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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

[해방정국]

[김구 VS 이승만]

[정읍 발언]

[남북협상]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

[엘리트 대통령]

[과거청산 실패]

[제 1공화국]

[자유당과 친일파의 부활]

[강경한 반일 대통령 이승만]

[한국전쟁 , 도망간 대통령]

[이승만의 독자노선]

[이승만의 양민학살]

[독재자 이승만]

[구황실재산법]

[측근에 고립된 이승만]

[4.19 혁명]

[대통령 하야]

[노예의 멍에를 매지 않도록 해야 한다]

[독재자 VS 국부]

<라봉봉>

 

[해방정국]

또한 당시 독일을 제압한 소련군은

동북아로 전선을 집중시켜서

태평양 전쟁으로 비어있는 일제령 만주 , 조선에 빠른 속도로 남하하며

무혈입성하듯이 점령하고 있었고

소련은 참전 일주일만에 한반도 북부를 점령합니다

 

미국은 한반도에 38선을 그어

남한을 통치하려 했고

 

전후

소련군은 북한을 ,

미국군은 남한을 통치하게 됩니다

 

소련군과 미군의 한국 군정기

 

미국은 막 점령한 일본을 관리하기 바빠서

한반도의 중요성을 다시 멀리하기 시작했고

 

하여튼 이후

이승만은 맥아더 장군과 함께

1945년 10월 4일 한국으로 귀국합니다

 

1945년 10월 16일 오후 5시 ,

도쿄에서 맥아더를 만난 후

이날 이승만은 김포공항에 도착했고

 

17일 저녁 8시 30분 ,

귀국한 독립운동가 이승만은

그를 환영해주는 동포들에게

라디오로 그의 유명한 발언을 합니다

 

<이승만>나를 따르시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습니다

 

이승만은 미우나 고우나

대한민국 초대 임시정부 대통령 출신이었고

의외인게 김구나 안창호보다 더 나이도 많은 인물이었으며

미군정 역시 말이 통하는 인물이 이승만밖에 없는 상황이었기에

 

초기의 이승만은 의외로 좌우할 것없는 전민족적 지지와 미군정의 큰 지지를 받습니다

 

1945년 10월 이승만의 귀국연설회

 

11월 23일부터는 중국내 김구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인사들도 귀국했고

 

12월 29일 모스크바 3상회의로

한국에 대한 신탁통치가 결정되자

이승만은 김구와 함께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주도합니다

 

이승만과 김구 , 우정의 독립운동가 동지들

 

35년만에 일제에서 해방된 한국인들은

또다시 외세가 통치한다는 것에 극렬히 거부감을 느꼈는데

 

좌익 박헌영이 소련의 지령을 받아온 뒤부터는

좌익들은 신탁통치에 찬성했고

 

공산주의 운동가 박헌영

 

김구와 이승만은 우익으로 분류됩니다

 

이승만이 김구와 하지 중장(미군정 지도자)을 소개하는 모습

 

광복은 되었지만

이때부터는 점차 남한과 북한 ,

우익(자유주의)과 좌익(공산주의) 으로 나뉘어

한민족은 극도로 분열하고 있었고

한반도내에서는 정치테러 , 암살이 빈번하게 이뤄지며

혼란의 해방정국이 시작됩니다

 

암살당하는 거물 정치인 여운형 , KBS 1TV 대하드라마  서울 1945 (2006)

 

[김구 VS 이승만]

같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장 출신이자

같은 우익이었던 김구와 이승만은 연합했지만

 

민족주의 성향이 강한 김구와

반공 , 자유주의 , 친미성향이 강한 이승만은 다시 대립하게 되었는데

 

당시 38선으로 남북이 나뉜 한국내에서는

남북이 동시에 공동선거를 해서 통일된 정부를 세워야 한다는 것과

남한만이라도 단독 정부를 세운 후

차후를 대비해야 한다는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해야한다는 두가지 안이 나왔는데

 

남북통일정부는 김구가 ,

남한 단독정부는 이승만이 지지했습니다

 

이러한 갈등속에

한때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장출신이라는 공통점과

독립운동 동지였던

김구와 이승만은

점차 우정에 금이 가기 시작합니다

 

 

[정읍 발언]

이승만은 남한 각지를 순회하다가

1946년 6월 3일 정읍을 방문하던 중

이른바

 

'정읍 발언'

 

을 하면서

이러한 주장은 표면으로 공식화됩니다

 

<이승만의 정읍발언>

이제 우리는 무기휴회된 공위가 재개될 기색도 보이지 않으며 , 

통일정부를 고대하나 여의케 되지 않으니

우리는 남방만이라도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여

38 이북에서 소련이 철퇴하도록 세계 공론에 호소하여야  것이다. 

여러분도 결심하여야  것이다.

 

연설하는 이승만

 

근데 당시 미국은 소련과 그래도

2차 세계대전때 같이 연합국으로 참전한 바가 있어서

일단 한국을 38선으로 나누어도 소련과 척지지 않으려 했고

공산주의와 자유주의는 사상적인 갈등일 뿐 

그 이상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승만이 계속 나대자

미군정도 김구랑 이승만 같은 강경 민족 , 우익은 배제시키고

김규식 , 여운형 같은 중도파 인물을 키우려 했는데

 

이승만 역시 식견이 있는 상태에서 나댄 것이었고

 

당시 38선 이북 , 북한은 

미군정의 판단과 달리

소련과 공산당이 완전히 독점 , 장악해서

다른 세력은 한마디도 못하던 상황이었고

 

반대로 38선 이남 남한은 

우익과 좌익이 양분하는 형태였기에

 

김구나 이승만 같은 강경 우익의 목소리 역시

일리가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점차 미군정 관계자들은

북한이 공산당으로 단일화 됬고

남한은 파벌이 양분되있다는 점 때문에

새 정부가 들어서면

한반도 전체가 공산화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결국 한국문제는 세계연합 , UN 으로 이관됩니다

 

UN

 

[남북협상]

UN 은 한국에 임시위원단을 파견했는데

1948년 1월 8일 UN위원단이 서울에 입국했지만

북한지역은 UN 위원단의 방문을 거부했고

 

유엔 한국 임시위원단 내한

 

이에 이승만은

북한이 UN 위원단의 방문을 막고있으니

남한만이라도 단독선거를 실시해야한다 했고

결국 UN 역시 남한만이라도 단독선거를 할 것을 결의합니다

 

이에 김구는

겨우 얻은 광복인데 나라가 두동강날 것 같다는 위기감에

1948년 4월 19일

남북협상을 위해

북한을 방문하고

북한 지도자 김일성과 만나서

북한과의 남북 단일정부 수립 약속을 받아내지만

 

한민족의 분열을 막기위해 38선을 넘은 백범 김구 선생님

 

애초에 북한 역시 공산화된 통일 정부를 세우고 싶었을 뿐

남한의 자유주의자들과 연합할 생각은 전무했고

김구 선생님의 민족을 위한 노력은 허사로 돌아갑니다

 

중국물도 오래 먹었고

민족주의자이자 애국심이 강했던 김구 선생님은

그렇지만 , 안타깝게도 광복 이후부터는 

좌우대립 , 미국과 소련이 하는 패권대결을 보는 국제적 시각이 부족했기에

광복 이후부터는 노장이 되어 역량이 다하고 있던 것이었습니다

 

반대로 ,

미국물도 오래 먹고

해외와 미국에서 오랜 유학경험이 있어

국제정세와 미국인들의 정서와 시각을 읽을 수 있었던 이승만은 

당시 미국과 소련의 체제대결속 남북한의 관계 ,

공산주의와 자유주의 이념체제의 다른점을 파악하고 있었기에

광복후 한국에서 급부상하게 됩니다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

결국 1948년 5월 10일

남한지역에서

5.10 총선거가 실시되었고

역시 1대 국회의원에 당선된 이승만은 제헌 국회에서 

초대 국회의장이 되어

미국과 같은 대통령 중심제 등의 헌법개정을 시행했습니다

 

1948년 5월 31일 제헌국회 개헌식

 

곧 제헌국회 간접선거로 진행된 대통령 선거에서

 

(수천만 국민투표가 아닌 수백명의 국회의원들이 대통령을 선거하는것)

 

196명 의원 중

180명의 표를 압도적으로 얻어서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결국 이승만은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에 취임합니다

 

취임선서하는 초대대통령 이승만 ,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식

 

[엘리트 대통령]

이승만이 압도적 득표를 받은 것은 우연 혹은 조작이거나

한민족이 무슨 독재자를 사랑하는 변태 취향의 그런 것은 아니었는데

 

당시까지만해도 

이승만은 한국 근현대사의 정통성의 끝판왕중의 끝판왕 인물이었고

엘리트 테크를 차곡차곡 밟은 인물입니다

 

일단 이승만은 젊은시절엔 개화사상을 받아들여

독립협회 , 만민공동회에서 활동하다

고종황제에게 두드려 맡고 감옥에 갇혀 투옥생활을 했고

 

싸가지는 좀 없는데 

근데 또 영어는 ㅈㄴ게 잘해서

 

고종황제도 나라가 망할 위기에 처하자

대한제국 안에 영어 되는 새끼가 이승만밖에 없어서

다시 이승만을 감옥에서 꺼내서

 

'대한제국 독립보전 요청 임무' 

 

로 이승만을 미국에 특사로 보냈고

 

청년 이승만은 미국 시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과 만나서

한국민들의 대표로 한국인들의 입장을 전달하기도 하고

 

이후 을사조약으로 나라가 망하자

그때부터 이승만은 미국에 짱박혀서

일본의 야욕을 알리고 식민지 한국인들의 상황을 알리는데 주력했고

 

점차 명성을 얻은 이승만은

1919년 건국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첫 대통령 ,

초대 수장이 되는 

순혈 성골테크를 밟은 인물이고

 

이후부터 일제가 군비를 늘리며 광폭화하자

계속해서 세계사회에 한민족의 중요성과 일제의 위험성을 알린 인물이었기에

 

이승만이

간선제일지언정 압도적 지지로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 된 것은

결코 조작도 , 이상한 일도 아니었고

당시 대한민국에서 가장 똑똑한 인물중 한명이었기도 했기에

실제 당시 국민적 지지도 , 인기도 엄청났습니다

 

한국 민중의 사랑을 받았던 이승만 박사

 

그러니 이승만은

 

계몽운동가 ,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 , 독립운동가 , 국제적 인물

 

등 어느하나 빠질것 없는 인물이었고

물론 이전 임시정부 시절부터 민족주의자들의 의심과 의문을 받으며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에서 탄핵된 전력이 있는 찝찝함이 있었지만

하여튼 미국과 소련이 그레이트 게임을 하는 

당시까지만해도 대한민국에는 이승만을 대체할 인물이 전혀 없었고

 

하여튼 괜히 독립운동가 출신이 아닌것처럼

이미지와 달리

의외로 대한민국 이승만 정부 초대 내각에서는

친일파가 없었고

독립운동가들도 활발히 대한민국(남한) 정부에 참여합니다

 

독립운동가들로 구성된 대한민국 초대 내각

 

[과거청산 실패]

그러나 한국은

짧은 독일의 식민지 경험으로 과거청산이 쉬웠던 프랑스와 달리

 

35년간의 긴 식민지배동안

1~2세대가 일본제국령 조선에서 태어나며

점차 나랏말도 잃어버릴 지경에서 해방을 맞은 것이었기에

 

한반도내 일반 민중들까지도

일제의 정서에 젖어있는 상황이었고

 

태평양전쟁대부터 광폭화된 일제의 한민족 말살정책 , 일제 신사에 강제로 참배하는 한국학생들

 

최고위층 인사들을 제외하고는

친일청산이 쉽지 않았고

또한 미국이나 이승만도 일본을 매우 싫어했지만

반공이 우선이라는 판단아래

일반 관료 , 순경(일반 경찰) 같은 하급공무원들은

일제시대대 인사들을 그대로 등용합니다

 

그러나 ,

이승만이 매우 잘못했던 것은

그중에서도 악질적으로 일제의 개가 되어

앞장서서 조선인이나 독립운동가들을 잡아들여 고문했던

노덕술 같은 인물들까지 그대로 등용하는 악수를 두었고

 

일제 앞잡이 노덕술

 

초대 대통령이 이지경이니

결국 대한민국인 친일청산에 완전히 실패합니다

 

어짜피 당대 국민들도 현실적으로 

제대로된 , 완전한 친일청산까지도 바라지도 않았지만

노덕술 같이 악명이 높았던 인물까지 등용한 것은

 

개개인의 실수라 보기도 어렵고

평범한 상식 수준을 벗어난 것이었기에

 

이승만이 대통령 , 지도자로서 적합한가의 의문까지 불러 일으킬 정도였고

괜히 민족주의자 , 역사학자들 뿐만 아니라

일반인들 조차도 이승만에 대해 평가가 박한 것이 아닙니다

 

[제 1공화국]

하여튼 ,

친일청산보다 반공이 더 우선이라 생각한 이승만은

점차 반공코인에 탑승한 친일파들을 다시 정부로 하나 둘 불러들이기 시작했고

철저한 반공노선을 지향합니다

 

이승만 정부는 제 1공화국이라는 명칭으로 불리고

이후부터 헌법이 크게 개정(개헌) 될때마다

제 2 , 제 3 , 제 O 공화국 ... 이라 불리며

가장 유명한 공화국이 1980년대 신군부 배경의 드라마로 유명한

전두환 정부 시기의 제 5공화국이고

 

이후부터는 민주화가 되어

더이상 군부가 아닌

민간 선거에 의해 대통령이 나오는

노태우 정부부터 오늘날 문재인 정부까지는

제 6공화국이라 불립니다

 

제 1공화국 대통령 이승만 공식 초상화

 

[자유당과 친일파의 부활]

하여튼 이승만 정부 ,

제 1공화국은

그렇게 막 독립한 신생국가 대한민국에서

미소대립 , 좌우갈등 , 친일논란 등

여러 파란속에서 시작하였고

 

이승만은

1952년

자신의 직계 여당 

자유당을 창당했고

자유당은 철저한 반공 , 반일 노선을 지향합니다

 

당시 미국이

일본을 지배할때 큰 갈등을 일으키지 않기위해

A급 전범이 아닌 강경 군부인사들을 살려주는 것을 선택했는데

미국의 영향을 받은 대한민국 , 이승만 역시

극반일임에도

친일파들을 살려주는 것을 선택했고

 

단지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였기에

미국이 전후관리도 딱히 안했고

 

일본처럼 A급 전범은 없었지만

A급 친일파는 많았는데

문제는 이런 A급 친일파들이

이승만 , 자유당에 붙어

한국은 모두 살아났습니다

 

아 ,

그렇다고 자유당과 오늘날 자유당을 계승한 국민의 힘이

친일매국정당이라고만 보기도 뭐한게

더 역겨운 것은

오늘날 국민의 힘의 원형격인

자유당에 붙은 친일파들은 친일관료 , 기업가고

 

오늘날 더불어 민주당의 원형격인

한민당에 붙은 친일파들은 친일 지주층이라

한국은 여야할것 없이 친일파 청산에 완전히 실패했고

 

국민의 힘과 더불어 민주당 역시

자신들은 이런 정당을 계승하지 않았다 주장하며

친일을 부인하지만

국민들은 , 그리고 양당은 서로를 그렇게 보지 않고

 

학계에서는 국민의 힘 , 더불어 민주당 모두 다

보수계에서 출발했다 보고 있습니다

 

국민들은 누구를 믿어야 할까요 ?

 

[강경한 반일 대통령 이승만]

하여튼 자유당은 반공 , 반일을 지향했음에도

이승만식 자유적 기풍과 달리

이미 친일파들이 점차 달라붙어가며

점차 부패의 온상으로 썩어들어갔고

 

일단 그래도 자유당 수장 겸 대통령인 이승만은

부하들인 자유당원과 달리

일본을 극혐했기에

일본에 대해서는 극강경외교노선이었고

 

이승만 정부 , 제 1공화국 외교는

 

친미 , 반공 , 반일

 

이 세가지라 보면 됩니다

 

이승만은 대일 강경외교를 시행하며

한국과 일본 바다에

 

'이승만 라인'

 

이라는 선을 그엇고

 

이승만 라인

 

일본어선이 제주도에 침범하면

한국 경찰이 총을 쏘아 일본 선박 선장이 사망한다거나

한국 영해를 넘나드는 일본 선박은

체포 , 억류하며

 

1965년 박정희 정부때 한일국교 정상화가 되기 전까지

한국 해경은 328척의 일본배를 나포했으며

나포한 배들을 해안경비대 경비정으로 쓰게 합니다

 

또한 이승만 정부는 중국 측에서도 강경대응을 했고

한국경찰들은 중국어선과 총격전이 벌어져 

한국 경찰 4명이 중국배에 납치되 12년간 옥살이를 하기도 합니다

 

상남자였던 승만이형

 

[한국전쟁 , 도망간 대통령]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북한은 기습적으로 무방비 상태의 한국을 남침했고

결국 동족상잔의 비극이자 현대사회 최악의 국제전이었던

한국전쟁 , 6.25 전쟁이 터집니다

 

이승만은 곧바로 대전 , 익산 , 목포 , 대구를 거쳐

부산으로 런했고

 

 

당시 상황을 전혀 모르고 있던

서울시민 , 대한민국 국민들은

대통령이 도망간지도 모른채

피난가지 말고 안심하라는

이승만의 라디오 방송만 믿고

가만히 있다가 북한군에게 점령당해

강제 부역하게 됩니다

 

북한 인민군 치하의 서울 , 매일같이 스탈린과 김일성 우상화 집회가 열린 서울

 

한국전쟁은 이전 이야기에서 쓴 바와 같이

엄청난 비극이었고

혼자서 대국민 거짓말치고 ,

한강철교를 폭파시켜놓고 도망간 이승만 대통령이었기에

국회의장 , 부의장은 이승만을 찾아가

대국민 사과를 발표하라 요구했지만

 

이승만은 

 

<이승만>내가 무슨 당 덕종이냐 !

 

하며 사과를 거절합니다

 

(당덕종은 전란을 진압하고 백성들에게 사과함)

 

[이승만의 독자노선]

이승만은 한국전쟁 내내에도

전쟁상황에 상관없이

무조건적인 북진통일을 주장했고

 

당시 중국군의 인해전술에 충격을 먹었던

미국도 계속 이승만이 홀로 따로 가려하자

골때리는 양반 취급을 합니다

 

1952년 3월

이승만은

분단상태에서 휴전은 한국에 사형선고나 다름없다며

단독으로라도 계속해 싸워나갈것이라 했지만

 

결국

1953년 7월 27일 

이승만과 대한민국 정부만 제외된 상황에서

 

미국 , 중국 , 북한은

셋이서 판문점에서 휴전협정을 처리합니다

 

당시 이승만은 미국의 휴전협정을 방해하려고

멋대로 반공포로들을 대규모로 석방했고

미국은 친구인줄 알았던 대한민국 대통령 이승만이 똥고집 피우며 엇나가자

격분해 이승만을 제거하려고도 했습니다

 

북진통일을 주장한 이승만

 

[이승만의 양민학살]

하여튼 이승만은

한국전쟁 시기

전쟁 , 공산당 숙청 명목으로

수많은 양민(일반 국민) 들을 학살하는 팀킬까지 저질렀는데

 

국민방위군 사건때

장교 , 간부들이 군수물자를 횡령해서

수많은 징집된 한국군이 굶거나 얼어 죽었고

 

국민방위군 사건때 징집된 청년들

 

간첩 소탕목적으로

거창 양민 사건이 일어나

민간인 700~1400명이 총살당합니다

 

거창양민학살 사건

 

1953년 

한국전쟁이 끝나고

나라도 전국토가 쑥대밭이 됬지만

더 문제였던 것은

남북한의 적대적 감정이 극대화 됬고

금방이라도 다시 통일될 줄 알았던 38선은

수십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군사적 긴장이 있는 분단선이 되었습니다

 

또한 국민들은

이승만 정부의 무능과 학살 등으로

점차 이승만에 대해 등을 돌리고 있었고

 

이승만의 이미지는

전국민적 지지를 받는 빛나는 외교독립운동가 대통령에서

북진만 주장하는 부패한 보수꼴통 노인네 이미지로 변화합니다

 

[독재자 이승만]

한국전쟁 이후 점차 한국 엘리트 층 역시

이승만에게 등을 돌려가고 있었는데

 

점차 독선적 기질이 재발한 이승만은

1954년 사사오입 개헌을 통해

거짓 논리로 우기면서까지 억지로 3선 개헌을 시행해

1956년 3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고

 

사사오입개헌에 항의하는 의원

 

1958년에는 진보당 사건을 일으켜

반대파들을 사법살인으로 죽여버리며

독재자의 길을 걷기 시작합니다

 

25m 의 당시 세계최고 규모였던 남산의 이승만 동상 , 이승만 독재의 상징

 

점차 과거의 명성에 취해 독선과 아집만 남은

권력에 집착하는 추악한 노인네의 모습을 보인 이승만이었고

 

이에 수많은 대한민국 국민들은

점차 그와 나라가 잘못되가고 있음을 느낍니다

 

[구황실재산법]

1954년

구황실재산법이 제정되는데

계몽운동가 출신이었던 이승만은 이전부터 고종황제에 반발하다

감옥에 투옥된 이후부터

대한제국 황실과 왕정에 대한 혐오감을 느끼고 있었고

 

대한민국에서 옛 조선 , 대한제국 황족들이

다시는 자리잡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대한제국 황실 후예들의 재산과 권력을

냉정하게 몰수했습니다

 

1972년 고종황제의 딸 덕혜옹주 (왼쪽에서 두번째)

 

근데 이게 만약 제대로 안됬다면

한국은 오늘날 외국 왕정국가처럼

왕족들이 조상 유산으로 떵떵거리며

다시 부패하거나 신분제 국가가 될 수도 있었고

 

또한 이승만은 한국 최초의 공화국 대통령 ,

초대 대통령이었기에

특히나 이런 것에 예민할 수밖에 없었던 인물입니다

 

[측근에 고립된 이승만]

점차 정상인들도 떠나가고

아부하는 측근들만 남은 노년의 이승만 대통령은

점차 자아도취에 빠지고 있었고

 

'자신은 위대한 독립운동가이자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을 건국한 국부이며 ,

어리석고 우매한 국민들은 자신을 언제나 지지해줄 것'

 

이라고 믿게 됩니다

 

실제로 이승만은 자뻑에 빠질만큼 공이 있었던 인물이긴 한데

미국을 건국한 미국 국부 조지 워싱턴처럼

박수칠때 깔끔하게 권력욕을 버리고 떠났다면

워싱턴처럼 한국의 국부이자 존경받는 위인으로 남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점차 측근들에 둘러쌓이며

종신 대통령을 꿈꾸게 되었고

 

독립운동가 겸 한국 민주주의를 도입한 선구자 ,

군림하려는 독재자

 

라는

이런 이중적 모습에 점차 사람들은 그에게 등을 돌리기 시작합니다

 

[4.19 혁명]

1960년 3월 15일에는

대통령 , 부통령 선거가 있었는데

이승만 , 자유당 정부의 주도로 전국적 개표조작이 벌어졌고

결국 국민들의 전국적 저항으로

 

1960년 4월 19일 ,

한국 최초의 시민혁명인

 

'4.19 혁명'

 

이 일어나서

이승만과 자유당 정부 , 제 1공화국은 시민혁명으로 무너집니다

 

이승만 동상을 철거하는 시위대들

 

눈에 최루탄이 박힌채 사망한 학생 김주열 열사

 

4.19 혁명 당시 어린이 시위대들 , 부모형제들에게 총부리를 대지 말라

 

4월 19일 경무대(청와대 , 대통령관저)로 향하는 시위대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 , 교수들의 시위

 

군부 역시 희생자가 발생한 시민 , 학생 시위대에

무력진압을 거부했고

 

계엄군의 탱크에 올라탄 시위대들

 

결국 시민들의 압박에

측근들은 이승만 대통령에게

학생들을 탄압하자는 제의를 했고

 

그런데 일말의 양심이 있었던 이승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승만>불의를 보고 일어나지 못하는 민족은 죽은 민족이다.

민중이 내가 그만둘 것을 원한다면 물러서면 된다

 

또한 이승만은 4.19 의거로 부상입은 학생들이

수용된 병원을 찾아

학생들의 궐기를 높이 평가하며

 

<이승만>우리 선열들의 독립투쟁과

3.1 운동을 이어받은 것이다

 

하며

자신이 물러날 때임을 직감합니다

 

뒤늦게 상황파악이 된 이승만 대통령

 

결국 이승만은

 

<이승만>어떻게 국민들을 죽일 수가 있느냐

내가 물러나야지

 

하며 하야(관직에서 물러남) 을 결정했고

당시 이승만에게 하야 권고를 하러 간

허정 외무부 장관은 

하야 성명을 구술하는 이승만을 보고

목이 메어서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대통령 하야]

1960년 4월 27일

이승만은 국회에 대통령직 사임서를 제출하고

즉시 수리되었습니다

 

<당시 이승만>정의를 사랑하는 우리 청년학도들이 있는 한

대한민국의 미래는 밝다

 

하야성명을 발표하고 돌아가는 이승만

 

곧 이승만은 

1960년 5월 29일

하와이로 망명했고

처음엔 이승만도 잠시 하와이에 머물러 있다가

한달 후정도에 다시 돌아올까 생각했는데

 

하와이로 출국하는 이승만

 

이승만이 하와이로 망명간 이후

더이상 이승만의

 

'위급시 런-안전시 돌아옴'

 

검머외 스킬에 진저리가 났던

대한민국 관료들은 그의 귀국을 허용하지 않았고

결국 그는 조국 대한민국에 돌아오고 싶은 향수병에 걸린채

하와이에 머물게 됬습니다

 

[노예의 멍에를 매지 않도록 해야 한다]

실제 이승만은 40년 넘게 외국에서 떠돌며 생활했기에

그 반동작용으로 고향 , 조국에 대한 집착적 향수병이 매우 강한 인물이었고

누구보다도 반조선 , 왕정 주의자였음에도

오랜기간 미국물만 먹은 그는

수많은 재미교포들이 그러하듯이

조선 , 한국 전통에 대한 집착이 강한 인물이었습니다

 

하와이 망명시절 조국에 대한 향수때문에 키운 발바리(잡종견) '해피'

 

(의외로 한국가정은 그냥 평범한 집에

세련된 현대식 인테리어를 선호하는데

미국이나 재외동포들이 오히려

괜히 집안에 한옥가구나 한복 , 부채와 도자기등을 꼭 구비해놓는

성향이 있음)

 

1962년에는 비행기 표도 끊어놓고

사과성명도 발표했지만

 

박정희 정부의 특별지시로 이승만 귀국은 반대됬고

이미 독재자로 낙인된 이승만이었기에

한국 신문들도 사설을 내며 이승만의 귀국을 반대합니다

 

망명생활 , 향수병등에

이승만은 병세가 나타났고

1965년 7월 19일 하와이 호놀룰루 요양원에서

이승만은 90세의 나이로 심장병으로 사망합니다

 

하와이의 이승만-프란체스카 부부

 

그는 죽기 전 이런 유언을 남겼습니다

 

<이승만>잃었던 나라의 독립을 다시 찾는 일이 얼마나 어렵고 힘들었는지 우리 국민은 알아야 하며

불행했던 과거사를 거울삼아 다시는 어떤 종류의 것이든 노예의 멍에를 매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것이 내가 우리 민족에게 주는 유언이다.

 

그가 죽어서야 ,

곧바로 그의 유해는 대한민국에 돌아왔고

정부는 이미 죽어버린 독립운동가 이승만에게

국민장 예우를 갖출까 했지만

 

4.19 혁명 관련단체들은

이미 죽어버린 독재자 이승만에게

국민장은 과분한 조치라며

항의농성을 했고

 

결국 이승만 장례는 가족장으로 행해집니다

 

[독재자 VS 국부]

이승만은

 

계몽운동가 , 자유주의자 , 민주주의자 ,

독립운동가 , 애국자 , 반공인물 , 독재자

 

등 여러 수식어가 붙는 인물이었고

2000년대 이후 극우 사관 , 뉴라이트 , 일베 등은

이승만을 건국대통령이자 국부로 모셔야한다는 재평가를 하자는

의견도 내놓았습니다

 

이승만 역시 일생 , 재임기간 내내 뚜렷한 공과 과가 있었던 인물이었고

매우 똑똑하고 대단한 인물임은 틀림 없으나

그로인해 무고하게 죽은 인물도 엄청나게 많으며

추악한 아집과 고집으로 자신의 명예를 더럽힌 인물이기도 합니다

 

실제 그는 농담도 잘하고 매우 유머러스한 성격이었기에

만일 살아있었더라면

가난하고 어리석었던 조국 한국의 빛나는 발전에 감격했을 것이며

그에대한 오늘날의

 

생물학적 국부 ,

런승만

 

여러 조롱성 별명에도 유쾌하게 웃어 넘길 인물이라 생각됩니다

 

한복을 입은 이승만과 외국인 영부인

 

<라봉봉>독립운동가이자 한국 건국 대통령 이승만이

역사학계에서 평가가 매우 박한것은

역사학계가 무슨 좌경화되거나 그래서 때문은 아니고

그냥 이런 통수기질 부류 인물들이 역사에서 노답인 경우가 많고

실제 이승만도 그랬기에 그런것입니다

 

근데 저는 이승만의 능력 자체는 높게 평가하고

제가 보기에 한국사 대통령 중

천재의 영역에 근접해있는

유일한 대통령인 것은 맞다고 생각되는게

 

일단 영어를 ㅈㄴ게 쌉 잘했던 인물이라서

혼자 감옥에서 영한사전을 편찬했다는 말도안되는 기록을 보고

저도 깜짝 놀랬습니다

 

괜히 세계 초강대국 미국에서도 

한국사 대통령중 가장 높은 클래스의 환대 , 대우를 받은게 아니고

친미파지만 머리가 컸던 인물이라

미국 의도대로 고분고분하게 움직여주지도 않았습니다

 

단 천재는 아니고 천재의 영역에 근접했다는 것은

일단 뚜렷한 전문적인 무언가를 남겼다 보기 어렵고

기회주의 , 검머외 기질도 강했고

말년이 추악해도 너무 추악했기에

우직해서 전 민족적 존경을 받았던 그의 친구 김구 선생님과 달리

한국사 위인전에서 탈락한 인물입니다

 

오늘날에는 교육 기회도 늘어나서

영어 잘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지만

 

한가지를 잘하는 것과

매우 잘하며 그것을 전문적으로 표현하고

구사하는 것의 클래스 차이는 엄청나다는 것을 알기에

이승만의 능력에 대해 높이 사는데

 

일단 글은 읽으면 무슨무슨 뜻인지는 대략 이미 아는 사람도 많겠지만

그걸 처음으로 쓴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고

글을 쓴다는 것은

많은 자료와 교차검증을 써서 내야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영어 시험 만점자들은 수두룩하지만

이승만처럼 전문적으로 영어가 구사가 되는 인물은

현재도 매우 귀한 실정이고

 

이런 고급언어 인물은

서울대 영문학과를 나오거나

학교에서 백날 영어로만 수업해도

쉽게 나오는 것이 아니기에

 

천성적 재능에 극한의 노력이 겸비되어야하는 것이라 생각되고

그나마 대한민국에서는 이승만 대통령이나 반기문 유엔총장이

영어공부를 오지게 많이 한 인물이라고 생각되고

저는 영어는 아무리 노력해도 못하게 된 사람이라

출신 , 정치성향에 상관없이 개인적으로 영어 잘하는 사람들이 너무 멋있어서

재능적 영역에서는 마음에 드는 인물들입니다

 

하여튼 앞으로 21세기 대한민국은

좀 영어실력 만큼이나

인성 , 역사관이 올바른 인물들도 나와야 한다 생각되고

 

근데 특히 이승만 대통령은

뭔가 저랑 유쾌한 성격이 비슷한 경향이 많아서

공감도 되고 좀 연민도 되는 인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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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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