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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운의 내각제 총리 장면 >

[제 2공화국]

[유복했던 장면의 집안]

[댕기머리를 자르다]

[상급학교 진학]

[애처가 장면]

[미국 유학]

[동성상업학교 교장 장면]

[장면 VS 김수환 추기경]

[선비 장면]

[해방정국]

[제헌국회의원]

[국제사회에 신생국 대한민국을 승인시킨 정치인]

[초대 주미대사 장면]

[민주당 창당]

[민주당 부통령 장면]

[4.19 혁명]

[내각제 총리 장면]

[장면 총리 , 윤보선 대통령]

[혼란의 제 2공화국]

[5.16 군사정변]

[수녀원에 숨어버린 총리]

[대한민국 건국공로자의 친일논란]

<라봉봉>

 

[제 2공화국]

이승만 정부와 자유당 , 제 1공화국은 그렇게

3.15 부정선거로 인해 시민들의 분노를 맞아

4.19 혁명으로 무너졌고

 

그렇게 4.19 혁명으로 자유당은 멸망했고

야당 민주당이 집권에 성공합니다

 

그리고 대통령 중심제는 폐지되고

의원내각제가 시행되는 제 2공화국이 출범했는데

 

기존 이승만 정부대에

대통령중심제는 대통령이 엄청난 권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었고

이에 이승만 대통령 개인적 부패와 결함이라는 치명적 문제가 드러났기에

 

대통령의 힘이 약화되고

국무총리의 권한이 강화되어 권력이 분산되는 효과를 가진

내각제가 시행됩니다

 

이로인해 일본처럼

한국도 사실상 총리가 대통령인 그런 상황이 되는데

제 2공화국 당시 총리는 '장면' 이었습니다

 

장면 총리

 

장면내각 , 장면 총리는 민주당 인물로서

집권기간이 1년도 안되 매우 짧고

곧바로 5.16 군사정변을 맞고

박정희 정부에게 정권을 내주었기에

한국사에서 큰 존재감이 있는 인물이 아니지만

일단 당대 국민들이 인정한 인물이었고

인품도 고상한 정치인이었습니다

 

그렇게 신생국가 대한민국의 두번째 지도자였던

그런 그의 일대기를 잠깐 알아봅시다

 

[유복했던 장면의 집안]

일단

장면은 1899년 8월 28일

서울 삼군부 뒷골 , 종로구 적선동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집안은 몰락한 남인 양반가였지만

장면의 아버지가 일찍 천주교와 영어를 배웠기에

아버지가 영어에 능통하고 사업수단이 뛰어나서

구한말 탁지부(기획재정부) 관료로 일했고

일제강점기 시절에는 관직대신 무역업을 ,

해방후엔 초대 부산세관 세관장을 맡았기에

집안 사정이 매우 유복했고

 

장면의 아버지는 아들 세형제의

집을 직접 장만해줬고

또 손자대까지 생각해서

강원도 통천 근처 수십만평 땅을 사서

잣나무 묘목 수백만 그루를 심었다고 합니다

 

즉 요약하면

대한민국 민주당 첫번째 집권자였던 장면은 쌉금수저로 태어났고

괜히 오늘날 민주당도 진보정당 이미지와 달리

지주나 금수저들이 많은게 아닙니다

 

하여튼 장면은

유복한 가톨릭 집안에서 성장했는데

이로인해 장면 총리 역시

평생 정치인보다는 종교인의 모습이 강했던 인물입니다

 

신학문을 접했던 장면의 부모님 장기빈과 황루시아

 

[댕기머리를 자르다]

인천에서 성장한 대한제국의 9살 어린이 장면은

인천에 이발소가 생겼다는 소식에

평소 어머니가 머리 빗겨주는게 귀찮고

머리 땋고 다니는게 싫어서

부모님 허락도 없이 혼자가서 머리를 잘랐고

이에 어머니가 기겁을 하며 역정을 내셔서

장면은 혼나서 울기까지 했습니다

 

구한말 댕기머리 소년들

 

단발령 시행 전후의 구한말 남성들 , 상투를 자른 모습

 

1900년대초 , 당대 대한제국 어린이들에겐

흔히 있는 일상이었고

이미 나라에선 근대화 및 단발령이 시행되있었기에

이렇게 대한민국 초기 정치인 , 기업가들은

봉건과 근대라는 시대의 격변속에서 성장합니다

 

[상급학교 진학]

장면의 아버지는

장난이 심한 장면을 계도하려

이름에 힘쓸 , 부지런할 면자를 써서 장면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고

 

장면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모두 문과 학문을 좋아하는 문돌 , 문순이었기에

장면 역시 이러한 기풍속에서

신학문을 배운 이후 상급학교에 진학하려 했고

일제강점기 시기인

1914년 수원농림학교 , 오늘날 서울대 농대의 전신에 입학합니다

 

학교는 국립이었기에

나라(일본제국)에서 학생들에게 매달 급여를 주었고

청소년 장면은 어른들 틈에 끼어서

수원농림학교에서

밭과 논도 갈고 거름도 지고 나르며 농삿일을 배웠습니다

 

농림학교 재학중 장면 (앞줄 오른쪽 맨 끝)

 

[애처가 장면]

1916년 5월 20일

장면은 서울 중림동 성당에서

미곡상(쌀가게) 을 경영하는 쌀집 막내딸 김옥윤과 결혼했는데

당시 한국은 농업사회였기에

미곡상 운영은 부의 상징이었고 

 

(삼성이나 현대도 미곡상에서 시작)

 

즉 유복한집 아들과 유복한집 딸이 결혼을 한 것이었습니다

 

서울의 미곡상

 

당시 장면은 농림학교 재학중이었는데

아버지가 이웃 천주교 신자와 사돈을 맺기로 결정했기에

옛날 청년답게 부모 뜻에 따라 결혼한 것이었고

 

신부 얼굴도 못본 상태에서

결혼식에서 가림막 사이로

서로 손만 앞으로 내밀고 악수를 하고 결혼을 했고

결혼이 끝나고서야 겨우 신부 얼굴을  보았습니다

 

1916년 결혼 직후 부인 김옥윤과 장면

 

근데도 장면은 ㄹㅇ 종교인 유형의 인물답게

결혼 이후에도 한시도 한눈팔지 않고 아내에만 집중했다하고

소년시절 친구들이 기방(기생집) 에 끌고갓을때도 긴장해서 도망치고

일제 말기에도 총독부 관리 만찬장에서 기생들이 나오자

도망쳤다 합니다

 

(올바른 인성이군)

 

[미국 유학]

장면은

1917년 3월 25일 수원농림학교를 졸업하고

1917년 9월 서울 중앙 기독교학관(YMCA) 영어과에 입학해

1920년 3월 20일 YMCA 영어과에서 최우등으로 졸업하고

그의 아버지 같이 영어에 큰 소질을 보였습니다

 

1924년 YMCA (현 종로 YMCA)

 

이후 장면은 미국에 유학해서

1921년 9월 19일

뉴욕 맨하탄 대학 문과에 입학해 교육학을 전공했고

 

대학 재학중 장면

 

1925년 6월 4일 뉴욕 맨하탄 대학을 졸업해

이탈리아 로마에서 한국 가톨릭 신도 대표로 참석해

교황을 알현한 후

1925년 8월 29일 한국으로 귀국합니다

 

[동성상업학교 교장 장면]

일제강점기 일본령 조선에 돌아온 장면은

평양에가서 어학 교수로 부임하다

가톨릭계 사립학교 동성상업학교 교사를 하다

1933년 정지용 , 이동구 등 문인과 

 

'가톨릭 청년'

 

잡지를 펴냅니다

 

정지용 시인

 

이후

1936년 장면은

동성상업학교 교장에 취임했고

 

1938년 장면

 

고위직 인물답게

친일단체에도 선출되고

창씨개명도 다마오카 쓰토무로 했기에

 

평생 친일파의혹이 따라다녔지만

사람들은 그가 적극적인 친일행위가 아닌

교장으로서 천주교 교단을 살리기 위한

소극적 부일(일제에 부역)에 불과했다는 반론도 합니다

 

[장면 VS 김수환 추기경]

가톨릭계 사립학교였던 동성학교 교장 장면은

평소 성품이 유순하고 늘 학생들을 사랑으로 대했고

 

장면교장은

일제의 감시를 피해

신앙심과 애국심이 있는 제자들을 키워냅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김수환 추기경인데

당시 학생이었던 김수환 추기경은

수신(오늘날 윤리) 시험문제에서

 

'천황폐하의 생신을 맞이해 황국신민으로서의 소감을 말하라'

 

라는 제목으로

일본어 시험답안을 쓰게 됬는데

김수환은 

 

'나는 황국신민이 아님 ,

그러므로 소감이 없음'

 

이라 썼고

 

이에 장면은 김수환 학생을 교장실로 호출한 후

뺨을 때렸습니다

 

아무리 가톨릭 사립학교지만

당시 정부는 일제 총독부였고

가톨릭계 역시 일제에 일단 순응하지 않으면

한국에 발을 붙일 수 없었기에

학교 책임자였던 교장 장면은

폐교위기때문에 결국 김수환의 위험천만한 행동을 꾸짖다가

또박또박 말대꾸하는 김수환 학생에게 손찌검을 했고

 

김수환은 평소 유순했던 장면이 유일하게 손찌검한 학생이었습니다

 

그러나 장면은 일부로

김수환에게 그렇게 한 것이었고

겉으로만 야단치고 실제론 처벌하지 않았고

이후 기개있는 김수환의 모습을 보고

김수환을 가톨릭 지도자로 키우기 위해

일본 유학장학생을 선발할때

김수환을 1등으로 추천해서

일본 조지대학으로 유학보냅니다

 

장면과 김수환 학생 , MBC

 

이후 김수환은 가톨릭 사상 최초의 한국 추기경이 되어

광복후 군부독재 시기 대한민국 민주화운동의 종교 , 정신적 지주가 됩니다

 

김수환 추기경

 

[선비 장면]

장면은 민주당 인물답게

평소 선비기질이 강하고 청렴한 인물이었고

버스에서도 사람이 많아 밀려나와 표를 못낼때에도

내린 이후에 꼭 전차표를 그자리에서 찢어 버렸고

 

자신이 교장이라는 고위직위에 있었기에

일부로 자식의 학교에도 일절 오지 않았습니다

 

[해방정국]

1945년 8월 15일

조국 한국은 꿈에 그리던 광복 , 해방을 맞았고

곧바로 한반도는

남한은 미군 , 북한은 소련군이 진주했고

각각 우익(자유주의)과 좌익(공산주의)으로 나뉘어

혼란의 해방정국이 시작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평소 영어실력이 뛰어났던 장면은 

천주교 대표로 미군정 자문기관 민주의원 의원에 임명된 후

좌익과 투쟁 , 미군정과 한국인 대표의 통역 및

미군정당국과 타협 등의 일을 했습니다

 

엄항섭 , 여운형 뒤에 흰 양복과 중절모를 쓴 장면

 

[제헌국회의원]

장면은

1948년 5월 10일 총선(남한 단독총선) 에서

서울 종로을구에 출마해

제헌국회의원(대한민국 1대 국회의원) 에 당선됩니다

 

<장면>이 제헌국회야말로

신생 대한민국이 민주주의적으로 발전할 있는 터전을 닦게 것이었다.

사실 제헌국회가 생김으로 해서 오늘의 한국이 이루어진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헌법을 만들고 대통령을 선출하였다.

그때의 기쁨은 8·15 광복날의 기쁨에 못지않은 것이었다.

 

제헌국회의원 장면(가운데) 와 그의 선거운동원들

 

[국제사회에 신생국 대한민국을 승인시킨 정치인]

그니까

당시 한국내의 NO.1 국제 , 미국통은 역시 이승만이었지만

장면 역시 미국 유학파 + 가톨릭학교 교장출신의 뛰어난 외교 인재였기에

대한민국 , 이승만 정부의 NO.2. 국제통 정도는 된 인물이었고

 

이승만은 가톨릭이 아닌 개신교(감리회) 의 신자였지만

일단 가톨릭이나 개신교가 모두다 기독교라는 틀아래에 있어 비슷한면도 많고

혼란의 해방정국에서

급하게 남한단독의 신생국가 대한민국을 출범시킨 이승만은

신속하게 세계사회 , 유럽과 남미등 가톨릭 국가들의 정부승인을 얻기위해

장면을 사용했고

 

이승만의 예측대로

장면의 활약으로 교황청 및 유럽과 남미국가들은

신속하게 대한민국 정부를 승인해서

신생국 대한민국 정부는

유엔에서 북한을 제치고

한반도 내 유일한 합법정부로 승인 , 선점하는데 성공합니다

 

장면은 유엔총회 파견되어

대한민국 대표단 수석대표로 활약했습니다

 

<장면>국제 외교무대에 처음 나서는 우리는 모든 것이 낯설고

유엔 총회에 모인 세계 열강 외교단들에게 우리의 실정과 승인의 필요성을 납득시키려니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하루는 우리 일행이 헤이그의 이준 열사 묘지를 참배하고 돌아가서 설복하여 ,

드디어 3 유엔 총회 마지막 밤의 최종 안건으로 국제 승인을 획득하게 되었다.

이날의 나의 감격은 일생을 두고 잊지 못할 만큼 것이었다

 

UN총회의 대한민국 정부 대표단 장면

 

[초대 주미대사 장면]

장면은

1949년 미국에 와서

미국 트루먼 대통령의 대한민국 승인 발표성명을 들으며

초대 주미대사로 임명됬다는 전문을 받았고

 

1대 주미대사 장면

 

1950년 6월 25일 ,

북한의 남침으로 한국전쟁 , 6.25전쟁이 터지자

장면은 미국 국무성과 대통령을 만나며

구원을 요청했고

유엔 자유민주우방 대표들에게

눈물로 호소하며 맹렬히 구국활동을 나서

미군 , UN군이 대한민국에 파병되도록 힘을 보탰습니다

 

대한민국 파병에 표결하는 유엔 안보리

 

이로인해 미군 , 유엔군 , 가톨릭교회에서는

여러 구호물자를 급하게 한국으로 보내주었고

 

1950년 11월 28일

전쟁통의 장면은 이 공으로 국무총리에 지명됩니다

 

1951년 부산 피란통의 이승만 대통령과 장면총리

 

[민주당 창당]

결국 1953년 한국은 휴전되어 한국전쟁도 끝났고

한반도 전국토가 전쟁으로 파괴되어

유에서 무로 , 황폐화 되고

한국인들은 부자와 거지 할 것 없이 모두 리셋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정신을 못차리고 

자신의 연임을 위해

1954년 11월 사사오입 개헌을 통해

억지로 비합법적 방법으로 대통령 연임 개헌을 하였고

 

이로인해 친했던 이승만과 장면의 거리는 멀어집니다

 

이승만 VS 장면

 

당시 장면 역시 한국정부를 세계에 승인받게하고

한국전쟁 당시

UN과 미군의 파병을 요청한 공으로 이승만 다음의

대한민국 NO.2 거물 정치인으로

떡상해있던 상황이었고

 

이승만이 1954년 사사오입 개헌 후 독재자의 길을 걷자

청렴하고 고결한 성품이었던 장면은 곧바로

이승만 정부에서 이탈해

1955년 자유당을 대안할 보수주의정당 민주당을 창당해서

최고위원으로 선출됩니다

 

[민주당 부통령 장면]

민주당은

신익희를 대통령 후보로 ,

장면을 부통령 후보로 내세우는데

 

못살겠다 갈아보자 ! , 당시 3대 대선 민주당 포스터

 

갈어봤자 더못산다 , 3대 대선 당시 자유당 포스터

 

당시 사사오입 개헌 , 한국전쟁때 민간인 학살때문에

정치인(엘리트)과 국민들은 이미 이승만을 극혐하던 상황이었기에

 

민주당 내부에서는 조금만 더 유세하면

이승만을 뚜드려 팰 수 있다는 긍정적 분위기가 조성되었고

 

근데 하필 당시 신익희는 이런 분위기에 고무되어서

건강에 무리하면서까지 유세일정을 줄이지 않았고

결국 선거를 10일 남기고 열차를 타던 중 뇌일혈로 기절해 사망합니다

 

신익희

 

결국 민주당은 다 이기는 게임에서 후보자가 사망해버려

몇일 앞두고 좆되버렸고

민주당은 자유당처럼 강경보수정당은 아니어도

기본적으로 반공정서가 있는 보수정당이었기에

그렇다고 진보당의 조봉암과 손잡고 싶지도 않아했기에

결국 자유당 이승만은 아주 손쉽게 대선에서 압승합니다

 

민주당 대통령 후보가 갑자기 죽어버리자

이승만 독재를 싫어한 국민들은 이승만을 견제하기 위해

장면에게 몰표해주었고

 

부통령으로 나선 민주당 장면만은

결국 자유당 이기붕을 

46.43% VS 44.03% 라는 아슬아슬한 표차로 이겨

부통령에 당선되었고

 

자유당 이승만은 결국 또다시 대통령에 당선되고

부통령은 민주당 장면이라는

정부내에 여야가 공존하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이승만과 장면은 기독교인 , 국제통 , 외교인물이라는 공통점이 많았고

이승만 독재전까진 친했기에

어제의 동지가 다른 당으로 만나게 된 것입니다

 

이후 이승만 역시 장면을 용공(공산주의 용인 , 동조자) 이나

친일 성향이 있다 주장했고

국민들은 그렇게 이승만 자유당 , 장면 민주당으로 분열합니다

 

이후 장면은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괴한의 총격에 맞아

왼손을 관통당하는데

장면은 대인배처럼 선처를 호소해

감형을 주선했습니다

 

오른손 관통 직후 부축받는 장면

 

[4.19 혁명]

1960년 장면은 다시 부통령 후보로 출마했는데

자유당이 조작한 3.15 부정선거로

부통령에 자유당 이기붕이 당선되어

장면은 낙선되었고

 

몸을 낮춘 장면은 표면적으로는

이기붕에게 진것처럼 표현했지만

결국 민중봉기를 이끌어내서

4.19 혁명을 일으키는데 성공했고

이승만을 하야시키는데 성공합니다

 

4.19혁명 , 무너지는 이승만 동상

 

하야 후 하와이로 망명하는 이승만

 

[내각제 총리 장면]

4.19 혁명 이후 재구성된 국회는

내각제를 시행하며

내각제 총리 선거에서

장면은 2표를 더얻어 극적으로 집권에 성공해

대한민국 수장이 됩니다

 

그러나

일제시대때 장면의 창씨개명 및 친일단체 참가 이력때문에

장면을 싫어하는 반대파들은

당시 장면이 친일파라는 비방을 많이 했고

 

특히 깡패였지만 김좌진 장군의 아들이자 애국자였던 김두한은

국회에서 장면 총리지명 동의안 표결 전에

여의도 국회의사당에 나타나

장면에게 역사적인 귀한 표를 던져서는 안된다며

장면의 창씨개명을 적은 문건을 뿌렸고

장면을 국무총리로 뽑는다면 의사당을 불살라버리겠다 외쳤지만

제지당하고

장면의 총리 인준안은 통과되어

장면은 총리에 당선됩니다

 

총리에 인준된 직후 윤보선 대통령(왼쪽) 과 악수하는 장면 총리

 

[장면 총리 , 윤보선 대통령]

당시 대한민국 제 2공화국은 그렇게

장면 총리가 주도하는 국가가 되었는데

 

당시 대한민국 총리는 장면 , 대통령은 윤보선이었고

윤보선 대통령은 형식적 , 상징적인 수반일 뿐 힘이 없고

실무적 내정은 장면총리가 담당해

사실상 장면이 한국 대통령이었던 시기입니다

 

제 2공화국 윤보선 대통령

 

그러나 민주당 구파의 윤보선 대통령은

민주당 신파의 장면 총리와

국군통수권 문제와 내각 문제로 암투를 벌였고

민주당 신파였던 장면 총리는

 

윤보선 대통령의 권환을 확대시키려는

민주당 구파들에게 끊임없이 시달립니다

 

장면 총리는 평소 살아온 것처럼

총리가 되어서도 근면한 생활을 했는데

일은 열심히 했지만 그의 성향답게

우유부단한 성향이 강해 강력한 지도력이 부족한 인물이었고

 

민주당 내부 뿐만 아닌

옛 자유당의 잔재이자 자유당이 강력하게 통제한 세력들인

군 , 경찰들에서도 계속 불만이 터져나오기 시작됩니다

 

[혼란의 제 2공화국]

또한 4.19 혁명으로

갑자기 이승만 독재가 끝나고 자유가 찾아오자

고삐가 풀린 언론은 마구잡이로 지껄이기 시작했는데

언론 역시 우유부단한 장면을 마구 까대는 사설을 내놓으며 장면흔들기에 동참했고

 

4.19 혁명 이후 제 2공화국 시민층에서도

계속해서 시위 , 데모가 일어났으며

툭하면 별것도 아닌일로 데모가 일어나

 

'데모를 하지말자는 데모'

 

까지 일어날 정도였습니다

 

데모좀 그만해 !!!!!

 

<당시 상황을 묘사한 주한독일대사 뷩거>

서울과 다른 대도시들에서는 지속적으로 데모가 발생하고 있다.

...

데모는 경찰에 의해 성공적으로 진압되고 있다.

...

한국 경제는 급속한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다.

따라서 최근에는 젊은이들 사이에서 민주당 정부의 정치적 , 외교적 무능에 대한 불만과

더불어 반미 구호까지 등장하기 시작했고 ,

신문들도 미국의 원조방식을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

또한 한국인들은 부패청산이 미미한 점에 불만을 갖고 있다.

이승만 정권에서의 기득권자들이 그들의 재산을 은닉하고 있는데도

정부는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다.

...

또한 매일 부패 스캔들이 터지고 있으며 ,

공산주의 세력의 선전 선동에 사회적 동요와 불안감이 확산되고 있다.

...

한국의 경제상황은 더욱 나빠지고 있으며 ,

장면은 혹시 발생할 수도 있는 민중봉기를 진압할 경찰력을 확보하고 있다.

모든 상황은 이승만 정부 당시로 회귀하는 양상이다.

...

 

[5.16 군사정변]

우유부단한 장면 역시

내부통제에도 실패하고

집권 8개월동안 내무장관을 4번 ,

국방장관과 육군총장을 두번이나 바꿨고

 

이런 상황에서

이승만의 강력한 통제에 익숙해있던 군이나 경찰은

갈팡질팡하고 있었고

 

또한 장면총리는 당시

군대안에 있었던 박정희 장군의 신원을 조회했는데

박정희의 남로당 활동 전력이 알려지며

 

'박정희는 좌익이다'

 

라는 답변이 왔고

 

장군시절 박정희

 

주한미군 사령관 카터 매그루더는 장면에게

 

<매그루더>그런 사람을 어떻게 그런 요직에 앉혀뒀냐 

 

라며 항의했고

당시 한국군 내부에서도 기회주의 성향이 강했던

박정희에 대해 어찌해야할지 몰랐던 상황이었기에

 

결국 궁지에 몰려간 박정희는

장면 및 제 2공화국의 정치력 부재와

혼란의 국가를 구하겠다는 명분을 삼아

5.16 군사정변을 계획합니다

 

결국 혼란의 민심속에

박정희 소장은 군대를 이끌고

1961년 5월 16일 군대를 이끌고

서울을 점령했고

 

5.16 군사정변의 박정희

 

대한민국 정부 주요기관과 시설 , 발전소와 방송국과 파출소와 시청 등을 장악하며

실체를 드러냈고

 

5.16 군사정변은

박정희 장군을 구심점으로하는 사회 불만 가득한 군장교들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박정희는 장면 정권이 군부에게 넘어갔다고

국민과 미국이 믿게 하기 위해

곧바로 여러 포고문을 쏟아내며

전국의 모든 단체들의 정치활동을 불법으로 하고

모든 정치인과의 협상을 배격할 것을 밝혔습니다

 

[수녀원에 숨어버린 총리]

위기에 몰린 국무총리 장면은

5월 16일 새벽 공수부대가 그의 숙소를 덮치기 몇분 전 황급하게

탈출해 미국 대사관에 갔지만 들어가지 못해서

혜화동의 가르멜 수녀원에 숨어버렸고

 

이에 윤보선 대통령에게 대한민국 제 2공화국의 운명이 달리게 됬는데

유엔군 사령관 매그루더와 주한 미국 대리대사 마셜 그린은

윤보선을 찾아가 쿠데타 저지를 위한 병력 동원을 하가해달라

3시간에 걸쳐 간청했는데

윤보선 대통령은 끝내 허락해주지 않았고

 

결국 미국 국무부 역시

숨어버린 총리 , 아무것도 안하는 대통령 때문에

제 2공화국은 5.16 군사정변에 

 

'장면은 나타나지도 않고 지도력을 행사하지도 않는다'

 

며 공식적 개입 거절을 발표했고

 

그 사이

전두환은 육사생도를 이끌고 쿠데타 지지시위를 하며

점차 반란군 입지는 탄탄해져갔고

 

시가행진을 벌이는 육사생도들과 그것을 바라보는 시민들

 

5월 18일 미국이 개입하지 않겠다는 연락을 받은 장면은

결국 수녀원에서 나온 후

중앙청 총리실에 끌려와서

장면은

 

<장면>금번 군사사태의 발생에 대하여

정치적 , 도의적인 책임을 통감하고

불법적인 비상계엄을 추인(일이 있고나서 동의)하고 내각 총사퇴한다

 

라는 성명을 내고

정계은퇴하고

본연의 가톨릭 신앙인으로 살게 됩니다

 

[대한민국 건국공로자의 친일논란]

이후 장면은

1966년 6월 4일 서울 명륜동 자택에서 별세했고

국민장으로 경기도 포천군 칠보산 기슭 천주교 묘지에 안장됩니다

 

국민장되는 운석 장면 박사

 

제 2공화국 지도자 운석 장면은

초대 주미대사로서 세계 국가들이 신속하게 대한민국 정부를 승인하는데 기여하고

6.25 전쟁 당시 유엔군의 신속한 참전결정을 이끄는데 공을 세웠다는 명분으로

1998년 건국공로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고

 

2009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조선인 천주교인들을 총괄해 일제의 전쟁수행에 협력하는

 

'국민정신총동원 천주교연맹 간사'

 

를 지낸 죄목으로

가톨릭 분야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등재되나

적극적 친일이라기 보다는 소극적 부일(일본에 부역) 이라는 동정론도 존재하고

 

'당시 한국에 친일 아닌 사람이 어딨어 ?'

 

라는 말도 있지만

관직 등이 아닌 이상 무슨 친일 안하면 죽일 분위기는 아니었기에

친일 안하고 관직에 진출 안하고 산 사람도 많았고

그런 말은 독립운동가와 일제에 숨죽여 살아간 한국 국민들에 대한 모욕입니다

 

또한 장면은

1961년 총리 재임시절 일본 히로히토 천황에게 뜬금없이 생일 축전을 보내

정치계에 어그로를 끄는 등

그가 잘못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장면은 민주당 초기 인물로서

이승만 자유당 독재에 맞선

보수 , 반공 정치인이었고

 

괜히 민주당 내부나 외부에서도

 

'더불어민주당이 사실 진짜 보수정당이고

국민의 힘은 극우다'

 

라는 말이 나오는게 아닐 만큼

 

(물론 보통 민주당 지지자들이나 진보계에서

이런말을 하는 편)

 

민주당 역시 초기엔 보수인사들이 많았고

태생 , 역사적으로 한국의 민주당과 국민의 힘은

진보와 보수정당이 아닌

미국 민주당과 공화당의 관계처럼

기본적으로 자유민주주의를 믿는 보수 , 자유정당에서 나왔습니다

 

물론 점차 시대가 변하며 친일파들도 이땅에서 죽거나 교체됬고

여야 정치인들 역시 대안이 없어서 점차 분화하며

민주당은 진보나 자유 ,

국민의 힘은 보수나 극우 정당 이미지로 바뀌게 되었으나

(미국 역시 비슷)

 

민주당 역시 이런 이력때문에

내로남불이나 공감 ㅈ도 안되는 금수저 새끼들이 난립하기도 하고

이전에 말한 것처럼

더불어 민주당(민주당)은 친일 지주가 ,

국민의 힘(자유당)은 친일 관료 및 친일 기업가들의 연합으로 시작된 정당이기에

 

현재 여야 정당도 국민의 신뢰를 받으려면

과거 청산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야 하고

무조건 적으로 당만 보고

개새끼가 나와도 ,

대가리 깨진채 지지하는

한국 정치의 형태는 바뀌어야 한다 생각됩니다

 

<라봉봉>사실 오늘날 한국 정치에서

민주당은 서민과 함께하는 진보정당 , 

국민의힘은 엘리트 관료 , 기업가 정당이라는 이미지가 있지만

 

양당 국회의원들도 잘 살펴보면

민주당도 은근 관료 ,부자들도 많고

국민의힘 역시 민주화운동가도 있고

출신들이 다양한데 (기괴)

 

현재는 여러 인물들이 섞인 추세지만

초기 한국정치사는

 

강경보수 정당이 자유당이고

이승만 , 자유당 독재에 대안으로 나온

보수정당이 민주당이었고

 

양쪽다 자유민주주의를 신봉하며

반공을 내세웠고

민주당은 공산당과 사회주의는 구분하며

공산당은 불허하나 사회주의는 이념적 가치로 허용하는 모습을 보였고

이미지와 달리

정치학자들이나

알만한 사람들은 아는 이야기입니다

 

또 오늘날 더불어 민주당은 민주당을 계승하지만

보수주의보다는 자유주의 색체가 짙으며

국민의 힘이 보수주의 성향이 짙은데

양쪽다 친일이나 독재 이력을 부인하거나 쉬쉬하는 형편인데

과거 청산이 되지 않고서는 국민적 지지를 얻을 수 없다는게 제 입장이고

 

원래 정치나 외교는

 

'소리없는 전쟁'

 

이라고도 불리기에

의외로 한국사에서도 표면적인 부분이 잘 이야기되지 않고

교과서에서도 세세한것은 다루지 않습니다

 

잘 살펴보면 의외로 한국정치인들 역시

잘 드러나지 않는 공과 과도 있고

 

장면 총리 역시 온건하거나 존재감 없는 이미지와 달리

이런 면들이 있었으며

 

예나 지금이나

민주당쪽은 비현실 , 공명심이 강하고 우유부단한 약점이 있다 생각하고

자유당 , 국민의힘쪽은 이익에 대한 욕심과 부패에 대한 약점이 많다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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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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