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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투안 라부아지에>

[근대 화학의 아버지]

[잠깐 보는 화학의 역사]

[부잣집 첫째아들 라부아지에]

[프랑스 과학아카데미]

[수세조합]

[마리 앤 라부아지에]

[다이아몬드를 태우다]

[질량보존의 법칙]

[화학혁명]

[화약왕 라부아지에]

[라부아지에와 듀퐁]

[근대 화학의 어머니]

[플로지스톤설 폐기]

[산소 명명]

[민중의 분노]

[프랑스 혁명]

[단두대의 이슬]

[마리 앤의 외로운 투쟁]

<라봉봉>

 

앙투안 라부아지에

 

[근대 화학의 아버지]

앙투안 라부아지에는

'질량보존의 법칙' 을 발견한 프랑스의 화학자로

근대화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인물입니다

 

근대 화학의 아버지 라부아지에

 

우리가 한국사에서

고대 삼국시대-중세 고려시대-근대 조선시대-현대 대한민국으로 나누듯이

화학사도 이와 같은 시대구분이 있는데

라부아지에는 중세화학시대를 끝내고

근대화학시대를 최초로 연 화학자로서

오늘날까지도 근현대 과학의 아버지로 알려져 있는 인물입니다

 

[잠깐 보는 화학의 역사]

예전 고대화학은 고대 그리스에서 시작해

그리스 자연과학 철학의 일부로 여겨졌고

고대 그리스인 중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물질은

 

물 , 불 , 바람(공기) , 흙

 

이 네가지로 구성된다 생각하였고

네가지 물질이 서로 변화하고 이동한다 생각했고

이 4원소설이 고대화학의 핵심이었는데

 

옛날 사람들이 믿었던 4원소설

 

고대인들은 적당히 고대식 야금기술로 재련 , 무기생산 등을 하다가

헬레니즘시대가 되며 이집트의 실용적 기술과 동방의 신비주의 사상을 받아들여

점차 4원소설을 계승해 황금역시 다른 금속 등으로 만들 수 있다 생각했고

이로인해 중세화학은 연금술의 시대가 열리게 됩니다

 

연금술사

 

중세 연금술사들은 최우선 두가지 과제로서

황금과 만병통치약을 만들기위해 노력했고

중세 연금술사들은 알케미스트 (alchemist) 라고 불렸는데

오늘날 화학 (chemistry) 의 유래가 되었고

사실 이 여러 물질들을 다루는 화학은

여러 유럽의 왕과 귀족들이

막대한 황금과 영원히 살고싶어하는 욕망에서 시작된

연금술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금나와라 뚝딱..

 

중세 연금술사들의 황금과 만병통치약을 제조하려는 노력은

완전히 실패했지만

그것들을 만들려 시도한 몇백년간의 과정(뻘짓) 에서 수많은 물질과

새로운 화합물들이 발견되었고

광석에서 금속을 정련하는 기술이 발전되고

저울 , 플라스크 , 비커 ,도가니 , 증류기 , 가열기구 등

화학기구들을 만들었습니다

 

오늘날 수많은 실험도구가 연금술사들이 만들었단 말씀 !

 

그럼에도 라부아지에 이전의 화학은 제대로 정립되지 않은

중세화학의 시기로서

사람들에게 연금술이나 괴상한 실험가들로 여겨졌고

중세 연금술사들은 끝까지 일반 금속을

황금으로 바꿔준다는 전설의 물질 '현자의 돌' 을 찾아나서려 노력했고

 

해리포터에 영감을 준 '현자의 돌' ,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

 

당연 실패했지만

영화 해리포터에 나오는 수많은 마법 실험약 제조나 마법사의 돌 , 괴상한 주문들이

다 이런것때문에 만들어 진 것고

중세화학은

과학(관찰 , 실험 , 증명) 과

마술(신비주의 , 주술)이 완전히 구분되지 않았던 시기였습니다

 

근대 과학자시대를 연 라부아지에나 뉴턴의 경우도

활동할 당시 함께한 과학자들은 여전히 연금술 등을 신봉하던 상황이었고

근대 최고의 학자인 뉴턴조차도 연금술을 신봉한 마지막 연금술사로 불리는 것을 보면

미신같은 비과학을 배격하고 근대과학의 시대를 연

라부아지에는 근대 과학사에서 굉장히 용기있고 의미있는 인물이며

화학을 체계적 학문으로 정립한

라부아지에를 시작으로 근대적 직업화학자들이 계속해서 나타나게 됩니다

 

[부잣집 첫째아들 라부아지에]

라부아지에는 1743년 8월 26일 프랑스 파리의 매우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고

아버지는 당시 유명한 변호사였고

라부아지에는 어머니의 막대한 상속로 부자가 된 인물이었고

상류층 자제로 태어나 라부아지에는 어린시절부터 굉장한 교육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금수저 물고 태어났당께~

 

1754년 ,

라부아지에는 마자랭 대학에 입학해 식물학 , 화학 , 수학과 천문학을 배웠고

아버지의 영향 때문에 법과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했지만

변호사로 활동하지 않고 오로지 그의 열정은 과학연구에 있었습니다

 그는 1761년 대학을 떠나 3년후 화학에 관한 첫 논문을 발간했습니다

 

1767년

라부아지에는 알자스-로렌 지방의 지질조사일에 채용되었고

다음해 그는 프랑스 과학아카데미에 선출되었습니다

 

[프랑스 과학아카데미]

1768년

라부아지에는 지질학에 관한 과학적 업적에 의해

프랑스 과학아카데미(프랑스 과학 학술원) 에

준회원으로 선출됬는데 그의 나이 고작 25세였고

당시 프랑스 과학아카데미는

당시 가장 유명한 과학 엘리트 집단이었습니다

 

영국왕립학회와 쌍벽을 이룬 프랑스과학아카데미(프랑스 과학한림원) , 루이14세때 만들어짐

 

[수세조합]

또 라부아지에는 과학자로서는 이례적으로 변호사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공직 , 정치쪽 일을 병행하며 과학연구에 대한 자금을 끌어오려 했고

평소 정치 사회적으로도 진보주의자여서 정치에도 관심이 있어

프랑스 사회에 일어나는 사건들을 과학적 방식으로 해결하려 노력했습니다

 

같은해 1868년 그는 수세조합(백성들 세금거두는 조합) 의 세금을 걷는 특권을 사서

수세조합 , 징세청부업자가 됬지만 과학연구는 계속했습니다

 

당시 프랑스는 프랑스혁명이 일어나기 직전의 시대로서

성경에도 단골소재며 프랑스혁명때또한 마찬가지로

세계민중들이 가장 싫어하는 직업이 바로 세리 , 세금징수자들이었고

프랑스 루이 16세 정부는 자체적으로 세금을 징수하는 조직체가 없어서

프랑스인들 중 가장 부자인 사람들로 이루어진 법인체

즉 '수세조합' 에서 세금을 징수할 수 있는 독점권을 팔았고

독점권을 산 부자들은 엄청난 액수의 돈을 지불하고

관세 , 소비세 , 간접세에 상당한 수수료를 부쳐 대신 세금을 징수했고

 

악덕세리의 유래가 된 '세리'

 

수세조합원들은 17~18세기 프랑스의 엄청난 부자들이었고

파리패션의 선봉자이자 호화예술의 수집 , 소비자이자

예술가들의 후원자로 유명했고

또한 백성들의 세금을 바로 앞에서 징수하는 계층이어서

그로인해 민중들에게 수많은 지탄을 받아야도 했고

 

징세업자들은 국왕에게 얼마정도만 내면

그 외는 마음대로 세금을 정할 수 있어

이들이 거두는 세금은 국왕직할지의 최소 2배가 넘어

막대한 지탄을 받았고

수세조합은 막대한 돈이 오가는 만큼 부정부패의 온상지기도 했습니다

 

상류층 출신의 라부아지에도 이런 수세조합의 일원이 됬고

라부아지에는 과학자 이외에도

프랑스 상류층 + 고위공직자로서 행정가로 활동하며

세금에 대해 해상사항에 없던 귀족들에게도 세금을 거두어야 한다 주장하기도 했고

농경 , 산업발전 , 복지사업에도 관심이 많아서 다방면에서 서민과 약자를 위해

활동한 깨어있는 금수저였지만

 

세금징수인 , 세리는

당시 프랑스에서

자신들의 지위를 이용해 봉건제도아래 부당하게 서민들을 착취한다고 해서

대중의 미움을 받은 직업이었는데

평이 매우 나쁜 28명의 세금징수인들 중에서도

라부아지에는 당대에 엄청난 과학적 업적으로 가장 유명한 인물었고

 

라부아지에는 세금징수인으로 돈을 벌어

상당한 돈을 과학실험장비를 꾸미는대 써서

그 장비 덕분에 근현대화학의 기초를 만들 수 있었지만

하필 세리라는 경력이 너무 어그로를 끌어서 프랑스 민중들이 지탄을 받게 되었고

라부아지에는 상류층의 일원으로서 귀족들과 서민백성들을 중재하려 애썼지만

봉건적 차별과 굶주림에 이성을 잃은 프랑스 군중들은

이 세리때 경력을 문제삼아 프랑스혁명때 라부아지에를 사형시키게 됩니다

 

[마리 앤 라부아지에]

1771년

28세의 라부아지에는 13세의 마리 앤 폴즈와 결혼했고

당시 마리 앤 역시 아버지가 수세조합의 일원으로서 금수저녀였는데

 

마리 앤 라부아지에

 

1771년 13세의 마리 앤은

50살의 다메르발 백작의 청혼을 받았고

백작은 마리 앤의 집안을 협박하며 결혼시켜달라 요구했고

마리 앤이 37살 연상의 괴물같은 음침한 백작의 청혼을 거부하자

아버지 자크 폴즈는 이런 난처한 상황에서 딸이 벗어나려면

재빨리 딸에게 적당한 혼처를 마련해주는 것이라 생각했고

 

자크 폴즈는 딸의 혼사를 위해

화학자 , 지질학자로 프랑스 학술원 회원인 엘리트이자

부자+귀족이며 같은 수세조합원이었단 동료부하 라부아지에에게

마리 앤과의 결혼 의사를 물어봤고

28살의 라부아지에는 어린 소녀를 지키기 위해

청혼을 받아들여서 1771년 12월 결혼하여

둘은 부부가 되었고

마리 앤은 마리 앤 폴즈 라부아지에가 되었습니다

 

'라부아지에와 그의 부인' , 자크 루이 다비드 1788

 

사실 라부아지에와 마리 앤과의 나이차이도 꽤 났고

이 역시 정략적 결혼인 셈이지만

그들은 금술이 좋아 과학계의 환상의 커플로 불리고 있고

마리 앤도 남편 못지 않은 대단한 여인이었고

역시 상류층 자녀 출신이었던 마리 앤은 영어를 배워

남편의 과학학술을 보조했고

근대 화학의 어머니이자

라부아지에 실험실 연구동료로 유명한 인물입니다

 

[다이아몬드를 태우다]

1772년 라부아지에는

지인들과 값비싼 다이아몬드를 공동출자로 사서 유리병 속에 넣고

거대한 확대경으로 햇빛을 다이아몬드에 비쳤고

 

가장 값비싼 보석의 왕 다이아몬드

 

다이아몬드는 타서 완전히 사라졌으나

병의 전체 무게는 전과 동일함을 발견합니다

 

다이아몬드를 태우는 라부아지에

 

또한 연소결과 기체가 생성된 것을 깨닫고

라부아지에는 질량보존의 법칙이 적용한다는 사실을 인지하였고

즉 병 내부의 다이아몬드가 원래 그대로던 타서 재가되던

병의 무게(질량)는 그대로 보존됨을 발견하였고

 

또한 다이아몬드나 숯이나 태우면 똑같은 기체 , 이산화탄소가 생성됨을 확인하고

둘은 같은 원소의 동소체이며 다이아몬드와 숯의 원소를 '탄소' 라고 명명합니다

다이아몬드를 태운 엄청난 돈이 쓰인 연구였지만

그만큼 세금징수원으로 부를 축적한 라부아지에의 부는 넉넉한 상황이었고 (;;)

 

 

[질량보존의 법칙]

라부아지에는

1772년 11월 1일

프랑스 과학아카데미에 '연소' 논문을 보고해

화학이 연금술과는 차별화된 '과학' 임을 알렸고

이듬해 1773년 2월 완성된 논문을 발표하며 라부아지에는

 

<라부아지에>이번 실험은 물리학과 화학에서 혁명을 가져올 것

 

이라 밝혔습니다

 

라부아지에는 밀폐된 유리 용기 속에서 금속을 태운 뒤

정량을 측정함으로서 연소라는 현상이

공기중 산소와 결합하는 과정이라는 연소설을 확립했고

 

라부아지에 레토르트 플라스크 실험 , 밀봉된 플라스크는 가열 전후 무게변화가 없었고 외부에서 불입자가 들어와 무게가 증가한다는 것이 반박됨

 

실험을 통해 산소의 존재를 발견하고 화학반응 전후에

질량이 보존된다는 질량보존법칙을 밝혀냈습니다

1774년 라부아지에에 의해 정립된 질량보존의 법칙은 근대화학과

오늘날까지의 과학의 근간 기초가 되었습니다

 

대한민국 중딩과학담당일진 '질량보존의 법칙' , 공기만 차단해주면 반응전후 무게는 같음

 

킹무위키 질량보존법칙 예시 , 수소 1g + 산소 8g 은 9g 이고 지구에서 우주선을 쏘지않는한 지구의 광물무게는 변하지 않는 등 당연한 이야긴데 라부아지에 당시는 이런 개념이 없었음

 

[화학혁명]

하여튼 라부아지에의 아내 역시 남편의 연구에 관심을 갖고

라부아지에의 와이프이자 실험파트너가 되었고

결혼후 라부아지에는 수세조합에서 계속 일했지만

 

1775년

루이 16세 즉위 후

라부아지에는 왕립기관인 화약행정기관의 4명의 책임자중 한 사람으로 임명되어

라부아지에 부부는 실험실과 집이 부속건물로 딸린

파리의 왕립 병기창(Royal Arsenal) 에 정착했고

1792년까지 함께 그곳에서 살며 부부는 많은 연구를 하게 됩니다

 

 

라부아지에는 이곳에서 화학에 대한 관심이 활짝 피었고

수세조합에서 세리로 번 돈으로 재정적 여유가 엄청났던 라부아지에는

이곳에 엄청난 규모의 최첨단 실험실을 마련했으며

전 유럽에서 젊은 화학도들이

현재 진행중인 화학 혁명에 대하여 배우기 위하여

라부아지에의 실험실을 방문했습니다

 

[화약왕 라부아지에]

라부아지에는 4명의 화약감독관 중 하나로서

화약의 생산과 보급을 책임지게 됬는데

라부아지에는 인도로 기술자를 보내서

초석이 대량 산출되는 이유를 조사하며 동시에

국내 초석 및 화약 생산과정을 개선하는 작업을 했고

 

직공들을 대상으로 관련 화학 , 수학 지식을 가르쳤고

초석이나 화약생산에 아주 조그만한 것이라도

기여를 하는 사람에게

현금으로 보상하는 제도를 마련했으며

낡은 공정은 폐하고 새로운 화약생산 공정을 도입합니다

 

(역시 천재는 천재)

 

화약만드는 근대 프랑스인들

 

이렇게 라부아지에가 개선한 화약은 품질이 매우 좋아서

프랑스제 화약은 양과 질이 매우 좋아져서

프랑스 정부의 재원이 되었고

 

[라부아지에와 듀폰]

이때 라부아지에에게 화약만드는 법을 배운

라부아지에의 조수 엘뢰테르 이레네 뒤퐁은

 

엘뢰테르 이레네 뒤퐁

 

프랑스혁명때 미국으로 이민가서

미국의 품질나쁜 화약 대신에 라부아지에에게 배운 방식으로 화약을 만들어

막대한 부를 축적하게 되었고

오늘날 세계 굴지의 화학회사 듀폰을 만들게 됩니다

 

미국 굴지의 화학회사 '듀폰'

 

듀폰사 연구원 윌리스 흄 캐러더스가 개발한 나일론

 

듀폰형님 테플론(고어택스) 만들어주셔서 감사

 

스타킹 하아하아 압도적 감사~

 

<결론>스타킹 만든 회사를 만든 사람의 대스승 라부아지에 (꼴잘알 빛부아지에 인정합니다 따봉~)

 

[근대 화학의 어머니]

라부아지에 아내 마리 앤 역시 천재남편에 못지않게 많은 노력을 했으며

라부아지에의 동료들에게 화학 , 실험기술에 대한 교육을 정식으로 받고

왕립 병기창에서 살던 기간동안 마리 앤은 독일어 , 영어 , 라틴어를 유창히 배워서

당시 화학계에 유행하던 플로지스톤설에 대한 논문을 불어로 번역해

라부아지에가 읽을 수 있게했으며

라부아지에가 쓴 논문과 단행본들을 라틴어와 영어로 번역해 설명을 덧붙여

세계의 학자들에게 퍼트렸습니다

 

마리 앤은 유명화가 자크 루이 다비드에게 그림과 판화를 배워

남편의 연구를 돕고 그림을 그려 남편의 연구를 보존했고

당대 최고의 화학자 조셉 프리스틀리의 폴로지스톤에 관한 논문들도 번역해서

남편에게 중요한 정보를 제공했으며

이로인해 라부아지에는 플로지스톤 이론이 잘못됬다는 것을 확신하고

100년이나 유럽에 뿌리내리고 있던 플로지스톤설을 폐기시킬 수 있었습니다

 

라부아지에 그림속 여자는 대부분 와이프라 보면 됨

 

[플로지스톤설 폐기]

플로지스톤설은 화학사에서 굉장히 중요한 이야기인데

연금술처럼 폐기된 이론이지만

중세말~근대초기 화학자들에게는 물질이 연소하는 과정을 밝히려다 나온

핵심적이고 혁명적인 이론이었고 

 

예를들면 100g 짜리 나무가 타면 재가 되는데

재의 무게는 100g 보다 안되게 작기때문에

당시 과학자들은 그 이유를 과학적으로 밝히려 노력하다

플로지스톤설을 구상했고

 

플로지스톤설은

이런 나무에는 플로지스톤이라는 입자가 붙어있고

나무가 연소할때 플로지스톤이 빠져나가게 되며

그로인해 나무의 질량이 감소하게 되는 것이고

플로지스톤이 모두 빠져나가게 되면

연소과정이 끝나며 다시 연소하지 않는다고 주장되었습니다

 

근대화학계의 환단고기로 수많은 근대과학자들을 낚았던 '플로지스톤'

 

나름 과학적으로 물질 , 나무의 연소와 연소후 무게가 가벼워지는 이유를

생각한 당대 과학자들의 생각이었고

엄청나게 진보적이고 혁명적인 이론이라 많은 당대 유명 과학자들이 추종했지만

문제는 플로지스톤이라는 물질이 존재한다는 근거가 없었고

 

 

또한 플로지스톤설에는 엄청난 문제점이 있었는데

나무나 종이가 타서 재가 될때는 무게가 감소하지만

금속이 타서 금속재가 될 경우에는 (예를들면 철이 타서 산화철)

무게가 오히려 증가하는 현상이 일어났고

 

 

오늘날은 이런게 산소와 금속이 결합해 산화반응을 일으켜서

산소가 결합해 산소무게만큼 철무게가 증가한다고 알 수 있지만

당대에는 알쏭달쏭 알듯말듯한 일들로 여겨지는 상황이었고

당대 최고의 화학자 영국의 프리스틀리 역시 플로지스톤에 대해 신중한 입장이었고

라부아지에 역시 1770년대까지 플로지스톤 설을 굳게 믿고 있었지만

 

1783년

라부아지에는 연소에 필요한 것은

플로지스톤이 아니라 산소라는 것을 실험을 통해 증명해내면서

플로지스톤설은 폐기되고 라부아지에의 산소설로 대체되었고

플로지스톤은 존재하지 않음이 증명되었습니다

 

<라부아지에>우리는 사실에만 의존해야 한다.

사실이란 자연이 것이라서 속이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떠한 경우에도 실험결과에 따라 판단해야 한다.

억지로 진리를 찾으려고 하지 말고 ,

실험과 관찰이 주는 자연적인 길을 따라야 한다.

 

[산소 명명]

1789년

라부아지에는 '화학원론' 을 펴내며

이 학문을 변하는 학문 , Chimie 라고 정의하며

화학이라는 학문이 본격적으로 탄생하게 됩니다

 

근대최초의 화학교과서 화학원론 표지

 

라부아지에는 황산 , 아황산염, 황산염을 언급하며 황에 대한 예를 들었고

그는 이 화학기초논문을 출판하는데

오늘날 현대의 최초의 화학 교과서로 여겨지고 있으며

현대 명명체계의 기초가 된 화학명명법을 작성합니다

 

책에서 그는 원소에 대해 명확한 정의를 내렸고

이 책에는 아연과 수은도 있고 빛도 포함되 있고

몇가지 실수도 있지만 그는 모든 화학을 통일된 이론으로 통합하기 위한

의도적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라부아지에 이전에 '연금술' 은 물질들을 마구잡이로 섞어보고

안돼도 그만이였다 여겼지만

라부아지에는 연금술을 체계적인 '과학' 실험을 통해

철저하게 정량을 재서 섞어보고 태워보고 실험하고

왜 그런 일이 일어나는지 해석하며 이론을 배우는

'화학' 이라는 학문을 완성하였고

프랑스혁명 전야에 이루어진 라부아지에의 이론은

과학과 화학의 변화에 너무나 큰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 기간을 '화학혁명' 이라 부르게 되었고

이 시기를 시작으로 비과학과 증명없는 이론이 배격되고

정량적 , 실험적 근거에 기반한 근대 , 현대화학이 시작되게 됩니다

 

라부아지에는 특히 산소의 중요성을 최초로 발견해낸 화학자였는데

산소는 이전 쉴레가 최초로 분리해냈고

프리스틀리가 여러 산소의 성질을 연구하고 최초로 학계에 발표했으며

라부아지에가 산소라 이름붙이고 중요성을 발견했는데

이로인해 세 인물 다 산소의 발견자라 이야기 되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산소로 인해 숨을 쉬고 생명이 유지되는 것을

'상식' 으로 여기지만 당시 라부아지에는 이 '상식' 을 최초로 생각해낸 인물이었고

 

라부아지에는 실험실에서 사람이 호흡하는 동안 산소를 소비하는 것을 측정했으며

마리 앤은 옆에서 앉아서 데이터를 기록했습니다

 

<라부아지에>그것(산소) 바로 동물의 실체 자체다.

동물에게 연료를 공급하는 것은 혈액이다.

호흡으로 잃어버린 산소를 보충해 주지 않는다면

램프가 기름이 다하면 꺼지는 것처럼 동물도 죽고 것이다.

 

<라부아지에>만약 계속해서 대체하는 3입방 미터의 공기가 마련되지 못한다면

사람은 24시간 이상 목숨을 지탱하기 힘들다.

 

산소호흡실험하는 라부아지에와 기록하는 마리 앤

 

산소같은 너(SHINee Love like Oxygen) 만들어주셔서 감사 (이수만도 라부아지에에게 감사할듯)

 

라부아지에의 위대한 여러 업적들 뒤에는

환상의 커플이었던 와이프 마리 앤이 있었던 덕분이었고

여성들의 사회활동이 제한되던 시대

마리 앤은 남편의 실험준비는 물론 실험내용과 과정을 그림으로 남기며

남편을 도운 또 한명의 여성화학자였습니다

 

[민중의 분노]

천재과학자이자 화학의 아버지로

당대 과학계의 스타가 된 라부아지에였지만

라부아지에는 변호사인 부친의 의도로

법학을 공부하고 징세업자로 활동해 대중의 미움을 받았는데

라부아지에는 이것으로 귀족 못지 않은 고소득을 올렸고

연수입 최대 15만 리브로도 기록했고

다이아몬드를 사서 태우거나 값비싼 실험장비를 사는게 가능했던 이유였고

 

라부아지에는 이렇게 모은 재산을 아낌없이 과학연구에 써서

당대 징세업자들에 비해서는 의외로 재산을 많이 모으지 못했고

검소한 생활을 했지만

그럼에도 당시 서민기준에는 부자였고

값비싼 기구로 실험을 하는 일 자체가 서민들에겐 사치로 비춰졌습니다

 

프랑스 혁명 전 왕과 귀족에 수탈당하는 민중 풍자화

 

또한 라부아지에는 특히

파리를 드나드는 통행세를 징수하던 인물이었기 때문에

특히 많은 미움을 샀는데

그는 통행세 징세활동에 자신이 만든

 

'질량보존의 법칙'

 

을 이용하여

파리 전체를 성벽으로 둘러싸고 통행세를 거두면

확실하게 세금을 거둘 수 있다는 이론을 실천에 옮겼습니다

 

(문돌이 입장에서는 덕의 개념으로

세금도 좀 살살 봐주면서 백성들 형편 생각하면서 거둬야하는데

이공계들이 문돌이 전문영역에 함부로 손대면 안되는 이유)

 

라부아지에의 질량보존법칙을 활용한 과학적인 징세는

파리 전체를 감시하는 것보다 경계만 감시하는게 훨씬 간편하기에

실용적이고 오늘날 외화의 송출금과 과세에도

이와 같은 원리가 정해지지만

이로서 통행세 탈세 , 개구멍이 완전 차단되었고

이로인해 프랑스 대중들의 라부아지에를 향한 분노가 높아지게 됩니다

프랑스 혁명이 일어날때 이런 것들로 인해

가장 먼저 단두대에 오른 사람들이 징세업자들이었습니다

 

당시 프랑스 과학계가 라부아지에를 선두로

화학혁명의 광염을 뿜어내며 최전성기를 달리고 있었는데

반면 당시 프랑스 국가 자체는 나라의 상황이 매우 좋지 않은 상황이었고

프랑스 왕실과 귀족 , 부자들은 극심한 낭비와 사치를 일삼아

민중등은 엄청난 세금과 폭정에 시달리고 있었고

넓은 토지와 면세특권을 가진 귀족들도 민중들의 고통을 모른 채하며

모든 부담은 시민들이 짊어지는 상황이었고

 

영화 레미제라블 속 신음하는 프랑스 민중들

 

계속되는 부당한 대우에 고통받은 프랑스 민중들은 마침내

왕실과 귀족들에게 죽창을 들고 일어나서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며 프랑스혁명이 시작됬고

 

[프랑스 혁명]

1789년 프랑스혁명이 일어나자

 

프랑스 혁명

 

민중들에게 큰 분노를 사고 있었던 수세조합은

1791년 폐지되었고

1792년 라부아지에는 화약 행정기관 책임자 자리를 내놓고

왕립 병기창에 딸린 집과 실험실을 떠나게 됩니다

 

당시 라부아지에는 진보적이고 깨어있는 상류층이어서

일반 백성들의 복지정책에도 많은 관심이 있었고

프랑스 조세법 , 통화시스템 ,

공장노동자를 위한 제조업 방식 개선 , 파리의 가로등과 물공급 개선 ,

도량형을 미터법으로 전환하는 것 등 많은 개혁을 한 인물이었지만

그럼에도 당시 혁명의 열기로

부자 , 귀족 , 수세조합원들이 죽창맞고 갈려나가고 있던 상황에서

부자 , 귀족 , 수세조합 일원 모든것에 해당했던 라부아지에는

민중들의 분노를 사던 상황이었고

 

당시 프랑스 민중들과 라부아지에가 서로를 바라본 모습

 

1793년 8월 8일

국민공회에서는 과학학술원을 비롯한 모든 학구적 학술원을 폐지했고

프랑스혁명 공포정치가 로비스피에르 , 당통 , 마라 삼인방중

마라는

라부아지에가 과학 학술원에서 활동할때

과학학술원 회원이 되고싶어서

심혈을 기울여 쓴 논문을 들고 입회를 신청했을떄

라부아지에가 논문을 읽고 허접하다며 입회를 거부한 것에 앙심이 있었는데

혁명으로 자기 시대가 오자 (ㅋㅋ;;)

 

수세조합의 일원인 라부아지에가 민중을 착취한 것으로

맹렬히 비난했고

이전부터 과학사에 의미는 있었지만

보석의 왕 다이아몬드를 태우는 등 값비싼 실험으로

이미지가 썩 좋지 않았던 라부아지에였기에

 

1793년 11월 24일

모든 수세조합원들에 대한 체포명령이 내려져

1793년 12월 24일 군인들은 라부아지에의 실험실로가서

라부아지에를 체포합니다

 

라부아지에의 체포 그림

 

마리 앤은 남편을 석방시키려 수많은 유명인과 과학자들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모두가 혁명의 기세가 두려웠기에 아무도 라부아지에를 돕지 않았고

반면 공포정치가 마라는 라부아지에보다 일년 먼저 목욕중에 암살을 당했습니다

 

[단두대의 이슬]

1794년 5월

혁명재판소 법정에 선 51세의 라부아지에는

부패의 온상으로 몰려 사형을 선고받았습니다

 

징세청부업자들은 혁명이 일어나자

가장 먼저 단두대에 올랐는데 

혁명정부는 세금을 거두는거 자체는 범죄가 아니기에

그동안 정부에 필요한 공무를 대행한 일로서

필요한 세금만 징수한 것은 죄를 묻지 않겠다 했지만

라부아지에를 포함한 당시 징세업자들 중에서 털어서 먼지 안나오는 사람은

없었고

 

혁명재판소에서는 라부아지에의 연수입 15만 리브르 중

10만 리브르가 부당이익이라는 판결을 내렸고

자코뱅당은 모든 위법행위에 대해 사형을 집행한다는 방침을 천명했고

라부아지에는 1794년 5월 다른 징세업자들과 함께 처형당합니다

 

라부아지에는 사형을 당하기 전까지 재판장에게

 

<라부아지에>중요한 실험을 할 수 있도록 2주일만 더 시간을 달라

 

고 요청했지만

 

재판받는 라부아지에

 

재판장은

 

<재판장>프랑스 공화국은 과학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혁명은 신속한 재판을 원하고 있다 !

 

라하며 그를 단두대에 세웠습니다

 

 

과학적 생각이 강했던 라부아지에는 죽으면서도

주위 사람들에게

 

<라부아지에>단두대에서 처형돼 내 목이 떨어진 뒤에

의식이 있는지 살펴봐주게

 

라고 부탁했고

 

<라부아지에>만약 의식이 있다면 반응을 하겠네.

말은 할 수 없을 테니 눈으로 신호를 하지 ,

목이 잘린 뒤에 최대한 계속 눈을 깜빡이겠네

 

라고 했고

라부아지에는 처형 당일 목이 잘린 뒤

15초 가량 눈을 깜빡였다고 합니다

 

죽기직전 라부아지에는 조용히

 

<라부아지에>유언은 아내에게 편지로 남겼다

 

하며 차분히 죽었다 합니다 (ㅠㅠ)

라부아지에는 그렇게 단두대의 이슬로

1794년 5월 8일 프랑스 제1공화국 파리 콩코르드 광장에서

50세의 나이로 죽었고

 

 

수학자 라그랑주는 라부아지에가 사형당한 것을 보고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라그랑주>그의 목을 자르는 데는 1초밖에 걸리지 않았지만

똑같은 머리를 다시 만들려면 100년도 더 걸릴 것이다

 

라부아지에가 사망하자 그로부터 두 달 후

공포정치를 주동하던 공포정치가 로베스피에르가 처형당하며

공포정치는 막을 내렸고

 

[마리 앤의 외로운 투쟁]

라부아지에의 아내 마리 앤은 남편의 사형을 반대하는데 가담하지 않은

남편의 친구 , 동료들과 평생 연을 끊었고

사실 당시 의회에서 총칼이 난무하고 정치인들이 암살당하는 혼란스런 시대였고

혁명의 광풍이 불던 시기 징세업자 라부아지에가 빠져나갈 곳이 없다싶이했고

라부아지에의 죽음을 결사반대하는 사람들 역시 해외에 있거나

외국인들밖에 없던 상황이라 프랑스 내부에 라부아지에에게 도움받은 동료들도

조용히 숨죽여 지내야하던 상황이었고

 

라부아지에가 죽은 뒤 혁명정부는

라부아지에의 모든 재산과 자료를 압수해 다 없애려 했지만

몇 달 뒤 자코뱅 정권이 무너졌고

남편사후 구속수감된 마리 앤도 로베스피에르가 처형되고 무죄판결을 받아

65일 만에 재산몰수형만 내려지고 풀려났고

 

프랑스혁명으로 남편과 아버지까지 잃고

알거지가 된 마리 앤은 옛날 자기집 하인이었던 사람의 집에서 살게 되었고

단두대에서 처형된지 1년 반 후 라부아지에는 혐의를 벗고 프랑스 정부에 복권됬고

프랑스 국민들은 그가 죽자마자

부정부패 세리임에도

프랑스와 시민들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 천재 과학자를 죽였다는 것에

아차 ! 하며 엄청난 후회를 하며

다시 라부아지에에게 동정여론이 형성됬고

 

코믹 메이플 발암짤 , 난 죽었지만

 

마리 앤은 이때부터 라부아지에의 실험도구 , 자료 , 연구업적을 되찾기 위한

투쟁을 시작해 점차 남편의 자료들을 돌려받게 되는데

수년 동안 그녀는 남편의 출판되지 않은 연구논문들을 수집해

화학논문집을 직접출판했습니다

 

마리 앤은 이후 파리에서 상류층 지식인들의 사교장소

 

'과학 살롱'

 

을 열어 과학자들과 교류하였고

이곳을 드나들던 럼퍼드 백작은 그녀에 구혼했는데

마리 앤은 처음부터 럼포드 백작에게 결혼 후에도

마리 앤 폴즈 라부아지에 이름을 유지하겠다고 요구했고

 

(서양은 아내가 남편 이름을 따름)

 

결국 럼퍼드도 이에 동의하여

마리 앤은 재혼 후

옛 남편 이름인 라부아지에 이름을 유지합니다

 

이후에도 매우 독립적이고 의지가 강한

마리 앤과 럼퍼드는 성격이 너무 맞지 않아

결혼생활은 시작하자마자 삐걱대었고

둘은 부부싸움끝에 4년 후 이혼합니다

 

<럼퍼드 백작>마리는 여전히 전 남편을 잊을 수 없었기에

더 이상 같이 살 수 없었다

 

마리 앤은 자신의 남은 27년 인생을

화학을 후원하고 대중화하는데 바치고

남편의 업적을 세상에 알리는데 남은 평생을 바치다

1836년 2월 10일 78세의 나이에 사망합니다

 

라부아지에가 근대 화학의 아버지로

일생을 과학에 바쳤다면

라부아지에의 아내 마리 앤은 이름없는 과학영웅으로서

일생을 과학에 바친 여성과학자이자

남편 못지않은 근대 화학의 어머니였고

 

근대 화학의 아버지와 결혼한 근대 화학의 어머니 마리 앤 라부아지에

 

그녀는 외국어를 배워 남편 라부아지에가 다른 과학자들과 교류할 수 있게했으며

죽기전까지 남편이 남긴 노트와 화학장비를 대부분 회수해

라부아지에의 유품은 현재 코넬대학에 전해지고 있습니다

 

<라부아지에>자연은 거대한 화학 실험실이다

 

<라봉봉>라부아지에는 과학사 특히 화학사에서는

화학계의 뉴턴 , 물리학의 라부아지에 이런 말을 할 수 있을만큼

세계 역사에 한 획을 그은 대단한 위인이긴 위인인데

뉴턴은 조용히 짜져서 혼자 공부만 하다 독신으로 죽어서 동정표가 많은 것과 달리

 

라부아지에는 금수저로 태어나 봉건제 세리로 엄청난 돈을 불렸고

미모의 엄친딸 금수저 와이프까지 얻어서

업적이 위대함에도 그가 가진 막대한 부귀영화가

당시 봉건제에 신음하던 프랑스 민중들에게 어그로를 너무 끌어서

프랑스 민중들의 분노에 어처구니 없이 천재 과학자가 한방에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것이었고

 

이런 잔혹하게 죽은 것때문도 있고

어린시절 고생하고 주경야독해서 자수성가해서 인류에 봉사하고

어린이들에게 꿈을 실어준 어린이 위인전에 쓰기 굉장히 좋은 패턴의 인물도 아니고

 

돈걱정 없이 평생산 금수저인데

공부를 엄청하고 징세업자로 재산 불려서 인류에 과학봉사는 엄청한

복잡한 인물이라

과학사에는 반드시 큰 비중을 차지하지만

어린이 위인전에는 라부아지에 이야기는 없다싶이 합니다

 

그 어떤 부모님도 자기 자식이 라부아지에처럼

민중의 원망을 쌓는 일을 하다 단두대에 목잘려 죽길 바라는 사람은 없고

라부아지에는 대표적이고 전형적인 프랑스혁명 당시

부패한 프랑스 기득권으로서

분노한 민중의 광기에 한방에 가버린 것이고

독가스를 개발한 독일 과학자 하버와 더불어 과학윤리문제에 이야기되는

단골인물이기도 합니다

 

제가 10대 후반부터 20대 초반까지 화학공부에 크게 빠져들었고

화학이 아무래도 저같은 문과출신에게 이해하기가 직관적이게 좋았고

실용적 학문이라 또 화학이 물리학과 더불어 돈이 굉장히 되는 분야라

돈 좋아하는 제가 참 매료된 학문이었고

이 시기 화학사를 여러권 읽었는데

참 라부아지에를 복잡 미묘하게 봤던 기억이 있습니다

 

또한 최근에도 우리는 왜 유럽같은 스타과학자나 듀폰같은 기업이 없나 한탄스러운 마음도 들었고

화학이 참 매력적이고 만화나 영화에서도 아톰이나 포켓몬극장판 등

SF 요소가 많은 만화 극장판에선 막 어떤것을 확대하면 미시세계속 화학 분자식이 엄청난 속도로

군집하여 이동하는 연출이 굉장히 장엄하고 웅장한 느낌을 주는 연출들이 있고

좀 정적이고 여성스러운 느낌의 지구과학이나 생물학과 달리

화학과 물리학은 굉장히 정유업이나 기계공업같은 터프한 상남자 학문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라부아지에 이야기처럼 화학이 개인이던 국가던 사회의 부를 쌓기에

가장 좋은 실용학문 중 하나인건 변함이 없고

이름그대로 물질과 물질의 변화를 다루는 학문이기에 굉장히 매력적인 학문이고

고대중세 연금술사들부터 근대 라부아지에 , 오늘날 수많은 화학자들이

다 이런 이유때문에 화학에 입문하고 화학의 길을 걷게 되는게 아닐까 싶고

정말 자기가 똑똑하다 생각하고 물욕이 강한 사람들일 수록

의대가서 중고등학생들한테 가오잡지 말고

듀폰 , 스페이스X 같은 과학회사를 만들거나 신물질을 발명하면 월 십억 이상과 개인 비행기도 보장되는

화학자나 물리학자의 길로 빠지는게 개인과 사회적 이익에 옳지 않은가 싶기도 합니다

 

하여튼 ,

라부아지에는 오늘날 화학체계를 만든 인물로서

그의 업적은 단순히 화학적 영역에만 국한되지 않고

실험 , 증명 이라는 근대적 과학방법론의 토대이자

질량보존의 법칙은 오늘날 수많은 분야와 과학이론들의 기초적 토대를 제공했으며

오늘날 우리가 산소처럼 당연히 여기고 상식이라 여기는 것들에는

다 이런 근현대 과학자들의 잘 보이지 않는 노력들이 있어서였고

또 다르게 보면 단순히 200~300년 전 사람들은

산소도 모를정도로 지금보다 상식 수준이 월등히 떨어졌고

근대라는 시기를 시작으로

300여년동안 그동안 인류역사 수천년보다 더 많은 양의 발견이 이루어졌고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인류의 발전과 진보가 이루어졌으며

앞으로 50년 뒤 우리 후손들은 우리를 어떻게 볼지도 참 궁금할 정도입니다

 

라부아지에를 단두대에 올린 프랑스 민중들은

당시 온갖 봉건제의 수탈에 혹사당하던 상황이었기에

함부로 당시 봉건제의 실질적 보스 격이었던 라부아지에를 동정하기도 어려운 상황이고

실제 당시 프랑스 국왕은 루이 16세였지만

화학의 왕이었던 라부아지에의 실권과 국제적 영향력은

아마 루이 16세보다 훨씬 강하면 강했지 덜하지는 않은 상황이라

세리와 귀족들의 대표로서 분노한 백성들의 죽창질에 죽은게 아닐까 싶고

 

또 프랑스 혁명은 세계 민주주의에 시발점이 된 굉장히 중요한 의의가 있는 사건이었지만

이때 너무 과격하게 자국 과학자들과 과학을 탄압해서

영국과 숙명의 경쟁을 하던 프랑스는

세계 과학의 중심지를 영국에게 넘겨주어야 했고

 

근대시기 과학패권은 곧 세계패권을 의미했기에

영국은 프랑스가 혁명으로 과학자들을 전부 쫓아내버리고 자멸하자

세계 과학의 유일한 중심지로 우뚝서게 되었고

이건 매체에서 잘 나오지 않고 항상 민주주의의 시초로 조명받는

프랑스혁명의 어두운 부분이기도 했습니다

 

학문과 과학은 실험기구와 여러 무형의 지식을 다루는 것이기에

농사나 장사처럼

당장 눈앞에 보이는 것보다 길고 장기적인 계획이 필요한 분야고

공부와 학문은 귀족이나 양반의 전유물이었듯이

이로인해 옛날이던 지금이던

학자들은 대부분 당장 먹고살 걱정이 없는 중산층 이상에서 배출되었고

학문과 과학도 어느정도 국민들 삶의 질이 향상된 나라에서 꽃피워지게 되는 것인데

 

프랑스는 지배층이 무능하고 부패함이 심각하던 상황이었기에

유럽의 강국이자 부국임에도 국민들의 삶이 질이 너무 떨어지고 빈부격차가 심한 상황이라

프랑스 혁명으로 프랑스 과학계가 전부 무너져 내린게 아닐까 싶고

수많은 과학혁명의 중심지임에도 국민들의 삶의 질 향상을 외면하고

봉건적 모습을 고착화한 프랑스는 유럽 1등국가에서

혁명으로 이후 유럽 2등국가로 전락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문명과 과학이 발전해도

국민 , 사회적 약자들에게 그 혜택이 제대로 돌아가지 못하면

빈부격차는 극심해지고 혁명이 일어나 문명과 과학이 무너지고 다시 야만의 시대로 가는게

과학사 , 역사에서는 자주 보이는 현상이었고

 

고대과학문명국 로마가 야만 바바리안들에게 무너진 것이나

프랑스과학이 무너진후 일등이 된 영국과학이

후발주자인 독일과학에 위협받고

독일과학이 히틀러에게 무너지고 미국 , 소련에 흡수될때도

다 이런 비슷한 패턴이 있어왔고

과학과 문명의 발전이 자국 시민 , 가난한 민중들을 위해 쓰이지 못하고

기득권과 소수의 사치품과 향유물 ,

지배계급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라부아지에 질량보존 통행세 , 1984 , 백신통제) 으로 전락하면

곧바로 혁명이 일어나고 공들여 이룩한 과학과 문명이 무너지는게

라부아지에 외에도 계속 반복됬다는 생각입니다

 

또한 이전 겸손한 삶을 살고

과학을 잘 모르는 민중들과도 발맞춰 걸으려 노력하며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은

패러데이 이야기를 쓴 것처럼

과학자들도 여러 과학윤리 , 직업윤리에는

이런 처신문제도 포함시켜야한다는 생각이고

 

요즘 쓰는 과학자들 이야기 작업은

평소 위인전에서 보기 어려운 인물들이고

또 그들의 과학적 업적 외에도 개인적 이야기였기에

의미있는 작업이 된 것 같고

제가 쓴 역사 , 인문학적으로 본 과학 , 과학자 이야기가

독자들에게 의미있는 이야기로 남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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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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