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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건>

[천주교 집안에서 태어나다]

[세례를 받다]

[마카오로 건너가다]

[두번의 귀국실패]

[한국 최초의 신부]

[옥중 세례와 임치백]

[회유를 거절하다]

[마지막 편지]

[새남터의 순교자]

<라봉봉>

 

김대건

 

[천주교 집안에서 태어나다]

김대건 신부는

1821년 8월 21일

면천고을 솔뫼(오늘날 충청남도 당진시 우강면 송산리) 에서

천주교를 믿던 김제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김대건의 고향은 소나무 숲이 청청하다해서

솔뫼(소나무 산)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솔뫼성지 김대건 생가를 방문한 프란치스코 교황

 

당시까지 조선은 천주교를 탄압했는데

김대건의 집안은 대대로 이어진 천주교 집안이었기에

김대건의 증조할아버지와 작은할아버지는

조선 정부의 탄압에 순교(신앙을 지키려 목숨을 바치는 일) 하셨습니다

 

조선정부가 극심히 탄압했던 천주교도들

 

이로인해 김대건의 할아버지 김택현은 가세도 기울고

정부의 탄압으로 천주교 신앙을 지키기 어려워지자

탄압을 피하고 종교의 자유와 신념을 지키기 위해

경기도 용인군의 골배마을(골배마실)이라는

산골짜기로 가족들을 데리고 이주했습니다

 

김대건 신부가 어린시절을 보낸 골배마실 성지

 

김대건은 골배마을(골배마실 , 뱀이 많아서 뱀마을 배마실이라 불리다

산골짜기라 골배마실이 됨) 에서 소년시절을 보냈는데

골배마을은 천주교인들이 옹기판매로 생계를 유지하며

천주교 복음을 전파하던 조선의 천주교 공동체 지역이었습니다

 

[세례를 받다]

김대건은 프랑스 가톨릭 선교사 피에르 모방신부가

은이마을 (숨어있는 마을 , 은이성지 , 경기도 용인)에 왔을때

세례를 받아 안드레아라는 세례명을 받았습니다

 

피에르 모방신부

 

은이마을은 숨어있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역시 천주교 신자들이 박해자들의 눈을 피해 모여살게된 교우촌이었습니다

 

경기도 용인의 은이성지

 

한창 조선의 신학생 후보를 찾아 헤메셨던 모방신부는

김대건을 보고서는

 

<모방신부>저 아이가 장차 조선교회를 이끌 목자의 재목이다

 

여겼습니다

 

모방신부는 선교지 주민들을 신학생으로 선발해 교육하는

전통에 따라 신학생 셋을 선발했는데

이에 최양업 , 최방제 , 김대건 세 명이 뽑히게 되었고

김대건은 그렇게 한양에서 한문과 라틴어 및 기초적 신학공부를 시작했습니다

 

모방신부와 세 소년

 

[마카오로 건너가다]

모방 신부는 조선 정부의 천주교 탄압속에서도 꿋꿋이 신앙을 지키며 살던

김대건 집안의 이력을 듣고 김대건을 신부로 키울 생각을 했습니다

 

당시 조선에는 박해도 심하고 신학교가 없었기에 모방신부는 국내에서

성직자를 양성하기 어렵다 판단했고

 

이에 김대건이 신부가 되려면

신학교가 있는 청나라로 유학을 가야했고

모방 신부는 조선에서 가까운 북경신학교를 탐탁치 않아해서

마카오(포루트갈의 영구 임대영지였기 때문)까지 보내게 됬습니다

 

김대건 신부의 발자취

 

기초 신학공부를 마친 후에 김대건은 중국 청나라로 귀국하는

유방제(파치피코) 신부의 도움으로

1836년 12월 3일 15세의 소년 김대건은

최양업(토마스) , 최방제(프란치스코) 등과 함께

조선 서울을 떠나 만주와 요동을 거쳐

1837년 6월 7일 마카오에 도착했습니다

 

마카오의 김대건 신부 동상

 

그러다 김대건은 마카오 민란으로 잠시 두번 필리핀 마닐라의

롤롬보이로 피신했고

 

1986년 필리핀 롤롬보이에 건립된 김대건 신부동상 , 가톨릭신문

 

다시 마카오에서 김대건은 비밀리에 사제수업을 받았고

프랑스어 , 라틴어 , 신학 , 서양철학 등을 배웠습니다

 

신학생 김대건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이 상당히 성숙해서

라틴어로 다음과 같은 글을 써서 남겼습니다 (계몽사의 김대건 신부님 위인전)

 

<신학생 김대건이 남긴 글>네로 황제가 로마 제국을 통치하던 시기에

많은 그리스도인이 박해받았습니다

집에서 사자를 키우던 어떤 신자도 잡혀갔고

경기장(검투사 경기장 , 콜로세움)에서 사자와 마주쳤습니다

사람을 보고 달려들던 사자는 갑자기 조용해졌습니다

자신을 키우던 주인을 알아보고 양순해진 것입니다

이렇게 사자도 제 주인을 알아보건만

사람들은 왜 천주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일까요 ?

 

콜로세움에서 사자와 싸우는 로마검투사

 

[두번의 귀국실패]

김대건은 학문 이외에도 외국어와 미술도 뛰어난 다재다능한 인물이었고

신학교 공부를 마친 후

천주교 신자들에 대한 탄압이 지속되고 있었던 조선으로 돌아오려 했는데

 

먼저

1842년 조선으로 입국하기 위해

에리곤호의 세실함장의 통역사 자격으로

승선했지만

세실함장이 마닐라행 결정으로 하선했고

9월 11일 상해에 머물게 됩니다

 

다시 10월 2일

상해를 출발해

10월 22일 태장하 부근 요동에 도착했는데

12월 23일

김대건은 가난한 나무꾼으로 변장해

단독으로 입국을 시도해

국경선을 넘어 의주를 통과하나

위험을 느끼고 요동으로 돌아옵니다

도중 눈위에 쓰러져 동사할 뻔했지만

1843년 1월 6일

기적적으로 살아남아 돌아오게 됩니다

 

그렇게 조선입국에 두 번이나 실패했고

1845년(헌종 11년) 1월 15일에서야 국경을 넘어 한양에 몰래 들어왔는데

이때 그의 나이 25세였습니다

 

[한국 최초의 신부]

그러나 김대건은 조선 정부의 천주교 탄압이 거세서 다시

4월 30일 11명의 신자와 함께 상하이로 건너갔고

그해

1845년 8월 17일 중국 상하이 진쟈상(김가항) 성당에서

고 페레올 주교님에게 사제 서품을 받음으로서

김대건은 한국 최초의 신부가 되었습니다

 

김대건 신부의 사제서품

 

가톨릭 사제 정복 비레타를 입은 김대건 신부(중국옷이 아님)

 

오늘날 가톨릭교회의 사제서품식

 

김대건 신부는 다시 프랑스 주교와 함께 상하이를 떠나

1845년 10월 12일 충청남도 강경으로 몰래 상륙했고

방방곡곡을 돌며 비밀리에 천주교 전도할동을 펼쳤습니다

 

이듬해 김대건 신부는 동료 선교사들이 조선으로 들어올 수 있는

비밀 입국 통로(선교사 입국길 개척)를 알아보려 백령도를 돌아보다

1846년 6월 5일 순위도 앞바다에서 관헌에게 체포되어

6월 21일 한양으로 압송되어 한양 포도청에 갇혔습니다

 

[옥중 세례와 임치백]

감옥안에서도 김대건 신부는

불타는 포교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감옥에서의 김대건 신부

 

당시 아내와 자식이 천주교 세례를 받은것과 달리

본인은 천주교 세례를 미뤄왔지만

항상 천주교도들에게 우호적이었던

임치백은

아들이 김대건 신부와 함께 체포되자

아들의 석방을 청하다 도리어 옥에 갇혀

한양 포도청으로 압송됩니다

 

감옥에서 김대건 신부를 만난 임치백은

김대건 신부의 고결한 성품과 깊은 신앙심에

천주교인들이 그를 성직자로서 존중하고 따른다는 것에

큰 감명을 받았고

천주교 신자가 되기로 결심합니다

 

임치백은 김대건신부에게

 

<임치백>신부님 저는 저를

감옥에 있을 수 있게 해준

하느님의 특별한 은혜에 대해 감사합니다 ,

 

나도 오늘부터는 성교회를 믿겠습니다.

너무 오랫동안 끌어왔었습니다.

 

이에 김대건 신부는

감옥에서 임치백에게

직접 기도문을 가르쳐주고 옥중세례를 해주어

임치백은 요셉이라는 세례명을 받게 됩니다

 

김대건 신부에게 옥중 세례 받는 임치백

 

임치백의 친구들은 감옥에 찾아와

그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천주교를 버릴것을 강권했지만

임치백은

 

<임치백>천주는 나의 임금이시며 아버지시다. 

나는 천주를 위하여 죽을 결심을 하고 있고 ,

이미 죽은 사람이니 다시는 그러한 말을 하지 말라

 

대답할 뿐이었습니다

이에 분노한 형리들은

임치백을 거꾸로 매달고 참혹하게 물매질했습니다

 

<임치백>당신들은 죽은 사람을 때리니

헛수고만 하는 것 아니오 ?

 

또 어느날은 형리가 임치백에게

 

<형리>십계명을 외워보아라

 

했는데

임치백은

 

<임치백>아직 모두 외우지 못합니다>

 

이에 형리는

 

<형리>십계명도 모르면서 어떻게 천국에 갈 수 있느냐 ?

천국에 가려면 유식해야 한다

 

임치백은 머리를 흔들며 큰 소리로 대답했습니다

 

<임치백>자녀가 무식하면 효도할 수 없습니까 ?

아닙니다.

무식한 자녀들도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부모께 대한 책임을 다 할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저는 배운 것은 없으나 천주께서 저의 아버지이신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결국 형리는 그에게 꼬챙이로 찌르는 형벌을 사용하는데

임치백은 신음했고

형리는 임치백의 신음을 항복의 신호로 받아들이겠다 하자

임치백은 신음을 멈추었습니다

 

임치백은 그렇게 옥살이 3개월만에

사형선고를 받고 매우 행복해했습니다

 

<임치백의 유언>나는 본래 아무런 공적도 없었는데 

천주의 특별한 은혜로 여러분보다 앞서서 천국에 가게 되면 

반드시 천국에서 내려와 여러분의 손을 붙잡고 

아버지이신 천주의 나라로 안내할 터이니 여러분도 용기를 내시오

 

그렇게 김대건 신부에게 옥중 세례를 받은

임치백은 1846년 9월 20일

43세의 나이로 목졸려 사형당했습니다

 

임치백 요셉

 

[회유를 거절하다]

김대건을 심문하던 조선 조정 대신들은

김대건 신부가 서양 글자를 필기체로 능숙히 쓰는 것에 놀랐습니다

세계지리에 밝은 김대건 신부가

조정 대신들의 부탁으로 영국에서 만든 세계지도를 라틴어 실력을 발휘해

한국어로 옮김과 동시해 색칠했고

김대건이 번역한 세계지도를 헌종도 보게 되었고

조선 조정은 김대건 신부가 라틴어 , 중국어 , 프랑스어가 가능한

조선에서 없다싶이한 뛰어난 엘리트임을 알았습니다

 

김대건 신부가 제작한 조선전도

 

조선 조정은 프랑스어에 밝은 김대건 신부를 이용해

조선정부의 프랑스 선교사 처형에 항의하던

프랑스와의 외교문제를 해결하려는 등

천주교를 믿음에도 너무 재능이 아까워 처음엔 그를 회유하려 했습니다

 

<조선 조정 대신들>천주교만 버리면 살려줄 뿐 아니라 

벼슬도 내리고 후한 보상을 하겠다

 

 

그러나 신념을 지키려는 김대건 신부는 결사코 거부했습니다

 

헌종도 말하기를

 

<헌종>김대건의 일은 어떻게 처치할 것인가 ?

 

하자

 

영의정 권돈인은

 

<권돈인>김대건의 일은 한 시각이라도 용서할 수 없습니다

스스로 사교(邪敎 요상스러운 종교)에 의탁하여 인심을 속여 현혹하였으니

그 한 짓을 밝혀 보면 오로지 의혹하여 현혹시키고 선동하여

어지럽히려는 계책에서 나왔습니다

 

그리고 사술뿐만 아니라 그는 본래 조선인으로서 본국을 배반하여

다른 나라 지경을 범하였고

스스로 사학(邪學 요사스러운 학문)을 칭하였으며

그가 말한 것은 마치 공동(恐動 위험한 말을 하여 두려워지게 함)하는 것이 있는 듯하니

생각하면 모르는 사이에 뼈가 오싹하고 쓸개가 흔들립니다

이를 안법(按法 법으로 누름)하여 주벌(誅罰 벌을 줌)하지 않으면

구실을 찾는 단서가 되기에 알맞고

또 약함을 보이는 것을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당시 조선 조정은 성리학 지배층들의 이권보호 이외에도

천주교를 중국에서 황건적의 난이 일어날때의

황건적이 믿던 민간신앙들 같은

국가의 잠재적 위협이단종교세력으로 인식했던거 같습니다)

 

영의정 권돈인은 김대건이 그린 지도와 편지를 보고

격분하며 엄하게 다스려야 한다 했고

권돈인과 조정 관리들은 김대건을

단순 이단신봉자가 아닌

조선을 배반하고 조선을 위협하는 외세 프랑스와 결탁해

조선에 해악을 가한다 여겼기에

김대건에게 군문효수형(머리를 베어 군대 문에 거는 것) 에 처합니다

 

[마지막 편지]

처형을 앞둔 김대건 신부는 옥중에서

교우들에게 마지막 편지를 남기셨습니다

 

<김대건 신부의 마지막 편지>

교우들 보아라.

우리 벗아 , 생각하고 생각할지어다.

...

고로 이런 군난 역시 천주의 허락하신 바니 

너희 감수 인내하여 위주(주를 위하다)하고

오직 주께 슬피 빌어 빨리 평안함을 주시기를 기다리라.

내 죽는 것이 너희 육정과 영혼 대사에 어찌 거리낌이 없으랴. 

그러나 천주 오래지 아니하여 너희에게 ,

내게 비려 더 착실한 목자를 상 주실 것이니 부디

설워 말고 큰 사랑을 이뤄 한 몸 같이 주를 섬기다가

사후에 한가지로 영원히 천주 대전에 만나 길이 누리기를 천번만번 바란다.

잘 있거라.

김 신부.

 

김대건 신부의 마지막 편지

 

[새남터의 순교자]

결국 김대건 신부는 새남터에서 천주교 사제로 참수되서

순교(모든 압박과 박해를 물리치고

자기가 믿는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일 ,

넓은 뜻으로는 주의나 사상을 위하여 죽는 경우에도 쓴다)

하셨습니다

 

<김대건 신부가 참수형을 당하기 전에 한 말>

나는 이제 마지막 시간을 맞았으니 여러분은 내 말을 똑똑히 들으십시오

내가 외국인들과 교섭한 것은 내 종교와 내 하느님을 위해서였습니다

나는 천주를 위해 죽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이 내게 시작되려고 합니다

여러분이 죽은 뒤에 행복하기를 원하면 천주교를 믿으십시오

천주께서는 당신을 무시한 자들에게는 영원한 벌을 주시는 까닭입니다

 

<김대건 신부의 유언>주교님 , 어머니를 부탁드립니다

 

그렇게 1846년 9월 16일 서울 용산 새남터(한강변 새남터)에서

김대건 신부는 나라의 기틀을 흔들었다는 죄로

군문효수형을 선고받고 순교하셨고

한국 최초의 신부 김대건 신부가 순교하실때 나이는

겨우 26세셨습니다

 

김대건 신부의 순교

 

또한 사제생활 1년 1개월만의 일이었습니다

 

한국 최초의 서양학문을 공부한 유학생이자

한국 최초의 신부였던 김대건은

천주교에 대한 조선정부의 모진 박해를 무릅쓰고

그리스도교의 진리를 증거했고

1984년 한국 가톨릭 200주년을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김대건 신부와 103위 한국순교성인

 

원래 조선에서 천주교 탄압으로 사형을 받은 신자들은

3일 뒤 연고자가 시신을 찾아가는 것이 관례였으나

김대건 신부의 경우는 예외로 참수된 자리에 시신을 묻고

경비를 두어 지키게 했고

17세의 소년 이민식 빈첸시오는 파수 군줄의 눈을 피해

김대건 신부 순교 40일이 지난 후 시신을

빼내는 데 성공해서 그의 시신을 가슴에 안고 등에 지고

산길로 밤에만 걸어 5일만에 경기도 안성에 도착해

안장시켰고 이 곳은 오늘날 '미리내 성지' 가 되었습니다

 

김대건 신부의 유골

 

경기도 안성의 미리내 성지

 

<라봉봉>김대건 신부는 한국 최초의 신부님이자

한국에 기독교 정신을 알리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치신 한국의 위인입니다

 

참 읽으면서도 가톨릭은 특유의

무겁고 진중한 느낌이 있고

어떻게 저렇게 심하게 종교를 탄압하는가 ,

어떻게 저렇게 신념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가 등

여러 생각이 드는데

 

이게 조선시대뿐만 아니라

이전 신라에 불교를 들여오기 위해 순교한 이차돈 처럼

역사에서는 항상 새로운 문물이 도입될때마다

구세력 , 기존세력의 반발과 탄압이 반복된 면도 있고

오늘날에도 이런 배타적인 문화수용모습은 경계해야 할 사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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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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