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의 유년시절>
[전두환]
[골목대장]
[가난한 소년]
[대구공고 고학생]
[축구왕 전두환]
[육사 꼴찌]
[꼴찌의 노력]
[이순자]
[전두환과 이순자의 러브스토리]
<라봉봉>
[전두환]
전두환 ,
박정희와 더불어 한국 군부독재자의 상징인 인물이었고
오늘날까지 생존해 있는 인물이며
한국 경제 호황시기 대통령이 된 운좋은 인물이기도 했으며
독재와 민주화운동가들을 고문한 것 ,
5.18 광주학살에 대한 원죄가 있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박정희의 유신독재에 환멸이 나있던 시기
박정희는 유신정권의 2인자였던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게 암살당했고
그로인해 국민들의 민주화 열기가 끓어올랐는데
그 열기에 찬물을 끼얹고 등장한 인물이 군부의 전두환이었으며
독재자였지만
결국 한국 경제를 이끌던 경제대통령 박정희가
스스로 물러나거나 국민들의 시민혁명으로 물러나지 않고
암살이라는 비정상적인 상황으로 사망해버리자
그의 잔재가 전두환으로 나타나
마지막 불꽃을 뿜어올린 것이었으며
전두환과 당시 군부독재에 익숙해져 있었던
박정희계 세력들은 이익수호 , 경제성장유지를 위해
본능적으로
조금더 독재를 이어가야겠다는 생각이 있었고
전두환이 나서게 된 환경이 조성된 것도 있으며
결국 전두환은 박정희때 심어놓은
경제라는 과일나무들을
유지 , 수확하는 인물이었고
전두환은
역시 박정희 독재를 그대로 답습한 인물이었지만
무역적자를 흑자로 돌려놓고
물가도 보기좋게 잡고
두자리수 높은 경제성장률을 올리며
전두환과 노태우라는 마지막 군부독재자들은
국가주도의 경제성장 , 경제개발5개년 계획을 완수했고
이후부터 한국경제는 국가가 아닌
민간주도로 바뀌게 되고
세계화까지 불어닥쳐
큰 진통과 격변을 겪었습니다
박정희가 등장하지 않았더라도
대한민국 국군 내부의 주류였던 일본군+만주군 출신 장교들이
거대 불안세력화로 작용해
5.16 군사정변이 아닌 또다른 쿠데타가 나왔을 확률도 있었고
전두환이 등장하지 않았더라도
유신의 잔재들 + 국가주도 경제계획으로 인한
강력한 리더십의 필요성으로
또다른 군부독재자들이 등장할 확률도 있기에
역사속 인물의 등장은
개인의 의지만이 아닌 사회적 현실과도 맞물려 돌아가고
당시까지 한국은 국가주도 경제개발이 한창 중요시됬고
막 박정희가 만들어놓은 인프라들로 경제가 일어나던 시기였기에
경제적으로는 전두환의 등장으로
사회적 안정이 있었다 평가되기도 하고
그럼에도 국민들이 격렬히 저항했던
박정희의 유신독재를 그대로 답습한 인물이었기에
오늘날까지 전두환은 불명예와 학살자 , 악인의 대명사로 이야기 되고 있습니다
만약 박정희가 김재규에게 암살당하지 않았더라면
전두환이 등장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박정희 역시 시민혁명을 맞거나
대한민국도 북한이나 싱가포르처럼
계속해서 철권독재를 이어가는 등 또다르게 역사가 흘러갔을지도 모르고
박정희보다 더 명분이 부족하고 유연하기도했던 전두환이 등장했기에
민주화세력들이 단결해서 군부독재자들을 몰아내고
민주화를 이룩할 수 있기도 하고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하여튼 ,
경직되있던 박정희 유신정권의 말년과 달리
유연했던 전두환의 등장으로 많은 것이 바뀌기 시작한 것도 맞는 이야기입니다
최근에도 전두환이 직접 쓴
'전두환 회고록' 이 교보문고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을 정도로
전두환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은 여전하고
한쪽은 전두환을 쿠데타 , 광주학살 , 5공비리로 보고있고
한쪽은 물가안정 , 서울올림픽 , 경제성장으로 보고있기도 합니다
결국 오늘날 대한민국 정부는
이런 두가지 모습들로
전두환을 11 , 12대 대한민국 대통령으로 인정함과 동시에
반란수괴 , 살인 , 뇌물수수로 사형과 무기징역을 선고한 모순적 모습을 보이고 있고
한국 대통령들은 보수계정당 , 민주계정당 할 것 없이
항상 중간이 없는 극단적 모습의 지도자들이 주로 나타났기에
비단 전두환 뿐만 아닌
역대 대통령들에 대한 국민들의 심정 역시 이와 같습니다
하여튼 ,
시골이장을 하더라도 시골에서 유능한 인물이 뽑히게 될 것인데
하물며 나라의 대통령은 어떻겠습니까
일단 한국사에서 가장 무식한 대통령이라는 이미지가 있는
전두환이지만 ,
일국의 수장을 지냈다는 것은 결코 우연은 아니며
전두환은
박정희 딸이었던 박근혜처럼 부모후광으로 대통령이 된 인물도 아니었기에
무식한 이미지와 달리 실제론 머리가 똑똑한 인물이기도 했고
사실 학벌주의가 지배하는 한국사회에서
학벌로 육군사관학교+미국군사기관 출신 전두환을 깔 인물은 없고
전두환도 사실상 서울대급 학력을 가진 인물이고
우리 한국은 아직도 학벌주의 나라고
인물의 됨됨이보다는 학벌을 보는 사회이니
전두환은 학벌주의에서는 머리가 가장 똑똑한 대통령이기도 합니다
즉 , 귀납논리적으로 우리 한국사회는
전두환보다 똑똑한 국민들은 거의 없다는 결론으로 내려지게 되는 것이고
그게 비참하게도 우리 현실이기도 하며
현실을 더 정확히 알아야
비참한 역사를 반복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교과서 내용처럼 ,
결국 전두환 독재는 끝나고 민주화는 이루어졌지만
실제론 ,
오늘날에도 전두환은 계속 만들어지고 있고
광주 민주화운동 역시 계속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
또다시 우리는 독재를 종결시키기 위해
독재시대의 역사를 빠짐없이 알아야하며
그런 한국 군부독재시대의 마지막 불꽃을 뿜어올린
전두환의 일생을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골목대장]
전두환은 일제강점기인
1931년 경상남도 합천에서 6남 4녀중 넷째아들로 태어납니다
전두환은 아버지에게 강한성격을 ,
어머니에게서는 억센 기질을 물려받아
어린 시절부터 동네 골목대장을 했습니다
전두환의 아버지는 가난한 농부였지만
마을 구장도 지낼 정도로 한문공부도 했고
전두환의 어머니는 많은 자녀들 중
전두환에 대한 기대가 가장 강해서
앞니가 아들의 운세를 막고있다는 미신을 듣고서는
즉시 쇠집게로 생니 3개를 뽑을 정도였습니다
(박정희나 전두환이 성장한 경상도 깡촌은
이런 미개한 풍습이 많았음)
전두환이 8살이 되던 시기
일본인 순사를 벼랑으로 밀어버리고 만주로 달아난 아버지를 쫓아
전두환은 만주로 건너갔고
곧 다음해 9살때 전두환은
아버지와 함께 대구로 와서 허름한 집에서 셋방살이를 했고
전두환 일가는 겨우 생계를 유지하는 수준이었습니다
[가난한 소년]
10살의 어린이 전두환은
일본인 식품공장에서 낫토(일본 청국장) 배달 ,
약배달 등을 하며 학교에 다니지 못했고
전두환은
뒤늦게 희도소학교(초등학교) 에 진학했고
만주행때문에 전두환은
또래보다 서너살 많은나이인
16세의 늦은나이에 소학교를 졸업합니다
<전두환>돈이 없어 나는 처음에 학교에도 못 갔다.
보통 아이들보다 2∼3년 늦게
그것도 정식학교는 자리가 차서 금강학원이라는 곳에 들어갔다.
내가 1학년을 만주에서 다녔으므로
2학년에 들어갔다가 공부를 잘해서 곧 4학년으로 월반했다.
4학년 2학기 때 희도소학교 5학년에 시험을 쳐서 진학했다.
소학교는 정식으로 2년밖에 못다닌 셈이다.
[대구공고 고학생]
곧 전두환은 6년제 중학교+고등학교 과정이었던
대구공립공업중학교(대구공업고등학교) 기계과에 입학해
왕복 50리(20km)가 되는 길을 걸어서 통학했는데
박정희도 어린시절 먼거리를 통학했고
전두환과 박정희는
경상도깡촌출신 + 가난한 형편 + 먼거리 통학 + 만주행
등 나름 겹치는게 많습니다
전두환은 대구공고를 다닐때에도
신문배달 등 아르바이트를 하며
고학을 했고
옛날에는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이
스스로 돈을 벌며 공부하는것을
괴로운 공부 , 고학이라 했고
이런 학생들을 고학생이라 했습니다
[축구왕 전두환]
전두환은 중학교부터 권투를 시작해
학교갈때마다 어깨에 권투장갑을 걸고 다녔고
전두환은 스포츠에 자신이 있어
축구부를 이끌며 동급생들 사이에서 두목기질을 보였습니다
일단 전두환은 학교를 늦게 다녀서
동급생들도다 3~4살 많기도 했고
싸움실력이 ㅆㅅㅌㅊ였던 전두환은
축구로 몸이 엄청나게 단련되있어서 싸움을 잘할 수 밖에 없었고
힘만 센게아니라 넉살이 좋고
자기 사람으로 만드는 능력이 탁월해
무리를 만들어 두목이 되기 매우 유리했고
의외로 축구 포지션은 공격수가 아니라
골키퍼였습니다
<훗날 대통령이 된 전두환>
골키퍼는 할 게 못됩니다
다른 사람은 백 번 실수하다가도 한 번 골을 넣으면 스타가 되는데
키퍼는 백 번 잘하다가도 한번 실수하면 욕을 먹어요
즉 전두환은 고학생 + 운동부 일진이었고
이로인해 성적은 중간이었는데
(성적이 좋았다는 이야기도 있음)
일단
1950년 2월 10일 전두환은 대구공업고등학교를 졸업했습니다
[육사 꼴찌]
이후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터졌고
이런 상황에서
전두환은 1951년 일자리를 구하던 중
전봇대에서 육군사관학교 모집 공고를 보고
군장교가 되는 육군사관학교에 지원하게 됩니다
그러나 공부실력이 부족하고
전쟁중이라 책도 구할 수 없어 전두환은 육군사관학교 합격자 발표에서 떨어졌고
근데 불합격 한달 후 갑자기 결원이 생겨서
전두환은 육사에 228명 중 꼴찌에서 두번재인
227등으로 합격하게 됩니다
<전두환>육사 입학시험을 쳤는데 성적이 엉망이었다.
수학은 빵점을 받았을 텐데
마침 외우고 있던 피타고라스 정리가 문제로 나와 영점을 면했다
똑같은 군인독재자인 박정희와 전두환은
여기서는 다른점을 보이는데
박정희는 초딩전교1등+교대와 초딩교사출신+만주육사수석+일본육사 출신으로서
실제로 학교공부를 ㅈㄴ게 잘했지만
전두환은 ㄹㅇ 학교공부를 ㅈㄴ 못하고
학교에서도 스포츠나 인맥질에 여념이 없는 인물이었고
육사는 들어가는 순간 국비지원 +
군장교직(군공무원) 이 보장되는 것이기에
원래 공무원 시험도 ㅈㄴ게 어렵다는 인식이 있지만
IMF 이후 공무원 인기가 높아지기 전까진
공무원되기가 그렇게 빡세진 않았고
대한민국 초기엔 오늘날보다 더 구멍이 많았는데
전두환은 결국 허술한게 많았던 초기 육사의 문을 두드린 결과
꼴찌라도 막차로 탑승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꼴찌의 노력]
일단 ,
꼴찌로 육사에 들어간 전두환 생도는
남다른 노력을 펼쳤습니다
일단 장교는 훈련만 받는게 아니라
수학 , 물리 , 역학 등 학과공부도 해야했고
낙제하면 사병으로 투입되기에
전두환은 매일같이 연등(취침시간인 밤 10시 이후에 12시까지 공불하는 것) 을
해야했습니다
전두환은 아침 기상점호 40분전에 일어나
변소(화장실의 옛말) 에 들어가 모포를 뒤집어 쓰고 공부를 하기도 했고
평소 인맥질 실력을 바탕으로
전두환은
영어 잘하는 생도 ,
수학 잘하는 생도에게 찾아가
영어와 수학을 개인지도 받는 방법으로 공부를 했고
그럼에도 졸업때 성적은 여전히 하위권이었습니다 (ㄹㅇ 공부머리는 아니었음)
전두환은 그렇게 육사에서 ㅈㄴ게 공부못하는 ,
간당간당 성적을 유지하는 학생이었는데
당시 전두환의 유일한 해방구는 역시 축구였습니다
<전두환>난 매일밤 연등하지 않으면 안되었지.
그것도 부족해 밤 12시 이후엔 내무반에서 판초(우의)를 뒤집어쓰고
촛불을 켜놓고 공부한 적도 많아.
학과공부가 진전이 없고 답답하니 스트레스가 오죽했겠어.
아마 체육시간이 없었으면 난 질식했을지도 몰라.
난 축구부에 들어가 골키퍼라면서 소리소리지르고 공도 뻥뻥 찼지.
열성이 있으니 주장이 되더군.
후배들하고 뛰고 구르고 하는 것이 어떻게나 좋던지.
전두환은 결국 육사 축구부 주장으로서 리더쉽을 발휘해
육군사관학교를 전국대학 축구대회 준결승에 진출시켜버리기도 합니다
<전두환>결국 나는 4년을 그렇게 보내며 소대장 생도 한번 못해보고 졸업했지.
성적순으로 매기는 군번이 한참 뒤로 처져 한이 맺히더군.
그래서 결심했지.
내가 공부는 못했지만 군인으로서는 1등하겠다고 말이야.
이같은 결심이 열매를 맺은 것이 65년 육군대학때였어.
그때 난 처음 1등이란걸 해봤어
일단 엄격하고 고된 사관학교답게
전두환의 육사 11기는 228명이 입교해
70명이 탈락하고 156명이 졸업했는데
전두환은 하위권으로 126등이었고
그의 친구 노태우는 67등으로 중위권이었습니다
(일단 체력을 중시하고
축구잘하는 녀석을 에이스 취급하는 한국군대답게
육사교육관들도
축구부 주장이었던 전두환을 꼴찌를 면하게
적극 밀어줬을 수도 있습니다)
[이순자]
전두환과 노태우는
1955년 9월 30일 소위로 임관해
전방 소대장을 지냈고
전두환은 이후 육사 태능부대를 거쳐
25사단 72연대 중대장을 맡습니다
전두환은 1959년 1월 24일
이순자와 결혼식을 올렸는데
전두환은 육사 2학년 생도시절
이규동 육사 참모장 집을 방문했습니다
<전두환>참모장님을 좀 뵈러 왔는데요
지금 댁에 계십니까 ?
이때 여중딩이었던 이규동의 큰 딸 이순자는
밖을 나와 집 문을 열어주었습니다
<이순자의 회고>그때 전두환 생도의 웃는 모습이
참으로 인상적으로 느껴졌다
그렇게 이순자 학생은 전두환과 이규동에게 차를 끓여 대접했고
전두환 생도는 그곳에서 예비장인 , 장모님에게
예의바르고 씩씩한 모습 , 유쾌한 모습을 보여주며
점수를 따버렸습니다
<이순자>일요일만 되면 생도들과 함께 아버님을 찾아오는 그분은
언제나 예의가 바르고 싹싹했으며
집안을 활기차게 만들었습니다
우리 부모님을 대하는 것이 꼭 자기 친부모님을 대하는 것 같이
자연스러웠지요
누나들 틈에 만 있던 동생 창석이는
그분 뒤를 졸졸 따라 다닐 정도였습니다
일요일이면 정성있는 음식이 준비됐고
음식준비는 어머님의 큰 기쁨이 되어 갔지요
어쩌다 휴일에 그분의 모습이 보이지 않으면
부모님과 저는 어디가 아픈가 하고
걱정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분은 자연스럽게 한 가족이 되어버렸던 것입니다
일단 일개 육사생도가 상관이었던
참모장 관사에 들낙거리는게 쉬운 일은 아니었는데
전두환의 깡과 넉살이 좋았고
남녀간은 뭔가 알 수 없는 그런것도 있어서입니다
당시 한국 군부는 역시
사관학교출신이 최상위였는데
관료나 공직사회 역시
경기고-서울대 테크를 뜻하는
KS 마크를 최상위 엘리트 코스로 여겼고
여자의 경우
경기여고-이화여대를 최상위 엘리트 코스로 여겼습니다
이순자의 경우도
경기여중-경기여고를 졸업한 후
1958년 이화여자대학교 의과대학에 진학했고
이순자는 학교다니던 시기에도
전두환과 만나 전차(기차)에서 데이트를 하며
딱히 특별한 일 없어도 시간 가는줄 몰라 했고
이후 이 둘은 가족들의 허락속에 자연스럽게 연인관계로 발전합니다
사실 ,
박정희-육영수 부부가 교사출신으로
지성미가 있어보이는 것에 비해
전두환-이순자 부부 역시 둘다 한국학벌 최정점 출신인데
이 부부는 박정희 부부와 달리
윤원형과 정난정 조선 탐욕의 훈구파 부부가 생각나는데
전두환 부부는 교양보다는 돈벌이에 치중했던 부부였기에
둘다 돌머리 + 무식한 복부인 아줌마 이미지가 있고
지성미는 이상하게 없어보입니다
근데 하여튼 끼리끼리라는 말이 있듯이
전두환과 이순자는
금슬은 매우 좋은 대통령 부부로 유명합니다
[전두환과 이순자의 러브스토리]
하여튼 ,
그럼에도
남녀간의 상열지사만큼 재밌는 것은 없고
다시 러브스토리썰로 가서 ..
이순자가 이화여대 의과대학에 입학할 당시
전두환은 육사졸업후 전방부대에서 근무를 했는데
어느날 이순자는 급성맹장으로 드러눕게 되었고
전두환은 아파 허리를 펴지 못하는
이순자를 보고 놀라
즉시 이순자를 업고 병원에 달려갔는데
다행히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고
로맨틱 가이 전두환은 이순자 어머니와 함께
이순자 곁을 떠나지 않고 간호했습니다
10일만에 집으로 돌아온 이순자는
마음속으로 전두환에게 정말 고마운 마음이었는데
곧바로 절망의 편지를 받게됩니다
전두환은 편지로
이순자에게 절교하자 했고
이순자는 전두환의 절교편지에 노여움과 원망스러움으로
빡돌아서 결국
전두환이 있는 부대로 찾아가는데
전방부대에서 지뢰사고가 났다거나 하는 소식을 듣고
이순자는 눈물과 오열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끝내 이순자는 전두환 중위가 있는 부대에 찾아갔는데
무척 수척한 전두환을 보고 울어버렸고
이에 전두환은 이순자를 보고 놀라며
이순자에게 절교편지를 쓴 이유를 설명해줍니다
<전두환의 설명 요약>초급장교 한달 봉급이
쌀 한말인데 급성맹장수술때 수술비에 절망했음 ,
대한민국 육군중위가 연인이 아파 병석에 누워있는데도
과일바구니 하나 사줄 수 없어 고통스러웠음 ,
길을 걸으며 현실 , 주제파악을 했고
결혼하면 고생할게 뻔한데
사랑하는 사람을 고생시킬 수 없어
마침내 절교편지를 썼음
눈물겨운 전두환 중위의 설명에
이순자는 또다시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말했습니다
<이순자>나는 군인의 딸로 자라왔기 때문에
어머님께서 어려운 생활을 어떻게 극복해 내셨는지 알고 있어요
무슨 고생이든 다 해낼 수 있어요 !
결국 가난때문에 연인에게 이별을 말한 전두환에
이순자는 오히려 솔직한 전두환의 모습에 더욱 전두환을 사랑하게 되버렸고
결국 둘은 재결합하고
이순자 역시 가난한 전두환의 입장을 생각하며
학교갈때 걸어다니며 돈을 저축해 전두환 주머니에 몰래 찔러주었고
데이트 비를 아끼기 위해
가급적 집에서 만나고 도시락을 싸먹으며 데이트합니다
결국 이 둘의 눈물겨운 사랑은 결실을 맺어
1959년 1월 24일 결혼을 하게 됩니다
근데 당시 이화여대는
금혼규정이 있었기에 학칙상 재학중 결혼하면 퇴학이었는데
이순자는 대학보다 사랑을 택하기로 했고
결국 둘은 운명의 결혼식을 치루게 됩니다
결혼전 이순자는 어머니와 함께
전두환의 가난한 집안형편때문에 함께 울었는데 (ㅠㅠ)
이순자의 어머니는 이순자에게
<이순자 어머니>옛말에 혼인치레 하지 말고
팔자치레 하라는 말이 있다
찬물 한 그릇을 떠놓고 결혼했어도
잘 사는 사람 많이 봤고
바리바리 싣고 결혼 한 사람이
못사는 것도 많이 봤다
나나 너의 아버님도 사람 보는 눈이 있다고 믿는다
전중위는 우리도 무척 아끼고 사랑하니
용기를 내라
이에
이순자는 모아둔 돈을 몽땅 털어
전두환의 양복을 준비했고
결국 둘은
1959년 1월 24일 대구제일예식장에서 결혼식을 올렸고
전두환 친구 노태우 중위가 축사를 했습니다
결혼후 곱게자랐던 이순자는 혹독한 시집살이가 시작됬고
요리하나 할줄 모르던 이순자는
손을 데이면서 열일했고
이후에는 결국 전두환은 이순자를 따라
중령으로 진급할때까지
8년간 처가살이를 하며
장군이었던 장인의 처갓집 정보력을 활용해
패밀리 비지니스로 재산을 증식했고
이순자는 억척스럽게 돈을 모아버립니다
전두환의 권력의 뒷면에는 이렇게
처갓집 + 이순자가 있었고
전두환-이순자를 보면
조선시대 부패한 훈구파
윤원형-정난정 부부도 생각나지만
ㅂㅅ이었던 남자가
앞으로 떡상할 것을 보고
결혼한 뒤
집안파워로 적극 지원사격한
한고조 유방의 부인 여후나
일본 초대쇼군 미나모토 요리토모 부인 호조 마사코도 생각납니다
(셋다 한중일 악녀긴 하군 ..)
<라봉봉>항상 어린시절은 누구나 귀엽고 훈훈하고
점차 어른이 되가며 욕심과 탐욕으로 얼룩져 변해가는 사람들이기도 합니다
전두환 기록은
치밀하고 복잡했던 박정희 기록과 달리
전두환의 성격답게
단순 , 직선적이며 좀 화끈거리고
전두환은 군인 , 정치인으로서는 오명이 있고 실패한 인물이지만
노년에서도 전두환-이순자 부부가 항상 손을 꼭 잡고 다니는게 인상깊었고
두 부부가 솔직히 인물이 좋다 느낌은 없지만
제눈에 안경이란 말처럼 본인들끼리 좋으면 그만이고
결혼생활 자체는 서로에 대한 의리가 깊고
성공한 인물들이라 생각합니다
하여튼 감상은 여기까지 접어두고 ,
전두환 일가 역시 행복하고 눈물겨운 스토리가 있는데
자신의 행복 만큼 남의 행복또한 소중한 것이며
이후 전두환은 독재자가 되어 수많은 사람들의 행복을 짓밟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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