 출신으로서
일제강점기시절엔 일본에게 쫓기던 신세였기에
일본에 대한 반발감이 극심한 인물이었고
이승만 정부시기에는
재산 청구권 문제(식민지 시절 배상) ,
평화선(동해바다) 문제 때문에
한일 국교 정상화가 되지 않던 시기였고
박정희는 곧바로 급진적 경제개발을 해야했기에
일본의 돈을 끌어오기 위해
국민들에게 제대로 알리지도 않고
비밀리에 , 급하고 졸속하게 한일국교정상화를 시행했고
이로인해 1964년 ,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한일수교 반대시위 , 6.3항쟁이 일어나는 등
국민들의 거센 반발을 받았고
박정희는 곧 비상계엄과 휴교령을 선포해
학생운동을 진압하고
1965년 한일기본조약을 체결하며
한일국교를 정상화시키고
졸속적으로 , 국민들과의 합의 없이
식민지배 시절 역사문제를 합의해
오늘날까지 큰 역사문제 , 한일 외교문제를 가져오고 있습니다
[베트남 전쟁 한국군 파병]
또 박정희는
쿠데타로 집권했기에 미국 눈치를 극도로 볼 수밖에 없었고
결국 미국의 인정을 받기 위해
공산게릴라 , 베트콩(북베트남)에게 고통받던
베트남 공화국 , 남베트남을 지원하기 위해
미국의 우군으로서 베트남 전쟁에 대규모 군사파병했고
(2차 세계대전 시기 일본군이 동남아에 군대를 보낸 것같은
식민지배 , 침략목적 파병이 아닌
당시 자유국가였던 남베트남을 지원하기 위한 파병이었음)
이로인해 미국은 박정희가 동맹임을 확인하게 됬고
미국은 베트남에서 베트콩들의 엽기작전에 당황하며
비싸고 무기력하게 움직이던 자국군에 비해
저렴한 가격으로 매우 용맹하게 용병해주던 한국군을 신뢰하게 됬고
이로 인해 한국전쟁 이후 다시금 한국에 많은 경제 , 군사지원을 해주게 됩니다
한국내 야당에서는 박정희가
베트남전에 한국청년들을 팔아넘겼다고 비판 , 반발했지만
이로인해 한국 경제개발 자금 및 국제적 신뢰를 얻게 됬고
한미 양국 역시 한국전쟁때 한국이 미국에 진 빚을 갚았다 여기고
미국은 한국을 신뢰할 수 있는 미국의 혈맹으로 인정하게 됩니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
결국 한일수교 , 베트남전쟁으로
박정희는 일본과 미국의 신뢰를 얻어
일본자금과 미국자금을 한국으로 끌어올 수 있었고
곧바로 그 자금으로
제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추진하였습니다
한국전쟁으로 모든게 파괴되어
황무지화 되었던 한국은
이시기부터 본격적인 고도경제성장이 시작되었고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이런게
사실 공산국가에서 행해지는 국가주도 사회주의 경제개발 방식이었지만
박정희 정부의 5개년 계획은
그런 사회주의 경제개발 모델이 아닌
국가가 부패를 통제하고 우수한 능력의 경제관료와 산업전문가들을 동원해
국가는 민간에 큰 틀을 제시하기만 하고
시장의 주체인 민간 , 기업 등은 정부계획에 맞추어 시장활동을 펼쳤고
수출 중심의 정부정책에 맞게 수출진흥확대에 노력합니다
(박정희가 일본군장교와 남로당을 왔다갔다한
극단의 전력때문인지 의외로 보수+진보가 혼합된 정책을 많이 펼쳤음)
그렇게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1966년 끝나며
연평균 경제성장률 7.9% , 수출증가율 43.6% 라는 성공적인 결과로 끝났고
1967년부터
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시행되는데
박정희 정부는 2차 경제개발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전후 경제개발로 번영을 맞던 서독(자유 독일) 에
광부와 간호사를 파견해 외화를 송금해오도록 했고
베트남 전쟁 파병을 통한 미국지원 시작 등으로
경제성장에 박차를 가했습니다
[경부고속도로]
1970년
박정희를 상징하는
경부고속도로를 완공하며
국가 인프라 확충에 힘썼고
경부고속도로는
박정희가 일제강점기 만주군 시절 배운 측량 , 측도법을 활용해
박정희가 직접 스케치 , 디자인 한 것으로 유명하고
오늘날 한국 경제의 핏줄이 되었습니다
[국산화]
박정희는 시멘트 공장 , 비료공장 들을 지으며
점차 외국물품에 대한 수입 의존들을 줄여나가고
자국기업들을 육성해 수입대체를 가속화시킵니다
이전 구한말시기 ,
한국 고종 광무황제와 일본 메이지천황은
각기 광무개혁 , 메이지유신으로 맞붙었는데
일본 메이지 천황은 서양에 대한 물품 , 무기 등을
자국기업들이 직접 생산하게해
조잡할지언정 국산화를 이루어내어 부국강병을 해내었고
한국 광무 황제는 서양에 대한 물품 , 무기 등을
현금으로 구입하며
겉은 강한 근대군대를 양성했지만
국산화에 실패해 대외의존도가 높아지며 결국
일본의 식민화되었기에
그런 경험때문에
일본의 영향을 깊게 받은
박정희는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한국 근대화의 모델로 채택했고
박정희는 한국 근대화를 시작하며
적극적인 자국물품 국산화를 시행했고
군장비도 국산화가 시작됩니다
단 , 이로인해 극단적 외국 물품 금지 및
한국 재벌들이 조잡한 상품들로
국내 시장을 독점 , 장악하며
오늘날까지 자국내에서 횡포를 부리는 환경을 조성합니다
[남북체제경쟁]
1967년 ,
또다시 대선이 시작되며 박정희는
6대 대선에서 국민들에게 중간점검을 받게 되었고
고속경제발전의 성과로
무난하게 구정치인의 상징이었던 신민당 윤보선 후보를 꺾고
재선에 성공합니다
박정희는
고구려 대무신왕이나
고려 광종 ,
조선 태종 이방원처럼
건국이후
국가 기틀을 놓아야하는
엄격한 카리스마형 지도자에 속했고
이 시기에도 기틀을 놓는 일에 집중해
주민등록증 제도를 시행하며
주민등록증 1 , 2호는 박정희-육영수 부부가 받게 되었고
박정희는
110101-100001 ,
육영수는
110101-200002 번호를 부여받았습니다
남한 , 한국의 경제개발이 가속화되던 이시기 ,
점차 북한의 견제가 시작되었고
당시
북한 역시 동아시아 공산주의 최전방으로서
소련의 지원을 받아 경제개발이 쑥쑥 진행되고 있었고
남한 역시 동아시아 자유주의 최전방으로서
미국의 지원을 받아 경제개발이 쑥쑥 진행되던 시기였기에
당시까지 격차가 크지 않던
남한과 북한은 체제경쟁 , 경제경쟁 , 사상경쟁을 본격화하던 시기였고
북한은 김신조 사건과 푸에블로호 피랍사건을 벌이며
여러 무력도발을 벌이게 됬고
결국 이시기부터
남한은 자유주의 분위기가 쇠퇴하고
적극적 반공 , 공안분위기가 조성됩니다
[3선 개헌]
점차 박정희는 인민혁명당 사건 등
점차 간첩 조작사건을 벌이며
초법적 권력을 행사하며 독재자화 되었고
일단 공화당 내부에서는
당시까지 박정희 각하가 2번 대통령을 했으니
다음 후계자를 정할 것을 논의했는데
박정희가 술자리에서 3선욕심을 나타내자
여당 내부에서도 박정희를 두려워하게 됩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박정희는
3선 개헌안을 통과시켜
결국 3선에 나서게 되었습니다
[새마을운동]
독재화되는 것과 별개로
이전부터 시행하던 경제개발은 궤도에 오르게 되어
여러 기반시설 건설 , 소비재 국산생산 ,
노동집약적 중화학공업이 발전되었고
농촌생활진흥운동인
새마을운동도 시행되
낙후된 초가집의 농촌들을 슬레이트 지방으로 바뀌고
농츤의 흙길은 시멘트길로 변화합니다
[전태일 열사]
그러나 ,
점차 사회양극화도 시행되어
청년노동자 전태일이 열악한 도시노동자들의 현실을 알리며
분신자살하고
이를 시작으로 전국적인 노동운동이 시작됩니다
<전태일>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
일요일은 쉬게 하라 !
노동자들을 혹사하지 말라 !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 !
[김대중 VS 박정희]
박정희는
3선 개헌을 시행한 뒤
다시 나선 3번째 대선 , 7대 대선에서는
신민당 김대중 후보를
53.2%(박정희) VS 45.3%(김대중)
득표율로 따돌리며
3번째 집권에 성공했는데
점차 약빨이 떨어져가던 박정희는
야당내 갑자기 등장한 유능한 인물이었던 김대중의 급부상에
큰 위기를 느꼈고
궁지에 몰린 박정희는 선거에 국가 예산에 15%를 쓸 정도로
7대 대선은 부정 , 관권선거화 됩니다
민주공화당 박정희 VS 신민당 김대중 후보가 경합했던
7대 대선 당시
공화당 내부반발에도 기어이
3선에 나섰던
박정희는
<박정희>다시는 국민에게 표를 달라고 하지 않겠습니다
했고
박정희의 독재화를 간파한 김대중은
<김대중>박정희가 이번에도 집권하면
총통제(히틀러 총통같이 독재화)가 실시될 것입니다
라고 말했고
결국 박정희는 이후 선거가 필요없는 유신독재자가 되어
두 인물의 말은 결국 둘다 맞아 떨어지게 됩니다
하여튼
겨우 3선에 성공한 박정희는
1971년 7월 1일 , 7대 대통령에 취임하며
추악한 마지막 합법정권을 이어가고 있었고
점차 경제성장률도 떨어지던 시기였고
국제사회 역시 자유주의와 공산주의 세계간
화해 , 평화무드가 시작되어 냉전이 무뎌지며
박정희는 경제성장 , 반공을 국시로 하는 정책에
제동이 걸리게 되었고
궁지에 몰리며
점차 국정을 수행하는데 장애가 걸린
박정희는 최후의 발악 , 유신을 선포하며
극도의 무리수를 두며
자신이 만들었던 , 민주정 형태를 유지했었던
제 3공화국을 직접 부셔버리고
선거가 이루어지지 않고
대통령이 황제처럼 지 꼴리는대로 다 할 수 있는
제 4공화국 , 유신정권을 선포합니다
<라봉봉>박정희는 그가 존경한 이순신보다는
조선 급진개화파였던 김옥균같은 모습이 보이는데
김옥균은 실패한 박정희고
박정희는 성공한 김옥균 같고
실제로 박정희의 군정 , 박정희 정부 시기 개혁 정책들은
매우 급진적 성향의 개혁이었고
진보적 정책도 상당수 포함되 있습니다
일단 정치라는게
진보 VS 보수의 문제가 아니라
유능 VS 무능 문제인 것도 있어서
당대 김대중 등장 전까지는
박정희보다 유능한 정치인이 없었던 것도 사실이고
박정희는 정권을 탈취한 후
청년시절부터 품어온 이상을 펼치기 시작했고
독립 , 건국후 혼란에 빠져있었던 한국의 기틀을 놓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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