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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위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위기]

[우남 이승만]

[국민대표회의]

[이승만 탄핵]

[국무위원제]

[민족 유일당 운동]

[한인애국단]

[이봉창과 윤봉길 의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대장정]

[3 합당]

<라봉봉>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위기]

1920년대부터 일본은 1차 세계대전 승전국 겸

유럽이 전쟁할때 막대한 자원들을 유럽에 팔며

풍요로운 시기였고

 

1차 세계대전 전후 별장 , 조선에서 호랑이 사냥등 호화생활을 즐긴 일본 벼락부자(졸부) 들

 

반대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그런 일제를 맞서야 했기에

상황이 더욱 좋지 않았고

여러 재정난 , 갈등에도 시달리고

자유시 참변으로 만주지역 독립군들이 와해되기 이릅니다

 

만주지역 독립군 밥상 재현 , 경상남도 교육청

 

[우남 이승만]

당대 임시정부의 유명한 국제통은

도산 안창호와 우남 이승만이 있는데

둘 다 미국 유학파 출신이라는 공통점이 있었고

 

이승만은 이로인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이 되었고

훗날 광복 이후에도 이승만은 이때의 독립운동 + 미국의 압도적 지원으로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 됩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대통령 이승만(가운데)

 

(단 이승만은 역사의식이 뛰어났던 안창호 선생님에 비해

민족 , 역사의식이 부족한 인물이었기에

오늘날에도 한국인들의 존경을 받지 못함)

 

특히 이승만은 국제정세 판단 , 외교에 뛰어난 능력이 있었기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이승만에게 기대를 걸며

초대 대통령까지 시켜주었지만

 

별다른 성과가 없었고

이승만이 미국에 한국의 위임통치를 제기했다는 것이 밝혀지며

이승만과 임시정부에 대한 비판이 거세집니다

 

결국

1921년부터

박은식이나 신채호 등 역사학자들은 

이승만 , 임시정부 등을 신뢰할 수 없다 판단해

다른 조직을 만들며 이탈하기 시작했고

 

근대 민족사학자 박은식과 신채호

 

만주지역 독립운동가들 역시

이승만 사임 , 임시정부 개조를 요구하며

국민대표회의 소집을 요구하자

 

이승만은 결국 임시정부에 머문지 6개월만에

1921년 5월 상해를 떠나서 미국으로 돌아갑니다

 

[국민대표회의]

결국 

1923년 1월 

한국 독립운동가 국내외 대표 140여명이 참여한

국민대표회의가 시작되어

63회에 걸친 마라톤 회의가 시작되는데

 

국민대표회의 임시의장 도산 안창호

 

국민대표회의에서 두가지 파가 나뉩니다

 

임시정부를 개혁 , 개조하자(개조파)

VS

임시정부를 해체한 뒤 새로운 정부를 창조하자(창조파)

 

라며

개조파와 창조파로 나뉘는데

이 두 파의 노력에도

이승만을 지지하는 세력들의 반발로

결국 정부개조안은 기각되고

 

결국 개조파와 창조파는 연이어 탈퇴했고

국민대표회의가 끝난 후부터 

임시정부는 각지 대표 , 독립군 세력의 이탈로

구심점도 , 인물들도 다 떠난 상황이 됩니다

 

임시정부의 분열

 

[이승만 탄핵]

결국

1925년 3월

임시의정원은 이승만을 탄핵합니다

 

<임시의정원>

임시대통령 이승만을 면직시킴

...

이승만은 외교를 빙자하고 직무지를 떠나 5년 동안 원양일우에 편재해서

난국수습과 대업진행에 하등 성의를 다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

허무한 사실을 제조 간포해서 정부의 위신을 손상시키고 민심을 분산시킨 것은 물론 ,

정부의 행정을 저해하고 국고수입을 방해하고 의정원의 신성을 모독하고

공결을 부인하고, 심함에 이르러서는 정부의 행정과 재부를 방해하고 ,

임시헌법에 의해 의정원의 선거에 의해 취임한 임시대통령으로서

자기의 지위에 불리한 결의라고 해서 의정원의 결의를 부인하고 ,

'한성조직 계통 운운' 과 같은 것은

대한민국의 임시헌법을 근본적으로 부인하는 행위다.

 

이와 같이 국정을 방해하고 국헌을 부인하는 자를

하루라도 국가원수의 직에 두는 것은 대업진행을 기하기 어렵다.

국법의 신성을 보지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순국 제현이 명복할 수 없는 바이고 ,

또 살아있는 충용들이 소망하는 바 아니므로 주문과 같이 심판한다.

 

대한민국 7 3 11 

 

사실 이승만이 탄핵당한 이유는

위임통치때문만은 아니었는데

위임통치는 한국의 완전한 독립을 전제로

국제연맹의 위임통치였기에 김규식 , 안창호도 동의했던 것이었고

 

그것보다 이승만은

임시 대통령이면서도 상해 임시정부에서 활동을 거의 안하고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했기에

안창호 혼자 과로에 시달리게 되었고

 

또한 ,

이승만은 미국지부의 자금을 맡았는데

본인이 다쓰고 본부에 조금밖에 안보냈으며

미국에 머물며 교민 자금을 멋대로 썼다는 이유(횡령)로

결국 이승만은 탄핵됩니다

 

[국무위원제]

이승만 탄핵부터

단일대표체제인

대통령제의 폐단을 막기 위해

개헌을 해서

지도체제를 내각책임제로 바꾸고

국가 수반을 대통령이 아닌 국무령으로 변경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국무령에 취임하지 않는 문제가 일어나자

1927년부터는 국무위원제라는 집단지도체제를 했고

국무위원제는

1940년 10월 주석제로 바뀔때까지 계속됩니다

 

대통령제와 국무위원제

 

[민족 유일당 운동]

임시정부는 분열을 막기위해

1926년 5월부터

안창호 중심으로 민족 유일당 운동을 시작했고

 

도산 안창호 , 한국 위인

 

안창호는 독립운동을 효율적으로 수행하려면

정부보다는 정당형태가 낫다 생각하고

 

(안창호는 단일지도체제보다는 집단지도체제가 낫다 판단 ,

이승만은 단일지도체제 , 대통령제를 중시함)

 

좌우합작을 이뤄냈지만

노선과 사상이 달라

민족유일당운동은 끝내 실패합니다

 

 

이후부터

독립운동세력들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이탈해

좌파는 좌파대로 , 우파는 우파대로

서로 노선을 달리하며 각기 독립운동을 시작했고

 

1930년 1월 김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정당 '한국독립당' 을 창당합니다

 

[한인애국단]

그리고 만주사변이 시작되어

일제가 중국을 침공하자

 

만주사변 , 하얼빈에 입성하는 일본군

 

일본이 만주에 세운 괴뢰국 만주국 (빨간 빗금)

 

점차 임시정부는

자금난 , 내부갈등 , 현지 중국인과의 갈등이 격화되자

 

무장투쟁 , 외교독립

그 어떤 것도 할 수가 없는 상황에 이르렀고

 

결국 백범 김구와 임시정부는

 

1931년 10월

 

'한인애국단'

 

을 조직하고 활동을 의열투쟁을 시작하는데

 

백범 김구 , 한국 위인

 

한인애국단 이봉창(왼쪽) 과 윤봉길 의사

 

의열투쟁이란

평화운동의 반댓말로서

 

한국 독립운동가들은

비폭력투쟁이었던 3.1 운동이 일제의 폭력에 실패한 것을 보았기에

일제 기관 , 요인을 파괴 , 암살하는 폭력투쟁을 시작했고

이를 의열투쟁이라 부릅니다

 

사실

안창호가 정치가 ,

안중근이 군인이었듯이

 

이전부터

지식인들은 교육 , 계몽 , 정치활동을 통해 독립운동을 전개했고

힘이 센 사람들 , 용맹한 사람들은 의병 , 독립군이 되는 등으로 하며

무장독립운동을 전개해왔는데

 

특히나 의열투쟁은

무장독립운동중 가장 맵고 독한 것으로서

의열투쟁 독립운동가들은 일반적 독립군과 달리

후퇴라는 개념이 없었고

 

나라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치기로 결심한 상태에서

일제 요인 암살등을 위해 사실상 자폭공격을 했습니다

 

(일제의 가미카제 특공대처럼

절대 국가적 강요가 아니라

독립운동가들이 자신의 의지로 한 것이었음)

 

대내외적으로 악재가 겹치며 궁지에 몰렸던 대한민국 임시정부 역시

의열투쟁에 참여했는데

의열투쟁을 이끈 것은

한인애국단을 조직한 김구였습니다

 

<한인애국단>한 사람을 죽여서 사람을 살리는 방법이 혁명수단의 근본

 

수많은 의사들이 김구에게 몰려가

한국 독립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리겠다 했고

결국 한인애국단은 백범 김구의 지휘로 움직입니다

 

[이봉창과 윤봉길 의사]

1932년 1월 한인애국단의 이봉창 의사는 일본 천황을 제거하라는 명을 받고

도쿄로 파견되어 일본천황 히로히토에게 수류탄을 투척했고

 

이봉창 의사

 

실패했으나 

일본인들에게 살아있는 신이라 여겨지던

히로히토가 암살당할 시도가 있었다는 것 자체에 충격을 받게 되고

국제적으로도 큰 파장이 일어납니다

 

일본인들에게는 살아있는 신 , 세계인들에겐 아시아의 히틀러였던 일본천황 히로히토

 

그리고 이봉창의사는 스스로 자수했고

 

체포된 이봉창 의사

 

일제 법정에서도 끝까지 태연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미소를 띄웠고

끝내 사형을 선고받고 32세의 나이로 순국하십니다

 

<이봉창>왜황(일본 황제) 도살하기는 극히 용이한데

하고(무슨 까닭) 독립운동자들이 이것을 실행하지 아니합니까

 

한인애국단 이봉창의사가 일제에 충격을 준 후 3개월만인

1932년 4월 한인애국단의 윤봉길 의사는

 

김구와 윤봉길 의사

 

훙커우 공원에서

히로히토 천황 생일 기념열병식에서

도시락 폭탄을 투척해

일본 장군 , 고위급 인사 등 7명을 살상했고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 공원 의거

 

일본군인 , 관료들을 싹 날려버린 후

윤봉길 의사는 현장의 일본헌병에게 붙잡혀

구타당하다가 결국 사형을 선고받고 

24세의 나이에 순국하십니다

 

<일본>마지막으로 남길 말은 없는가 ?

 

<윤봉길>사형은 이미 각오했으므로 ,

하등 말할 바 없다

 

중국에서는

이봉창 의사의 히로히토 암살시도에는 '불행히도 실패했다' 표현했고

윤봉길 의사가 일본군 장성들을 살상하자

열광적인 반응을 보입니다

 

<중국 지도자 장제스>2억 중국인이 하지 못하는 일을

한 사람의 조선 청년이 해냈다

 

장제스

 

점차 일제는 이 사건들로 큰 두려움에 떨게 되었고

세계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존재 ,

한민족이 간절히 독립을 원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후부터 일제의 감시가 심해지자

한인 애국단을 조직한 백범 김구는 

다른 동지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위해

다음과 같은 성명을 발표합니다

 

<김구>나 김구가 애국단원 이봉창과 윤봉길을 시켜

일왕 저격사건과 상하이 홍커우 사건을 일으킨 것일 뿐

다른 조선 기관이나 조선인과는 관련이 없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대장정]

이후부터 일제는 김구와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을 체포하는데

혈안이 되었고

결국 임시정부는

1932년부터 일제의 추격을 피해

13년간 둥지를 틀었던 중국항구도시 상해를 떠나

중국 내륙까지 8년간 대장정을 시작하며 피난생활을 시작합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대장정

 

그러나 ,

역시 한국처럼 일제에 맞서야하는 , 똑같은 형편이었던 중국인들은

한인애국단의 희생 이후부터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하기 시작했고

 

윤봉길 의사의 활약에 감동한

장제스 , 국민당 정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해주었고

 

김구는 이후부터는

의열투쟁보단 보다 체계적인 독립군의 양성이 필요하다 생각해

한국 광복군 건설에 매진합니다

 

[3당 합당]

1937년 7월부터

중일전쟁이 시작되고 일제가 중국 각지를 점령하기 시작하자

흩어져있던 독립운동가 ,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다시 단결했고

 

김구가 이끄는 한국국민당을 중심으로

한국독립당 , 조선혁명당 , 미국의 대한인국민회 , 이승만의 대한인동지회 등

단체들이 연합해

 

'광복진선'

 

이 조직되었고

 

한편 좌파계열은 따로

조선민족전선연맹을 결성해

1938년 10월 조선의용대를 결성했는데

 

이후 결국 분파가 시작되어

 

1940년 5월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한국국민당 , 한국독립당 , 조선혁명당

 

우파계열 3당을 합당하여 (3당합당)

한국독립당을 조직하고

임시정부 단일정당을 만듭니다

 

그렇게 점차 일제를 피해 옮겨다니던 임시정부는 

1940년 중국 내력 깊숙히 있어 일제가 올 수 없었던

충칭(중경) 에 정착하게 되었고

주석제를 도입 ,

백범 김구가 주석에 옹립되며

김구 중심의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시작됩니다

 

충칭 임시정부의 김구 주석(오른쪽) 과 지청천 광복군 총사령관

 

<라봉봉>이승만은 한국 최초의 박사 , 한국 최초의 임시정부 대통령 ,

한국 최초의 대통령 등 여러 타이틀이 있는 인물이었지만

기회주의 성향도 강했고

그래도 국적을 버리거나 독립운동을 안한 인물은 아니어서

독립운동가는 맞긴 맞는데

서재필(필립 제이슨 , 미국으로 귀화) 의 국산 버전이라 보면됩니다

 

능력은 있는데 ,

통수력이 너무 심해서

신뢰가 안가는 인물이 이승만이었고

 

차라리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으로 안창호를 박아두고

이승만을 대미 외교 전담으로 돌렸더라면

임시정부도 좀더 클린한 운영이 가능했을텐데

 

신뢰성이 부족한 인물이 국가 수장이 되니

임시정부 초기는 여러 파란이 컸습니다

 

하여튼 개인적으로 이승만은 워낙 조금만 불리하면 도망치는 기질이 강해서

능력이 있어도

대통령 , 지도자 감이 아닌 인물의 대표적 사례라 생각되고

 

일제는 초기엔 잘나갔지만

워낙 동양 , 전세계적으로 악의 씨앗을 많이 뿌려두었기에

점차 1930년대부터는 그 악들이 자라나며 일본도 쇠퇴하기 시작했고

결국 일제는 발악하며 전세계를 대상으로 전쟁을 시작했고

 

점차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이런 악의 제국 일본제국에 정면으로 맞서서

연합국과 정의의 편에 서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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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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