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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의 교사시절>

[대구사범학교]

[식민지 조선인에 대한 차별]

[아리카와 대좌]

[군인을 동경한 박정희]

[꼴찌 박정희]

[조선인 선생님들]

[주수구방 기명유신]

[대자연]

[부모 강요로 억지로 한 결혼]

[문경공립보통학교 박정희 교사]

[나폴레옹 초상화]

[박정희와 거북선]

[죽어도 선생질 더 못해 먹겠다]

[신천지를 찾아서]

<라봉봉>

 

[대구사범학교]

일제시대 당시 한국에서는 

초등교원(초등학교 교사) 양성기관은

전국에 세개가 있었는데

 

평양사범 ,

경성사범(서울사범) ,

대구사범

 

이렇게 북부 , 중부 , 남부에

한개씩 있었고

경상도의 수재 소년 박정희 역시

이곳에 응시해서

 

100명이 합격할때

1070명의 응시자 중 51등으로 합격합니다

 

대구사범학교

 

나름 지금으로 치면 농촌소년이 서울대나

사법고시 합격한 격이었는데

 

그러나 비름나물을 먹고 허기를 달래던

박정희의 어머니는 자식의 합격에 기쁨보다 걱정이 앞섰고

학비를 댈 엄두가 안나

내심 박정희가 진학을 포기했으면 했는데

 

구미보통학교 교장과 담임선생님들은

박정희 부모를 설득해 시험을 보게 했고

 

박정희 어머니는 박정희가 시험에서 떨어지길 기도했지만

결국 박정희는 

1932년 4월 1일 대구사범학교에 입학해

5년간 공부해서 학교선생님이 되게 됩니다

 

[식민지 조선인에 대한 차별]

당시 대구사범은 100명 정원 중

한국인 90명 , 일본인 10명을 뽑았지만 

일제는 가난하면서도 우수한 한국학생을 선발해

철저한 일본교사로 만들 목표였고 (식민지 교사 양성소)

 

24시간 감시 및 규율이 엄격해

당시 일제의 군국주의적 분위기처럼

교사를 양성하기보단

거의 군장교를 양성하는 

사관학교 수준이었습니다

 

일제는 소수의 일본 학생과 다수의 한국 학생에 대한

차별을 철저히 했고

일본학생은 자유롭게 ,

한국학생은 철저한 감시와 통제 및

수시로 형사들을 보내 독서경향이나 언동까지 조사하게 됩니다

 

당시 박정희

 

또 기숙사 급식도

일본인 학생은 쌀밥+잡곡인데

한국인 학생은 잡곡+고구마고

봉급 역시 한국인 교사는 일본인 교사보다

60% 수준으로 받았기에

식민지인 박정희 및 한국학생들은 일본에 대한 악감정이 커지게 됬고

 

박정희는 일본인 상급생에 대해

경례도 잘 하지 않습니다

 

[아리카와 대좌]

또 당시는 군국주의 일본이었기에

학교에는 교련과목도 존재해

학교에 군인이 상주해있었는데

교련책임자였던 장교는

교장 다음으로 서열이 높았고

교사 , 학생들은 장교의 통제를 받았는데

 

대구사범 교련책임자는 

일본 육사와 육군대학을 나온

아리카와 대좌로서 일본인들까지 멸시하는 콧대높은 엘리트 군인이었는데

 

(박정희를 총애 , 훗날 1945년 오키나와 전투에서 자결)

 

아리카와 대좌(혹은 중좌)

 

아리카와는

어린시절부터 힘의 논리에 관심이 많고

교련 과목에 출중했던 

박정희를 예뻐했고

박정희를 교련조교로 부리곤 했는데

 

박정희 역시 그를 좋아했고

긴 칼을 차고 다니며

그처럼 일본인까지 무시할 수 있는 

군인이 되고싶은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당시 일본 군복

 

박정희는 대구사범시절에도

쪼그만한 키인데도 정의감에 동기들과 싸우기도 했고

말수가 적고 항상 성낸사람같이 웃음을 모르고

혼자 사색하는 모습을 보였고

이때 역시 별다른 친구없는 녀석이었습니다

 

[군인을 동경한 박정희]

하여튼 박정희는

1932년 4월 8일 15세에 대구사범에 입학해

1937년 3월 25일 5년간 수학해 20세에 졸업했는데

 

일제강점기 당시 평범한 조선인이 할 수 있는 3대장 공무원 직업이

교사 , 순사(경찰) , 군인이었는데

그중 교사 역시 일제의 조선식민통치 , 황국식민화 작업으로

키우기 위해 좋은 시설과 우수인력 확보에 집중투자했고

대우도 좋았기에

당대 가장 안정되고 존경받는 직업이 교사였습니다

 

그러나 ,

박정희는 예전부터 집안에 밀주단속이 와서

일본 순사가 들이닥칠때 모두 무서워 하는 것을 봤는데

 

이전 일본순사가 일본군인과 시비붙은 것을 박정희가 봤는데

제 아무리 일본순사여도 군인들 앞에선 굽신댔고

당대는 군인들이 전쟁으로 가장 많이 죽고 대우도 가장 좋았던 시기라

그것을 보고 이전부터 군인이 되려 생각했던 박정희였습니다

 

[꼴찌 박정희]

예전 보통학교(초딩) 때는 가난했을지언정

1등만 하고 반장만 하던 우수한 우등생 박정희였지만

 

상급학교인 사범학교부터는 동네 어린이가 아닌

전국적인 인재 , 부잣집 애들이 모여들었고

 

대구사범 품행 평가에서도

박정희는

음울 , 빈곤 , 불성실 , 불활발 등으로 평가되었고

결국 박정희는

4학년때는 73명중 73등 ,

5학년때는 70명중 69등을 해서

꼴찌로 졸업하는데

 

그나마 제일 잘한게

사격 , 육상 등 체력활동이었기에

결국 박정희는 대구사범의 교련시간 소대장으로 활약해

대구사범에서 모범생은 되지 못했지만

군사기술 터득에 집중합니다

 

(일진+공부잘한 만능 범생이였지만

점차 일진화된 정희쿤)

 

하여튼 ,

이거때문에

쫌생이였던 박정희는 대통령이 되고나서도

1등만한 초딩때 성적은 지 잘났다고 공개했지만

대구사범 성적은 비밀에 부치거나

우수~중간정도라고 조작했는데 

 

일단 꼴찌여도 서울대에서 꼴지한 격이었고

사범학교는 졸업만 하면

교사직이 보장된 것이었기에

아인슈타인이 낙제한 것처럼

박정희가 학교 공부를 못했다고 보긴 어렵습니다

 

일단 기본적으론 머리가 똑똑하고

체력이 뛰어났고

집안이 가난했기에

박정희는 대구사범에서 부잣집 학생들을 보호하는 일종의

호위무사 , 선도부 캐릭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이고

대신 초딩때는 무서울게 없이 공부잘하는 엄석대처럼 굴다가

갑자기 꼴찌 , 일진 이미지로 변화한 이런 스탠스때문에

점차 스트레스 , 사회불만등도 커지게 됬다 생각됩니다

 

[조선인 선생님들]

그럼에도 머리는 기본적으로 똑똑했기에

이곳에서 청소년 박정희는

여러 조선인 선생님들을 만나며 영향을 받게됩니다

 

이전 사회주의자지만 학생들에게 한글을 보급하며

문맹퇴치운동을 벌이고 국사교육 , 민족교육혼을 불어넣었던

현준혁 교사와 대구사범 1기생들이 대거 구속되어 학교를 떠난후에도

박정희의 선배들은 그 교사에게 영향을 받아

후배들에게도 존댓말을 하고 있었습니다

 

<현준혁>상급생이라고 하급생을 일본학교서처럼 기합줘서도 못쓰고

하급생이라고 굴종해서도 못쓴다

우리는 다같이 압박받고 있는 조선사람들이야

서로 아끼고 사랑해야 한다

 

현준혁 , 박정희에게 공산주의 사상 영향을 준 인물

 

박정희는 존댓말하는 선배들에게 놀랬고

현준혁 교사가 떠난 후에도

그의 정신을 이어받은 김영기 조선어 선생은 

1933년 제정된 '조선어 철자법 통일안' 을 교재로

학생들에게 한글을 열심히 가르쳤고

조선어 시간에 조선사를 가르쳐주기도 했는데

 

한글 맞춤법 통일안(1933년 조선어학회)

 

김영기 교사는 임진왜란과 이율곡의 10만 양병설을 설명하다가

 

'나라가 이러니 어찌 망하지 않을 수 있었겠느냐'

 

면서 한동안 흐느꼈고

학생들 또한 따라 울었습니다

 

율곡 이이 , 한국 위인

 

또한 김영기 교사는

대구사범 학생들 , 박정희에게

 

중국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고

김구 , 이승만 , 윤봉길 , 주시경 선생님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들려주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시경 , 국어연구로 민족혼을 일깨운 한국 위인

 

남이 장군의 시를 가르치며

기개의 호방함을 찬탄하며 학생들에게 포부를 심어주려 했습니다

 

기개로 유명했던 남이장군

 

박정희는 여러 조선인 선생님중

김영기 선생님에게 가장 큰 영향을 받았고

이후 김영기 선생님은 박정희가 졸업한 뒤

학생 30여명과 지하독립운동을 했다 구속되어

5명은 고문으로 옥사 , 김영기 선생님은

광복으로 석방되어 평생 교육계에서 헌신합니다

 

[주수구방 기명유신]

김영기 조선어 선생과 더불어

박정희에게 큰 영향을 준 선생님은

염정권 한문 선생님인데

염정권 교사는 학생들에게 한시를 읽혀주며

학생들의 기개를 기르려 했습니다

 

<염교사가 읊어준 도연명의 시>

성년은 다시 오지 않고

하루에 새벽은 두 번 없으니

때를 따라 열심히 공부하여라

세월은 사람을 기다리지 않는다

 

 

또 염정권 교사는

학생들에게

 

'주수구방 기명유신'

 

이라는 글귀를 가르치는데

 

그 글자를 써놓고 염정권 교사는 말했습니다

 

<염정권>주나라는 비록 옛나라지만 개혁을 함으로써

천명을 새롭게 했다

 

뱀이 살아나기 위해 허물을 벗듯이

민족이나 국가가 발전할때도 낡은 껍질을 벗어야했고

일본의 근대화 개혁인 메이지유신 , 명치유신 역시 이 글자에서 유래했으며

박정희 역시 천명을 바꾸는 행위 , 즉 혁명의 논리인 유신을

마음속 깊이 품게 되었고

혁명의식을 가지게 됩니다

 

훗날 10월 유신(독재)을 발표하는 박정희 정부

 

일제의 황국식민정책 시기에도

한국인들은 끊임없이 저항하며

선생님들은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불어넣으려 했고

나라는 망했을 지언정

정신은 망하지 않으려 끊임없이 노력했습니다

 

[대자연]

점차 박정희 역시

어떤 정의감이 자라났고

이상을 꿈꾸게 됩니다

 

<1936년 대구사범 교우회지 5학년 박정희의 일본어시 '대자연'>

1. 정원에 피어난 

아름다운 장미꽃보다도 

황야의 한 구석에 수줍게 피어 있는 

이름 없는 한 송이 들꽃이 

보다 기품있고 아름답다.

  

2. 아름답게 장식한 귀부인보다도 

명예의 노예가 된 영웅보다도 

태양을 등에 지고 대지를 일구는 농부가 

보다 고귀하고 아름답다.

 

3. 하루를 지내더라도 저 태양처럼 

하룻밤을 살더라도 저 파도처럼 

느긋하게, 한가하게 

가는 날을 보내고 오는 날을 맞고 싶다. 이상 

 

대구사범 졸업앨범의 박정희

 

화려함보다는 자연의 소박함을 사랑했던 박정희

 

[부모 강요로 억지로 한 결혼]

박정희는 방과후 검도와 권투연습을 하던 일진 학생이었지만

공격적 학생은 아니었고

남이 먼저 건드리지 않는 이상 가만히 있거나

자존심을 지키려 힘을 키우는 학생이었습니다

 

체력은 국력이다

 

나름 문무겸비의 교사로 성장했지만

박정희는 꼴찌학생이었기에

나라에서 주는 장학금도 받지 못했고

한국사 교육 , 민족교육 , 민족차별로 일본인의 무시 , 평가도 나빠서

이때부터 반일감정이 커지게 됬고

노골적으로 자행되는 조선인과 일본인의 구별 , 차별에

불만이 움트게 됩니다

 

또 이시기

박정희는 부모 중매로 2년제 간이학교 출신이며

훤칠하고 잘생긴 처녀인 김호남과 결혼했는데

박정희 아버지는 생전 막내 정희가 결혼하는 것을 꼭봐야겠다며

아직 졸업도 안한 박정희의 혼사를 밀어붙였고

결국 박정희는 대충 결혼해놓고 다시 대구로 올라옵니다

 

대구사범시절 박정희와 박정희 어머니 , 밑은 김호남

 

박정희는 좀 더 나이가 든 뒤에

자신과 맞는 여성과 혼인하길 바랬는데

대구사범을 다니며 신식교육을 받았던 엘리트 박정희는

자신과 같은 신식교육을 받은 엘리트 여성 , 신여성을 만나고 싶어했고

부모와 집안 어른들의 강요로 억지로 결혼해버린 것이었고

이후에도 박정희는 결혼사실을 잘 알리지 않을 정도로 결혼에 불편함을 갖게 됩니다

 

[문경공립보통학교 박정희 교사]

1937년 3월 25일 박정희는 대구사범학교를 졸압한 후

갓 스무살의 젊은 선생 박정희는

4월 1일 문경공립보통학교 교사로 부임해 4학년을 맡았고

 

교사는 당대에도 대우가 좋은 직업이었기에

구미에서는 박정희가 교사된것을 보고 

개천에서 용났다고 소문이 납니다

 

교사시절 박정희

 

박정희는 체육시간에 흥미를 가지며

학생들의 체육훈련에 열성을 보였고

아버지가 가끔 찾아와서

술값을 뜯어내거나

마누라좀 돌보라 타이르기도 했습니다

 

박정희는 월급 45원중 가난한 집 아이들 기부비

2~3원 사용 후 본인 용돈 10원을 쓰고

나머지는 상모리의 집에 송금했고

 

이외에도 아버지가 마누라좀 챙기라며

박정희를 나무라기도 하자

그럴때마다 박정희는 아내 김호남을 더욱 싫어하며

방학때도 아내가 있는 상모리 집에 가지 않고

밖에서 맴돌고

 

끝내 아버지는 아들 부부가 오손도손 사는 것을 보지 못하고

1938년 사망합니다

 

박정희는 아버지의 죽음에 착잡했지만

당시까지도 박정희는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고

이후에는 어린 학생들에게

사범학교에서 배운 그대로 민족혼을 불어넣는 말을 자주합니다

 

<박정희 교사>

학생 여러분 !

전세계를 얻는다 할지라도 민족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면 죽는 길밖에 없다.

앞으로 10년이 지나면 20세기의 후반기가 된다.

우리는 남을 이길수 있는 실력을 쌓아야 한다.

아는 것이 힘이다.

알기 위해서는 노력해야 한다

 

박정희 교사는 몸집도 작고 허름한 옷을 입고있었지만

다정다감하고 엄격하게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나폴레옹 초상화]

하루는 어린 학생들이

새로온 박정희 선생님의 하숙집에 놀러갔는데

박정희 방에 배가 불룩 나온 아재 사진액자가 걸려있었고

 

'저 사람이 누구냐'

 

묻자 

박정희 선생님은

 

<박정희>영웅 나폴레옹

 

하시며

나폴레옹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ㄹㅇ 나폴레옹 빠돌이였음)

 

 

[박정희와 거북선]

박정희 교사는

일제치하에서도 우리글을 가르치려 애쓰기도 했고

학생 한명을 복도에 세워놓고

일본 교장이나 교사가 오지않게 망을 보게하고

조선어 , 한국사 , 시조등을 가르치고

위인전도 많이 읽게 합니다

 

<학생들의 증언>우리는 조선사람이다

우리 글과 우리 역사를 알아야 한다는 말씀을 하시면서

이순신 이야기를 재미있게 해주시는 것이었습니다

교과서에 등장하는 일본의 영웅들이 이순신 장군에게 패주하는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충격이었습니다

 

선생님은 거북선 그림을 그려가면서

실감있게 전투장면을 묘사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왜놈들이 배 지붕으로 올라오면 송곳으로 찌르게 만들었다느니

물속으로 잠수까지 했다느니

하시면서 몸짓을 해가며 연기를 하시는데

흥분 그 자체였습니다

 

 

[죽어도 선생질 못해 먹겠다]

점차 일본의 민족말살정책이 강화되며

박정희 교사의 마음은 울분과 갈등으로 끓어오르기 시작했고

교사생활 씨발 때려칠까 생각이 강해집니다

 

박정희는 그렇게

민족적 울분과 정열이 넘치던 흙수저 교사였고

햐숙집에서는 결국 아버지를 그대로 닮았는지

울분속에 온종일 술을 퍼마시기도 합니다

 

박정희 교사시절 하숙집 청운각

 

박정희는 친일파인 이미지와 달리

당시 ㄹㅇ 일본에 대한 감정이 좋지가 않았는데

말끝마다 '왜놈들' 이 튀어나왔고

 

한번은 일본인 아리마 교장에 대해

 

<박정희>그새끼 때려 죽이려다가 놔주었다

왜놈이면 다여 !

 

하며 씩씩대기도 합니다

 

점차 어떤 반항심이 강해지던 박정희 교사는

다른 교사들이 당대 규율처럼

군대처럼 빡빡이로 깎던 머리와 달리

혼자서 장발로 나타났고

 

(대통령이 된 이후 장발 통기타족이나

히피들 뚜드려 팼던 박정희도 의외임ㅋㅋㅋ)

 

문경공립보통학교에 쪽빠리 장학사가 시찰을 나오자

그는 박정희 교사의 튀는 긴 머리를 보고서는

 

<장학사>아직도 총력정신이 결여된 교사가 있다

이것은 황민화의 정책에 순응하지 못한다는 증거이다 

 

하며 박정희에게 꼽을 주었고

 

 

그날밤 아리마 교장은 집에서

장학사를 위한 술자리를 열고

교사들도 초청했는데

그자리에서 박정희 교사의 두발문제를 다시 거론하자

 

박정희 교사는 일본 장학사와 일본 교장을 상대로

언쟁을 벌이다 술잔을 던지며 소란을 일으켰고

 

다음날에도 아리마 교장은 박정희 교사를 불러

장학사에게 사과를 요구합니다

 

<아리마 교장>조선인 주제에 너무 건방지다

 

젊은 혈기를 이기지 못한 박정희 교사는

결국 모욕감을 참을 수 없어 울컥해

주먹을 아리마 교장의 면상이 날렸고

곧바로 사표를 써던집니다

 

근데 일단 박정희도 교사출신으로서

열혈청년이어도 자기 상관 면상에 주먹을 날릴정도는 아니었을 것이고

 

(그럴 애들은 이미 사범학교에서 걸러짐)

 

박정희가 아리마 교장이랑 싸웠다는 말들은 

이후 박정희가 만주행 , 일본군인이 된 것을 합리화 시키려 꾸며낸 말이라는 이야기도 있고

 

실제론 박정희 누나 박재희는

자기한테 박정희가 와서

 

'죽어도 선생질 더 못해 먹겠다'

 

고 말했다고 합니다

 

하여튼 빡돈 박정희 교사는 결국

교사생활 3년만에 사표를 냈고

가족들도 겨우 고생해서 교사가 된 박정희가 사표를 내자

어이가 없어합니다

 

[신천지를 찾아서]

박정희(백수) 는 어린시절부터 동경한

이순신 장군 , 나폴레옹 황제 , 군인에 대한 생각이 다시 커지게 되었고

 

조선인 식민정책 , 차별정책이 강화됬어도

일본군인들에 대해서는 일본인 , 일본 관리들도 꼼짝을 못했던 것을 봤기에

권력과 힘을 동경한 박정희는 결국 만주로 가서 일본군 장교가 되는 길을 선택합니다

 

 

<훗날 박정희 비서관>각하는 왜 만주에 가셨습니까 ?

 

<박정희>긴 칼 차고싶어서 갔지

 

<라봉봉>제가 반오십 넘게 살아오며 겪은 바로서

전라도 사람 , 경상도 사람은 꼭 티를 내는데

 

전라도 사람들은 서글서글 , 능글거리는 성향이 강하고

경상도 사람들은 뭔가 분노에 차있고 독한 구석도 있는 느낌도 있고

 

물론 좀 농담이고 ㅎ

일반화는 안되지만

하여튼 , 경상도인들은

박정희같은 성격이 많은 느낌입니다

 

박정희는 친미계 보수인사 이승만과는 연관이 없는

친일계 보수인사지만

이승만과 박정희가

비슷하게 엮이는 이유는

인간 개인의 자유의지로 순응하지 않고 집단 , 조직에서

튀어나가는 모습을 보였고

이는 자유주의 사상으로 인한 것입니다

 

이승만은 자유국가 미국에서 ,

박정희는 서양에 자유주의를 전파한 자유주의자 나폴레옹에게

이런 큰 영향을 받은 것이고

 

단순무식 , 군사독재자라는 이미지에 비해

생각보다 공부를 엄청나게 많이 한 지식인형 팔방미인 캐릭터였으며

그래서 사람들 , 특히 민주화 운동가 중 지식인들까지도

군인 외길만 걸어서

단순무식 , 직선적으로 국정운영하는 전두환보다 

이것저것 다했던 박정희를 더 무서워했습니다

 

왜냐면 전두환은 군부에만 있다가

ㄹㅇ 쿠데타로 집권해서

명분이 딸려서 많이 타협도 했지만

 

박정희는 자신의 독재의 정당성을 나름 동양 고전이나

민족주의 , 자유주의 등에서 찾아서 교묘하게 국민들에게 세뇌시켰고

교사+군인 출신이라 공부도 ㅈㄴ게 했던 군인독재자랄까

하여튼 답이 더욱 없는 독재자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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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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