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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레오 갈릴레이>

[장남 갈릴레오]

[의대생 갈릴레오]

[아리스토텔레스 VS 갈릴레오]

[진자의 등시성]

[피렌체 가문]

[대학교수]

[결혼 ?]

[사고실험]

[피사의 사탑 자유낙하실험]

[관성의 법칙]

[천문학에 대한 연구들]

[망원경 개량]

[달의 크레이터]

[과학 지동설 VS 종교 천동설]

[그래도 지구는 돈다]

<라봉봉>

 

갈릴레오 갈릴레이

 

[장남 갈릴레오]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1564년 이탈리아 피사에서 음악가인 빈센조 갈릴레이의

여섯자녀중 첫째이자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이름은 성과 이름이 비슷해서 헷갈리기 쉬운데

갈릴레오가 이름이고 갈릴레이가 성입니다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아버지 빈센조 갈릴레이는

음악선생님이자 류트 연주자로서

피렌체에서 태어나 베니스에서 음악을 공부한 뒤

1563년에 빈센조와 결혼하고 피사 근처 시골에 집을 지어서

첫 아이 갈릴레오를 보게 됬고

갈릴레오는 어린 시절을 피사에서 그의 가족들과 보냈습니다

 

갈릴레오는 귀족집안에서 태어났지만

그가 태어날때 가세가 기울어 어려운 형편이 되었고

1572년 갈릴레오가 8살이었을 때

그의 가족은 아버지의 고향 피렌체로 돌아왔지만

갈릴레오는 피사에 남아 친척의 집에서 2살동안 살았고

10살이 되자 피사를 떠나 가족들과 합류하려 피렌체로 이사한 갈릴레오는

카말돌레스 수도원에서 3년간 생활하는데

수도사의 고독하고 엄격한 생활이 마음에 들었던 갈릴레오는

수도회에 들어가려 했지만

갈릴레오의 아버지는 장남 갈릴레오가 보수가 많은 직업인 의사가 되어

집안을 일으켜주길 바랬기에 

 

(돈때매 의대보내려는 건 예나 지금이나 똑같네 ..?)

 

아버지 빈센조는 갈릴레오가 수도회에 가입하기를 포기하게 하고

피렌체로 돌아오게 했고

갈릴레오는 피렌체에서 학업을 계속했지만

카말돌레 수도사들에 의해 운영되는 학교에서 계속하여

이렇게 어릴때부터 수도원 , 수도사에게 영향을 받은 갈릴레오였기에

죽을때까지 갈릴레오는 종교인들과 인연이 깊게 됩니다

 

[의대생 갈릴레오]

1581년 아버지 빈센조는

16세의 갈릴레오에게 의학을 공부시키려

16살에 피사 대학교에 등록시켰는데

 

세계사에겐 행운이지만

아버지에게는 불행히도

아들 갈릴레오에게 의학은 별다른 생각은 없었는데

아버지는 옛날에 집안에 저명한 의사양반도 있었고

또한 총명한 첫째아들 갈릴레오가

개룡남 의사가 되어 월 천오백씩 쭉쭉 벌어서

젖탱이도 섹시한 부자여자한테 장가가서

고급아파트 키 , 외제차 키 , 상가건물 키도 세 개씩 받고

차도 제네시스 G80으로 바꿔주기를 그랜절하며 기원하였는데

 

 

아버지가 바란 아들 갈릴레오의 모습 , 하얀거탑

 

(우리 이과전교1등 똑똑이 아들이

분명 의대가서 용돈도 매달 200씩 주겠지~ㅎㅎ)

 

 

일본 도게자도 울고가는 한국 그랜절 문화

 

총명한 갈릴레오는 당장 돈도 안되는 수학에 빠져들었고

 

(아버지 ! 그런 세속적인 의학보단 기초학문이 미래입니다요~ㅎㅎ

빈유가 꼴잘알이쥬 ~)

 

갈릴레오는 수학과 자연철학에 대한 수업에 빠지며

의학공부는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않았고

수학에 진심전력하게 됩니다

 

부귀영화가 보장된 카필라 왕국의 왕 VS 걸식하는 부처의 고민이 비단 싯다르타만의 문제는 아니었던듯..

 

1582년~1583년 사이

갈릴레오는 피사대학에서

리치 선생님에게 유클리드 기하학(수학)를 배웠고

1583년 여름동안 아버지 빈센조는 갈릴레오에게

갈렌(로마제국 전설의 의사 갈레노스) 을 읽도록 격려했지만

갈릴레오는 여전히 의학공부를 꺼렸고

비판적인 생각 때문에 사소한 문제에도 친구들과 반대 입장에 서서

싸움꾼 별명이 붙었습니다

 

리치 선생님은 갈릴레오가 좋아하는 것을 시키기 위해

빈센조에게 갈릴레오가 수학공부하는 것을 허락하려 설득했는데

빈센조는 처음엔 저항했지만 점차 양보하며

갈렐리오는 이탈리아 번역본으로

전설의 고대수학자 유클리드와 아르키메데스의 작품을 연구하게 되고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 이야기를 듣고 깊이 감동합니다

 

지동설을 주장하며 천문학에 새 패러다임을 제시한 코페르니쿠스

 

[아리스토텔레스 VS 갈릴레오]

또한

갈릴레오가 학생이었을때 , 활동할 시기 당시만해도

학교에서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을

절대적인 진리로 가르쳤고 아리스토텔레스가 곧 법이자 진리이던 시대로서

실제로 아리스트텔레스가 철학과 과학 등

다방면에서 여러 업정을 남긴 전설적인 고대 학자이자 세계 위인이지만

너무 영향력이 커서 그가 잘못 생각한 것 까지도

전부 진실로 받아들이는 그런 상황이었고 (권위에 호소하는 오류)

 

인터넷에 있는 모든 글을 그대로 믿지 말라 , 에이브러햄 링컨

 

그렇게 아리스토텔레스의 그림자 밑에 있고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며 그 주변을 태양과 달이 돈다는 중세과학계상황에서

갈릴레오는 오히려

태양이 우주의 중심에 위치하고 그 주변을 지구와 달이 돈다는

'지동설' 을 주장한 코페르니쿠스와

고대 그리스의 위대한 물리학자 아르키메데스의 생각에 공감했습니다

 

대학생시절 갈릴레오는 대학을 거닐다 우박이 떨어지는 것을 목격하고

우박 덩어리들은 크기와 무게와 관련없이 똑같은 속도로 지면에 떨어지듯 보였고

이상하게 여긴 갈릴레오는 아리스토텔레스 이론에 의하면

 

'무거운 것은 먼저 떨어져야 한다'

 

였는데 이상히 여겨서

당대 피사대학 최고학자이자 강경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였던 

지롤라모 보로 교수에게 질문했는데

보로는

 

<보로 교수>우박이 각각 다른 위치에서 떨어졌고 무거운 우박은

더 높은 곳이서 , 가벼운 우박은 더 낮은 곳에서 떨어져서

우리 눈에는 동시에 닿은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라 답해줬고

당연히 갈릴레오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갈릴레오의 일생에 가장 영향을 준 과학자는 당연

그 시대를 지배하고 있던 아리스토텔레스였고

갈릴레오는 아리스토텔레스라는 거인의 어깨위에 올라타

더 넓은 곳을 볼 수 있게되었고

또한 갈릴레오는 평생동안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과 세계관을 하나하나 깨트리며

자신의 세계관을 만드는데 성공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 VS 갈릴레오

 

[진자의 등시성]

피사대학 시절 18세의 갈릴레이는

피사의 사원으로 예배하던 중

예배당의 천장에 매달린 샹들리에(등)가 천천히 좌우르 흔들리고 촛불이 깜박이는

모습을 보고는

자신의 맥박을 시계대신 사용해 샹들리에가 한 번 왕복하는데 걸리는 시간을 재보았고

샹들리에가 흔들리는 진폭이 작아져도

주기는 변함이 없는 듯 하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집에 가서 같은 길이의 진자 2개를 준비해

한 쪽은 크게 , 다른 쪽은 작게 흔들어 보았고

그 결과 2개의 진자가 동시에 진동해 사원에서 자신이 관찰한 내용이 옳았음을 확인하고

 

'진자의 등시성(isochronism)'

 

이라는 법칙을 발견합니다 (등시=일정함)

 

샹들리에를 보고 진자의 등시성을 발견한 갈릴레이

 

추의 무게가 무거우나 가벼우나 한번 갔다오는데 걸린 시간(주기)은 같고 많이 흔들리던 적게 흔들리던 주기는 변하지 않는다

 

훗날 갈릴레오가 세상을 떠나고 14년이 지난 후

1656년 네덜란드 수학자이자 물리학자인 크리스티안 하위헌스는

진자의 등시성을 응용한 '진자시계' 를 발명하게 됩니다

 

진자시계 , 서울경제

 

수학에 전념하게 된 갈릴레오는 여전히 피사대학 의대생으로 등록되었지만

결국 1585년 갈릴레오는 의대과정을 포기하고 

끝내 학위를 마치지 못하고 떠났습니다

 

[피렌체 가문]

갈릴레오는 처음에 피렌체에서 수학가정교사를 하다가

1585~86년동안 시에나에서 공직을 맡았고

1586년엔 균형을 이용해 물질의 특정한 중력(상대밀도) 를 찾는

아르키메데스의 방법을 설명한 그의 첫번째 과학책

 

'작은 균형 The little balance'

 

을 썼고

1587년 갈릴레오는 로마로가서

로마 예수회를 방문했는데

이 시기 예수회 수학자들에게 무게중심은 매우 인기있는 주제였고

갈릴레오는 이곳에서 여러 몇가지 결과를 보이고 호의적 인상을 주었지만

대학수학교수가 되는데는 실패합니다

 

그럼에도 점차 인정받기 시작하던

1588년 갈릴레오는 피렌체의 아카데미에서

단테의 지옥의 크기와 위치에 대하 강의하라는 초대를 받았고

 

갈릴레오를 초청한 자들은 바로 메디치 가문으로서

피렌체 공화국에서 가장 영향력 높은 가문이며

실질적 통치자로서 은행업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한 가문이자

예술가와 학자를 후원하며 르네상스 시대가 피렌체에서 열리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가문이었고

 

메디치 가문

 

역시 인재 판독기인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에 눈에 들어온 갈릴레오는

메디치 가문의 저택으로 불려가

 

'지옥의 크기'

 

를 주제로 강연하게 됩니다

 

단테의 작품 '신곡' 에서 묘사된 지옥의 크기는

당대 지식인들 사이의 주요한 주제였고

갈릴레오는 작품속에서

 

'루시퍼는 로마 성 베드로 광장의 거인 조각상보다 43배가 크고

조각상은 단태보다 43배가 크다'

 

라는 묘사를 보고 비례법을 이용해 문제를 풀었고

결론적으로 갈릴레오는

 

'루시퍼의 키는 1800m 정도이며 지옥은 지구의 1/12 정도 부피의

원뿔 모양이다'

 

라고 계산했고

 

단테의 지옥 묘사도

 

그의 강연은 극찬을 받으며 끝나게 됬고

메디치는 학사 학위도 없는 갈릴레오에게

피사대학의 수학교수 자리를 제안합니다

 

(르네상스 시대 레전드 위인들은 다 메디치 가문과 엮여있고

안목 있던 메디치가문도 괜히 부를 쌓은것도 아닌듯)

 

[대학교수]

로마를 떠난 후 갈릴레오는

로마 과학자들과 편지로 교류를 시작하며 점차 명성을 얻었고

1589년 피사대학의 수학교수직에 임명됩니다

 

1589년부터 1610년까지 갈릴레오는 피사 대학과 파도바 대학의 수학교수였고

원래 1591년 갈렐리오의 아버지 빈센조가 사망하자

장남이었던 갈릴레오는 나머지 가족을 부양하고 두 여동생의 지참금을 마련하려

피사대학 수학교수 봉급으로는 택도 없었기에

더 돈이 되는 직업을 찾다가

피사에서 받았던 월급의 3배의 월급에

1592년(우리는 임진왜란 시기 ㅠㅠ) 파도바 대학의 수학교수로 임명됩니다

 

1592년 12월 7일부터 갈릴레오는 첫번째 강의를 하였고

18년동안 대학에서 재직합니다

갈릴레오는 이 기간을 인생에서 행복하게 생각했고

이 기간동안 물리학에 중요한 공헌을 한 낙하하는 물체에 대한 실험을 수행합니다

 

[결혼 ?]

잠깐 그의 결혼이야기도 하자면

교수가 돼 나름 안정감이 생긴 갈릴레오는 결국 여자도 생겨버렸고 (!!..)

파도바에서 갈릴레오는 베니스 출신 마리아 감바와 장기적 관계를 시작하지만

갈릴레오는 재정적 상황이 충분치 않다 느껴서

둘은 결혼하지 않았고

근데 애는 또 낳아서 (;;)

1600년 첫째아이 버지니아가 태어나고

다음해 둘째딸 리비아 , 

1606년 아들 빈센조가 태어나며 가정도 꾸릴 수 있게 됩니다

 

[사고실험]

다시 과학이야기로 가서..

옛날에 고대 그리스 과학자이자 철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는

무거운 것은 빨리 떨어지고 ,

가벼운 것은 천천히 떨어진다 주장했고

 

당연히 무거우니깐 힘이 크니깐 더 힘을 많이 받을 거고

가벼우면 힘이 작으니 힘을 많이 안받으니 그렇게 될것이기에

과학을 공부하지 않으면

오늘날 현대 일반인들도 누구나 2000년도 전 사람인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이 그렇게 생각이 들 것입니다

 

실제로 쇠공이 솜뭉치보다 빨리 떨어지므로

당대 과학계에선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이 정설이는데

 

25세의 나이에 수학교수가 된 갈릴레오 역시 수학교수로서

천문학과 유클리드 기하학 ,

아리스토텔레스의 운동학을 가르쳐야 했으므로

좋던 싫던 낙하운동에 대한 이론을 강의해야했는데

그럼에도 수업을 하면 할수록 이론의 모순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나 갈릴레오는

이 경우 두 가지 힘이 동시에 작용해 오류가 있다 생각하였고

두 가지 힘이란 바로

지구의 '중력(Gravity)' 과 '공기의 저항력(Air resistance force)' 였고

갈릴레오는 이 상황에서 공기의 저항력을 배제시키면

무겁운 것이나 가벼운 것 모두 동시에 떨어지지 않을까 ? 라고 생각하였고

 

현재는 공기가 없는 진공 속 낙하에 대해 갈릴레오의 

생각이 옳음이 증명됬고

근세 갈릴레오의 이 생각은 너무 유명한 이론이라

근대 아이작 뉴턴이 이론적으로 증명하고

1971년 아폴로 15호가 달에가서

승무원들이 직접 망치와 깃털을 동시에 떨어트리는 실험으로 입증했지만

 

크 낭만 ㅈ되누..

 

400년뒤 달에서 망치와 깃털.. 낭~~~~~만~~~~~~

 

갈릴레오가 살아있을때 당시는 진공상태의 실험조건을 만드는 것이 쉽지 않았고

일단 그럼에도 갈릴레오는 진공상태가 아님에도 이런 실험을 해 볼 수 있다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갈릴레오는 무거운 물체가 가벼운 물체보다 빨리 떨어진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을 납득할 수 없었고

본 실험을 해보기 전 논리와 생각(사고)으로서

 

'사고실험(생각실험)'

 

을 하게 되는데

사고실험은 머릿속으로 시물레이션을 한다 보면 됩니다

 

 

사고실험의 대표적 예 트롤리 딜레마 , 1명을 죽이고 5명을 살릴것인가 반대인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에 의하면

물체의 낙하속도는 질량에 비례하는데

 

10kg짜리 쇠구슬은 1kg 짜리 쇠구슬보다 10배 빠른 속도로

낙하한다는 것이고

갈렐리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을 반박하기로 생각하고

논리개발에 몰두하였고

그는 결국 어떤 방법을 생각하는데

바로

무거운 물체와 가벼운 물체를 묶에서 높은 곳에서 떨어뜨리는 상상을 한 것이었고

 

'두 물체를 묶은 낙하 사고실험'

 

을 머릿속으로 시행합니다

 

무거운 물체 A 와 가벼운 물체 B 가 있는데

두 개를 실로 묶어서 던지면

무거운 물체 A 는 가벼운 물체 B에 의해 속도가 느려지고

가벼운 물체 B 는 무거운 물체 A 에 의해 속도가 빨라지는데

이로인해 두 물체를 묶은 AB는

처음 무거운 물체 A 하나만인 경우 보다 느려지면서

가벼운 물체 B 하나만인 경우보다는 빨리 떨어져야하며

둘을 묶으면 평균의 속도로 떨어질 것이고

 

아리스토텔레스의 '무거울수록 낙하속도가 빠르다' 라는 이론에 의해

두 물체를 묶은 AB 는 무거운 물체 A 보다 더 빨라져야 하지만

두 물체를 묶은 AB 는 무거운 물체 A 보다 느리면서 동시에

무거운 물체 A 보다 빨라야 한다는 모순적이고 상반된 두 결론을 내놓고

따라서 갈릴레오는 애초의 가정이 틀렸음을 알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은 틀렸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갈릴레오의 사고실험

 

참고로 세계사에서는 에디슨이 수천번 노오오오오력 해서

전구 수천 번의 실험을 끝에 만들기도 했지만

이렇게 갈릴레오마냥

머릿속으로 사고실험을 통해 만들어진 이론들이 여러개 있고

갈릴레오의 아리스토텔레스 낙하이론 반박도 있지만

철학자이자 수학자 데카르트가 침대에 누워있는데

천장에 붙어있는 파리(곤충 , 파리바게트 파리 아님ㅋ)를 보고

파리의 위치를 편하게 표시하려고

머릿속으로 십자모양으로 좌표계를 만든게 유명하고

오늘날 4사분면으로 나뉘어 X축과 Y축으로 표시되어

중학생들 1차 , 2차 함수로 탈모 오게 하는 중딩 담당일진이 되고

이 데카르트 좌표계는

훗날 뉴턴이랑 라이프니츠에게 미적분이 만들어지는데 기여했으며

오늘날에도 맨날 보고 쓰게 되는 이 십자 XY 좌표계가

데카르트가 파리 스토킹하다 만들어진 이론이란 말씀 ~

 

데카르트와 파리

 

천장의 파리가 (2 , -1) 위치에 있군.. , 이런식으로 만든거였움 ㅋㅋ;;

 

그리고 아인슈타인도 어린시절 기차에서 기차를 타고 빛을 쏘면 어쩌구 하면서

상대성이론을 생각했다 하고

슈뢰딩거의 고양이나 보이지 않은 손 , 테세우스의 배 등

수학 , 철학 , 물리학 , 천문학 , 인문학 등

여러 다양한 분야에서 사고실험이 있어왔고

생각보다 인류가 밥먹고 맨날 섹스 , 엉덩이 , 찌찌 생각만 하진 않았군요..

 

(가끔 전 제가 젊은 나이때 위인들이 해낸 업적들 보고

참 대단쓰.. 난 뭐징 이런 생각도 여럿 듭니다)

 

[피사의 사탑 자유낙하실험]

하여튼..

갈릴레오는 사고실험의 결과가 너무 명백해서 자신감에 차 있었고

곧바로 부피는 같지만 무게가 다른 두 개의 공을 들고

피사의 사탑으로 올라갑니다

 

나선형으로 된 294 개의 계단을 올라

꼭대기 층에 이른 갈릴레오는

부피는 동일하지만 무게는 다른 공을 동시에 떨어뜨렸고

두 공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설과는 달리

동시에 떨어졌습니다

2000년만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이 깨지게 되어버렸고

갈릴레오는 생각실험 (Thought Experiment 사고실험) , 

사고실험의 원조 격에 해당하는 인물로서

 

갈릴레오의 피사의 사탑 실험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건축물 피사의 사탑

 

모순되는 현상의 발견 ,

모순되는 현상의 핵심 탐구 ,

생각을 통해 해결방안 탐색 ,

생각을 통해 해결방안 적용 ,

실제 실험을 통해 증명

 

이라는 과정을 거치는 통찰실험을 개발함으로서

(대충 생각을 통해 모순을 인지 후 해결)

후대 과학 , 철학 , 인문학자들에게도 그대로 전달됩니다

 

이 사고실험으로인해 갈릴레오는

근대과학의 아버지라 불리고 있고

사고실험은 현대의 물리학자들도 즐겨 사용하며

대표적인 예가 블랙홀이나 천문학에 관련된 논의는

대부분 사고실험이라 할 수 있습니다

 

(현재 기술력으로 가볼 수는 없으니

상상에 상상에 상상을 더해서 두뇌 풀가동잼 ㅋㅋ)

 

[관성의 법칙]

또한 자유낙하실험 외에도

갈릴레오의 사고실험으로 빗면실험도 유명한데

U자형으로 양 끝이 휘어져있는 빗면의 한쪽 끝에서 공을 굴릴때

갈릴레오는 생각속에서 대담한 가정을 도입합니다

바로 U자 코스에서 마찰을 없앤 것이고

현실에서는 마찰이 없을 수 없지만

생각과 상상에서는 가능했기에 갈릴레오는

뇌피셜로 U자 코스에 마찰을 없애버렸고

 

갈릴레오의 가정으로는 마찰이 없으면

빗면의 한쪽 끝에서 출발한 공은

다른 쪽 빗면을 타고 올라가 원래 빗면과 똑같은 높이까지 이를 것이고

반대편 빗면을 조금 바닥방향(수평방향)으로 눕혀도

공은 원래 출발선과 똑같은 높이까지 올라갈 것이고

대신 빗면이 완만해진 만큼 공은 출발선과 똑같은 높이 까지 올라가려

더 많은 거리를 이동할 것이고

반배편 빗면을 완전한 바닥으로 눕히면

무한히 먼 곳에서 빗면이 위로 솟아있다 가정할 수 있기에

공은 무한히 먼 곳까지 굴러갈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로인해 갈릴레오는 마찰이 없다면 빗면을 내려온 공은

무한히 멀리 계속해서 굴러갈 것이라 사고실험으로 생각했고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운동관을 산산히 부숴버리는데

아리스토텔레스는 운동이 일어나려면 접촉자(접촉기동자)가 반드시 있어야하고

즉 공이 평면을 굴러가려면 사람이 계속 발로 차야하고

차지 않으면 공은 얼마 지나지 않아 멈추는게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이었는데

갈릴레오는 이 사고실험으로 또 아리스토텔레스가 틀렸다 말하며

접촉자가 없어도 공은 계속 굴러기고 이것이 바로 관성이며

갈릴레오는 이 빗면사고실험을 통해

 

'관성의 법칙'

 

을 발견합니다

 

 

<갈릴레오 '새로운 두 과학'>

어떤 물체가 자유롭게 떨어지면서 얻은 속력을 ,

그 물체는 계속 그대로 유지하려는 본성이 있다

 

갈릴레오는 자유낙하운동이 시간에 따라

속도가 일정하게 증가하는 등가속운동임을 알았고

 

이때 '물체의 낙하거리는 시간의 제곱에 비례한다' 는 것을 알아냈고

갈릴레오는 빗면을 이용해 이 사실을 확인합니다

 

이 결과를 투사체 , 비스듬히 쏜 물체(포탄)에 적용하면 놀라운 결과가 나오는데

투사체 운동은 수평운동과 수직운동으로 나뉘며

마찰이 없으면 수평운동은 속도가 변하지 않고 일정히 유지되기에

이동거리가 시간에 정비례하고

반대로 수직운동은 아래쪽으로 가속도를 받는 등가속운동이고

 

갈릴레오는 이 둘을 조합해 투사체의 운동궤적이 포물선임을 알아냈고

아리스토텔레스 운동관에서는 야구공을 비스듬히 위로 던지면

야구공은 처음에 사선으로 강제적 운동을 하고

강제적 운동이 끝나면 지구를 향하는 본성적 운동을 해서

야구공 궤적이 직각삼각형이 되는데

 

직각삼각형인 아리스토텔레스는 틀렸고

역시 포물선인 갈릴레오가 옳았고

대표적인 예가 포탄인데

포탄 궤적이 직각삼각형인지 포물선인지는

군사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갈릴레오는 책상 위에 경사면을 만들어 공이 등가속도(일정한 가속도)로 움직이게 하고 경사면을 거쳐 책상 아래로 떨어지는 공의 궤적을 조사 , 이 실험을 통해 투사체의 궤도가 포물선임을 확인함

 

[천문학에 대한 연구들]

파도바 대학의 수학교수였던 갈릴레오의 임무는

의대생들에게 기초적인 수학(유클리드 기하학)과

천문학(지구 중심 천문학)을 가르치는 것이었고

당시 의학에서는 점성술(ㅋㅋ;;)을 사용하기 위해서

약간의 천문학을 알아야했고 (ㅋㅋ;;)

갈릴레오 교수가 당시 가르친 이 천문학은

하필 당시 표준이었던 지구 중심으로 별들이 도는

그런 지구중심 천문학(천동설)이었습니다

 

당시의 믿음으로 만들어진 천문학은

아리스토렐레스의 믿음을 따르며 하늘의 모든 변화는

지구에 가까운 달의 지역 ,

고정된 별들의 영역이 영원해야한다는 것이었고

 

1604년 갈릴레오는 현재는 케플러의 초신성으로 알려진

당시 새로운 별에 대한 공개강의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천문학과 자연철학에 대한 관점에 반대했고

갈릴레오는 시차 주장을 사용해 새로운 별이 지구에 가까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증명했습니다

 

[망원경 개량]

1608년 네덜란드 안경원에서 렌즈를 연마하던

한스 리퍼세이에 의해 망원경이 발명되는데

곧바로 다음해인

1609년 갈릴레오는 멀리 있는 물체를 가까이 있는 것처럼

확대한다는 렌즈에 대한 소식을 접한 뒤

볼록렌즈 1개와 오목렌즈 1개로 이루어진

첫 망원경을 개량했고

이후 망원경으로 갈릴레오는 천체를 관측하며

달의 크레이터 , 태양의 흑점 , 목성의 위성 같은

기존 우주론을 반박하는 증거들을 얻게 되었고

 

갈릴레오가 만든 망원경

 

갈릴레오 망원경을 보고 있는 베네치아 총독

 

[달의 크레이터]

가장 먼저 갈릴레오가 관측한 달은

의외로 크레이터 범벅의 울퉁불퉁한 존재임을 확인해

달이 불완전하다는 것을 확인했고

이는 기존 아리스토텔레스의 전통적 세계관에 대한 비판이자 도전이었습니다 

 

갈릴레오가 망원경으로 본 달을 스케치한 작품 , 충돌구멍인 크레이터가 보임

 

갈릴레오의 망원경 개량 소식에 온 유럽이 들썩였고

천문학자들은 열광해 갈렐리오 망원경의 단점을 보완시키며

더 나은 망원경 개발이 촉진됩니다

1610년 1월 갈릴레오는 목성을 공전하는 4개의 새로운 별을 발견했습니다

 

갈릴레오는 니콜라스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을 접해

그의 이론의 탁월함에 감복하며 지지했고

갈릴레오는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을 토대로

스스로 해낸 달의 표면에 대한 관찰(크레이터)과

은하계의 많은 새로운 별들에 대한 그의 발견을 설명하는 짧은 논문인

'시데리우스 눈치무스' 를 출판하였고

권력자인 토스카나 대공 코시모 2세 데 메디치의 환심을 사기 위한 시도로

갈릴레오는 목성의 위성들을 '메디치의 별(메디치안 별)'

이라 부를 것을 제안합니다

 

관측하는 갈릴레오

 

<갈릴레오 '시데리우스 눈치무스'>이제 우리는 고귀하신 전하를 위하여

그보다 더욱 참되고 더욱 경사스러운 징조를 말씀드릴 있게 되었습니다.

불멸의 영혼인 전하의 은총이 지상을 밝히기 시작하자 ,

전하의 없이 훌륭한 미덕을 기리기 위해

하늘에서 밝은 별들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전하의 찬란한 이름을 기리기 위해서 여기 4개의 별이 예비되어 있습니다.

별들은 너무 흔해서 주목할 만한 것이 못되는

평범한 붙박이별(항성) 아니라 ,

참으로 빛나는 떠돌이별인데 ,

별은 그중에서 가장 우아한 목성 둘레를

놀라울 만큼 빠른 속도로 돌고 있습니다.

별들은 집안의 아이들처럼 서로 다른 궤도운동을 하며 목성 둘레를 도는데 ,

한편으로는 상호조화 속에서 ,

목성과 더불어 12년에 번씩 세상의 중심 ,

태양 둘레를 크게 공전합니다.

실은 별들을 처음 발견했을 때 ,

별들의 창조주께서 저에게 새로운 별들을

다른 모든 이들 앞에서

전하의 찬란한 이름을 따서 명명하라고 명백히 충고하는 했습니다.

 

[목성의] 모습을 보면 누구나 전하의 부드럽고 온화한 영혼 ,

호감을 주는 태도 ,

빛나는 왕의 혈통 ,

위엄 있는 행동 ,

다른 이들을 지배하는 폭넓은 권능을 눈에 알아보게 것입니다.

전하의 내면에는 절로 고귀한 모든 품성이 깃들어 있습니다.

감히 말씀드리건대 ,

모든 선의 원천인 창조주를 본받아 

더없이 자애로운 주피터의 (목성)에서

모든 품성이 유래했음을 모르는 누가 있겠습니까 ?

전하가 탄생하셨을 때 ,

지평선의 어두운 안개를 뚫고 중천으로 솟아올라

왕실의 동편을 비춘 별이 바로 목성이었습니다.

 

이제까지 모든 천문학자들에게 감추어져 있던 별들을

제가 코시모 전하의 후원을 받아 발견하였기에 ,

저는 당연한 권리로서 전하 가문의 존귀한 이름으로

별들을 명명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저는 이것을 처음 발견하였기에 마땅히 이름을 정할 권리가 있습니다.

다른 별들에 붙여진 다른 영웅들의 이름처럼

별들에 더욱 영광이 더해지기를 바라 마지않으며 ,

제가 별들을 '메디치 별' 이라 부른다 하더라도

아무도 권리를 부인할 없을 것입니다.

(중략) 그러므로 더없이 자비로우신 전하께옵서는

별들이 예비한 특별한 영광을 받아 주시고 ,

별들뿐만 아니라

별들의 창조자이고 지배자인 하느님께서

전하께 내려 주신 신성한 축복을 오랫동안 누리옵소서

 

요약하자면

 

'메디치 행님들 후원 감사합니다요~

리액션으로 저 갈릴레오 이번 발견한 별에 형님들 이름 붙이겠습니다~

그니깐 도네 더 팍팍 해주세연 데헷~(천재도 돈앞에선 장사 없당께 ㅋ)'

 

이 발견은 갈릴레오를 유명인사로 만들었고

흡족해진 코시모 2세는

갈릴레오를 메디치 가문의 수학자이자 철학자로 임명하고

갈릴레오의 후원자가 되어

그의 이론을 발표하는데 도움을 주고 반대자로부터 보호해주었습니다

 

[과학 지동설 VS 종교 천동설]

그러나 갈릴레오의 관찰은 

당시 과학자와 신학자들 모두에 널리 용인되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관과 모순되었습니다

 

신학자들에게 인정받지 못한 갈릴레오

 

달의 울퉁불퉁한 표면은 하늘이 완벽하다는 생각에 어긋낫고

메디치안 별들의 궤도는

하늘이 지구 주위를 돈다는 지구중심적 개념을 위반했습니다

 

당시 교황청의 주류들은 성서를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문자주의를 따랐는데

성서에는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구약성서 여호수아 10장 13절>

태양이 머물고 달이 멈추기를 백성이 그 대적에게

원수를 갚기까지 하였느니라

야살의 책에 태양이 중천에 머물러서

거의 종일토록 속히 내려가지 아니하였다고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갈릴레오의 책 시데리우스 눈치우스는

성서를 문자그대로 해석할 시 성서와 상당히 배치되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었고

갈릴레오는 코페르니쿠스의 열렬한 지지자였지만

독실한 기독교도이자 명석한 과학자로 이름높아 교황청 사람들과 친분이 많았던

갈릴레오는 교황청과 대립하고 싶지는 않았고

 

갈릴레오는 교황청 사람들에게 성서의 천동설을 암시하는 내용을

문자 그대로 해석할 필요 없다며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이 꼭 성서와 배치되는 것은 아니라 주장했습니다

 

교황청도 두 파로 나뉘어져

한 파는 갈릴레오의 주장에 동조했지만

한 파는 갈릴레오를 가톨릭 교리에 어긋나는 이단으로 규정해야한다 했고

1615년 갈릴레오는 검사성성에 고발되자 자신과 코페르니쿠스 이론을 변호하려

로마를 방문했지만 속수무책이었고

 

결국

1616년 가톨릭 교회는 태양 중심의 우주에 대한 최초의 현대과학적 주장인

니콜라스 코페르니쿠스의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 를 금서목록에 올렸고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

 

교황 바오로 5세는 갈릴레오를 로마로 불러들였고

갈릴레오에게 더이상 공개적으로 코페르니쿠스를 지지할 수 없으며

천동설에 맞서 지동설을 유일한 진리로 지지하지 말라 경고했습니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

이 근대천문학의 아버지는 그렇게 중세종교인들의 엄포를 받았지만

갈릴레오에게는 다시 기회가 온듯 하였습니다

 

1623년 고향 피렌체에서 지내던 갈릴레오는

그와 친분이 두터운 마페오 바르베리니 추기경이 교황으로 선출되어

우르바노 8세로 즉위하였고

1624년 로마를 방문해 교황의 환대를 받은 갈릴레오는

자신의 이론을 추론 수준에서 발표해도 무방하다 판단했고

 

1632년 갈릴레오는 태양중심주의 논쟁의 양쪽에 대한 주장을 제시한

 

'두 가지 주요 세계관에 관한 대화'

 

를 출판했고

출판허가를 받기 위해 로마를 방문했는데

1632년 우여곡절 끝에 피렌체에서 발간됬지만

곧 반대 세력의 격렬한 항의가 이어졌고

자신의 지지자인줄 알았던 우르바노 8세도

이 책의 발간을 자신에 대한 배신으로 간주해

우르바노 8세는 결국 이 책의 배포를 금지하고

지동설을 지지하지 않겠다는 교회와의 약속을 어긴 갈릴레오를

종교재판소에 회부합니다

 

1633년 갈릴레오는 로마 종교재판에 소환되었습니다

처음에 갈릴레오는 자신이 태양중심주의를 옹호했다는 것을 부인했지만

나중엔 의도하지 않은 것일 뿐이라 말했고

 

 

종교재판받는 갈릴레오

 

갈릴레오는 '이단의 격렬한 의심' 으로 궐석재판으로 유죄판결을 받았고

투옥될 예정이었지만 건강이 나쁘고 당시 거의 70세의 고령임을 감안해

가택연금으로 감형되었습니다

 

(화형이나 물고문은 아니고 똑똑하고 메디치가랑 교황 친구라 많이 봐준거 ;;)

 

태양이 우주의 중심이라 생각한 갈릴레오는

지구가 우주의  정지된 중심이라는 것을 인정하라는 강요를 한

교황청의 종교재판을 받는 동안

 

'Eppur si muove ! 에푸르 시 무오브'

 

(And yet it moves !  그럼에도 그것은 움직여 ! ,

그래도 지구는 돈다)

 

라며 중얼거렸는데

앞에서는 하는 수 없이 권력과 타협하는 듯 하지만

끝내 진리를 추구하는 학자의 모습을 보인 명장면으로서

세계사를 바꾼 명대사가 되었고

의외로 갈렐리오는 과학의 자유를 위해 교황청과 격렬한 투쟁을 한 과학자는 아니었고

종교와 대립을 피하려 애썼는데

갈릴레오가 유죄판결 받은게 오히려 용기있는 과학자여서라기보다

신학의 대한 교만때문에 좀 교황청에 미운털이 박혔다는 이야기도 있고 (괘씸죄)

 

하여튼 갈릴레오는 마지막 9년을 편안한 가택 연금상태에서 살았고

연금상태의 그는 초기 운동실험에 대한 글을 썼고

가택연금 상태에 있던 70세에

 

'새로운 두 과학에 관한 수학적 증명'

 

에서 갈릴레오는 살비아티의 목소리를 빌어

 

'무거운 물체가 가벼운 물체보다

더 빨리 떨어진다'

 

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을 자신있게 반박합니다

 

(옛날 서양에서는 종교재판 , 이단재판이 오져서

과학자들이 요즘처럼 대놓고 논문으로 사실을 쓰지 않고

고소각 피하려고 책에 애둘러 말하거나 빌어말하거나 하며

모호한 방식으로 글을 썼음)

 

<새로운 두 과학에 관한 수학적 증명 , 스티븐 호킹 거인들의 어깨위에 서서>

아리스토텔레스는

'100큐빗(1큐빗은 팔꿈치에서 가운뎃손가락 끝까지의 길이, 약 50cm)의

높이에서 떨어뜨린 100파운드의 쇠공은

1파운드짜리 쇠공보다 100배나 빨리 떨어진다'고 했지.

그렇지만 나는 둘 다 똑같이 땅에 닿는다고 말하겠네.

 

그런데 자네도 알다시피 실제 실험을 해보면

큰 공이 작은 공에 비해 손가락 두 개 정도 길이만큼 더 빨리 떨어지네.

즉 큰 공이 지면에 도달했을 때 ,

손가락 두 개 너비만큼 아직 지면에 못 미쳐 있다는 뜻이지.

자네(심플리치오)가 손가락 두 개의 차이를 가지고

아리스토텔레스의 99큐빗의 오류를 숨기려 들지는 않겠지.

다시 말해서 내 작은 오차를 언급하면서

그의 큰 실수를 침묵으로 덮어주지는 않겠지.

 

아리스토텔레스는 무게가 다른 물체들이 ,

같은 매질 속에서(그것들의 움직임이 중력에만 의존하는 한에서) 움직일

속도는 무게에 비례한다고 했네.

자네가 일반적인 명제를 원한다면

같은 속도의 비율이 모든 무거운 물체들에서 유지되며 ,

이를테면 20파운드 돌이 2파운드짜리보다

10배나 빨리 움직인다는 것을 입증해야 하네.

그러나 나는 그것이 거짓이고 ,

만약 그것들을 50이나 100 큐빗 높이에서 떨어뜨린다면

같은 순간에 지면에 도달할 것이라고 주장하네

 

심장 두근거림과 열로 고통받던 갈릴레오는 1642년 1월 8일

77세의 나이로 이탈리아 피렌체 근처 아르케트에서 사망했습니다

 

갈릴레오는 말년의 종교재판때문에

과학의 순교자 이미지가 생겨났지만

실제론 위에서 말했듯이 교황청에도 인맥이 많았던

유능한 과학자이고 안철수마냥 간잽이질 하며

온건하게 중도인것 처럼 과학과 종교 양쪽에서 오락가락하는 척 하며 

과학적 사실을 주장하려 애쓴 과학자였고

당시 중세교황청도 당대 유능한 과학자였던 갈릴레오의 이런 성향을 잘 알고 있어서

이로인해 갈릴레오를 크게 처벌하진 않고

나대지마 노친네 새꺄 하며

집에서 속박플레이 시키는 정도로 끝낸 것이었고

 

(망원경도 만들어주는 쓸모있는 도라에몽이자 교황 친구라는 인맥때매

집에 있기나 기도문 외우기 숙제내주는 솜방망이 형벌정도로 끝냄)

 

그럼에도 이런 비화는 널리 유명해져서

훗날 볼테르 같은 계몽 사상가들에게

갈릴레오는 과학적 진리를 지키기 위해

악의 세력인 중세교황청에 맞선 성스러운 과학의 순교자로 묘사되었고

실제로 대중적으로 느껴지는 교회에 맞서는 갈릴레오같은 이미지의

진짜 과학의 순교자는 케플러라는 말도 있고

최근에 들어서야 갈릴레오의 실제 재판 내용이 종교와 과학의 대립 외에도

권력적 음모와 철학적 사항의 문제였다는 이야기도 나오고

갈릴레오는 재판때 순응하며 조용히 짜져있었고

실제론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한 적도 없다는 말도 있습니다

 

(갈릴레오도 사람인지라 일단 살아야 되니 이해는 됨..)

 

갈릴레오 이탈리아 2000리라 지폐

 

<라봉봉>어린시절 본 위인전에 과학자는 딱 세 명에

에디슨까지 포함하면 딱 네 명이 있었고

하여튼 그 세 명이 갈릴레오 , 뉴턴 , 아인슈타인이었고

어린이 위인전에 갈릴레오는 50여 쪽 정도의 그림 위인전에 담기에

너무 업적이 커서 적당히 피사의 사탑에서 떨어트리고

재판받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 키야

하며 감동주고 끝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던것 같고

 

저역시 막상 위인전 이야기에 너무 유명하고 당연한 위인이라

갈릴레오 이야기를 너무 늦게 쓴듯하고

이번 물리 화학 생물 위인을 연속으로 쓰며

물화생지니깐 의무감에 지구과학 대장형인

갈릴레오 이야기를 쓴 것도 있지만

쓰고보니 당연한 위인 치고는 너무 대단쓰한 업적이 많다는 생각이고

괜히 뉴턴의 롤모델이 아니었습니다

 

뉴턴 명언중 가장 유명한 말이

 

'내가 더 멀리 보았다면 , 그것은 거인의 어깨위에 올라타 있었기 때문이다'

 

인데 뉴턴의 거인이 바로 갈릴레오였고

즉 현대 과학자들은 아인슈타인 ,

아인슈타인은 뉴턴이나 패러데이 위에 올라탔고

뉴턴은 갈릴레오 위에 올라탔고

갈릴레오는 아리스토텔레스 위에 올라타며

각각 거인위에 올라탔고 또한 누군가의 거인이 되어준 인물들입니다

 

굉장히 현대 세계를 만든 역사적 인물이고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기초적 발명품 , 도구 , 법칙들이

다 갈릴레오 , 뉴턴 , 아인슈타인과 연관이 있으며

그만큼 수학과 물리학이 굉장히 중요한 기초과학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천문학 , 지구과학 특유의 향언하기 어려운 지리는 낭만이 있는데

제가 의외로 해리포터는 별로 안봐서 나이먹고 영화만 다봤고

어렸을때 나니아덕후였어서 판타지 소설 나니아연대기를 책 , 영화 다보고

영어원서도 읽고 책으로 권당 20번씩은 읽은 것 같은데

막 수많은 별들의 탄생과 죽음 ,

캐스피언 왕자가 코넬리우스 박사랑

탑에 올라서 별보는 장면이나

은퇴한 별 라만두 등등

별에 대한 이야기가 유독 많고

딱 갈릴레오가 별보는 그림이나 메디치가문 환심사려 편지쓴거 읽었을때

그 특유의 서양식 문체와 별에 대한 상상력이

딱 나니아 스타일의 그것과 유사했고

역시 괜히 서양 판타지 소설들의 고풍스럽고 아름다운 문체나

여러 도구들이 다 역사에 실존했던 것이고

역사가 판타지보다 항상 더해왔음을 계속해서 느끼는 중입니다

 

뭔가 갈릴레오는 어린이 위인전으로 자주 나오는

너무 친숙한 인물이라 피사의 사탑 재판 이런 이미지만 기억되는데

업적을 찬찬히 읽고 써보니 뭔가 소름이 쫙끼치고 눈이 정화되는 느낌이고

우리는 순신이 형님이랑 왜구녀석들과 한창 싸우며 눈물흘리던 시기

1600년대 사람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게 참 너무 대단하다는 생각이고

서양이 동양을 이 시기 기점으로 과학기술의 폭발적 발전으로 점차 역전하기 시작하는데

결코 우연이 아니었으며

과학 , 기술의 폭발적인 발전 중심에

바로 과학의 아버지 격인 갈릴레오가 있었던 것이고

참 수많은 세계역사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끼쳤으며

참 인류가 결국 모든 최첨단 역량 총동원하고 수천억을 들여 달에가도

300년전 할아버지가 했던 생각들

그대로 하는 거 밖에 할 수 없을만큼

참 대단한 사람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의학은 제가 의대 집중되는 현실때문에

많이 세속적으로 비판한 듯 글을 썼지만

실제론 당대 갈릴레오도 의대생 시절 갈레노스 공부를 해야할 정도로

의학도 위인이 엄청나게 많고 의학사랑 수학사는 인물이랑 썰이 굉장해서

아예 따로 써야할 정도로 방대한 분야기도 하고

어린이 개인이야기로 커버가 안될정도로 과학자 , 과학사 이야기가 너무 많아서

요즘 아예 어린이 과학역사를 따로 만들어야 할지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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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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