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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와 대한민국 임시정부>

[김구 주석과 광복군]

[대일선전포고]

[좌우 연합정권]

[국내 진공 작전]

[일제의 항복]

[광복군의 의의]

[광복후 대한민국 임시정부]

[신탁통치 반대운동]

[유엔위원단]

[김구의 방북]

[남북한 단독정부 수립]

<라봉봉>

 

[김구 주석과 광복군]

상해(상하이)를 떠나서 피난다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40년이 되서야 중경(충칭) 에 안착할 수 있었고

 

중일전쟁이 가속화되며

위기를 맞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집단지도체제였던 국무위원제에서

단일 지도체제 주석제로 체제를 바꾸었으며

이전 한인애국단을 이끌었던

백범 김구가 주석에 옹립됩니다

 

백범 김구 , 한국 위인

 

김구의 한인애국단의 활약에 감명받은 

장제스 ,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원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한국 광복군을 창설했고

 

충칭의 김구 주석(오른쪽) 과 지청천 광복군 총사령관

 

광복군

 

또한 3당합당(한국국민당+한국독립당+조선혁명당)을 하고

여당이 된 한국독립당이었기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당 · 정 · 군 체제가 정비됩니다

 

[대일선전포고]

중국일 침공한 일제는 점차 야욕을 멈추지 않고

세계 평화를 위협하기 시작했고

끝내 일제는

 

1941년 12월 8일(도쿄 시간)

미국 , 진주만을 침공합니다

 

일본의 진주만 기습

 

결국 진주만 침공으로

태평양 전쟁 , 미일전쟁이 시작되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도 발맞춰

진주만 습격 2일 후인

1941년 12월 10일

대일선전포고를 합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일선전성명서>

대한민국 임시 정부 대일선전성명서

우리는 3,000만 한국인 및 정부를 대표하여

중국영국미국네덜란드캐나다오스트레일리아 및 기타 제국(여러 나라)의

대일 선전 포고를 삼가 축하한다.

이것은 일본을 쳐부수고 동아시아를 재창조하는 가장 유효한 수단이다.

이에 특히 아래와 같이 성명서를 낸다.

 

1. 한국 전체 인민은 현재 이미 반침략 전선에 참가하였고 ,

일개 전투 단위가 되어 축심국(추축국 , 일본과 독일과 이탈리아)에 대하여

선전 포고한다.

 

2. 1910년 합병 조약 및 일체 불평등 조약이 무효임을 거듭 선배포한다.

아울러 반침략 국가들이 한국 내에 가지고 있는 합리적 기득권익을 존중한다.

 

3. 왜구(일본해적)를 한국중국 및 서태평양에서 완전히 축출하기 위하여

혈전으로 최후의 승리를 이룩한다.

 

4. 맹세코 일본이 비호하여 조성된 창춘(만주국 , 일제의 괴뢰) 및

난징 정권(왕징웨이 정권 , 일제의 괴뢰) 을 승인하지 않는다.

 

5. 나구선언(羅邱宣言) 각 조를 단호히 주장하며

한국 독립을 실현하기 위하여 적용하며

이것으로 인해 특히 민주 전선의 최후 승리를 미리 축하한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 주석 김구(인), 외무부장 조소앙(인)

대한민국 23(1941) 12 10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일선전성명서 1941.12.10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그렇게 연합국의 일원으로

2차 세계대전 , 대일전쟁에 참여하였고

 

1942년 좌익 김원봉이 임시정부에 합류하며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좌우합작이 시작됩니다

 

[좌우 연합정권]

의열투쟁을 전개하며 명성이 높았던 김원봉은

자신이 이끄는 조선의용대를 광복군에 편입시켰고

 

약산 김원봉

 

대한민국 임시정부 역시 선거를 통해

좌익계열 인사를 선출하며

좌우 연합정권이 시작됩니다

 

좌우 연합

 

[국내 진공 작전]

광복군은 연합군과 공동작전을 시행하는 한편

한반도 내부로 , 국내진공작전을 계획했습니다

 

한국 광복군은 아시아인으로서

 

일본인과 생김새가 같고 ,

교육 수준이 높았으며 ,

영어 , 일본어를 유창하게 할 수 있다는 극강의 장점이 있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광복군은

1943년 8월

영국군과 연합해 인도-버마 전선에 파견됩니다

 

광복군은

1945년에는

미국 첩보기구 OSS 에서

3개월간 군사훈련을 받고

국내 침투를 기다리고 있었고

 

첫번째 한미동맹 광복군과 미국 연합군 , '우리 두 나라의 힘있는 합작이 실현되는 날 이 사진의 역사적 가치를 볼 수 있을 것이다 !'

 

1945년 8월 10일 , 일제 항복 5일 전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부(국방부) , 한국 광복군은 

미국 OSS와 연계하여 국내진공작전인

 

'독수리작전'

 

을 추진했는데

광복군을 국내에 침투시켜

일제의 주요시설을 파괴하고 점령하는것이 목적이었습니다

 

독수리 작전 훈련장 , 중국 시안 중난산 골짜기

 

광복군의 본토 진입 계획

 

당시 한국 광복군 청년들은

국내진공작전 훈련을 받으며

 

미국 OSS 측 클라이드 사전트 대위와

미국 교관들의 도움으로

 

'독수리'

 

양성이 시작되었고

영어와 일본어 , 체력과 자질이 뛰어나 특별선발된 광복군 대원들은

국내진공 , 국토수복 , 대한독립의 의지를 불태으며

한 줄 밧줄에 의지해 위태롭게 수십미터 절벽을 오르내리고

폭발물을 설치하고 터뜨리는 고강도 훈련을 받았고

 

 

고도의 특수훈련을 받은 광복군 대원들을

산동반도에서 미군 잠수함에 태워

한반도에 비밀로에 들여보내 후방 교란작전을 전개한 후

 

수천명 규모의 한국인 특수부대를 육성해

한반도에 들여보낼 계획을 세웠습니다

 

국내 진공 작전 , 전쟁기념관

 

[일제의 항복]

그러나 ,

1945년 8월 10일

패색이 짙어진 일제는 국제연맹에 무조건 항복의사를 타진했고

이 소식은 중국 국민당 요인을 통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김구 주석에게도 전해집니다

 

이에 김구 주석은 백범일지에서 다음과 같이 한탄합니다

 

<김구>내게 희소식이라기보다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일이었다.

수년 동안 애를 참전을 준비한 것도 모두 허사로 돌아가고 말았다

 

김구 주석 뿐만 아닌

훈련장에 있던 광복군 대원들 역시

낙담한 분위기였습니다

 

[광복군의 의의]

그러나 ,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광복군은

1940년 창설되어 6년동안 부끄러움 없는 활동을 해냈었고

 

한국 광복군은

중국 국민당과 연대해 최전선을 넘나들며

대일 선전전을 하며 중일전쟁에 공식 동참 ,

'독수리 작전(국내진공작전)' 으로 미국과 연합작전을 나서며

연합국의 2차세계대전 승전 후

대한민국이 연합국의 일원 , 승전국으로서

세계 질서에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중요한 명분을 마련해 줍니다

 

물론 2차세계대전 승전 후 공산당 , 일본 견제가 급선무였던

미국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말그대로 임시정부였기에

승전국 지위에 공식 편입시키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약소국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일제에 맞서

정의의 편에 섰다는 점으로

나라잃은 임시정부가 해야할 수 있는 선을 다했고

국제 사회에 크나큰 명분과 귀감이 되었습니다

 

태극기를 들고 있는 광복군

 

[광복후 대한민국 임시정부]

1945년 8월 15일 ,

일제는 패망했고

한국은 꿈에 그리던 광복을 맞이합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도

하나 둘 한국으로 귀국했고

미군 비행기를 타고 여의도 비행장에 도착합니다

 

8월 18일부터 임시정부는

임시의정원 회의를 하고

환국 , 조국으로 돌아갈 것을 결정했고

차례로 귀국하게 됩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중국내 한국인들의 보호를 위해

한교 선무단을 조직했고

한교선무단은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전까지

주중대사관 역활을 했습니다

 

또한 임시정부는 광복군으로 하여금

중국내 징병 , 학병 , 지원병 등으로 끌려와 일본군에 배속된

한인 청년들을 광복군에 편입시켜 광복군 조직확대를 했는데

 

이때 일본군 , 만주국 장교에 속해있었던

북경에 있던 박정희(친일파 , 이후 한국 대통령) 역시 광복군에 편입됩니다

 

광복 후

3개월만에 임시정부는 환국을 시작했는데

임시정부 승계 , 광복군 이동 문제는 중국과 미국의 협조가 필요했고

이전부터 같이 활동을 전개한 중국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적극지원 , 각종 편의를 제공해주었지만

 

전쟁 말기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연합을 시작한 미국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보다는

한반도내에 친미정권을 세우고 싶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승인하지 않아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은

부득이하게 미국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기에

정부가 아닌 개인 자격으로 귀국하게 됩니다

 

귀국하는 김구 선생님

 

미국도 일제와의 전쟁에 희생이 매우 컸기에

질서 개편 , 국익을 위해서

한국에 대한 미국의 입장도 분명 있었지만

 

또한 미국은 아시아도 아시아지만

특히나 중국과 일본 사이에 껴있었던

한국 , 한국 역사 등에 대해

거의 정보가 전무했고

이로인해 미국 역시 이후에 한국에서 지옥을 맛보게 됩니다

 

미국은 2차 세계대전 시기 같이 연합했으며

순혈 정통성을 가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승인하지 않은 것으로 인해

해방후 한국이 극도로 혼란해진 원인도 되었습니다

 

[신탁통치 반대운동]

이후 돌아온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향후 수립될 정부를 위한 활동을 시작했지만

 

1946년 12월 28일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국제사회는 한국에 대해

 

미국 , 영국 , 소련 , 중국

 

4개 승전국이 신탁통치를 한다 결정했고

 

모스크바 삼상회의

 

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즉각 반발해

신탁통치 반대를 결의하고

4개국 지도자에게 보내는 결의문을 발송하고

반탁투쟁을 주도하며

정부로 역활을 수행 하려 합니다

 

이에 미군정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미군정의 정권을 빼앗으려는

 

'임시정부의 쿠데타'

 

로 규정하고

감시와 견제를 시작했고

 

결국 더이상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정부로서 활동할 수 없게 됩니다

 

미군정 , 중앙청에 내려오는 일장기와 올라가는 성조기

 

[유엔위원단]

이후에

1947년부터 미국과 소련이 대립하기 시작하자

한국문제는 국제연합 , UN 으로 넘어갔고

유엔은 한국에서 총선거를 실시해

통일정부를 수립하고 미군과 소련군이 철수하라 했고

 

유엔은 총선거 실시와 정부수립을 감독하려

유엔위원단을 한국에 파견합니다

 

유엔 한국임시위원단 내한

 

그러나 북한지역은 소련의 반대로

유엔위원단의 방문이 무산되었고

 

유엔위원단은

이승만 , 김구 , 김규식을 만나

정부수립을 논의했는데

 

이승만은 단독정부 수립을 ,

김구와 김규식 등 임시정부 인물들은 통일정부수립을 주장합니다

 

이승만(왼쪽) 과 김구

 

결국 유엔위원단은

 

1948년 2월

선거가 가능한 지역인

남한에서만 총선거를 실시할것으로 정하게 되었고

 

결국 임시정부 요인들은

한국의 분열을 막기 위해

남한만의 단독선거 불참을 선언합니다

 

[김구의 방북]

임시정부를 이끌었던 백범 김구는

한국의 분열을 막기위해

결국 1948년 4월

38선을 넘어 평양에 방문해

북한 지도자였던 김일성과 만나서 회담을 했지만

 

한민족의 분열을 막기 위해 38선을 넘은 백범 김구

 

북측에서는 민족을 사랑했던 김구의 의도와 달리

김구의 명성을 이용하며

역시 북한만의 단독정권을 수립하려는 움직임을 보였고

 

결국 회담은 실패로 끝나고

남과 북은 양측다 합의가 하나도 이루어지지 않게 되었습니다

 

[남북한 단독정부 수립]

결국

1948년 5월 10일

남한은 유엔위원단의 감시하에

총선거를 실시해

8월 15일 남한만의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됩니다

 

북한 역시 이어서

1948년 9월 9일

단독정부를 수립했고

 

한국은 그렇게 광복의 기쁨을 맞았지만

곧이어

자유민주주의 남한과

공산주의 북한으로 분열됩니다

 

남북분단 , 소련이 진주한 북한과 미국이 진주한 남한

 

단 ,

이때까지는 그래도 각 주요 도시에서

정치인 암살 , 정치 논쟁이 벌어지며 혼란하긴 했지만

민족적 적대감은 없었기에

언젠간 다시 남북 단일정부 , 통일정부가 들어설 것이라는

막연한 희망은 있었지만

그 막연한 희망은 한국전쟁으로 완전히 파괴되고

남북은 적대감을 가지게 되었으며

오늘날까지 수십년에 걸친 분단국가가 현실화됩니다

 

<라봉봉>한국 분단이 미국과 소련때문이라는 말도 있지만 ,

사실 그것이 틀린 말은 아니지만 ,

 

가장 1차적 책임은 우리 민족에 있었고

마찬가지로

일제의 식민지배의 원인은 일제의 한국 공격이었지만

가장 1차적 책임은 역시 우리 민족에게 있었습니다

 

외세는 항상 둘째문제이며

한민족이 분열해 힘이 약해진 상황속에

외세가 개입할 명분이 더욱 커진 것이지

다른 나라를 탓해서만은 안된다 생각합니다

 

그리고 ,

미국은 특히 태평양전선에서 사실상 혼자서 다한건데

전쟁 말기에 독일이 항복하고 일제의 힘이빠지자

소련군이 탱크로 만주 , 한반도까지 무혈입성하듯이 쭉쭉 밀고들어온 것이라

 

한반도를 소련과 반으로 나뉘어 먹는 것을 ㅈㄴ게 싫어할 수밖에 없었고

단지 일단 일본 본토 견제가 최우선이었기에

한반도를 반띵해주며 완충지로 삼고 일본 본토경영에 집중한 것이고

 

당시 미국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통성이나

한반도의 지리적 중요성을 전혀 모르고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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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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