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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보선의 반군부 투쟁>

[혼란의 제 2공화국]

[5.16 군사정변]

[올것이 왔구나]

[윤보선 대통령 하야]

[반군부 투쟁]

[진보 박정희 VS 보수 윤보선]

[정신적 대통령]

[사쿠라]

[낡고 늙은 정치인]

[사회원로 윤보선]

[정계은퇴]

[말년의 윤보선의 변절]

<라봉봉>

 

[혼란의 제 2공화국]

그렇게 4.19혁명으로 이승만 대통령과 자유당이 물러나고

민주당 장면 총리 내각이 주도하고

민주당 윤보선 대통령을 상징적 수반으로 하는

의원내각제의 대한민국 제 2공화국이 출범했는데

 

윤보선 대통령

 

당시 민주당은 의원의 수가 2/3 가 넘는

압도적인 규모의 강성여당이었음에도

민주당 구파의 윤보선 대통령과

민주당 신파 장면 총리의 권력갈등이 상당한 상태였으며

 

겉으론 악수하고 웃고있지만 갈등이 상당했던 장면(가운데) 총리와 윤보선(오른쪽) 대통령

 

대통령과 총리의 권한 문제 ,

민주당 구파와 신파의 갈등이 엄청나던 상황이었고

 

이러한 와중에

4.19혁명 이후 갑작스럽게

엄청난 자유를 찾은 국민들은

떼로 모여 허구한날 데모를 하던

혼란의 상황이었습니다

 

[5.16 군사정변]

제 2공화국의 상황으로는

정치계 , 시민들 뿐만 아닌

군대 역시 혼란이었는데

 

한국전쟁 , 6.25 전쟁 이후 한국군 조직은 엄청나게 비대해졌고

한국전쟁때는 군인들이 많이 죽던 시기라

이전까지는 젊은 장군 , 젊은 고위 장교도 많았지만

전쟁이 휴전된 후부터 인사적체가 발생하고

장교들 역시 승진이 급격히 막혀버려

불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는데

 

이런 상황에서 장면정부는

경제개발 5개년을 추진하려

그 자금을 국군을 감축하려 조달하려 했고

 

결국 이런 혼란의 상황에서

군에 있던 박정희는 과거 남로당 활동이 밝혀지며

좌익으로 지목되 언제 잘릴지 모르는 상황이 됬고

 

6군단 부군단장 시절의 박정희

 

궁지에 몰린 박정희 소장은 결국

불만많은 장교들과 함께 쿠데타를 일으켰고

1961년 5월 16일 해병대 일부 병력을 시작으로

5.16 군사정변 ,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서울을 점령합니다

 

5.16 군사정변

 

박정희는 청년시절부터 하숙집에 나폴레옹 초상화를 걸어두고

숭배하는 태도를 보일 정도로 야심으로 뭉친 인물이었고

 

자신의 5.16 쿠데타를

독재에 맞서 4.19 혁명 , 시민혁명 정신을 잇는

제 2공화국 정부의 무능과 사회혼란에 맞선 '군사혁명' 이라 주장하며

일어납니다

 

[올것이 왔구나]

제 2공화국 수장이었던 장면은 

5.16 군사정변이 일어나자

곧바로 수녀원으로 런해버렸고

 

이런 상황에서

유엔군 사령관 매그루더와 주한 미국 대리대사 마셜 그린은

남은 제 2공화국 수장 윤보선 대통령을 찾아가

쿠데타군 진압을 위한 UN군 동원을 허가해달라 합니다

 

그러나 윤보선은 그러다 대규모 유혈사태가 일어날까봐

2~3시간의 간청에도 끝내 허가해주지 않았고

 

결국 미국은

숨어버린 장면 총리 ,

진압을 허가하지 않는 윤보선 대통령 때문에

대한민국 제 2공화국에 개입할 수 없음을 공식화했고

 

결국 박정희는 각료들을 체포하고

윤보선이 있는 청와대에 등장합니다

 

이에 윤보선은

한국 정치사 희대의 명언을 남깁니다

 

<윤보선>올것이 왔구나

 

올것이 왔구나 !

 

윤보선은 이런 혼란의 상황에서

무슨 큰일이 터질지 예감하던 것이었고

실제 사건사고들은 재앙의 징조들이 꾸준히 보이기에

이 말은 이후에도 워낙 여러 상황에서도 자주 쓰이는 용어가 되었습니다

 

결국 

5.16 군사정변 3일 후인

5월 19일 윤보선 대통령은 대통령직에서 하야한다 했고

박정희와 군사 쿠데타군을

 

'군사혁명군'

 

으로 인정합니다

 

1961년 11월 27일 윤보선 대통령에게 미국 방문결과를 보고하는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윤보선 대통령 하야]

그러나 박정희와 군사정변군은

일단 윤보선 대통령이 사퇴하면

북한이 남침할 우려 및 미국의 눈치 때문에

윤보선 대통령에게 사퇴는 하지 말라했고

결국 윤보선은 수락해서 사퇴 , 하야는 번복합니다

 

1961년 하야 성명 발표 기자회견에 입장하는 윤보선 대통령

 

장면 총리 역시 결국 수녀원에서 나와서

박정희에게 GG 친 후

총리직에서 내려와서 민간인으로 살게 되었고

 

윤보선 대통령은 군사정변 이후에도

1년 더 허수아비 대통령으로 있었는데

결국 군사정변군과 의견차이로

1962년 3월 대통령직에서 하야합니다

 

[반군부 투쟁]

이후에

정치활동이 허용되자

곧바로 윤보선은 박정희에 맞서 반군정 투쟁에 앞장서게 됩니다

 

야당 인사들은

그가 대통령 시기 장면과 대립 , 군사쿠데타를 방조했다며

그가 다시 나서는 것을 거부하거나 비판했지만

그럼에도 윤보선이 대중적 인지도도 높고

군정반대 , 박정희 퇴진운동에 적극 앞장서자

결국 군정 박정희에 맞서 민정 윤보선이라는 이름으로

다시금 야당세력은 규합하게 되어

 

박정희의 민주공화당에 맞서

윤보선의 민정당의 창당됩니다

 

[진보 박정희 VS 보수 윤보선]

군정 기구인 국가재건최고회의를 이끌던

박정희는 민정이양을 시행한다며

결국

1963년 7월 제 5대 대통령 선거가 시작됬는데

 

민주공화당 박정희 VS 민정당 윤보선

 

구도로

 

군인 VS 민간인

 

출신 인물이 맞다이를 뜨게 되었고

 

박정희는 일제시대때 일본군 장교를 했던

친일매국노 출신이었지만

의외로 출생은 가난한 빈농출신이었기에

소박한 이미지를 내세웠고

 

금수저+친일매국 집안이자

귀족적 성향이 강했던

윤보선에 비해

박정희는

 

진보표 + 농민표 + 동정표

 

를 많이 얻어낼 수 있었고

 

당시 한국은 농업국가였기에

농민표는 아주 거대했고

윤보선은 꼰대+구식 정치인의 상징이었기에

박정희에게 극우 , 무능한 구식정치인으로 몰렸으며

 

오히려

박정희가 진보를 ,

윤보선이 보수를 대표하는 상징이 되어 경합합니다

 

박정희 VS 윤보선

 

당시 윤보선 캠프에서는

박정희가 친일파 및 남조선로동당 , 남로당 활동을 했던 것을

문제삼아 그가 조국을 두번에나 배신했다고 비판했고

박정희는 매카시즘 , 시대착오적 빨갱이로 몰지 말라고 맞받아칩니다

 

<윤보선>민주공화당(박정희) 은 공산당의 돈을 가지고

공산당 간첩이 와서 공산당 식으로 조직한

공산주의 정당 

 

[정신적 대통령]

애초에 5.16 군사정변 성공 이후

박정희는 국가를 장악하고

박정희 주도로 관권선거를 치루었기에

군경 , 공무원가족들은 박정희에게 몰표하는 형세였고

압도적으로 유리한 상황에서 선거를 했는데

 

선거 결과는

박정희는 46.6% , 윤보선은 45.1% 로서

고작 15만표 차이로 윤보선은 패배해버려서

실제로는 승리했는데

박정희가 선거를 조작했다는 이야기들이 나돌았습니다

 

남북구도(농촌과 도시) 였던 5대 대선

 

이에 윤보선은

 

<윤보선>선거에서 이기고 개표에서 졌다 ,

나는 정신적 대통령

 

이라는 두가지 희대의 명언을 남겨버렸고

 

이때부터 정신적 대통령 , 정신적 지주라는 말이 유행하게 됩니다

 

(한국 정치사 명언 제조기였음)

 

[사쿠라]

윤보선의 5대 대선 패배 이후

제 3공화국 , 기나긴 박정희 시대가 시작되었고

 

이후에도 윤보선은 야당 당수로서

박정희와 맞서게 됬고

박정희는 어짜피 윤보선은 자신을 대적할 수 없음을 알고

박정희도 그냥 형식적으로는 민주정을 유지하는 모습을 보이려 했기에

윤보선을 살려두고 위협적이면 제거하려 합니다

 

이후 윤보선은 국회의원이 되어

박정희의 한일협상을 매국외교로 비판했고

당시 당내에 노선을 뚜렷하게 하기 위해

박정희와 관련있는 사람들을

벚꽃의 일본말인 '사쿠라' 라 하며

사쿠라들을 당에서 쫓아내야 한다 말했습니다

 

(정치계 명언왕 윤보선)

 

정치계에서 '내부의 적' 을 뜻하는 표준어가 된 '사쿠라'

 

또 윤보선은

박정희의 한국군 베트남전 파병에 젊은이들을 사지에 몰아넣는

행위라 비판하며

박정희 정부 반대운동을 주도합니다

 

월남전 파병당시 한국군

 

윤보선이 반정부 시위에 앞장서자

박정희도 계속해서 사복경찰 , 중앙정보부 요원을 보내서

윤보선을 감시했습니다

 

[낡고 늙은 정치인]

이후 윤보선은 신민당을 창당해

신민당 공천으로

6대 대통령 선거 후보자로 출마해

박정희와 다시 한번 맞붙게 되었고

 

이전 박정희 정부가

의외로 무식한 군인의 모습이 아닌

경제개발 5개년을 성공적으로 이룩시켜

경제도 잘 살려놓고

야당에 대해 노골적 탄압을 보여주지도 않았기에

국민들에게 높은 성적표를 받았고

윤보선은 그냥 퇴물 , 낡고 늙은 정치인 이미지가 강해서

 

6대 대선은

접전이었던 5대대선에 비해

민주공화당 박정희가 무난하게

신민당 윤보선을 두드려 패고 10% 득표 차이로 당선됩니다

 

동서구도를 보여주는 6대대선

 

[사회원로 윤보선]

2번이나 대선에서 낙선하며 체면을 구긴 윤보선이었기에

윤보선은 점차 범야권 지도자에서 밀려가고 있었고

점차 김대중이 야권 지도자로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근데 보수적 성향이 강했던 윤보선은

김대중을 대단히 불신했습니다

 

<윤보선>김대중이란 사람은 머리털부터 발톱까지

완전히 정치적인 사람이야

 

근데 주변사람들의 설득에 결국 다시 윤보선은 김대중 지지로 돌아섰고

 

신민당 시절 김대중

 

박정희가 유신독재를 시작하며

완전한 독재자가 되자

윤보선은 김대중 등과 함께 사회원로가 되어

유신헌법에 반대하며 반군부 , 반독재운동을 시작합니다

 

유신독재자가 된 박정희

역시 야당 인사들을 잡아 가두거나

정치활동을 금지시키는 등

최후의 발악을 하고 있었고

 

유신독재에 맞선 부마항쟁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는 10.26 사태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총탄을 맞고

운명하게 되는데

 

10.26 사태

 

이전 총탄에 맞아 사망한 박정희의 부인 육영수 여사가 사망했을때

윤보선은 애도와 유감을 표명했지만

박정희가 죽었을때는 인과응보라며 비판적 견해를 보였습니다

 

10.26 사건으로 박정희가 죽자

오랜 군부독재에 신음했던 야당인사들과 국민들은

민주주의가 부활할 것이라 여기며

 

'서울의 봄'

 

이 왔다 했고

 

박정희 서거 이후 1980년 5월 15일 서울의 봄 당시 민주화를 외치며 유신잔당척결을 외친 시민들

 

어느새 80이 넘은 노령의 정치가 윤보선 역시

유신헌법 폐지 , 문민정부 수립을 촉구하는 대회를 열었습니다

 

[정계은퇴]

박정희가 사망하자

일단 권력을 승계한 최규하 총리는 대통령이 되어

1980년 2월

윤보선 , 김대중 등 687명의 복권을 선언해주었고

 

보수계의 윤보선(허수아비) 이었던 최규하 대통령

 

당시 야당 거물 김영삼과 김대중은 서로 대권을 두고 경쟁했기에

윤보선은 두 인물들을 단일화 , 중재하려 했지만 실패했고

결국 윤보선은 이후 정계를 은퇴하게 됬고

 

윤보선이 주도했던 민주당 구파(이론적 성향)는 김영삼이 승계했고

장면이 주도했던 민주당 신파(실무적 성향)는 김대중이 승계하게 됩니다

 

김대중과 김영삼의 갈등

 

[말년의 윤보선의 변절]

이후 신군부의 전두환이 대통령이 되어

서울의 봄은 끝나고

또다시 군부독재 , 신군부독재시기가 시작되게 되었고

 

전두환은 은퇴한 윤보선에게 접촉해

자신은 당신을 탄압한 박정희 정부와 다르다는 점을 밝히고

민주화를 위한 조치를 취할테니 도와달라 했고

 

윤보선과 만난 전두환

 

이미 노령이 되고

오랫동안 박정희에게 핍박을 받아 지쳐있었던 윤보선은

결국 전두환의 말에 마음이 움직여버려

부인 공덕귀 여사의 반대에도

전두환을 사실상 묵인해주었고

 

유신시절 반유신 부채시위를 하는 공덕귀 여사

 

결국 야당인사 , 학생 , 시민들은

윤보선이 변절 , 독재에 협력했다며 맹비난을 퍼부었습니다

 

왔다리 갔다리 했지만

기본적으로 보수적 성향이 강했던 윤보선은

일단 어떤 상황이 오던 반공사상이었고

당시 유행하던 학생운동권의 반미주의 사상때문에

학생운동권을 극도로 불신했기에

 

이런 세력들에게 정권이 넘어갈바에

차라리 일시적일지언정 신군부세력들에게 정권이 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 판단합니다

 

결국 윤보선은 신군부와 타협하게 되어

전두환 이후

1987년 대선에서는 신군부의 노태우 후보를 공개지지했으며

이로인해 학생 , 운동권들의 극렬한 비판을 받게 됩니다

 

노태우와 만난 윤보선

 

1990년 7월 18일

윤보선은 향년 92세를 일기로 사망했고

그렇게 윤보선은 친일 매국 집안에서 성장했지만

 

대한민국 임시정부 최연소 의원(국회의원) ,

민주당 창당자 ,

민주당 최초의 대통령 ,

유신독재에 맞선 민주화운동가

 

라는 상징적인 커리어를 남기다

말년에 신군부 및 노태우 공개지지로

의문스러운 행보로 시민들의 비판을 받으며 사망한 인물입니다

 

일단 윤보선은 뚜렷한 철학과 비전을 가지고 나선 지도자가 아니었기에

국민들의 지지와 존경을 받지는 못했고

잊혀진 정치인이 되었지만

 

민주당계의 온건 보수적 성향 정치인으로서

어떤 위험한 상황에서도 보수와 진보계 사이에서

적당히 잘 타협하며

유혈사태 , 정국에 피바람이 부는 것을 막으려 했던 인물이었고

정치권에서는 현대판 황희 정승같은 중재자로서 활약했으며

말년에는 탄압에 지치고 힘도 빠져서

신군부를 사실상 인정해주었고

이후 조용히 여생을 보낸 인물이었습니다

 

<라봉봉>윤보선 평전 등에서는

윤보선은 김대중 , 김지하 등 재야인사들의 석방에도 나섰기에

말년의 신군부와의 협력사실은 부인하나

노태우 공개지지선언은 사실이고

 

온건해서 그 어떤 세력들과도 손을 잡았던 그의 행보는

중도주의라기보다 회색분자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균형을 잡는 것도 중요하지만

밀어내야할때는 추진력있게 밀어나가야하기도 하는게 지도자의 덕목이고

그런 것들에서 항상 흐릿하고 의문스러운 모습도 보여준 인물이라

여러 화려한 커리어에도

한국사에서 존재감이 없는 인물입니다

 

단 ,

보수주의의 성향답게

비록 그게 나쁜 세력일지라도 조율에 노력해

항상 피바람이 부는 것을 막아냈다는 것은 인상적이며

이런 것 때문에

한국 정치계에서도 나름 진보나 보수계에서도 원로 , 짬대우는 해준 인물입니다

 

하지만 역시 강력한 지도력을 보이지는 못했던 인물이고

재상감이지 왕이나 대통령감은 아니었다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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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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