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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군 장교 박정희>

[사직결심]

[혈서]

[기회의 땅 , 만주]

[신천지를 찾아서]

[만군인맥]

[쿨리]

[상식과 비상식]

[우정의 구타]

[박정희의 측량술]

[다카키 마사오]

[만주 스케일]

[만주군 수석졸업]

[일본 육사]

[만주군 장교 박정희]

<라봉봉>

 

[사직결심]

하여튼 권력과 힘을 동경한 박정희는 결국

안정적이나 답답했던 교사생활을 그만두고

만주에 가서 군인이 될 것을 생각하는데

 

일제강점기 말기 일본제국군은 광폭화되었고

일본군은 아시아 각지로 파병되었기에

일본 군인들은 가장 높은 봉급을 받고

칼을 차고 다니며

일본순사 등 다른 일본 공무원들까지 무시할 수 있는

최강 직업이었기에

결국 박정희 교사는 초딩교사라는

당대에도 인정받는 엘리트 ,  안정적인 직업을 그만두고

어린시절부터 동경하던 군인이 될 것을 생각합니다

 

 

[혈서]

1938년 5월 여름 ,

박정희 교사는 숙직실에서

다른 선생님에게 말했습니다

 

<박정희>저는 아무래도 군인이 되어야겠습니다

제 성격이 군인기질인데

문제는 일본육사에 가려니

나이가 많다는 점입니다

만주군관학교는

덜 엄격하다고 하지만 역시 나이가 걸립니다

 

하고는

결국 고향에 다녀와 호적속 나이를 고칩니다

 

또 박정희 교사는 이후에도

어떻게하면 만주군관학교에서 환영해 줄까 고민했는데

그 이야기를 들은 선생님은

 

<동료교사 유증선 교사>박 선생 ,

손가락을 잘라 혈서를 쓰면 어떨까 ?

 

라고 했는데

박정희 교사는 즉각 찬동해

즉시 행동에 옮겨서

바로 옆에 있던 학생 시험용지를 펴서

면도칼로 새끼손가락을 찔러 피를 냈습니다

 

박정희 교사는 핏방울로

시험지에다가

 

'진충보국 멸사봉공'

 

이라는

 

충성을 다해 나라에 보답하고

개인의 욕심을 버리고 공익을 위해 힘쓴다는

뜻의 혈서를 썼습니다

 

 

한국사에서 피나는 손가락으로 쓴 유명한 혈서가 두개가 있는데

 

하나는 안중군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기 전

자신의 왼쪽 약지 손가락을 잘라(단지)

태극기 앞면에 '대한독립' 이라고 쓴 것이었고

 

안중근 혈서 태극기

 

하나는 박정희가

만주군관학교(일본이 만든 만주 육사) 에 입학하기 전

일제에 피로 충성하겠다는 의미로

손가락에 면도칼로 살짝 피를 내서 

초딩들 시험지에 '진충보국 멸사봉공' 이라 쓴 것입니다 (출세를 위한 SHOW)

 

박정희 역시 대구사범에서 민족주의자 선생님들에게

한국사와 민족의식을 받았음에도

일본군인이 되려했고

 

현실적으로 말하자면

박정희는 일본을 싫어했고

성격도 군인성격이 강해서

그저 권력이 강한 군인이 되고 싶었는데

당시 나라가 없어 갈 수 있는 군대가

현실적으로 먼 중국땅에 가서 가족들을 다 포기하고 가야하는

독립군에 입대하는 것은

가난한 홀어머니가 있는 박정희에겐

너무도 어려운 길이었고

일단 등용문이 열려있는

일본군에 입대해서 일본의 힘을 보고

세속적 출세도 하고싶은

욕심있는 조선청년이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당대 한국인들 정서에도

일본군 입대는 정말 옳은 것이 아니었기에

당시에도 박정희 주변 사람들은 박정희를 극구 말렸고

오늘날에도 박정희 지지자들 역시

박정희의 혈서나 일본군 입대는 쉬쉬하는 형편입니다

 

[기회의 땅 , 만주]

하여튼 박정희는 만주에 가서

대구사범 시절 자신을 아껴했던 교련장교 아리카와 대좌도 만나보아

추천서도 받아왔고

 

애초에 당대에도 초딩교사되기는 빡셌고

한국 남부의 서울대격인 대구사범 출신의

경상도 수재 박정희였기에

일본의 괴뢰국가였던

만주국 육사인 만주군관학교를 뚫는 것은 일도 아니었고

 

의대생이 갑자기 마음을 돌려서

9급 공무원 시험을 본 격이랄까

 

하여튼 ,

군인은 교사와 같은 공무원이어도

체력과 힘을 더욱 중요시하기 때문에

성적 컷도 훨씬 낮을 수밖에 없고

그것도 그것이지만

당시 만주는 여러가지로 복잡미묘한 땅이었습니다

 

일제의 괴뢰국 만주국

 

일만친선 포스터

 

일단 ,

만주는 당시 동양의 서부나 텍사스 같은 곳으로서

좋은놈 , 나쁜놈 , 이상한놈 , 미친놈들이 몰려드는

기회의 땅이었는데

 

일본은 만주를 점령한 후 만주국이라는 허수아비 괴뢰국(꼭두각시 국가) 을 세우고

청나라 마지막 황제 푸이황제를 데려와

허울뿐인 황제로 삼고 관료들은 전부 일본인으로 채워버렸는데

 

푸이황제

 

국제 사회에 눈속임을 하기 위한 괴뢰국일 뿐이지

실제로는 그냥 만주를 점령한 후 지배한 것이었고

이에 국제사회 역시 일본의 만주국 건국 후부터

일본을 범죄국으로 찍어서

더이상 국가 취급하지 않게 됩니다

 

일본제국은 이때부터 정상국가에서 이탈해

완전 범죄국가가 되어 무법천지가 시작됬는데

 

일제가 세워버린 만주국은 더욱 심각한 상황이었고

혼돈과 무질서 , 법보다 오직 힘과 주먹과 총이 정의인 

미국 서부같은 지역이 되었고

 

단순 오락영화라 보기엔 만주로망 , 동양서부를 구현하려 했던 영화 '좋은놈, 나쁜놈, 이상한놈'

 

그런데도 만주는 끊임없이 펼쳐지는 대평원에

광활하고 광대했던 

웅장한 땅으로서

붉게 타오르는 태양 아래의

만주 대평원에 수수밭이 끝또없이 계속되어 펼쳐진

대곡창지대이자

아주 큰 길이 펼쳐진 거대한 도시가 건설되는 대도시였기에

 

오늘날 만주벌판의 농사

 

만주국 도시

 

만주 사람들은 식량 걱정은 아무도 하지 않았고

또 거칠었지만 온갖 자원들이 나는 기회의 땅으로서

엄청난 매력이 강했기에

 

일본 내에서도 파벌에서 밀린 2군 귀족들 ,

일본 육사 떨어진 하급 상류층들 ,

경쟁에서 도태된 사람들은

만주국에 가서 출세하는 것을 택했고

 

(한국도 공부 어중간하게 잘한애들이

서울권 말고

섬이나 커트라인 낮은 지방 끝까지 가서 말단 공무원이라도

전략지원하는 것과 비슷)

 

만주국에 정착한 일본인들

 

만주는 땅이 워낙 넓고

공직도 일본이나 조선지역보다는 비교적 개방적이고 널널했기에

하급귀족 일본인들 뿐만 아니라

야심있는 조선인이나 한족(중국인) 들까지

일확천금을 꿈꾸며 만주로 가서 기회를 얻으려 했고

 

춥고 광활한 만주대륙은

가히 수많은 민족 , 사람들의 욕망을 녹여내는 

동아시아의 텍사스 , 용광로였습니다

 

만주는 무법천지이자

한국독립군 , 중국군 , 강도 , 마적 , 마약판매상 ,

사기꾼 , 간첩 , 빨갱이 소굴로

하류인생 , 폐급인간 , 인간실격자들이 모인

아시아의 쓰레기통 , 질풍노도의 땅으로서

문명인 , 일본인들에게 최악의 위험지대였지만

 

만주 마적단(말탄 도적단) , 영화 좋은놈 , 나쁜놈 , 이상한놈

 

 

아편에 중독된 만주국 황후

 

그것조차 삼켜버리는

미친듯한 만주벌판의 풍요가 그 리스크를 메꿔주었고

 

식민지 조선이나 일본 본토에서는

결코 거의 일어나지 않는 약탈과 방화와 살인 ,

벼락출세 , 떼돈벌기 같은

비일상적인 사건들은

만주에서는 일상적으로 일어나게 됩니다

 

일제는 자신들의 식민지배를 영원할 것으로 여기며 ,

또한 자국내 대공황으로 침체되있던 자국 기업들을 지원하기 위해

조선 , 만주 , 대만 등 여러 식민지역에

기반시설 및 대규모 중공업 투자를 시행했고

 

만주국의 거대한 풍요를 지키기 위해

일본제국 역시 야심에 불타는 군인과 관료들과

재벌과 브레인 집단까지 만주로 쳐 넣는

기괴한 지역이었습니다

 

만주국 대신(일본인) 들에게 둘러싸인 마지막황제 푸이

 

무법 , 무질서 , 광활한 대지 ,

투전판의 분위기 , 겨울밤 거친 눈보라 ,

독한 고량주 , 일본어와 러시아어와 중국어와 조선어가 뒤섞인 도시 ,

강도와 마적들은

남성들의 피를 끓게 만들었고

 

영화 황해에 묘사된 만주 조선족

 

마적(강도)와 일반인 , 좌파나 우파 같은

적대 세력들도

 

중앙정부의 힘이 미치지않는 풍요로운 만주에서 ,

총과 춥고 거친 대자연 앞에서는

모두가 강제로 평등해 졌기에

죽이면 죽였지 

따뜻한 한반도나 일본 본토처럼

찌질하게 서로 눈치보거나 견제하거나 하지는 않고

서로 연합하거나 같이 지냈고

 

법은 없었지만 박정희가 동경했던

강자가 법인 ,

힘의 논리가 그대로 적용되는 아주 마초적인 지역이었습니다

 

이에 만주에서는

수많은 일본인 , 조선인 , 한족 , 만주족 , 몽골족이라는

다섯 민족이 만주국에 모여서 자기만의 욕망과 이상을 펼쳤고 (오족협화)

 

일제가 홍보한 만주국 오족협화 , 현실은 일본인 미만잡

 

국제사회에서는 그저 괴뢰국에 폐쇄된 비밀의 허수아비 제국 만주국이었지만

 

만주국을 방문한 국제연맹 조사단 , 국제연맹은 만주사변은 일제의 조작이며 만주국은 중국에 환원되야 한다 결론내렸고 이에 일제는 국제연맹에서 탈퇴함

 

그 폐쇄된 곳에서는 엄청난 풍요가 있었기에

 

아시아에서 가장 강력했던 일본제국 조차

새우가 고래를 먹은 것 마냥

만주를 삼킬 역량이 없었고

일본인들은 만주를 이해하지도 , 소화시키지도 못한채

중국 대륙을 침공하게 됩니다

 

'강철로 된 무지개' 같은 만주는

사람들에게

소심한 사람 , 우유부단한 중간적 기질을 혐오하게 만들었고

강렬하고 적극적이고 분명한 것을 열망하게 만들었습니다

 

박정희 역시 만주행을 택한 수많은

조선 청년들처럼

울렁거리고 풍요로운 만주에 감화되었고

 

이전 깡촌에서 소를 키우던 소년 박정희가

어린이 위인전에서 지방 촌뜨기가 황제가 된 나폴레옹을 본 충격을 ,

만주로 간 청년 박정희는 그 강렬한 충격을 또다시 받게됩니다

 

먼저 만주에서는 한 조선청년이

혈서를 써서 충성하겠다는 편지를 보내오자

난리가 났는데

 

박정희가 혈서를 보낸 것은

이렇게 군관을 지원하는 애국정신이 있다고

만주 신문에 나게 되고

 

만주국 신문에 실린 박정희의 혈서

 

야심의 조선 청년 박정희에게

만주는 ,

가난하고 좁고 빈약하면서도

사람과 인재가 많아 경쟁이 미어 터졌던 경상도보다

진입장벽도 훨씬 낮고 훨씬 더 큰 기회의 땅이었습니다

 

[신천지를 찾아서]

곧바로

박정희는

1939년 10월 ,

만주국 육군군관학교 2기 시험을 치뤘고

당연 경상도 수재이자 엘리트 사범학교 교사출신인 박정희에게

일본육사보다 커트라인이 훨씬 낮은 만주국 육사 시험은

좆밥이었고 

충성맹세 혈서 버프까지 있어서

240명 합격자중 15등으로 합격합니다

 

만주군관학교 , 대한민국 대통령과 국무총리와 국회의원과 장관과 육해공군참모총장 등을 배출한 한국군 건군인사들의 모태

 

박정희를 따라다니던 어린 학생들은

박정희 선생님이 만주로 떠난다는 소식에

울면서 매달렸는데

박정희는

 

<박정희>우리 조선사람은 조선사람으로서

할 일이 있다

 

면서 선물들을 나누어주었고

그가 만주로 따날때 많은 지역 유지들과

학부모 , 학생들이 버스정류장에 나와서 전송해줍니다

 

박정희 어머니는

 

<박정희 어머니>늙은 어미를 두고 왜 그 먼곳에 가려고 하느냐

 

하지만

박정희는 울먹이는 어머니를 뒤로하고 기차에 올랐고

박정희가 뒤돌아보니 어머니는

흰 옷 그림자가 보이지 않을때까지 손을 들어 흔들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청년 박정희는 기회 , 출세 , 권력을 위해

당시 온갖 꿈과 욕망들이 모여들던

신천지 만주로 향하게 됩니다

 

[만군인맥]

일반 사람들이 보기에 박정희의 만주행은

그저 흑역사이고 변절 , 기회주의자 , 친일매국의 오욕의 역사인데

그건 사실 어떤 사람들 보기에도 맞는 말이지만 ,

더 자세히 보면

청년 박정희의 만주행은 훗날 한국 역사를 송두리째 바꿔놓았고

 

당시 박정희 말고도 조선 청년들이 만주군관학교에 입학해

일본군 장교가 된 후 

일제가 패망하고 1945년 8.15 광복을 맞자

한국군 장교로 편입됬는데

 

당시 식민지 기간이 너무 길었던 한국은

극소수의 광복군을 제외하고는

근대적 군사체계를 가진 군대를 가져본 경험이 없었기에

결국 일본군 편제를 그대로 따라하고

일본군 출신 한국인 장교들이 지휘를 맡게 되었고

 

만주 , 일본군 출신 박정희와 만주군 인맥들은

해방후에는 당대 군사 최고 전문가로서

대한민국 국군 건군 창군주역이 되었고

훗날 만군인맥들은 박정희의 5.16 군사정변을 돕게 됩니다

 

만주후배 박정희를 보호했던 백선엽

 

만군인맥은 아주아주 다양해서

피끓던 청년 박정희에게 엄청난 충격의 세계를 주었는데

만주군은 오늘날 숙청 이후

북한군 좌익 , 남한군 우익으로 뚜렷한 것과 달리

만주군은 좌익과 우익이 공존하는 기이한 형태였고

 

당시 일본인들은 만주에서 비일본인 , 식민지 조선인 ,

한족(중국인) 들을 철저히 차별했기에

만주내 좌익과 우익들은 서로 사상적으로 싸우기 보다는

일본이라는 공동의 적때문에 서로 연합하던 시절이었고

 

또 춥고 거칠고 야성적이었던 야만의 땅 만주에서

좌익과 우익같은 정치성향보다는

생존이 급선무였기에 만주군 인맥들은 유달리 더욱더

끈끈한 인맥을 형성했고

 

또한 오족 , 다섯 민족들이 공존하는 형태였기에

아무리 일본과 비일본인이 차별대우가 있었지만

그곳 역시 나름 사람사는 곳이기에

일본인과 비일본인의 우정과 추억도 많은 곳이었고

한국의 만주인맥인 박정희 역시 광복이후

일본의 만주인맥들과 긴밀한 유대감을 가지게 되는데

 

바로 만주국이라는 괴뢰국 경영 실권을 쥐었던

만주국 총무청차장 기시 노부스케 , 훗날 일본총리나

시이나 산업보 국장 , 훗날 자민당 부총재 등

 

박정희와 긴밀한 관계였던 기시 노부스케 일본총리

 

훗날

한국 만주인맥 박정희 대통령과

일본 만주인맥 기시 노부스케 총리는 

막후에서 만주국 라인으로 뭉치며 한일수교를 추진하기도 했고

일단 서로 다른 사상 , 다른 나라 사람이어도 같이 거칠고 황량한 땅에서

받은 무자비한 충격과 뒹굴던 추억거리가 공유되는 것이기에

박정희와 만주인맥들은 국내 , 국제를 가리지 않고

끈끈한 동질감 같은 것이 형성됩니다

 

[쿨리]

박정희는 이전 대구사범때에 수학여행을 갔을때에도

만주를 방문했는데

 

일본인들은 식민지 조선인들의 기를 죽이고

일본의 위엄을 느껴 압도되어 개기지 못하게 하려

일부로 일본 주요 도시나 거대 산업시설들을 데리고 견학시켜주었고

 

박정희 역시 이 시기 광활한 만주대지에서

대포나 탱크같은 신예무기도 보고

기름짜는 공장에서 꾸리(쿨리 , 중국인 저임금 노동자) 들이

나체 상태로 일을 한다거나

검은 빵을 손으로 뜻어 파를 춘장에 찍어 먹는 모습등을 보았고

 

중국 노동자 쿨리

 

만주국에서 서열이

철저하게

 

일본인-조선인-중국인과 만주족-몽골인

 

으로 돌아가는 것을 보고

착잡한 심정으로 대구로 돌아오게 됩니다

 

이때부터 박정희는 만주에 충격을 받게 되었고

결국 만주 군관학교에 입학해

만주에 감화되며 점차 만주의 어둠에 압도되기 시작합니다

 

허허벌판속에 세워진 기괴한 첨단도시 만주국

 

[상식과 비상식]

일본인들은 거칠고 풍요로운 만주를 관리하기 위해

한반도 북한지역에 거대한 댐을 짓고나 공장을 건설하며

만주를 뒷받침했고

 

또한 만주에서는 수많은 곡물들을 한반도와 일본으로 저렴하게

공급시켰고

만주는 막대한 천연자원때문에

일제에 의해 중화학 단지로 육성됩니다

 

만주에 건설된 쇼와철강공장 , 박정희 근대화의 모델이 된 일제의 만주경영

 

만주는 한반도와 일본내 공산주의 침투를 막는

전략적 지대이기도 했고

한반도를 거쳐 중국 대륙으로 가는 관문이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거대하고 웅장한 지역이었기에

상식이 비상식이 되고

비상식이 상식이 되는 땅이 바로 만주였고

 

결국 중일전쟁이 터지던

1940년 4월

만주제국 육군군관학교 2기 생으로 입학한

박정희와 조선인 생도들은 군국주의 분위기속에서

만주에서 이전과는 전혀 다른 경험들을 하게됩니다

 

[우정의 구타]

조선인 1기생 선배들은 박정희와 조선인 2기생 후배들을 데려와

군기 , 기합을 주었고

갑자기 주먹으로 따귀를 때리는데

작은 체구의 박정희는 주먹을 맞고 몸이 밀려도

용수철처럼 곧바로 원래 자세로 돌아와 딱버티고 서있었고

이에 선배는 독한놈 한명이 들어왔다 여기게 됩니다

이후 조선 선배는 박정희와 후배에게 

 

<선배>우리는 지금 일계 , 만계와 눈에 보이지 않는

민족투쟁을 전개하고 있다

학교 생활에 있어서

어떤 경우라도

그들에게 지면 안된다

알았나 !

 

했고 박정희와 후배들은

 

<박정희>예 !

 

하고 대답합니다

 

 

조선인선배들이

조선인후배들을 때린 것은

일반적 구타는 아니었고

그냥 만주나 북방사람들이 평범하게 할법한

애정표현이었습니다

 

(놀랍게도 러시아나 추운지역에서는

이런 미개한 상남자 문화가 많음)

 

선배들은 후배들을 무섭게 다룬만큼 크게 아껴주었고

우정의 구타 , 사랑의 매였고

하여튼 남부나 도시에서는 상상도 하지 못한

그런 것이었습니다

 

박정희는 조선인 1기 선배들에게도

뭐하러 여기왔냐는 질문에

왜놈 보기 싫어 왔다는 등의 소리를 하며

인상을 주었고

술도 제일 잘마셨습니다

 

[박정희의 측량술]

초기 박정희와 만주군관생도들은

ㅈㄴ게 구타당했고

일본유학생도들은 쌀밥을 ,

만주와 조선인 생도들은 수수밥을 먹으며 차별대우를 받기도 했고

 

박정희는 만주군관학교에서 일본육사 교육과정을 그대로 베낀 수업들을 받았는데

 

일본어 , 중국어 , 수학 , 물리 , 화학 , 역사 , 지리 , 사격 , 측도 , 마술(승마) , 유도 ,

보초와 수색 , 군사학 , 전술 , 측도

 

등을 배우며 엘리트 장교로 성장해나갔고

 

특히 측도 , 측량은 아주 중요한 것으로서

박정희는 일정 지역에 가서 측량하고 지도그려오는 훈련도 받았고

 

 

대통령이 된 후에도 이때 배운 측도법들을 활용해

경부고속도로 , 국토건설 같은 대사업을 구상할때도 직접 등고선이 들어간 지도를

아주 쉽게 즉석에서 그려냅니다

 

(박정희는 결코 빡대가리 독재자가 아니었고

공부도 ㅈㄴ게 잘한 독재자였음)

 

박정희가 스케치한 경부고속도로 구상도

 

그러나 박정희는 이미 엘리트 학교였던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한 인물로서

학교 공부는 좆밥 수준이었고

대구사범학교 교련(군사학) 조교출신답게

이미 다 한번씩 배우고 해본 것들을 반복했고

 

박정희는 대구사범학교를 다닐 시기는

군인에 대한 열망과 갈등 , 

부잣집 애들에게 열등감 등으로 성적도 낮아

인생하드모드로 학교를 다니며

맨날 까이면서 운동만 하던 꼴등학생 , 일진이었지만

 

막상 군인이 되는 만주군관학교에 입학하자

인생이지모드가 되어 공부도 , 운동도 , 충성(혈서) 도 다 잘하는

최우수 학생이 됬고

다시 1등만 하던 초딩때 시절같은 2차 리즈시절이 시작됩니다

 

[다카키 마사오]

1940년부터 점차 일제의 한민족 말살정책이 시작되며

한국식 성을 일본식으로 바꾸게 하는 창씨개명까지 강요했고

결국 박정희 일가는 고령박씨에서 고목이라는 성을 취해서

창씨개명을 하게 되었고

박정희 형 박상희는 고목상희(다카키 소기) ,

박정희는 고목정웅(다카키 마사오) 가 됩니다

 

당시 창씨개명은 안하면 차별과 불이익을 받았기에

박정희의 창씨개명까지 욕할 필요는 없지만

 

(박정희는 창씨개명보단 만주군 입대나

기회주의자 기질에서 욕을 먹을 필요가 있음)

 

보통 박정희를 비하할때 다카키 , 다카키 마사오라는 그의

일본식 이름으로 까는 경우가 많고

 

그럼에도 당시 사람들도 창씨개명을 비통해했고

박정희가 창씨개명을 하자

만주군관학교내 중국인 생도들은

 

<중국인 생도>조선인들이 이제는 이름까지 바꾸어

왜놈이 되었구나

 

하고 놀렸는데

당시 만주에서는 조선 , 한국인들을 곱게 보진 않았고

한국인들은 만주국내 일본인 다음 서열의 사람들로

일본인들의 앞잡이가 되어 중국인들을 괴롭히는데 앞장섰고

 

(원래 일진보다 일진 따까리들이 더 무섭다는 말도 있고

일진들은 뒤에서 명령을 내리는 입장이라 대화나 타협도 가능하지만

쫄병들은 앞에서 실행하는 입장이라 눈에 보이는 것을 해야하고

양쪽에서 까이게됨)

 

중국인들은 만주내 한국인들이 많이 밀정 , 통역 , 헌병보조로 일하며

중국인들을 괴롭힌 것때문에

해방 이후 보복을 많이 했습니다

 

그렇게 창씨개명을 한 박정희를 비롯한 조선인 생도들은

일본인 생도들의 경멸 ,

중국인 생도들의 원한을 양쪽에서 받게 되었고

나라없는 민족은 결국 이중차별을 받으며

울분을 가지게 됩니다

 

[만주 스케일]

박정희에게 만주는 엄청난 충격을 가져다 준 땅이었고

박정희는 한국역사사상 가장 큰 스케일이 컸던 대통령답게

비좁은 한반도 반토막난 남한땅 대한민국 대통령이

상상하기도 힘든 스케일의 국토개발을 실행했고

 

이는 만주 유학시절 

끝도 없이 펼쳐진 붉은 수수밭 ,

폭이 100m가 되는 대로를 중심으로 건설된 대도시와

도시의 핏줄 만주철도와 거대한 산업시설 등

박정희에게 만주는 울렁거리는 거대한 신천지였고

 

이런 거대한 만주 스케일을

박정희는 대통령이 되어

비좁은 한반도 남한에 그대로 때려 박아

남한의 좁은 국토에 과분할 것같은

거대한 규모의 산업시설들이 구축됩니다

 

허허벌판에 포항제철을 공사하는 박정희

 

[만주군 수석졸업]

만주군관학교는 박정희에겐 이미

대구사범학교 리마스터 버전이었기에

학습과 실습에서 가장 우수했던 생도 박정희는

결국 만주군관학교를

수석졸업했고

 

대구사범 출신 엘리트 + 혈서 + 군인스러운 성격

 

그가 주류사회에서 밀린

마이너들의 리그 만주에서 수석졸업할 이유는 너무도 많았고

만주군관학교내 일본인 장교들 역시

그런 박정희를 좋아했고

당시 만주군관학교내 일본인 장교들은

이미 일본육사나 일본내 군벌들의 파벌에 밀린 떨거지 장교거나

쿠데타를 시도하다 만주군 장교로 넘어온 사람들이었기에

 

박정희나 조선인들에게 충격적인 조언들을 많이해주었습니다

 

<일본군 장교>너희들 조선독립을 원하지 ?

앞으로 독립운동을 열심으로 하게

그러나 지금은 적당한 시기가 아니야

일본이 승승장구하고 있는 이때 독립운동을 하려면 목숨을 걸어야해

 

이런 비상식적인 친절한 조언까지 해주었고

 

(만주 스타일)

 

박정희 역시 만주군관학교 시절동안

조국의 비통한 현실에 개탄하며 울기도 하고

총구에서 나오는 권력에 대한 생각들을 하게됩니다

 

그렇게

박정희는

1942년 3월 23일 만주군관학교 240명 만주계 전체에서

수석(1등)을 했고

 

그렇게 박정희는 구미보통학교를 1등으로 졸업한 후

대구사범학교에서 꼴등으로 졸업한 후 오랜기간 방황하다

적성에 맞았던

만주군관학교에서 다시 1등을 탈환했고

인생 롤러코스터를 제대로 타게됩니다

 

(어중간하게 꾸준히 잘하는 애들보다

1등들이 꼭 이런 모아니면 도 경향이 있음)

 

만주군 수석졸업하는 박정희 생도 , 만주일보 1942.3.24

 

[일본 육사]

수석졸업한 특전으로 곧 박정희는

선발되어 일본육사로 유학을 가는데

 

박정희는

1942년 10월 도쿄 근방 일본육사 3학년에 입학합니다

 

일본 육사시절 박정희

 

지방 일진 , 거칠고 정치지향적 , 행동력이 강했던 만주군관학교와 달리

일본육군사관학교는 일본제국내 최고 권력집단이자

엘리트 , 단정하고 사색적인 성향이었고

 

일본육사는 한문공부와 동양고전공부 , 무사도 정신 , 

서양기술을 골고루 가르쳤고

 

특히 박정희는 일본육사시절

한국의 선비정신 격인

일본의 사무라이 , 무사도 정신에 깊은 감동을 받게 되고

 

무사도 정신

 

박정희는

일본이 한국보다 후졌다가 강성하게 발전하게 된 것은

한국인들이 공자왈 맹자왈 하며 책민보며 문약해질때

무사정신 , 힘과 기술을 중시해서

부국강병을 이룩해 낸 것이라고 믿게 됩니다

 

근데 박정희가 일본육사를 다니던 시기는

일본이 좆되고 있던 시기였고

진주만 습격으로 미국에 선빵을 친후

미국에게 다시 역습을 받아 괴멸당하고 있던 시기라

일본 육사생도들은 이전처럼 유유하고 고상하게 공부하지 못하고

빨리빨리 대량으로 장교들을 찍어내서 카미카제 자폭공격등에

동원됬고 (당시 일본은 공군이 따로 없었음)

 

패전 기색이 뚜렷했고

언제 죽을지 모르던 상황입니다

 

또 박정희는 일본 육사 시절

2.26 사건 처럼 일본 청년장교들의 국가 개혁 쿠데타 등에

영향을 가지게 되었고

정치인들의 부패 , 재벌들의 횡포 등에

가난한 청년장교 박정희는 군대를 방위수단만이 아니라

국가개조의 방법이라는 생각으로 보게 됩니다

 

일본육사시절 취해서 울부짖었다는 박정희

 

박정희는 운이 엄청나게 아슬아슬하게 좋았는데

박정희가 일본육사에 다닐때는

일본이 미국에게 반격을 맞고 뚜드려 맞고 있었지만

아직 본토는 공습당하지 않던 시기였고

평온하게 일본생활을 즐기던 박정희는

아슬아슬한 시기

1944년 4월 20일 일본육사에서 졸업해

만주로 돌아왔고

박정희가 떠난후 곧바로 일본 본토와

도쿄는 미군기의 공습으로

불바다가 됩니다

 

[만주군 장교 박정희]

이후 박정희는 만주군관학교 1등 , 일본육사 출신이라는

최정예 장교 스펙이 되어 만주로 돌아왔고

만주군에서는 작전참모 보좌 , 즉 머리좋은 장교가 맡는

브레인 장교직에 임명됩니다

 

당대 일본은 좆되고 있던 시기라

알만한 사람들은 다 일제가 곧 패망하고

한국은 곧 독립할 것이라는 것을 점차 눈치까던 시기였기에

 

브레인이었던 박정희 역시

이런 것을 결코 모를 수가 없었고

 

박정희가 만주군에서 간도특설대에 근무하며 독립군들을 토벌했다한다거나

 

박정희 후빨러들은

박정희가 만주에서 박정희가 비밀독립군으로 활동했다는 등

말도안되는 아부를 조작해냈지만

 

박정희는 만주군 시절 짬밥도 낮은 소위였고

별다른 작전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기 보다는

그냥 부대에서 인정받는 엘리트로서

비교적 편하게 지냈다 합니다

 

(박정희 뿐만 아니라 한국인 장교들은 수가 매우 적었고

그속에서도 수석 , 일본육사 출신 박정희는 거의 

만주군내 최상위 장교였기에 실전 투입 , 행동보단

행정쪽에서 뺑이칠 확률이 높고

원래부터 일본이나 만주에서 계속 이중차별 당한 박정희가

딱히 일본에 충성에 열의를 보였다거나 보긴 어렵고

출세를 위해 혈서쇼를 벌이는 등 정치군인에 가깝지

일제 앞잡이 이미지로 보긴 어려워 보입니다)

 

만주군 시절 박정희

 

하여튼 만주에서 주둔하던 박정희는

점차 일본 본토가 공습당했다는 것을 ,

만주내 조선인 장교들 역시 급변하는 상황에 대응하는 것들을

보게 되었고

 

결국

1945년 8월 15일 일제는 무조건 항복을 해서

조국 한국은 광복 , 해방을 맞게 됬고

박정희는 해방된 상황에서 일본군복을 입고있던 상황으로서

생사의 갈림길의 서게 됩니다

 

<라봉봉>조갑제 월간조선편집장이 조선일보에 연재한

'혁명가 박정희 생애 , 내무덤에 침을 뱉어라'

에서 많이 참고했는데

어린시절은 귀여운 맛이라도 있지

갈수록 욕심과 야심이 불어서 괴물이 되가는 청년 박정희의 모습입니다

 

박정희 일대기 역시

최대한 박정희 중심 , 박정희의 인간적인 면을 강조하는 편이지만

그럼에도 박정희에 대한 우호적 기록을 읽어도

정상인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계속 들게 되고

 

박정희는 혁명을 꿈꿨지만 

그 수단은 결국 기회주의 , 친일로 얼룩져있었고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곱게 볼 수 없는 그의 이력입니다

 

박정희의 친일전력으로 볼때

일단 보통 인물은 아니었는데

어린시절 보았던 영웅 , 혁명가들의 생애는

박정희에게 큰 영향을 주었고

 

만주에서 받은 압도적 충격은

이후 대통령이 되어 그대로 복사 붙여넣기 하는 것이었고

이에 한국 공업단지는 한국 내수규모가 아닌

가히 만주같은 거대한 대륙에 어울릴 법한 규모로 대규모로 조성되게 됩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살다가 갑자기 보는 엄청난 웅장한 것에 대한

충격을 받게 되는데

사실 이런 것을 보게되면

우울할 틈도 없고

이런 것을 자주 경험해줘야 정신건강에 좋다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예를들면 맨날 밀리맵을 하다가

무한맵을 할때의 느낌이라던지

 

막 학교를 졸업하고 첫월급이 들어올때

맨날 몇만원 용돈으로 구질구질 살다가

통장에 100만원 넘게 꽂힐때의 놀라움 ,

 

처음으로 중국이나 미국등 대륙국가에 여행했을때

압도적인 평원을 보고 놀라는 기분 ,

 

남자라면 군대에 가서 

받는 컬처쇼크

 

등등

 

사람이라면 이렇게 아드레날린이 급격히 분비되는 시기가 있고

박정희가 만주에서 느낀 압도적 충격은

충분히 공감이 가는 바이고

 

만주시절은

박정희의 의기가 엄청나게 증폭되던 시기입니다

 

하여튼 ,

당대에도 목숨걸고 독립운동을 하던 인물들을 보면

박정희의 출세를 위한 일본군입대는 정말 부끄러운 기록이며

위험한 요주 인물이었고

당대에도 사람들이 박정희를

큰 사람이 되거나 역적이 될거라 여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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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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