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안창호와 대한민국 임시정부>

[독살당한 고종황제]

[3.1 운동]

[임시정부]

[대한민국 임시정부]

[도산 안창호]

[통합 임시정부]

[연통제와 교통국]

[독립군 양성]

[대한인국민회]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쇠퇴]

<라봉봉>

 

[독살당한 고종황제]

고종황제는 일제에 강제 퇴위당하고

경술국치 , 대한제국이 일제에 멸망한 이후에도

덕수궁에서 머물며 비밀리에 한국 독립운동가들을 지원하주었고

 

말년의 고종황제

 

또한 일제의 감시를 피해 외국으로 망명할 계획을 세우고

실행을 하려 하다

결국

1919년 1월 21일

고종황제는 일제에 의해 독살당했습니다

 

독 든 식혜를 먹고 사망한 고종황제

 

노년이어도 팔팔했던 고종이 갑자기 독살당하자

일제치하 숨죽여있던 식민지 한국인들은 분노했습니다

 

[3.1 운동]

결국 

1919년 3월 1일 고종황제의 장례에 맞춰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것을 이용해

한민족은 3.1 운동을 시작했고

3.1 운동을 시작으로 전민족적인 대한독립운동이 시작됩니다

 

3.1 운동

 

파고다공원의 3.1 독립만세시위 , 문학진 (1976년)

 

3.1 운동을 주도한 유관순 열사

 

3.1 운동은 전세계에 큰 충격을 주었고

식민지 국가들에게 희망을 준 세계적인 독립운동으로서

한국인의 비폭력 사상 , 평화사상 , 독립사상이 총결집되있는 

선진적인 독립운동이었습니다

 

[임시정부]

마지막 임금이라는 상징인물인 고종의 죽음 및

고종이 말년에 결국 황제의 특권을 내려놓고

한국 독립을 지원했다는 점으로

결국 한국 내부에서는 본격적인 민주공화정 건국 움직임이 시작됬고

 

3.1운동 당시부터 국내 , 해외 각지에서 임시정부가 구성되는데

 

한국본토의

 

'한성정부'

 

그리고

외국에선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의 대한국민의회' ,

 

'중국 상해(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및 여러 임시정부 단체들이 3.1운동의 여파로 우후죽순으로 건설됩니다

 

곳곳의 임시정부와 대한민국 임시정부 통합과정

 

일단 가장 영향력이 컸던 두 단체가

 

러시아의 대한국민의회 ,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였고

 

러시아와 만주(간도)는

한국 북부와 국경이 접해있고 땅이 광활해

 

일제를 피해 독립운동을 하기 쉽고

독립군을 기를 수 있어

여차하면 육로로 국내로 들어오기가 유리하다는 장점이 있었지만

반대로 일제에 반격당하기도 쉽다는 단점도 있었습니다

 

무장독립운동의 거점이 된 만주와 간도 , 연해주 지역

 

중국은 바다를 건너야했기에

일제가 오려면 배를 건너야하기에 공격이 어려웠으며

또한 미개척지이자 사람이 별로 없었던 러시아 , 만주와 달리

인구도 많고 서양 열강들이 중국내 여러 기업 , 이권유지를 위해 항시 상주하는 곳이기에

일제가 세력을 뻗치기가 어려웠기에

 

중국내륙 , 상해 등은 한국과 접근성은 어려울지언정

안전하다는 장점이 있었고

결국 상해가 가장 좋은 임시정부 기지로 활용되었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1919년 4월 10일

29명의 대표자들은

 

'대한민국임시의정원'

 

즉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회를 조직했습니다

 

임시정부 태극기 , 1923년 상해 대한민국임시의정원에 걸린 태극기

 

임시의정원은 첫 회의에서

한민족의 나라 이름을

 

'대한민국'

 

으로 결정했고

이는 대한제국의 대한 즉 큰 한민족의 좋은 의미를 따오고

황제의 나라 , 제국이 아닌

국민들의 나라 , 민국으로 한다는

전통과 대한제국의 정통성을 계승한 아주 좋은 이름이었습니다

 

그리고 또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

 

임을 선언해

일본처럼 왕국 , 제국이 아님에 선을 확실히 그었습니다

 

[도산 안창호]

이미 대한제국 시기부터 한민족의 큰 존경을 받던

도산 안창호 선생님은 대한제국시기부터 실질적으로 한민족 지도자였는데

그런 안창호 선생님 역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합류합니다

 

도산 안창호 , 한국 위인

 

즉 ,

고종황제나 순종황제가 전통 , 군주의 상징으로서 한민족 지도자였다면

이미 내부에서는 한민족은 안창호 선생님을 실질적인 한민족을 이끌고 결집시킬

새로운 지도자로

생각하고 있었고

 

민족을 계몽하고 있는 안창호 선생 , 장리석 (1976년)

 

안창호가 가는 곳마다

사람이 모이고 독립운동 단체가 설립되었으며

신문이 발행되었고

 

안창호가 가는 곳마다

분열되있던 한민족은 결집하고

돈을 모아 독립운동가들을 양성했습니다

 

일본총리 이토 히로부미 역시

1907년 안창호와 만나

형식적 지도자였던 고종황제가 아닌

한민족의 존경을 받았던 젊은청년 안창호를 회유하려 했지만 실패합니다

 

<이토 히로부미>내 평생의 꿈이 세가지가 있습니다

첫재는 일본을 열강과 대등할 만한 현대 국가로 만드는 것이고

둘째는 한국을 그렇게 하는 것이요

셋째는 중국도 그렇게 하는것입니다

안창호 선생도 나의 함께 아시아를 향한

위대한 꿈을 함께 해주시겠어요 ?

 

<안창호>한국 , 중국 , 일본의 협력이 

아시아 평화의 시작이라는것에 동감합니다

 

또한 당신이 과거 메이지 유신의 공로자로 

일본을 변화시킨 공로도 알고 있으며

한국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려는 것도 감사합니다

 

하지만 당신이 우리 한국을 진정으로 발전시키고 싶다면

우리 한국은 한국인의 손으로 혁신하게 해주십시오

 

...

 

불행하게도 이미 일본은 한국과 중국인의 마음을 잃었습니다

이것은 일본의 불행이자 삼국 전체의 불행입니다

일본이 한국의 독립을 위한다며 청일 , 러일 전쟁을 했지만

두 전쟁의 승리 후에 일본이 한국의 주권을 빼앗지 않았습니까 ?

 

일본의 침략당한 한국은 미국이나 러시아에 도움을 구할 것입니다.

일본 제국주의의 성장을 원치 않는 서구 열강은 

우리 한국인의 요구를 들어줄 것이고

그러면 일본은 세계의 적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일본이 세계의 적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해

당신과 같은  정치가가 노력해주길 바랍니다

 

이토의 회유를 거절한 안창호 선생님

 

[통합 임시정부]

1919년 5월

도산 안창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내무총장으로 임명되어

미국에서 상해로 왔고

당시 한민족에서 가장 거물 정치인 , 민족지도자였던 안창호가 합류하자

대한민국 임시정부활동은 더욱 활력이 생겼습니다

 

1919년 10월 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원 기념 사진 , 가운데 안창호

 

안창호는 상해 임시정부와 대한국민의회(러시아) ,

한성정부 등의

임시정부를 통합해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운영합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여러 난항도 겪었는데

먼저 대한국민의회를 이끌던 문창범은

상해 임시정부가 한성정부를 개조한 수준인 것에 반발해

내각 취임을 거부했고

 

문창범

 

이승만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에 취임하자

 

1920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 시절 이승만

 

신채호 등 무장투쟁세력들은

 

신채호 , 민족주의 역사학자

 

이승만이 국제연맹에 한국 위임통치 청원서를 제출한 것에 반발해

임시정부에서 이탈합니다

 

신채호는 근대 역사학자이기도 하지만

급진적 성향의 인물이기도 했고

 

원래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 , 아싸성향이 강했던 신채호는

그냥 정부 조직 자체에 거부감을 품고 이탈합니다

 

그러나 ,

온건파였던 안창호는

외국에서까지 한민족의 분열을 바라지 않았고

결국 안창호의 설득으로

러시아의 이동휘가 국무총리로 참여함으로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간신히 봉합되었습니다

 

이동휘

 

[연통제와 교통국]

안창호 주도로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연통제 , 교통국을 설치해

 

한국 본토와 상해 임시정부의 통신망을 확보했고

 

연통제와 교통국으로

선전활동 , 군자금 모집등이 시행됩니다

 

전국적 조직망을 갖추고 있었던 연통제와 교통국

 

[독립군 양성]

또한

1919년 12월부터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독립전쟁을 위한 군대를 양성하려 했고

상해 육군사관학교가 설립됩니다

 

상해 임시정부 기념관을 찾은 대한민국 해군사관학교 생도들

 

또한 공군양성을 위해

군무총장 노백린은 미국으로 건너가 캘리포니아주 윌로우스에

비행사양성소를 설립했고

 

대한민국 공군창건 주역 노백린

 

이외에도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국내의 비밀결사 조직과도 연계하고

 

만주의 서로군정서 , 북로군정서를

임시정부 군무부에 편입시키고

 

만주의 무장독립운동

 

간도에선 광봉군총영을 조직하는 등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전세계를 무대로 

독립군 양성을 시작했습니다

 

[대한인국민회]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돈줄 중

가장 큰 돈줄은 미국에서 나왔는데

 

도산 안창호는 이전부터 미국생활을 하며

미국 내에서도 한국인임을 잊지 않아야한다는 것 ,

한국이 독립하려면 한국인들은 정직 , 성실해야한다는 것을 교육시키며

재미한인들을 교육 , 결집시켰고

 

1912년 리버사이드 오렌지 농장에서 노동하는 안창호

 

1909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안창호 , 이승만 등이 창설한

재미한인들의 기구

 

'대한인국민회'

 

는 

안창호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든든한 자금줄이 되어

100만달러에 달하는 자금을 임시정부에 지원합니다

 

대한인국민회에서의 도산 안창호(가운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쇠퇴]

그러나

1921년 일제의 철저한 단속으로

연통제와 교통국을 발각되어

일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자금줄을 끊었고

 

1920년 만주에서

홍범도 장군이 봉오동 전투 ,

김좌진 장군이 청산리 대첩

으로 일제에 승리했지만

 

김좌진 장군(왼쪽) 과 홍범도 장군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대첩

 

이후 만주의 독립군들은

일본군의 만주침공으로

러시아 자유시로 피난갔는데

 

독립군은 세력 , 군사력 보존을 위해 러시아로 넘어갔지만

결국 러시아는 외국이었고 ,

러시아의 무장해제 요구 ,

세력다툼으로

 

'자유시 참변(1921년)'

 

이 일어나

결국 독립군은 증발됩니다

 

자유시 참변

 

또한 안타깝게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맞섰던

일제는 줄타기에 성공해

1차세계대전 승전국으로서

유럽에서 대전쟁이 벌어지며 유럽 공장등이 파괴될 당시

자국 공장을 돌리며 유럽에 여러 물품들을 마구 팔아재꼈고

전쟁 특수 , 대호황 , 승전국 지위까지 얻어내며

1910년대 말부터 1920년대까지 풍요의 시기를 맞았고

 

당시 일본에 등장한 나리킨(벼락부자) 을 풍자하는 그림 , 지폐에 불을 붙여 신발을 찾는 남성

 

한국내에서도 문화통치라는 이름으로

이전 강경하던 통치 , 3.1운동으로 폭발한 한국 민심을 회유하려

한국인들의 자유를 살짝 풀어주고

친일파들을 양성하며

한국인들을 점차 세뇌시키고 있었고

 

이로인해 점차 임시정부 활동은

1920년대 말기부터 쇠퇴합니다

 

그러나 ,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계속해서 꺼져가는 독립의 불씨를 살리려 노력했고

그렇기에 한국은 망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반대로 ,

일제는 점차 야욕을 드러내며

세계평화를 위협하기 시작합니다

 

<라봉봉>요즘 막 인터넷에서

대한민국 독립운동을 부정하는 말도 안되는 글들이 나오는데

 

일제가 한국인을 조선시대 봉건 , 양반 노비에서 해방시켰다거나

임시정부는 수백명도 안되는 극소수 집단이며

독립군은 그저 마적떼 , 도적떼 수준이었다는 

근본없는 글들이 선동되고 있습니다

 

당연히 임시정부 , 독립군은

한반도 내 한국인들에 비해 극소수였고

뜻있는 사람들 , 지식인 , 애국지사들이 모여 목숨을 걸고 활동했기에

열악한 환경에 일반인들이 참여하긴 참 어려운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

당시 일제의 노비로 전락한 한반도내 한국인들은

이렇게 독립운동가들처럼 표면적으로 저항하지 못했어도

꾸준히 독립운동에 참여했고

뒤로 몰래 독립자금을 지원한다거나 독립운동가 ,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한 것이었고

 

당연히 소수집단인 임시정부는 빙산의 일각이었으며

수천만 한민족의 독립 열망을 대표하는 집단이었음을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초기 한국 독립운동사는 고난과 고난의 연속이었고

너무도 열악한 환경속에서

이름모를 외국땅에서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죽어가며

한국의 독립을 위해 싸우셨습니다

 

반응형
Posted by 라봉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