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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보선과 제2공화국>

[친일파 집안의 독립운동가]

[이승만계 보수 정치인 윤보선]

[서울시장 윤보선]

[청소시장]

[상공부 장관]

[이승만과의 결별]

[부산 정치 파동]

[민주당 창당]

[구파 윤보선 VS 신파 장면]

[제 2공화국]

[혁명총선]

[윤보선 대통령과 장면 총리]

[흐릿한 대통령과 우유부단한 총리]

[군사혁명을 주장했던 5.16 군사정변]

<라봉봉>

 

[친일파 집안의 독립운동가]

1945년 8월 15일 ,

꿈에 그리던 광복이 되자

 

친일파 금수저 집안의 돌연변이 독립운동가였던 윤보선은

집안 사람들과 처지가 역전되어

막대한 집안 자금력을 동원해 정치에 투신하게 되었고

 

윤보선은 임시정부 인사 등을 맞이하며

비용등을 부담했고 

윤보선은 미군정청 고문 직을 겸직하게 됬고

반대로 친일파였던 당숙 윤치호는 심한 비판끝에 사망합니다

 

친일반민족행위자 윤치호

 

윤보선은 친일집안이었음에도 홀로 독립운동을 했던

임시정부 출신이었기에 집안과 엮이지 않았고

점차 해방정국의 한국 주요 요직들에 참여합니다

 

[이승만계 보수 정치인 윤보선]

당시 한국은 38선을 경계로

북한은 공산주의 소련군 , 남한은 자유주의 미군이 진주해있었기에

남북은 이념으로 좌우로 나뉘어 극도로 싸우고 있었고

 

민족 지도자 김구와 이승만은 같은 우익이었지만

김구는 한민족의 분열을 막아 남북한 공동정부를 수립해야한다 했고

이승만은 일단 남한만이라도 단독정부를 수립해 북한 , 공산주의에 맞서야 한다했기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동지였던 두 사람의 우정에는 금이 가게 됩니다

 

이때 윤보선은 독립운동 시절부터

금수저로서 이승만에게 자금을 지원하기도 했고

이승만 사람답게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론을 지지했고

결국 이승만의 주장대로

남한만의 단독정부가 수립되게 되어

1대 총선 , 제헌국회의원선거가 실시되는데

 

윤보선은 고향 충남 아산시에서 출마하나 낙선했고

낙선이후 다시 은둔했지만

곧바로 국회의장이 된 이승만의 비서관이 되어

국회의장 비서실장이 됩니다

 

각별한 사이였던 이승만과 윤보선

 

[서울시장 윤보선]

이후 초대 대통령에 선출된 이승만은

윤보선에게 장관직이나 요직 등을 제의했지만

 

윤보선은 신문사나 경영하겠다며 거절했고

이승만은 어려웠던 시기 윤보선에게 받았던 도움을 갚기위해

계속해서 사람을 보내서 여러 고위직을 제안했으나

역시 윤보선은 삼고초려 제갈량에 빙의되어 계속 거절 , 거절합니다

 

나름 주미대사까지 시켜주겠다는데 거절한 것이기에

이승만도 윤보선이 왠만한 직책에는 성이 차지 않음을 생각한거 같고

 

결국 이승만은 윤보선을 서울시장에 임명합니다 (당시는 선거가 아니었음)

 

예로부터 역사에서 수도를 차지하는 자가 

나라의 모든 권력까지 차지했기에

수도를 관리하는 직책은 아주 중요한 직책이었고

 

조선시대대부터 권력의 요직중의 요직이었던

한성판윤이었으며

대한민국에 와서도 이는 변하지 않아

서울시장 자리는 아주 중요한 권력의 요직중의 요직이자

대통령 , 국가 수장이 되기전 거쳐가는 엘리트 코스였습니다

 

결국 윤보선은 마지못해 서울시장에 부임했고

이승만 정부에서 적극적으로 주도했던

문맹퇴치를 위해 윤보선 역시

초등학교들을 신설하고 국문보급반 운영 , 허례허식 타파 신생활운동을 하며

서울시장으로 활약합니다

 

서울특별시장 재직당시 윤보선 시장

 

당시는 성인들도 한글을 모르는 문맹들이 많았기에

윤보선은 동사무소에서 국문보급반을 설치하게 해서

한글정도는 동네 공무원들이 직접 가르치게 했고

식량 배급도 정리하고 기록하게 합니다

 

이승만의 숨겨진 업적 문맹퇴치 , 계몽운동가출신이었던 이승만은 누구보다 교육의 힘을 알고 있었고 자신이 키운 학생들에게 쫓겨났음

 

[청소시장]

윤보선은 서울시장에서 엄청난 눈에 띄는 성과 , 효율을 보였는데

서울시장은 윤보선 정치인생 최대 업적 겸 리즈시절로서

 

막 일제에 해방되어 해방정국혼란속에 

무질서해지고 똥과 쓰레기가 넘쳐나던

서울을 질서있고 깔끔한 모습으로 바꾼게 바로 윤보선이었습니다

 

<윤보선>그때 서울 가도(길거리)에는

곳곳에 쓰레기더미가 산을 이루어 길을 막을 정도로 쌓였고

인분(사람 똥)이 넘쳐서 불결함이란 실로 말할  없을 지경이었다. 

이렇듯 청소 문제는 중시되었으며

따라서 시장으로서의 나의 평가에 대한  시험이 아닐  없었다.

 

당시 서울은 청소업체등으로 하라는 청소는 안하고

여러 사람들이 이권다툼만을 하고 있었고

이에 윤보선은 청소권을 전부 몰수해

서울시 직영으로 한 후

직접 관리감독해 모든 서울시청 직원들이 총출동해서

쓰레기 반출작업을 시작했고

각 지역마다 공중쓰레기통을 도입합니다

 

<윤보선>이 청소작업은 단시일 내에 커다란 성과를 거두어

반출되는 쓰레기는 마치 폭풍에 씻겨 내려가는 형국을 연상시킬 정도였다

서울이 깨끗해졌을  아니라

시장으로서의 나의 명성을 크게 떨치게 만들어  

'청소시장' 이란 별명을 듣게까지 되었다.

 

청소시장 윤보선

 

또한 윤보선은 엘리트답게

시정의 투명성을 선언해

시정 상황을 모두 공개했고

 

한국은 역사에서 신라 , 고려 , 조선시대까지

내내 수령들의 행정사항은 공표되지 않아 부패의 온상이 되었지만

윤보선대에 이르러부터 투명하게 행정사항을 공개해

윤보선은 행정의 모범이 되었습니다

 

서구에 유학했던 영국신사 윤보선은 

역시 미국신사 이승만의 의도를 받들어

낙후되고 미개했던 서울을 개혁하려 했고

신생활운동을 실시해

미국에서 의복들을 가져와

서울시청 직원들에게 양복을 입혔고

운동화를 시중에 보급합니다

 

1960년 양복을 입고 공무원 시험을 보는 공시족들

 

또한 푸세식 (똥을 퍼서 빼는 변기) , 재래식 변기를 없애려

주택에 양변기 ,  수세식변기를 도입합니다

 

재래식변기 시절 흔히 있었던 '똥퍼 아저씨' , 만화 검정고무신

 

근대화의 상징 수세식 변기

 

사람들은 버튼만 눌러서 물이 흐르는 변기에 신기해 했지만

윤보선은 이미 1920년대부터 영국유학생활을 하며

서양에서 본것들이었고

이것이 유럽에선 이미 보편화됬다는 것을 설명하며

사람들에게 수세식 변기의 필요성을 설득합니다

 

하여튼 윤보선은 좋은 일을 많이하고

낙후된 서울을 깔끔하게 만든 청소시장이었으며

이로인해 서울시민들의 압도적 지지와 명성을 얻으며

정치인으로 떡상하게 됬고

윤보선 역시 서울시장 직이 가장 그의 적성 , 체질에 맞고

자신도 이 일을 즐겼습니다

 

<윤보선>서울 시장은 당시 나로서는  떠나기 싫은 자리였다.

우선 거기선 모든 일이  명령하에 원활히 움직여 주었고 , 

그리고 모든 일의 성과가  즉각으로 눈에 띄게 나타나

일할 보람을 느끼지 않을  없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 직속 상관이라  내무부 장차관도 내게 대해선 함부로 하기는커녕

시에 관할 일은 오히려 와서 내게 상의를 하고 동의를 구해야 했으니

직위상의 불만이 문제가  수도 없었으며 , 

더욱이 신생활운동에 나는 많은 열의를 갖고 추진에 몰두하려는 중이었기에

적어도 1년은  자리에서 일해야만 되겠다는 생각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일찍 아내와 사별한 그는

서울시장 재직 중 두번째 부인 공덕귀를 만나 재혼하는 기쁨도 얻었고

 

윤보선의 정치 , 사상적 동지였던 공덕귀 여사

 

계속해서 이승만 똘마니 겸 친일파 집안 금수저로 은둔하며 지내던

윤보선이 드디어 한국국민들의 사랑을 받게 된 

윤보선 인생의 최대리즈시절이었습니다

 

[상공부 장관]

그러다

1949년 6월 윤보선은 상공부 장관에 임명되는데

이때부터 윤보선은 다시 하기 싫은 일을 하게 됬고

이승만의 일방적 요구에 강제로 상공부장관이 됩니다

 

윤보선은 청렴 , 깨끗한 인물로서 서울시장도 성공적으로 해냈기에

이승만이 상공부(상업 , 물자 , 행정관리부로서 오늘날 산업통상자원부) 에

강제로 임명시킨것과 다름없지만

그것과 별개로 정말 적성에 맞지도 않았고

꾸역꾸역 고통스럽게 상공장관 생활을 이어갑니다

 

입 잘털고 타고난 정치인 , 외교인이었던 이승만과 달리

우직하고 조용해서 독립된 행정직이나 어울렸던 윤보선이었기에

대통령 명령을 곧이곧대로 수행해야하는 장관직은 고역이었고

 

FM 대로 인재들을 등용하며 하려는 상공부장관 윤보선은

이승만 대통령이 부당한 인사요구를 하자 모두 거절해버렸고

 

윤보선도 , 이승만도

고집이 ㅈㄴ 게 센 황소고집들이었기에

결국 둘다 계속 맞서며

점차 사이가 멀어지는데

이승만 역시 윤보선이 

 

'내말 안듣는 사람'

 

이라 메모했다 합니다

 

이승만도 윤보선을 내치려 했지만

청렴했기에 딱히 내칠 명분이 없었고

결국 눈치를 깐 윤보선도 

1950년 5월 9일 상공부 장관에서 자진해서 사퇴합니다

 

[이승만과의 결별]

이후 곧 6월 25일 한국전쟁이 터졌고

윤보선은 그해 12월 이승만의 명령으로 

대한적십자사 총재에 선출되어

피난민구호 활동을 합니다

 

대한적십자사

 

윤보선은 피란민과 다친 군경을 돕고 치료하는 일들에 집중했는데

당시 윤보선은 삼삼오오 떼지어 거지꼴로 죽어가던 한국군인들 ,

국민방위군들을 목격했는데

 

징집된 청년들 , 국민방위군 사건

 

징집된 한국군 청년들은

한국군 간부들의 부정부패 , 물자빼돌리기로

물자들을 제때 지급받지 못해 이곳저곳 뺑뻉이만 돌다

굶고 얼어죽어가고 있었고 (국민방위군 사건)

 

이 사실을 목격한 대한적십자사 총재 윤보선은 

즉시 이승만 대통령을 찾아가

목격한 대로 상세히 보고합니다

 

이에 이승만 대통령은

 

<이승만>아 ! 윤총재도 세상사람들 모략(공산주의자들 선동) 에 걸렸군

 

하더니 

한시간동안 장황한 변명만 늘어놓았고

윤보선은 속으로

 

<윤보선>이박사도 이제 큰일났구나 !

 

하고 걱정하게 됩니다

 

(예나 지금이나 지 맘에 안들면 빨갱이 프레임 혹은 극우프레임)

 

이승만에게는 거의 무지개반사 수준으로 남용됬던 공산주의 프레임

 

윤보선은 전쟁을 치루는 나라의 대통령이

직접 보고하는 참상을 믿으려 하지 않아

이승만에게 원망을 떠나 불쾌감이 들게 됩니다

 

한국전쟁기간동안

1951년 국민방위군 사건 , 거창 양민 학살 사건 등으로

이승만은 무고한 자국민을 학살하는 팀킬을 저질렀고

 

거창 양민 학살 사건

 

당시 이승만은 반성은 커녕 

공산당을 색출해서 사살했을 뿐이라는 뻔뻔한 태도로 일관했기에

점차 윤보선은 어린시절부터 존경했던 롤모델 이승만에 대해 환상이 다 깨질대로 깨져버렸고

실망하게 됩니다

 

세월이 지나며 흑화한 롤모델의 모습에 실망한 열혈팬

 

이승만은 자신이 일으킨 학살등에 대해 비판하는 사람들은

그저 불순한 의도를 가진 공산주의자로 몰았을 뿐이고

윤보선은 이때 이승만에게

 

<윤보선>억울하게 죽기만 하면 공산주의자로 환생하느냐

 

하며 비판 , 언쟁하며

이승만과 완전히 결별합니다

 

[부산 정치 파동]

이는 윤보선 뿐만 아닌

국회 , 국민들의 심정도 마찬가지였고

 

1952년 점차 지지기반을 잃어가던

이승만 대통령은

임시수도 부산에서 독재로 가는 신호탄 ,

발췌개헌을 실시합니다

 

이미 국회의원들은 이승만에게 등을 돌려가던 상황이라

국회의원이 대통령을 뽑는 간선제에서는

더이상 이승만의 연임이 불가능한 상황이 되었고

결국 이승만은 정치깡패들을 동원해 국회의원들을 위협하고

야당 국회의원들 50명이 탄 통근보스를 헌병대를 동원해

강제연행하고 10명의 국회의원들을 공산당과 관련있다는 혐의로 구속합니다

 

(1952년 발췌개헌 , 부산 정치 파동)

 

연행되는 국회의원들 , 부산정치파동

 

야당집회를 방해하는 중절모 쓴 정치깡패들 , 이승만 자유당 독재의 상징 정치깡패

 

국내 , 국제사회의 비판에도 이승만은 아랑곳하지 않았고

이승만도 독재자가 되어 더이상 제정신이 아니게 되자

윤보선은 부산정치파동을 계기로

공개적으로 이승만과 결별을 선언합니다

 

[민주당 창당]

결국 윤보선은 민주국민당에서 민의원을 하다

1955년 9월 18일 민주당이 창당되자

민주당 중앙의원이 되어

이승만과 자유당에 정면으로 맞섭니다

 

민주당(1955년)

 

자유당

 

당시까지 민주당은

이승만 , 사사오입 개헌에 반대해서 나온 정당이었고

원래 이승만계 인물들이 참여했기에

기본적으로 이승만과 자유당을 대체할 대안보수정당으로 창당되었고

보수주의와 반공주의 사상이 있었기에

독재 제외하고서는 자유당과 기본적 성향에도 별차이가 없었고

 

이승만 , 자유당과 다른 점은

대통령 중심제가 아닌

의원내각제(내각책임제)로 개헌할 것을 꾸준히 주장했던 정당으로서

이후 4.19혁명이 일어난 후에야 민주당의 꿈이 실현됩니다

 

이때 시작된

민주당(1955년) 은 사실상 한국 최초의 제1야당으로서

이승만 독재에 반발해 나온 정당이었기에

오늘날 더불어민주당 역시 자신들의 족보가 여기서 시작됬다 이야기합니다

 

[구파 윤보선 VS 신파 장면]

하여튼 그럼에도 민주당 윤보선은 원래

이승만과 인연도 깊고

보수적 성향이 뚜렷했던 인물이라

민주당내에서도 무색무취한 모습을 보여주었고

그럼에도 나름 야심도 있었고

명망과 기반 , 정통성은 있었던 인물이었기에

민주당 요직을 두루 하며 민주당 구파의 수장이 됩니다

 

민주당은 기존 야당세력 뿐만 아닌

이승만계 자유당탈당파들도 참여했기에

구파와 신파로 나뉘었는데

 

민주당 구파는

한국민주당이나 민주국민당에서 나온 사람들로서

윤보선 등이 있고

 

민주당 신파는

이승만 독재에 반발해 자유당 탈당파에서

민주당으로 합류한 사람들로서

장면 등이 있었는데

 

구파는 윤보선처럼 보수적 성향과 배타적 , 정치적(이론 , 훗날 김영삼계) 성향이 강했고

신파는 장면처럼 엘리트 관료 , 정책적(실무 , 훗날 김대중계) 성향이 강했는데

 

댱시까지는 그냥 뭐

이승만이 워낙 개ㅈㄹ을 하던 시기였기에

민주당내 구 , 신파의 갈등이 크지 않았고

일단 이승만 독재에 맞선다는 대의가 더 중요했기에

민주당 구 , 신파는 같이 화합해서 이승만을 뚜까패는데 집중합니다

 

당시 민주당 구파 지도자였던

대권후보 신익희 , 조병옥이 연속으로 사망하며

민주당내 대재앙이 터져버리자

결국 살아남은 윤보선은 민주당 구파 최고 지도자로 급부상했고

 

또 민주당 구파 윤보선은 별다른 뚜렷한 성향도 없고

야심도 드러내지 않았기에

민주당 신파들도 딱히 견제하지 않았습니다

 

[제 2공화국]

그러다

1960년 이승만 , 자유당의 3.15부정선거가 터지자

민주당 역시 독재에 맞서 행동을 개시했고

끝내 이승만 정부는 4.19 혁명 , 시민혁명으로 무너집니다

 

결국 ,

독재자 이승만은 시민들과 민주당원들에게 뚜들겨 맞고

하와이로 런해버렸고

 

1960년 4대 민의원(하원 , 국회의원)은

민주당의 오랜꿈이었던

의원내각제와 상원(참의원) 과 하원(민의원) 으로 구성되는

양원제를 시행시키는 제 2공화국 헌법을 통과시켰습니다

 

4.19 의거 후 신파 장면과 구파 윤보선

 

[혁명총선]

이승만 정부가 붕괴되자

제 2공화국 헌법에따라

대한민국 제 5대 민의원선거(국회의원 선거) 가 실시되어

총의석 233석에서

민주당은 175석을 획득했고

한때 나는새도 떨어트릴것처럼 어마어마한 권력을 자랑했던

자유당은 2석을 획득하며 사실상 해체되었고

(자유당계는 당시 쪽팔려서 거의다 무소속으로 출마)

 

민주당(파랭이) 이 쓸어갔던 5대총선

 

당시 민주당은 4.19 혁명이후

이승만 독재에 환멸을 느낀

국민들의 압도적 지지를 받아

절대다수 의석을 획득하며

오늘날 더불어 민주당 180석(총의석 300석)도 두들겨 팰정도로

전무후무로 전체 국회의석 2/3을 넘은

견제할 야당이 없는 ,

사실상 대한민국 유일정당화 됩니다

 

이때가 민주당 쌉 리즈시절이었는데

혁명총선이라 불린 당시 분위기상 사실상

이승만계 , 자유당을 지지하면 매국과 다름없었기에

민주당 후보로 나오면 무조건 당선될 수 밖에 없는 구도였고

오늘날처럼 지역감정도 없던시기라

경기 , 강원 , 충청 , 전라 , 경상도

전국에서 민주당이 싹쓰리했습니다

 

4.19 혁명 직후 민주당 위엄

 

그냥 국회의원들이 전부다 민주당이라는 상황이었다 보면 되고

옛날 조선시대

선비 사림파(민주당)가 부패한 훈구파(자유당)들을 전부 몰아내고나서

일당화되어 서인과 동인으로 분열해 서로 조져댔듯이

 

민주당 역시

이것때문에 결국 

제2공화국부터 유일정당화됬기에

구파와 신파로 본격적으로 분화해 혈투를 벌이게 됩니다

 

[윤보선 대통령과 장면 총리]

결국 민주당이 총선에서 압승한

1960년 그해 민주당 구파 지도자 윤보선은

민의원 , 참의원 합동회의(민주당 회의)에서

재적의원 263명 중 208명의 지지를 얻어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제 2공화국 대통령 윤보선 , 부인 공덕귀 여사와 함께

 

대한민국 4대 대통령 윤보선

 

민주당 신파들은

제 2공화국의 내각책임제(의원내각제) 에서

허수아비 직책인 대통령은 구파 윤보선을 밀어주었기에

실권직인 총리는 자신들이 가져가려 했고

 

윤보선은 구파들의 말을 듣고

구파인물을 국무총리로 지명했지만

신파들의 반대로 부결되어

결국 장면이 총리에 지명 , 당선되는데

 

이 과정에서도 민주당 구파 , 신파의 갈등이 컸기에

장면은 민주당 구파들의 반대때문에

겨우 2표차이로 과반을 넘겨서

이때부터 장면과 신파들은 윤보선과 구파에 앙금이 생기게 됩니다

 

(구파 ㅆㅂ련들아 구파 대통령만들어줬는데

왜 신파 총리나오는거 오지게 반대하냐 !!!!!)

 

당선된 장면 총리의 인사를 받는 윤보선 대통령(왼쪽) , 두 분이 한남콘 스타일로 비슷하게 생기셨는데 윤보선이 넙적하고 장면이 길쭉하다 구분하면 됩니다

 

윤보선은 제 2공화국 헌법에 따라

대통령은 당적을 가질 수 없기에

민주당에서 탈당했고

 

장면 총리 주도로 제 2공화국이 시작됩니다

 

제 2공화국 출범식 , 윤보선 대통령과 장면 총리

 

장면 총리는

당시 미국도 갈때까지 가버린 막장 자유당 잔재들과

손잡기 어렵다 판단해서

 

국회 2/3 파워 + 미국의 지지

 

라는 씹사기 버프를 가지고 시작한 인물이지만

장면은 부지런한 총리이자 덕망도 있는 인물이었지만

친일 논란도 있었고 민주당 구파들의 견제도 있었기에

 

장면과 민주당은 이런 엄청난 씹사기 버프를 가지고도

결국 속빈강정 , 씨없는 수박 , 빛좋은 개살구로서

윤보선 및 여야의 반발에 우물쭈물 아무것도 하지 못했고

 

또 제 2공화국의 대통령 , 총리가 공존하는 상황에서

아무리 상징적 대통령일지라도

상징적 대통령의 권한이 어디까지냐에 대한 논란도 많았고

윤보선 대통령과 장면 총리가 각각 구파와 신파 수장으로서

사실상 전혀 관계없는 관계가 되어가던 시기로서

장면은 갈팡질팡하게 됩니다

 

[흐릿한 대통령과 우유부단한 총리]

이때 윤보선의 흐릿한 성향도 문제가 되기 시작했는데

윤보선도 독립운동가나 야당으로서 당하던 시절에는

이런 흐릿한 성향이 처세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지만

 

국가수장 , 대통령으로서도

민주당 구 , 신파와의 엄청난 갈등속에서도

그냥 가만히 지내며 냉소적으로 대하고 있었고

 

지지기반인 구파도 , 반대파인 신파도

윤보선이 아군이 맞는지에 대한 의문이 생기게 됩니다

 

또 괜히 장면 총리가 내각운영하는게 답답하다며

그럴거면 총리에서 물러나라 한마디 해버렸고

이에 장면도 빡돌아서

 

<장면>그 영감이 나더러 총리직을 내려놓으란다

 

하며 성토합니다

 

우유부단했던 장면 역시 구파 ,신파 갈등에서 혼란해있었고

국민들 역시 4.19 혁명으로 피까지 흘려가며

독재자 이승만을 몰아내고 민주당을 정권에 올려주었는데

이놈들도 점차 이승만이랑 다를게 없는게 보이자

다시 허구한날 데모 , 시위만 해대며

국가 경제와 사회혼란은 심각해지던 상황이었고

 

점차 장면도 윤보선과 멀어져

단독으로 민주당 신파만 데리고 가는 모습으로 가고 있었고

이에 민주당 구파들도 빡돌기 시작해서 불평불만이 터져나와서

윤보선도 한번 장면을 조질까 하며

구파랑 신파가 한판 맞다이를 뜰까 분위기도 조성됩니다

 

집권 2년차의 장면 총리(가운데) 와 윤보선 대통령(오른쪽) , 겉은 웃고있지만 속으론 'ㅆㅂㅆㅂ' 를 외치고 있음

 

1961년 3월 23일 윤보선 대통령은 장면을 청화대로 호출해

사퇴하라 권고했고

이에 장면 총리는 화를 내며 맞받아 칩니다

 

<장면>나의 국무총리직은

대한민국 적법한 절차에 의해서 맡게 것이므로 ,

자의로 정권을 내놓는다 내놓는다 수도 없는 것이고 ,

당신의 강요에 따라 (내가) 총리직을 사임할 성질의 것도 아닌 안다

 

원래 유순하고 우유부단한 성품이었던 장면도

점차 빡돌아가며 강력한 정치를 하려 했는데

 

'응쿠데타'

 

가 시작되어

야심가 박정희 장군과 군인들이 일어나서

무능했던 제 2공화국은 허무하게 무너집니다

 

무능한 제 2공화국은 나 45세의 야심가 박정희가 처치했으니 안심하라구 ~ !

 

[군사혁명을 주장했던 5.16 군사정변]

당시 민주당 구 , 신파와의 갈등이외에도

민주당의 우유부단하고 무능한 모습에 회의를 느끼고 있었고

 

이승만도 권력잡고나서부터는 독재자로서 븅신같은 말년이었지만

기본적으로는 능력이 쌉사기였던 엘리트 출신이라

군 , 경들을 강력하게 통제하고 있었으며

여야 정치인 , 국제사회도 이승만이 븅신인것은 알았지만

그의 강력한 능력에 대해 의심을 품지는 않았습니다

 

(이승만을 일반적 개발도상국 독재자로 보진 않았고

넬슨 만델라가 독재했을 법한 그런 느낌으로 봄)

 

한국인 최초로 타임지를 장식한 이승만

 

1955년 박정희 준장과 악수하는 이승만 대통령

 

일본 담당일진 미국 맥아더 장군과 절친이었던 이승만 대통령

 

그니까 ,

유능한 독재자(이승만과 자유당) 가 물러난 후

나타난

무능한 민주주의자(윤보선 · 장면) 발암듀오때문에

다들 데모만 하며 굶주리며 손가락만 빨고있던 상황이었고

 

국회(민주당)도 허구한날 권력다툼만 해대고

국민들도 데모만하며 사회혼란이 커지는 상황에서

 

결국 군부의 박정희 소장은

자신이 혼란을 진압하고 경제를 재건하기 위해

4.19혁명 , 시민혁명을 계승하는

 

'군사혁명'

 

을 일으키겠다는 그럴싸한 명분을 들고와서

 

1961년 5월 16일

5.16 군사정변 , 쿠데타를 일으켜서

수도 서울을 점령하고 정치인들을 잡아나서고

 

5.16 군사정변 당시 박정희 소장(검은 선글라스)

 

서울의회 앞을 지나는 정변군의 셔먼탱크

 

무능한 민주주의자 모임이었던

윤보선 대통령과 장면총리 ,

그리고

제 2공화국은

탈영한 군인들의 총과 칼앞에 허무하게 무너집니다

 

<라봉봉>옛날부터

 

무능한 민주주의 VS 유능한 독재

 

프레임들이 있었는데

 

실제로 민주주의는 무능하지 않고

유능한 사람은 독재자가 될 수 없기에

 

성립되지 않는 가정들인데

 

매우 냉소적 시각으로 생각해보면

이승만 독재에 반발해서 일어난 4.19 시민들은 정의의 편에 선게 맞지만

그 시민들이 자유당에 염증을 느껴 선출해준

윤보선과 민주당들도 사실 무능하고 

일인독재가 다수독재로 변화했을 뿐이지

 

막상 오늘날 더불어 민주당 180석도 울고갈 수준으로

엄청난 권력정당이 됬음에도

 

그것을 유지하고 나아갈 어젠다 , 비전의 부재로

민주당은 서로 패갈려 싸우며 국민들의 신임을 잃어갔고

당시 민주당의 한계였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정치인 , 권력자들한테 월급으로 들어가는

국민 세금은 어마어마한데

그렇게 많은 자원을 먹고있는 정치인이 무능하다는 것은

곧 피같은 세금을 축내는 독재와 다를바 없다는 생각입니다

 

당시 민주당은 염원하던 개헌 , 내각제 등을 이뤄냈지만

그것을 유지할 인물이 없었기에 파벌갈등 , 대통령과 총리가 허구한날 싸웠고

 

무슨무슨 부서 새로 만들고 체제 바꾸기를 한다해도

그 이유와 타당성이 합리적이지 않다면

세금도둑 더 늘어나고 피로만 쌓인다 생각되고

 

결국 무능 역시 독재와 다를바 없는 것이기에

당시 반란군인 박정희와 군부의 군사혁명 , 경제재건이라는 주장들은

국민들에게 큰 유혹으로 다가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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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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