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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이승만>

[프린스 리]

[계몽운동가 이승만]

[투옥생활]

[고종황제의 대미특사 이승만]

[한국 최초의 박사]

[하와이의 독립운동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

[탄핵된 대통령]

[탄핵 이후 이승만]

[일제의 군비증강]

[독립외교가 이승만]

[독립운동중 얻은 기쁨]

[재팬 인사이드 아웃]

[국내진공작전]

<라봉봉>

 

[프린스 리]

친미계 독립운동가이자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 ,

그러나 독립운동가 시절부터 다른 독립운동가들과 큰 마찰을 빚었고

또한 대통령이 되어서도 책임감 없는 모습 , 부정선거와 독재로

오늘날까지 이미지가 영 좋지 못한 양면성이 뚜렷한 인물입니다

 

이승만 대통령

 

이전 이승만 정부의 이야기를 쓴 적이 있고

이번엔 이승만의 일생에 대해 이야기해봅시다

 

이승만은

1875년 3월 26일 황해도 평산군에서 태어났습니다

 

이승만은 세종대왕의 형 양녕대군의 16대손이기에

워낙 많이 올라가야되서 왕족이라 하기도 뭐했지만

 

이승만은 독립운동가 시절

자신을 

 

'프린스 리 (한국왕자 이씨)'

 

라며 소개하며

외국 상류층들을 상대했고

 

한국인들도 그저 아프리카 콩고 사람이라 하면 시큰둥 하지만

 

'나 콩고왕자요'

 

하면 오홍 하면서 잠깐 머리에 인식되기 싶듯이

 

이승만은 실제론 조선 왕족들을 싫어한

철저한 공화주의자였지만

만리타향 미국땅에서

먼 혈통까지 이용해

최대한 자신의 왕족의 피라는 것까지 쥐어짜내서

자신과 듣보잡 국가인 한국을 알리려 노력한

타고난 외교가였습니다

 

한국사 마지막 왕가 전주이씨 문장 이화문 , 대한민국 최초의 공화정 대통령 전주이씨 이승만

 

(사실 라봉봉도

신라 경순왕 + 고려 왕건 집안의

언양김씨니까

신라+고려 왕족임ㅋ ,

 

참고로 ㄹㅇ 제 고조할아버지가

조선시대때 족보 산게 아니라 한양에 99칸 집있는

역관이었음)

 

[계몽운동가 이승만]

당시 이승만은 평범한 조선 어린이답게

서당에서 한학을 배웠고

이후 과거시험에 응시했지만

당대는 조선말 ,

이미 문란해진 국가에서 과거시험은

내정자가 정해져있는 권세가들의 짜고치는 고스톱판이었기에

이승만은 당연히 낙방했고

 

오늘날 과거시험 재현행사 , 조선시대 말기 부정부패의 상징이었던 과거시험

 

이후 이승만은

20세부터 개화사상을 받아들여

배재학당에 입학합니다

 

감리회 선교사가 세운 배재학당

 

개화사상 ,

몽우리에서 꽃이 피듯이

사람의 지혜가 열려 새로운 문명을 받아들인다는 뜻으로

 

개화한 오얏꽃

 

조선말부터 뜻있는 지식인들은

서구문명과 조선의 격차를 직감하고

개화를 통해 적극적으로 조선을 개혁 , 개조하려 노력했고

청년 이승만도 이런 인물 중 한명이었습니다

 

구한말 급진개화파

 

이승만은 배재학당에서

자유와 민주주의라는 것을 배웠고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계몽운동에 참여합니다

 

이승만(왼쪽) 과 서재필 , 서재필은 이승만에게 여러 영향을 주었고 미국유학을 권장함

 

서구의 영향을 받은 독립협회는 민중계몽운동을 시작하였고

1898년 3월 10일 종로에서 열린

한국 최초의 근대 대중집회 만민공동회에서

23세의 이승만은 연사로 나서

러시아의 이권요구를 규탄했고

점차 이름을 알리게 됩니다

 

만민공동회 , 한국최초의 근대적 민중집회

 

당시는 이런 민중계몽운동이 활발하던 때라

사람들 앞에 나서서 말잘하고 연설 잘하면

사람들이 '옳소 ! 옳소 !' 하며 새로운 지식인 , 지도자로 추대해주는 분위기가 많던 시절이었고

 

(대중집회=정치 유튜브 옛날버전)

 

이런 계몽가 , 연설가로 유명해진 인물들이

도산 안창호 , 소파 방정환 , 우남 이승만(우남=이승만의 호) 이 있습니다

 

원래부터 말 잘하고 언어에 감각이 있었던 이승만은

타고난 외교가이자 지식인이었고

 

1898년 4월

최초의 민간 일간신문 매일신문을 창간합니다

 

매일신문

 

[투옥생활]

민중 계몽운동에 힘써 점차 이름알려지던 청년 이승만이었지만

이승만은 왕정폐지 , 공화정 수립을 도모했다는 반역의 죄에 연루되어

1899년 1월 한성감옥에 투옥되어 1904년동안 옥살이를 했고

 

한성감옥의 이승만(맨왼쪽 ㅅㅂㅋㅋ)

 

당시 개화파들을 고종이 키우긴 했지만

고종+명성황후 부부는 애초에 친청 , 친러 성향이 뚜렷했기에

일본이나 서구문명을 맛본 개화파들은 고종에게 모조리 숙청당하던 시기였고

이로인해 개화파들은 고종에 이를갈게되며 외국으로 도망치거나 나라를 버리던가 했고

 

이승만 역시 이때 감옥에 갇히며

고종의 매운 군밤맛을 보게 되고

조선왕실에 대한 혐오감을 충전하게 됩니다

 

고종황제를 지지한 구한말 유생틀딱들과 고종황제를 혐오한 개화파들

 

단 고종도 , 개화파들도

잘한점과 못한점이 있었고

이상과 한계가 뚜렷한 인물들이기도 했는데

시기적으로도 너무 어려운 시기였고

한국이 열강과 격차도 너무 많이 나던 시기였고

조선 , 대한제국에 계속해서 밀고들어오는 제국주의의 군홧발에

당시는 한민족이 단결하기 어려운 분위기가 강했습니다

 

하여튼 ,

이때 이승만은 고문도 당해서

안면근육경련이 생겼다는 말도 있고

ㅈㄴ 냉소적인 성격이 되기도 합니다

 

헬조선 특별교육 수료 완료 이후 군밤이라면 평생 치를 떨었던 이승만

 

수감시절에 이승만은 기독교로 개종하고

독립정신을 저술하였고

 

선교사들을 통해 감옥에 성경을 들여와 읽으며

간수와 동료 죄수들에게 기독교를 전도하고

독서도 하고

최초의 영한사전도 만들고 영어공부도 열심히 한

엘리트+모범 죄수가 됩니다

 

[고종황제의 대미특사 이승만]

러일전쟁 이후

한국엔 영어에 능통하고 국제정세가 밝은 인물이 필요했고

결국 이승만은

1904년 8월 

5년만에 특별사면으로 석방되고

대한제국의 독립보전요청이라는 임무를 받고

미국으로 보내집니다

 

이승만은 이때 고종황제의 군밤맛을 맵게 받아서 피폐해진 상황이었는데

대한제국에서는 또 영어 잘하는새끼가 이승만밖에 없어서

이승만을 미국에 보내주긴 했는데

 

이승만 역시 고종황제에 악감정이 커졌지만

또 한민족의 독립과 선진대국 미국에 대한 호기심으로 미국에 간 것이었고

 

1905년 8월 5일 미국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나서

한국 독립을 위한 청원서를 제출했지만

 

1905년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나기 전 예복을 갖춘 이승만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미국의 제국주의자였고

당시 미국 역시 뒤늦게 유럽식 제국주의 코인에 탑승하던 시기였으며

 

미국 제국주의자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

 

당시 미국과 일본은 이미

가쓰라-태프트 밀약(1905년 7월 29일) 을 해서

 

각각

미국은 필리핀을 ,

일본은 한국을

먹기로 합의한 상황이어서

 

루즈벨트는 한국과 이승만의 요청을 대충 시큰둥하게 넘깁니다

 

가쓰라-태프트 밀약 , KBS

 

그러나 ,

청년 이승만이 한국 대표로

세계의 거물인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을 만났다는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기도 했고

한국에서도 언론을 통해 이 사실이 알려져

황성신문에서는

 

<황성신문>이승만은 한국 국민의 대표자요 ,

독립주권의 보전자요 ,

애국열성의 의기남자요 ,

청년지사라

 

라고 보도되며 점차 한국내에서도 이름알려지게 됩니다

 

1909년의 청년 이승만

 

[한국 최초의 박사]

그러나 이미 미국은 일본의 한국 지배를 용인해주던 시기였기에

이승만은 외교적 성과를 남기지 못했고

결국 이승만은 미국에 남아 유학하며

학사 , 석사 , 박사를 취득해

1910년 35살의 나이에

한국 최초의 박사학위를 취득합니다

 

이승만의 박사학위 논문은

 

'미국의 영향을 받은 중립 (Neutrality as influenced by the United States)'

 

이었고

이는 그의 평생의 정치관과 일치합니다

 

1910년의 이승만 박사

 

[하와이의 독립운동가]

이승만은

1910년 경술국치로

조국 대한제국이 일본제국이 합병되는 것을 보아야했고

 

이후부터는

일제하 조선에 귀국하여

교육 계몽운동을 했지만

 

일제는 기독교인들에게

데라우치 총독을 암살하려 했다는 거짓 누명을 씌워

700명을 체포했고

 

기독교인이었던 이승만은

국내에선 계몽 , 독립운동이 어렵다 판단해

하와이로 다시 넘어갑니다

 

하와이 호놀룰루

 

미국의 제주도이자

미국 태평양의 따뜻한 휴양지 하와이 ,

 

이곳에서 이승만은

한인학원과 한인학교를 운영했고

 

일제강점기때

독립운동 방법으로

 

무장투쟁 VS 교육양성

 

으로 파벌이 갈라지자

이승만은 외교독립론을 주장하며 교육양성에 투자해야 한다했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

1919년 3월 1일 

한민족 최대 민족독립운동 3.1운동이 일어나

세계는 일제치하의 한민족이 독립을 간절히 원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결집된 한국인들은

한민족 단일 정부

 

'대한민국 임시정부'

 

를 건설하는데

국내에서 명망이 매우 높고

미국통이었던 이승만은

 

국내 동포와 임시정부 인사들의 기대를 받으며

1919년 9월 11일 상해(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에 임명됩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이승만 대통령 취임식

 

초대 대통령이 된 이승만은 그러나

계속 미국에서 활동하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미국 현지교민들의 독립자금을 독점하고 있었고

 

이에 빨리 상해로 돌아오라는 요청을 받아

결국

1920년 11월 이승만은 일본의 감시를 피해

밀항하여 상해로 건너갑니다

 

[탄핵된 대통령]

그러나 

1920년대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자금난 , 여러 파벌들의 갈등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던 시기였고

 

이승만 지지파도 있었지만

주로 미국에서 외교 중심의 독립운동을 벌이던 이승만은

무장독립운동가들과 민족주의자 , 역사학자들의 큰 비판을 받았고

 

이승만과 같은 미국 유학파 출신이었지만

민족주의자였던 안창호파에 의해

1925년 3월 이승만은 탄핵됩니다

 

이승만의 탄핵을 알린 1925년 3월 25일 독립신문 호외

 

사실 이승만은 국내적으로도 큰 명망있는 인사였지만

실무력이나 통솔력 등이 부족한 상황이었고

 

또한 성향이 외교 , 교육쪽으로만 ,

한쪽에만 치우쳐 있고

무장독립투쟁에 거리감이 강했던 이승만은

 

교육과 무장독립운동 둘다 중요시 여긴

도산 안창호에 비해서

한쪽 성향만 뚜렷했기에

임시정부내에 적이 많았고

 

미국내 재미한인단체 '대한인국민회' 의 안창호와 이승만

 

사실 사람이 다 공부만 하는 것도 아니고

성향도 다르기에

안중근처럼 학문보다 무예를 중요시해서

독립군 장군으로서 역사에 이름남긴 인물들도 있었고

 

보통 한국 지식인들은

교육 , 계몽독립운동을 ,

힘세고 호방한 자들은

무장독립운동을 하며 독립군 , 의열투쟁에 참여했기에

 

이런 차이과 다름으로 인해

임시정부 내에서도

서로 의견갈등도 컸는데

당시 이승만은 명성에 비해서

한쪽으로 치우친 성향이 강했던 인물이라

이들을 모두 통솔할 실무능력도 부족하던 상황이었습니다

 

[탄핵 이후 이승만]

탄핵된 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해 악감정이 커진

이승만은 다시 미국에서 활동하며

미국내 재미교포들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자금지원을 차단하는 등을 했고 (ㅉㅉ)

또한 강경투쟁 , 무장독립운동 등에 대해 비판적 태도를 견지합니다

 

단 이승만의 이런 태도는 정치 , 외교적인 태도이기도 했고

 

미국도 기본적으로 본인들이 급하게 당하고 있을때는

총과 칼을 들고 일어났지만

다른 나라들이 분쟁할 경우는 세계평화와 질서유지를 위해

말로 , 외교로 해결하라는 주의가 강하고

 

사실 이는 어떤 나라던 다 그런 성향이 강하고

사실 모두가 폭력과 전쟁을 싫어하기에

이게 당연지사 맞는 것이긴 합니다

 

미국의 눈치를 봐야했던 이승만은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 한인애국단 윤봉길의 훙커우 공원 의거(도시락 폭탄) 당시에도

어리석은 짓이라 비난했는데

 

이는 이승만이 정치테러행위를 매우 싫어한 미국의 눈치를 극도로 본 발언이었고

물론 광복후 눈치 볼게 없어진 이승만은 다시 윤봉길을 높여줍니다

 

하여튼 무장독립운동가 , 임시정부와 갈등이 컸던 이승만이었고

그럼에도 한국내에 미국통 인물이 이승만밖에 없었던 상황이라

대한민국 임시정부도 , 이승만도 서로에 대한 카드패를 버리지는 않았습니다

 

1928년 김구가 이승만에게 보낸 자금사정 호소문 , 이승만 역시 꾸준히 돈을 송금해줌

 

[일제의 군비증강]

그러나 ,

국제 상황은 다시 급변하는데

1차세계대전 승전국으로서 유럽국가들이 한창 전쟁하는 동안

파괴된 유럽에 물자들을 팔며

한창 꿀을 빨고있었던 일본제국은

 

1차세계대전 종전 후

유럽국가들이 다시 공장들을 복구하고

생산력을 회복해나가자

 

당시 일본은 양놈들 기술력을 이길 수 없었기에

메이드인 재팬은 다시 메이드인 유럽에 두들겨 맞고

일본은 다시 불황이 시작되게 되었고

 

결국 일본은 다시 군비를 증강하며

1931년 9월 18일 만주를 침공하는 만주사변을 일으킵니다

 

만주사변

 

1910~20년대 일본은 한창 잘나가고 있던 시기라

반대로 독립운동은 위축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고난의 시기였고

 

1930년대부터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키며

세계사회에 공공의 적으로 찍히자

기회를 얻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 이승만은

곧바로 빈틈을 파고들기 시작합니다

 

[독립외교가 이승만]

상황이 급변함을 직감한 이승만은 곧바로

1931년 12월 , 만주사변 직후

스팀슨 미 국무장관에게 편지를 보내 

일본이 장차 미국의 적으로 부상할 위험성을 경고했고

 

1930년대부터 이승만은

다시 대한민국 임시정부로부터

국제연맹(원조 UN) 총회에서 한국 독립을 탄원할 전권대사로 임명되었고

 

국제연맹 , 국제연합(UN) 의 전신

 

이승만은 미국과 스위스 등을 무대로

조선의 독립을 호소했고

 

일제의 야욕에 대한

이승만의 뛰어난 외교적 논리와

한국 독립의 당위성 설파에

 

이전까지는 일제에 우호적이고 반한국 정서였지만

점차 일제에 위협을 느껴가던

국제 사회 , 대표들은

이때부터는 한국에 호의 , 우호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결국 국제연맹은 일제가 만주사변 후 만주에 세운 괴뢰국(꼭두각시 국가) 인

만주국에 대한 승인을 불허했고

일제는 결국 국제연맹을 탈퇴합니다

 

[독립운동중 얻은 기쁨]

이승만은 계속해서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은 수십년이 지난 현재도

독립을 위해 활동하고 있음을 세계 사회에 알렸고

 

간도참변 , 관동대학살 , 일제의 한민족 약탈 , 살해 , 인권범죄 등을

세계 사회에 알렸으며

 

일제가 봉오동-청산리 대첩 보복으로 일으킨 간도참변 , 간도참변 당시 일본군에 총살당하는 한국 독립군

 

이때 국제연맹일로 스위스에 머물던 이승만은

식당에서 아내가 되는 프란체스카 도너 , 프란체스카 여사를 만나게 됩니다

 

1934년 미국에서 결혼식을 올린 이승만-프란체스카 부부

 

이승만의 활약으로 한민족의 독립에는 뚜렷한 성과와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고

결국 대한민국 임시정부 역시

양아치 검머외 , 버리는 카드인줄 알았던

이승만의 진가를 확인하고

1934년 다시금 이승만을 국무위원으로 선출시킵니다

 

[재팬 인사이드 아웃]

1939년 2차세계대전이 일어날 조짐이 보이자

이승만은 하와이에서 워싱턴으로 근거지를 옮겼고

 

1941년 66세의 이승만은

 

재팬 인사이드 아웃(Japan inside out : The Challenge of Today)

, 일본의 가면을 벗긴다(한국명 일본 내막기)

 

을 저술하며

일본의 미국침략을 경고했고

 

재팬 인사이드 아웃

 

결국 이승만의 말대로

일본은 진주만 침공을 단행하고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진주만 공습

 

이승만의 말이 맞았음이 나타났고

한인사회 뿐만 아닌

미국사회 내에서도 이승만의 명성이 떡상합니다

 

이승만은 미국 법무장관에게

미국내 한국인을

적국인 일본인과 분리할 것을 요청했고

 

결국 미국 법무장관은 이승만의 말을 받아들여

 

'한국인들 중 자의로 일본국적을 취득하지 않은 자들에 한해

적성국 외국인에 가해지는 규제에 대해 특별면제'

 

한다 발표합니다

 

또한 이승만은 미국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미국이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어기고 

일제의 한국병합에 손놓고 있던 미국의 결과가

진주만 공습이라며

 

현재 미국의 잘못을 지적하며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공식인정하고 한국이 참전하게 하라 설득합니다

 

<이승만>이제야말로 미국이 지난날 한국에 행한 잘못을 바로잡을 때다.

1905년과 1910년에 일본이 한국을 병탄하도록 도움으로써

1882년에 맺은 조미수호통상조약 위반한 미국이다.

일본이 대한제국을 멸망시킨 것을 시작으로 팽창을 거듭한 결과가

진주만 공습으로 이어졌고 결국 미국은 막대한 병력과 비용을 낭비하게 되었다.

 

서양 정치인들이 일본의 팽창주의를 억제할 있는 것은 한국이 유일하며

독립된 한국이 동양 평화의 보루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데서 비롯된 일이다.

 

그런데 아직도 미국은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소련이 종전 한국에 '소비에트 조선 공화국' 수립한다는 소문이 들리는 상황에서

그들의 극동 진출을 막고 현재의 대일 전쟁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기 위해서는

미국이 당장 임시정부를 승인하고 한국인들을 대일 전쟁 참전시켜

실질적으로 미국을 도울수 있게 해야한다.

 

결국 한국을 무시하다 일본때문에 피똥 싼 미국은

한국 이승만의 요구를 듣긴 들어주었는데

하필 반만 들어주었기에

결국 이후 또 피똥을 싸게 됩니다

 

무슨 말이냐면

일단 당시까지도 세계사회나 미국은 한국의 중요성을 전혀 모르고 있었고

그저 일본 식민지 , 미개한 토인국가라 여기고 있었는데

 

결국 한국을 삼키고 팽창한 일본이 미국을 침공하자

좆된 미국은

이승만의 말대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한미동맹을 맺었고

 

이후 미국은 일제를 물리치고 태평양전쟁에서 승전하지만

이승만의 요구대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인정하지는 않았기에

결국 미국에 의해 한민족은

정통성 있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해체되어

다시 분열하기 시작했고

 

결국 또다시 한국전쟁이 터져서

미국은 한국에서 막대한 병력과 비용을 낭비하게 됩니다

 

[국내진공작전]

하여튼 태평양 전쟁이 터지자

미국의 협조를 순조롭게 얻어낸 이승만은

미국 전략첩보국 OSS(오늘날 미국중앙정보국 CIA의 전신)와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연결을 주선합니다

 

한국인들은 동아시아인으로서

외모가 일본인과 같고

또한 일제에 대한 오랜 식민지배 경험으로

일본어에도 기본적으로 능통하고

일제 사정에 밝았기에

 

미국에게 좋은 정보들을 제공해줄 수 있었고

첩보작전에 투입되기 용이했습니다

 

결국 이승만의 주선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광복군과

미국정부 미군 OSS 는 

대일전쟁 첩보부대를 창설했고

 

첫번째 한미동맹 , 미국 정부 OSS와 대한민국 임시정부 광복군

 

OSS 와 중국내 대한민국 임시정부 광복군 연합은

미군 잠수함을 타고 한반도에 진입한다는

 

'국내진공작전(독수리 작전)'

 

을 계획했고

 

또한 미국내 소수 한인 특공대원을 선발해

한반도에 투입하는

 

'냅코 작전'

 

도 실행됩니다

 

국내진공을 훈련받는 광복군

 

미일전쟁 , 태평양전쟁에서

이미 일본은 미국에 대항할 수 없는 국력이었지만

모든 경우의 수 , 모든 카드패를 쥐려했던 미국은

승전은 당연하고 한 수 앞서서 전후 질서까지 생각하고 있었고

 

1945년 독일 패망후

마지막 전선 일본에 집중하던 미국은

일제가 더 발악하면 여차하면 한반도도 부셔버릴 생각이었고

 

국내진공작전(독수리 작전) , 냅코 프로젝트는

극소수 한국 대원들로 계획된 것이었기에

인터넷에서 한국까 , 식민사관론자들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ㅂㅅ들 고작 수십명으로 국내진공작전 ㅋㅋㅋ'

 

라면서 조롱하지만

 

미국이 실행하는 것이었기에

결코 허툰 계획이 아니었고

실행됬다면 일본제국령 식민지 조선은 ㄹㅇ 박살났을지도 모릅니다

 

국내 진공 작전 , 전쟁기념관

 

하여튼 그러나

이 작전들은

 

1945년 8월 일본 본토내 원자폭탄이 투하되며

일본은 무조건 항복하며 

끝나게 되었고

 

한국은 35년의 식민지배를 끝내고

꿈에 그리던 광복 ,해방을 맞이합니다

 

<라봉봉>이승만을 보면

딱 미국물 먹었다는 티가 팍팍 나는 인물인데

 

실제로 안창호도 미국물을 먹은 미국내 한인사회의 대표자 출신이었음에도

안창호는 토종민족주의자 느낌이 강하고

이승만은 검머외 느낌이 강한 이유는

안창호는 ㄹㅇ 밑바닥부터 차근차근 민중과 함께한 타고난 지도자였고

 

이승만은 젊은시절부터 공격력에 뚜렷한 두각을 보여

개화파 , 계몽운동가들의 지지를 팍팍 받았고

이후 고종의 지원을 받아 국운을 걸고 미국에 특사로 파견됬고

나라 멸망 이후에도

 

미국은 일단 세계 여러 국가에서도

미국에 유학 온 거물 정치인이 될법한 한 인물들은

미국 NO.1 대학인 하버드 대학교에 보내거나 하면서

친미 성향으로 키운후 그 나라로 보내는 경향이 있는데

 

(개발도상국 , 독재국가 출신 인물 , 왕족들도

미국 지원으로 하버드에 많이 감)

 

이승만 역시 멸망한 한국인 출신이었지만

미국의 의도로 키워질만한 좋은 인물이었고

 

미국 입장에서도

안창호 같은 민중과 함께한 인물은

일단 길들이기 어려운 인물이고

이승만같이 정부와 엮여있고

영어에 유창한 인물은 딱 박사로 키우기 좋은 인물이었고

 

그렇게 이승만은

미국 유학출신의 순수 한국형 지도자 안창호 선생님과 달리 평생동안

한국과 미국 정부의 '주변인(경계인)' 으로서 

키워진 인물입니다

 

이승만은

한국이나 미국에서도 할 것없이

ㅈㄴ게 비싸게 키운 카드패였고

 

이에 아무리 그가 개 ㅈㄹ을 해도

한국이나 미국은 함부로 버리기 어려운 좆같은 카드패였는데

그럴것만도 할만한게

 

일단 이승만은 한국인 중 영어가 되는 유일한 인물이었고

물론 영어는 안창호나 재미교포들도 생활영어는 다 할 수 있지만

 

이승만처럼 혼자서 영한사전을 펴낼 만큼

뛰어난 언어인재는 흔한 케이스가 아니었기에

 

법률 , 정치 , 행정 , 외교 같은 고급 언어가 사용되는 부분은

한국-미국(혹은 국제) 간의 관계에서

이승만 밖에 다룰 수 있는 인물이 없었습니다

 

싹수 노란 전문직 의사들이

의사 라이선스 철밥통 믿고 매년 연봉 수억씩 땡겨가듯이

 

고급기술을 가진 새끼가 그 집단에서

한명밖에 없다면

ㅈㄴ 패고 싶어도

울며 겨자먹기로 쓸 수밖에 없는 카드패였고

 

이런것때문에

극우 집단에선 이승만을 필요 이상으로 능력자라고 빨아대지만

 

이승만 역시 대학물 먹은 샌님 기질이 강해서

실무적인 것에 약하고

또 이기주의 , 통수기질도 강한 인물이라

 

괜히 역사학자 , 민중들에게 평가가 매우 박한 것이 아닙니다

 

단 이승만은 전체적인 것을 보는 눈이 부족했기에

타고난 지도자는 아니었지만

타고난 외교가로서

외교로서는 깔게 없는 인물이었고

 

2차 세계대전 시기

세계에 일제의 만행을 알린 빛나는 한국 독립운동가였다는 점은

부정 할 수 없는 업적이나

 

이후 이승만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또다시 대통령이 된 후

인생좆망테크를 걷기 시작합니다

 

하여튼 ,

이승만은 뭔가 유쾌한데 꿀밤 마려운 캐릭터고

만화나 창작물에서도 일단 악에 맞서는 주인공 , 정의의 편이긴 한데

아슬아슬하게 악의 편에 설뻔한 그런 발암 캐릭터 같은 느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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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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