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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 집안의 독립운동가 윤보선>

[존재감 없는 대통령]

[친일파 윤씨 집안]

[이승만을 존경한 소년]

[국가를 위한 개인의 희생을 반대]

[상해 임시정부로 건너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최연소 의원]

[영국 유학]

[은둔생활]

[창씨개명 거부]

[광복과 정치투신]

<라봉봉>

 

[존재감 없는 대통령]

한국사에서 존재감 없는 대통령하면

윤보선 , 최규하 대통령이 유명합니다

 

전두환의 예우를 받는 윤보선(가운데)과 최규하 대통령

 

윤보선 대통령은

애초에 대통령 감은 아니었지만

성격이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두루두루 온건한 편이어서

혼란의 과도기시절 타 세력들이 추대해

민주당 대통령으로서 허수아비 대통령으로 활약(?) 한 인물이고

곧바로 정권에서 밀려나고 국민들에겐 잊혀졌지만

정치권에서는 형식적인 구색맞추기용 인물로 쓰여진 인물입니다

 

대한민국 4대 대통령 윤보선

 

즉 이런 인물들은

국민들의 인식에서는 거의 존재감 제로이지만

정치계에서는 나름 중요한 의의가 있는 인물들이고

입에 자물쇠를 채운 뒤

뒤에서 한국 정치계의 안정을 추구한

처세술의 끝판왕 인물들이라

현대판 황희정승 같은 느낌도 들고

나름 일대기를 보면 의미가 있습니다

 

[친일파 윤씨 집안]

윤보선은 조선 선조대 영의정 윤두수의 후손인

해평윤씨가문으로

1897년 8월 26일 충남 아산에서 태어나서

99칸 부잣집에서 자랐습니다

 

윤보선 전 대통령 생가 , 충청남도 아산시 둔포면 신항리

 

즉 금수저였는데

윤보선 아버지와 형제들은 뚜렷하게 친일을 한 양반이었고

유명한 친일파였던 윤치호도 그의 집안이고

민주당답게 전형적인 친일 지주 집안 출신 정치인이었습니다

윤보선 집안은 친일인명사전 중 7명이 이름을 올렸고

 

윤보선 일가

 

윤보선 집안은 친일로 얻은 재산을 밑천으로

일본이나 서구국가에 유학을 보내

 

대통령 , 서울시장 , 서울대총장 , 세브란스병원장 , 

외교대사 , 조선일보와 혼맥 등

 

한국의 '지배 엘리트' 가 되며 주요 관직을 역임했습니다

 

친일 쓰레기 집안이었던 윤보선 일가 , 윤보선은 돌연변이 독립운동가였음

 

 단 그런 친일파 집안에서

윤보선은 고집스럽게 친일파가 되는 것을 거부하였고

윤보선은 경제적으로는 친일 가문의 지원을 받지만

소극적으로 일본을 싫어한 조선 도련님이었습니다

 

<윤보선의 회고>집안은 부유하였고

선대는 대대로 벼슬을 해온 집안이었기에

부러운 것을 모르고 어린 시절을 보냈다

 

윤보선은 총명하고 명석한 어린이었고

그의 할아버지 윤영렬은 윤보선에게

충과 효를 강조하고 삼국지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윤보선은 유비의 의로움과 관우의 충심에 감동했습니다

 

동양 민중의 사랑을 받은 삼국지 영웅 유비 , 관우 , 장비 의형제

 

할아버지는 윤보선에게 고조할아버지가

술을 과하게 마셔 집안을 기울게 했다며

술에 입을 대지 말라 훈계했고

윤보선은 평생 술을 입에 대지 않았습니다

 

[이승만을 존경한 소년]

어린 윤보선은 집안 어른들의 대화를 엿듣고

나라가 어렵다는 소식이 듣자

국채보상운동에 자신의 용돈을 모아 보내기도 했고

 

경술국치 , 한일합방이 되어

나라가 망하자

이후 학교에 다니다가

경성 기독교청년회 총무로 있던 이승만을 만나게 됩니다

 

1910년의 이승만 박사 , 훗날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어린 윤보선에게

미국에 유학해 한국 최초의 박사가 됬던

계몽+독립운동가 이승만은

동경과 존경의 대상이었고

 

이승만의 오졌던 말빨에 감동한

금수저 소년 윤보선은 이승만이 이후 대통령이 되서 독재를 하기 전까지

금수저 집안의 지원으로

그의 평생의 열혈팬 , 큰손(호구 + 물주)이 되어

이승만에게 슈퍼챗 , 별풍을 오지게 뿌려줍니다

 

이승만을 동경한 소년 윤보선

 

하여튼 이때부터 윤보선은 이승만 빠돌이가 되어

이승만 라인을 타게 됬고

초기 민주당 인사들이 그랬듯이

윤보선 역시 이승만계 보수정치인이었고

이후에 이승만의 독재와 ㅈㄹ에 환멸을 느껴

대안 보수정당인 민주당을 창당한 인물들이었습니다

 

[국가를 위한 개인의 희생을 반대]

1913년 윤보선은 소학교(초딩) 졸업 후

일본에 유학해 게이오 의숙에 입학했지만

곧 그만두었고

 

일본의 명문사립대학 게이오 대학 (한국 연세대 격)

 

윤보선은 당시 일본에서 팽배했던

식민지배를 옹호하는 사회진화론에 부정적 견해를 보이고

 

'국가를 위해 개인을 희생한다는 사상'

 

에 대해서는 비인간적 견해라며 정면으로 거부합니다

 

즉  윤보선은

총명하고 학구적 성향이 있는 전형적인 엘리트였고

감성적으로 움직였던 일반 정치인들과 달리

논리 , 이성적인 인물로서

허수아비지만 괜히 대통령까지 추대된 인물이 아닙니다

 

[상해 임시정부로 건너가다]

부유했던 집안에서는 매달 학비를 부쳐주었기에

윤보선은 어렵지않은 유학생활을 했지만

그는 당시 1911년에 일어난 중국 신해혁명에 관심이 쏠려서

더이상 학업에 집중할 수 없었고

결국 귀국해서 집에서 신해혁명 관련 글들을 찾아읽곤 했습니다

 

신해혁명을 이끌었던 현대중국의 아버지 '쑨원' 

 

당시 망명 브로커였던 여운형을 만난 청년 윤보선은

여운형의 도움으로 상하이(상해)로 건너가서 독립운동에 투신하려 했고

 

거물 정치인 여운형

 

당연히 친일파였던 그의 집안에 알리면 반대할게 분명했기에

윤보선은 아버지 윤치소에게 미국에서 기독교 공부를 한다고 뻥치고

상하이를 거쳐 미국에 간다했고

결국 윤보선은 여운형을 따라 상하이로 도착해

임시정부로 찾아가 독립운동에 투신합니다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통합된 한국 임시정부들

 

그가 떠난 이후에서야

윤보선 집안에서는 아들이 미국이 아니라

독립운동하러 상하이에 건너갔다는 사실을 알게 됬고

이승만이 아들을 현혹시켜 버려놓았다며 원망하기도 했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최연소 의원]

하여튼 윤보선은

1917년 상하이에 도착해

임정요인들을 찾아갔고

1919년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원(대한민국 국회의원의 전신)에 특별선출됩니다

당시 그의 나이는 21세로서 최연소자였는데

독립운동가들은 그가 너무 어려서 안된다했지만

 

김규식 , 여운형 등은

나이에 구애되어서는 안된다 해서

결국 윤보선은 최연소 임시의정원 의원이 됩니다

 

1919년 3.1운동 이후 임시정부가 수립됬지만

임시정부는 자금난에 시달렸고

윤보선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지시를 받고

국내에서 자금을 모금해오는 일을 하게 됩니다

 

윤보선은 일본 도쿄에 잠입해

동생 윤완선과 접촉해

고국에서 독립자금을 가져오라 했고

윤완선은 집안 돈 3천원(당시 집 서너채 가격)을 마련해왔고

윤보선은 이 돈을 들고 상하이로 귀환해

이승만에게 전해줍니다

 

[영국 유학]

이후에도 윤보선은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으로 활동했고

1921년 6월에는 귀국한 후

아내를 데리고 영국으로 유학갑니다

 

친일파였던 윤보선 집안 역시

윤보선이 다시 정신을 차려(?) 영국으로 유학가자

그때서야 이승만에 대한 부정적 시선을 거두게 되었고

 

윤보선은 영국에 도착해

영국에서 의학공부중인 당숙 윤치왕(이후 세브란스 병원장) 을 만나서

도움을 받으며 공부했고

옥스퍼드 대학에 입학해서 공부하다가

에든버러 대학교로 옮겨서 고고학을 전공합니다

 

영국하면 옥스퍼드랑 케임브리지 대학이 유명한데

에든버러 대학도 그 다음 순위 대학으로

찰스 다윈 , 아서 코난 도일 및 세계 정상 정치인들이 동문인 학교였고

윤보선 역시 이곳에서 식민지 조선인 금수저 테크에 탑승합니다

 

1920년대 에든버러 대학 유학시절 윤보선

 

윤보선은 인간의 도리를 깨우쳐 주는 것은

정치학이나 신학보다는 순수학문일 것이라 생각해

고고학을 전공했고

재학중에도 일본인 학생들과 같이 공부했지만

대한민국 임시정부 최연소 의원 출신이었던 윤보선은

4년 내내 일본유학생들과는 말한마디 나누지 않습니다

 

 

또한 윤보선은 영국에서도 꾸준히 기금을 마련해

미국 워싱턴의 대한민국임시정부 구미위원부에 100달러씩 송금하다가

일본 경찰의 첩보망에 걸렸지만

일본 경찰도 영국에 유학생신분으로 있던 윤보선을 체포할 수 없었습니다

 

에든버러 대학졸업후 윤보선은 

미국에 갈까 상하이에 갈까 고민하다가

집으로 돌아오라는 호출을 받았고

윤보선은 귀국하기 싫어서 유럽을 여행했지만

빡돈 윤보선 집안은 결국 부쳐주던 생활비를 더이상 부쳐주지 않았고

결국 윤보선은 생활비가 떨어지자 1932년 일제령 조선 , 고국으로 귀국합니다

 

(금수저의 최종보스는 부모님 뿐이라던가..)

 

귀국당시 윤보선 , 영국 신사가 되어 돌아온 윤보선

 

[은둔생활]

친일파였던 윤보선 집안에서도

독립운동 전력이 있던 아들 윤보선이 일제에 좆되지 않게 하려

조선총독부 등에 이미 힘을 써놓은 상황이었고

귀한 아들이 오랜 해외생활끝에 영국에서 귀국해 부산역으로 오자

온 가족이 부산까지 내려와 아들 부부를 맞이합니다

 

귀국 이후부터는

윤보선은 조선총독부 왜경(일본경찰)들로 부터 

위험인물로 분류되어

심한 감시를 받았기에

집밖에 나서지 못했고

조용히 지냈습니다

 

집안에 왜경이 찾아와

윤보선과 사랑방에 마주앉아

근황 등을 살피며 질문을 하면

윤보선은 고개를 숙인 채 

2~3시간이고 벽만 보고 침묵으로 일제에 미움과 거부를 표시했고

 

결국 일본인 형사는

그를 정신이상자 취급했고

소심한 금수저 친일파 집안 도련님의 일탈쯤으로 쉬쉬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후에도 윤보선은 지인을 통해

이승만의 은신처에 방문해 이승만을 간간히 만났고

1937년엔 조선총독부가 신사참배령을 내려 신사참배를 강요하자

윤보선은 감리교(기독교) 신자임을 들어 참배를 거부합니다

 

일제시대 신사참배 하는 조선예수교장로회 임원들

 

1940년대부터

점차 일제가 광폭화되어 세계 국가들을 상대로

전쟁을 개시하자

외국에 머물고 있다가

기회를 잡은

이승만과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계속해서 세계사회에

일제의 만행을 알리며 일제를 공격했고

 

한국내에 있던

조선 금수저 윤보선은 가택에 칩거생활을 했고

미니골프장을 갖췄던 함경남도 안변군의 별장에서

은둔합니다

 

[창씨개명 거부]

1940년부터는 조선총독부에서

한민족을 말살하기 위해

이름까지 일본식으로 바꿀것을 강요하는

 

'창씨개명'

 

을 요구했고

 

창씨개명을 하려 줄선 사람들

 

친일파 윤보선 집안은 당연 다 했지만

이미 아내와 사별하고 두 딸만 있었던 윤보선은

자녀들에게 불이익이 없겠다 판단해

집안에서 고집을 부리며 창씨개명을 거부합니다

 

[광복과 정치투신]

일제말기 기독교 선교활동 이외에는 일체 은둔생활하던 윤보선이었고

그러다

1945년 8월 15일

일제는 결국 패망했고

식민지 조선 , 한국은 광복을 맞이합니다

 

곧바로 윤보선의 정신적 지주였던

독립운동가 이승만 박사는 미국에서 귀국해서

한국인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게 되며 지도자로 추대되었고

 

해방이 되자 윤보선의 친일파 집안은 좆된 상황이 되었고

이전까지는 그저 말썽꾸러기 , 백수였던 윤보선은

유일하게 독립운동가 출신이었기에

해방후에는 다시 전세가 역전되어 집안의 희망이자 간판으로 떠올랐고

 

막강한 집안 자금력 , 영어에 능통 , 최연소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 출신 , 이승만과 연줄

 

이라는 스펙들로

윤보선은 정치에 투신하게 됩니다

 

<라봉봉>비록 집안은 전부 친일파가 됬지만

윤보선은 홀로 독립운동의 길을 선택했고

비록 그것이 소극적 독립운동이고 한국 독립운동사에 끼친 영향이 미비할지라도

이렇게 상황상 아주 소극적인 반항 , 거부하는 사람이라도 많아져야

독립이 이루어지는 것이고

 

민주화 운동가 김대중 전 대통령도

독재에 맞서며

 

'하다못해 담벼락을 쳐다보고 욕이라도 해야 나쁜 정치가 망한다'

 

하셨는데

윤보선은 진짜 담벼락을 쳐다보고 욕이라도 한 인물이었고

그시절 친일 금수저 집안에서 태어난 사람의 올바른 처신이었다 생각됩니다

 

저는 독립운동 , 민주화운동 , 정의의 편에 선다는 것이라는게

꼭 목숨을 바쳐야하는 그런 비장한 것은 결코 아니라 생각하고

또한 이런것에 개인의 희생을 강요해서도 절대 안된다는 생각입니다

 

윤보선 역시 일찍부터 이런 생리를 파악한 뛰어난 지식인이자 독립운동가였고

비록 내놓고 저항하지 못하더라도

이런 소극적인 저항이라도 꾸준히 모인다면

점차 나쁜 정치가 사라진다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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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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