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신라 후기 인물들>
[해상왕 장보고와 정연]
[장보고의 의의]
[부귀영화 김양]
[김양의 사촌형 김흔]
<라봉봉>
[해상왕 장보고와 정연]
장보고(혹은 궁복)와 정연은 모두 신라인이며
그들의 고향과 조상은 알 수 없었습니다
두 사람은 모두 전투를 잘하였으며 ,
정연은 또한 바닷물 밑으로 들어가 50리를 잠수하여 다녀도 숨이 차지 않았습니다
그 용맹과 씩씩함을 비교하면 장보고가 정연에게 약간 모자랐으나
정연은 장보고를 형으로 불렀습니다
그러나 장보고는 나이로 , 정연은 기예로 항상 맞수가 되어 서로 지려고 하지 않고
두 사람이 당 나라에 가서 무녕군 소장으로 있을 때 , 말을 달리며 창을 쓰는 데 있어서 대적할 자가 없었습니다
당시 통일신라는 삼국통일 이후 한창 번영과 평화기를 맞이하고 있었고
동일하게 번영을 맞이하며 국제국가로 변모하던 당시 초강대국이었던 당나라였기에
젊은 신라청년들이 출세하고 더 넓은 세계를 보거나 당나라에서 벼슬을 하기 위해
당나라로 유학 가는 것이 유행하였습니다
당나라에서 유학해온 장보고는
이후 신라에 귀국하여 신라대왕(흥덕왕)에게 말했습니다
<장보고>중국을 두루 돌아다녀 보니 ,
우리 나라 사람들을 노비로 삼고 있었습니다.
청해에 진영을 설치하여
해적들이 사람들을 약취하여 서쪽으로 데려가지 못하게 하시기 바랍니다.
청해는 신라 해로의 요충지로서 (오늘날 완도)
대왕이 장보고에게 군사 1만 명을 주어 청해에 진영을 설치케 하니 ,
이 뒤로는 바다에서 우리 나라 사람들을 노비로 파는 자가 없어졌습니다
장보고는 이미 귀한 자리에 올랐으나 ,
정연은 직업을 잃고 굶주림 속에서 사수의 연수현에서 살았습니다
하루는 수비하는 장수 풍원규에게 말하기를
<정연>내가 동쪽으로 돌아가서 장 보고에게 걸식하려 한다
하니
풍원규가 말하기를
<풍원규>그대와 장 보고의 사이가 어떠한가 ?
어찌하여 그곳에 가서 그의 손에 죽으려 하는가 ?
라고 했고 정연이 말하기를
<정연>배고픔으로 죽는 것은 싸우다가 죽는 것 만큼 통쾌하지 못하다.
더구나 고향에서 죽으니 좋은 일이 아닌가 ?
라 하고 드디어 그곳을 떠나 장보고를 만났습니다
그가 보고와 함께 술을 마시면서 마음껏 즐기는데
술자리가 끝나기 전에 왕이 시해되고 나라가 어지러워져서 임금이 없다는 소문이 들렸습니다
당시 신라는 42대 흥덕왕대의 안정시기가 끝나고
43대 희강왕부터 45대 신무왕까지 피비린내나는 왕권다툼이 일어나던 시기였고
신라 43대왕 희강왕은 김명의 반란으로 자살했고
김명은 신라 44대왕 민애왕이 되었습니다
이때 장보고가 군사 5천 명을 나누어 정연에게 주면서
그의 손을 잡고 울면서 말했습니다
<장보고>그대가 아니면 나라의 화란을 평정할 수 없다.
정연이 국도(수도)에 들어가 배반한 자를 죽이고 왕을 세웠습니다
새 왕이 된 신라 45대왕 신무왕 김우징은 장보고를 불러 재상으로 삼고 ,
정연으로 하여금 장보고를 대신하여 청해를 지키게 했습니다
<김부식의 생각>두목(당나라 학자)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두목>천보 연간의 안녹산의 난 때,
삭방 절도사 안사순은 녹산의 종제라는 이유로 처형당하였다.
그리고 곽 분양에게 조서를 주어 그를 대신하게 하였다.
열흘 후에는 다시 이 임회에게 조서를 내려 부절을 가지고 가서 삭방 군사의 절반을 나누어
동으로 조 , 위 지방에 나가게 하였다.
사순 때는 분양과 임회가 모두 아문 도장으로 있었는데 ,
두 사람은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한 자리에서 음식을 먹으면서도
항상 서로 눈을 흘기고 한 마디 말도 주고 받지 않았었다.
분양이 사순의 직무를 대신하게 되자 ,
임회는 도망하려 하였으나 미처 결행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
분양은 임회에게 병력의 절반을 나누어 주고 동쪽을 정벌하라고 명령했던 것이다.
임회가 들어가 분양에게 청하였다.
'이 한 몸이 죽는 것은 실로 달게 받겠으나 처자만은 죽음을 면하게 해 주시오.'
분양은 내려가서 임회의 손을 잡고 당상으로 올라와 마주 앉아 말했다.
'지금 나라가 어지러워 임금이 파천(피난)하였는데 ,
그대가 아니면 동쪽의 적을 평정할 수 없네. 어찌 사사로운 원한을 생각할 때란 말인가 ?'
그들은 작별할 때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면서 충성과 의리로써 서로 격려하였으니 ,
나라의 큰 도적을 평정하게 된 것은 실로 두 사람의 힘이었다.
배반할 마음이 없음을 알고 ,
재능이 일을 맡길 만한 인물임을 안 뒤에야 비로소 의심하지 않고 군사를 나누어 줄 수 있는 법이다.
평생토록 상대에 대하여 분한 심정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 상대의 마음을 알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분노를 가지고 있으면 반드시 상대의 단점이 먼저 보이게 되므로
상대의 재능을 알아보기가 더욱 어렵기 때문이다.
이러한 면으로 보면 장보고와 분양의 현명한 정도는 비슷하다.
정연이 장보고에게 갈 때 틀림없이
"저 사람은 귀하게 되었고 나는 천하니 ,
내가 자신을 낮춘다면 응당 옛날의 분노로 말미암아 나를 죽이지는 않으리라"
라고 하였을 것이다.
장보고는 과연 그를 죽이지 않았으니 이는 인지상정이오 ,
임회가 분양에게 죽기를 청한 것도 역시 인지상정이었다.
장 보고가 정연에게 임무를 맡긴 것은 자기 자신에게서 우러나온 것이다.
정연은 또한 굶주린 상황에 있었으므로 감동되기도 쉬운 일이었다.
분양과 임회는 평생 대립하였지만 ,
임회에게 내린 명령은 천자에게서 전권을 받은 분양에게서 나왔으니 ,
장 보고와 비교하자면 곽분양이 더욱 훌륭한 편이다.
이것이 바로 성현들이 성패를 속단하지 못하는 대목이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인의의 마음이 잡스런 감정과 함께 존재하여 ,
잡스런 감정이 이기면 인의가 사라지고 ,
인의가 이기면 잡스런 감정이 사라지는 이치이다.
장보고와 곽분양 , 두 사람은 인의의 마음이 이긴 데다가 총명함이 바탕을 이루었기 때문에
마침내 성공하였던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주공과 소공을 백 대의 스승으로 칭송하지만 ,
주공이 어린 임금을 보좌할 때 소공이 그를 의심했었다.
주공의 성스러움과 소공의 현명함으로 젊어서는 문왕을 섬겼고 ,
늙어서는 무왕을 보좌하여 천하를 평정할 수 있었지만 ,
주공의 마음을 소공도 알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만약 인의의 마음이 있다할지라도 바탕에 총명함이 없으면 ,
비록 소공일지라도 의심할 수 밖에 없었으니 ,
하물며 그보다 못한 사람들이야 어떠하겠는가 ?
'나라에 군자 한 사람만 있으면, 그 나라는 망하지 않는다'
는 말이 있다.
대개 나라가 망하는 것은 사람이 없어서가 아니라 ,
망할 때를 당하여 어진 사람을 쓰지 않기 때문이다.
진실로 어진 사람을 쓸 줄 안다면 한 사람으로도 족한 것이다."
송기는 말했다.
"아아! 개인적인 원망으로 상호 해치지 않고 ,
나라 일을 먼저 걱정한 사람으로는 진에 기 해가 있었고 ,
당에 분양과 장보고가 있었으니 ,
누가 이족에 사람이 없다고 할 것인가?"
(요약 : 사람쓸때 당장 급한불 꺼야하는데
사사로운 개인적 원망으로 더 중요한 것을 잊어서는 안되고
어진마음 , 똑똑함 , 지혜가 필요하다는 점과
장보고같이 나라에 한 놈이라도 제대로 된 사람 있으면 그 나라는 망하지 않음 ㅇㅇ)
삼국사기 열전에서 장보고는 이 기록으로 끝나는 인물이지만
장보고는 김부식도 굉장히 극찬할 만큼
통일신라 국력 절정기를 대표하는 인물이었고
[장보고의 의의]
장보고가 완도에 청해진 설치후
해적소탕에 열을 올려 신라인 노예매매가 사라졌고
청해진은 일반적 해경수준이 아니라
동아시아 최대의 해상무력집단으로서
중국 , 일본바다까지 관할했던
국제적인 군사집단으로서 마치 세계의 경찰 노릇을 하는 초강대국 미국의
그런 역할을 했던 집단으로서
통일신라 군사력 , 해상력의 최전성기를 상징하는 해상군사집단이었습니다
국제국가로 변모하던 중국 당나라에서도 장보고를 인정하고
신라와 장보고의 바다패권을 인정했고
신라방 , 신라소 등 당나라 해안가에 신라인 집단이 대거 활동했기 때문에
요즘식으로 비유해보면 장보고가 서해 , 남해 , 일본까지 항공모함 끌고 계속 순찰해주니
한중일 동아시아 국가 , 국제상인들이 해적에 대한 두려움을 잊고 마음놓고 교류할 수 있었고
김두한이 깡패지만 종로에서 일본야쿠자들 제압하고
일제식민지 시절 한국(조선) 상인들의 환호를 받고 보호비를 받았듯이
(CCTV와 스마트폰 뱅킹이 되서 소득세만 내고 장사하는
지금과 달리 옛날 현대 이전 상인들은
상가에 치안도 불안정하고 동네 양아치들도 많았기에
이리저리 동네 양아치들한테 돌아가며 뜯길바엔
차라리 지역주먹 1등 깡패 한놈한테 상납비 주고
양아치들 달라붙으면 쪼로로 달려가서
문제 일어나면 해결해달라하면서
대충 사설 경찰 , 사설 경호 맡긴 시스템이
있었다는 생각이고 당연 식민지 조선상인들 역시
김두한이 독립군대장 김좌진 장군 아들이란 상징성과
주먹도 세고 배포도 강하고 머리도 잘 굴러가기때문에
말도 안통하는 왜놈 야쿠자들한테 상납할바엔
말이라도 통하는 조선대표주먹한테 상납하는게 더 이익이었으니
김두한을 간판스타로 올려놓았다는 생각입니다
[역사에서도 원래 가장 센 무력집단이 곧 국가를 건설해서
가장 센 깡패가 곧 정부고 법이었음 ㅋㅋ] )
동아시아 바다 패권잡은 장보고 역시 종로 , 경성 주먹패권잡은 김두한처럼
장보고는 무역선을 당나라에 수시로 파견했고
당나라 동해안의 신라방 사회를 원격통제해서 막대한 무역이익을 얻었고
당나라에 법화원을 세웠고
또한 장보고는 일본 최고승려 엔닌에게 당나라 활동때
보호요청을 받기도 하고
장보고는 일본에도 회역사라는 무역선단을 주기적으로 파견했는데
규모가 지나치게 커서 공식 사신단을 방불케 할정도라
당시 일본에서는 회역사를 받지말아야한다는 말이 나오기도 할 정도였다 합니다
장보고는 이렇게 신라 중앙군에서 벗어난 자기만의 왕국을 청해진에 건설했고
일반적인 지역바다 대장이 아니라
한중일에 깊게 영향을 끼쳐 오늘날에도 중국과 일본에서도 장보고를 대단한 인물로 여길 정도로
동아시아 바다 , 질서를 수호한 인물이었고
가히 '해상왕' 이라 불리는 인물이고
장보고의 힘이 너무 강해서 두려움을 느낀 신라왕실에서 암살해서
신라의 해상제패는 일장춘몽으로 끝났지만
이후에도 너무 업적이 크고 중국과 일본에서도 굉장하게 여겨지는 인물이라
한국의 위인으로 이야기 되고 있고
세계 전쟁사에서도
육군 1등은 수부타이(or 징기스칸) , 해군 1등은 이순신이라 여겨지는데
이순신 장군은 진짜 극악의 환경에서 고초 겪으면서
나라 지키신 한국 명장중의 대명장이지만
난세의 영웅이었던 이순신과 달리
장보고는 진짜 통일신라 최전성기 시대 , 태평성대시기의 영웅인 인물이라
장보고의 죽음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른 격도 되서
굉장히 안타까운 면이 있고
장보고 죽음 이후부터는 신라 장군 , 지식인 , 상인들이
더더욱 골품제의 한계를 장보고란 한미한 출신의 영웅을 통해 뼈져리게 봤으며
더이상 신라에 세금을 바치고 충성하면 장보고꼴 나는 것을 분명히 봤기에
우리가 일제 , 독일제 , 미제 하면 오우 쓋팔 이건 명품이여 하면서
믿고 쓰지만 쭝국제나 개발도상국가들이 만든 제품은
대충 일회용품만 쓰거나 곧 쓰다가 고장나는 싼맛에 쓰는 싸구려제품이란 이미지가 있듯이
장보고가 살해당한 뒤로부터 신라민심이 크게 동요했을거란 생각이고
이때부터 신라라는 국가의 브랜드 가치는
충성하면 뒤통수치는 국가라는 생각이 신라민중 , 중국과 일본에서도
크게 돌았을 수가 있고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역사적으로 국민을 배반한 국가에
믿을 수 없는 국가 , 조정에 충성을 바치는 국민들은 없었고
곧바로 국가멸망테크로 달려가기 시작했고
장보고가 살해당한 이후부터 신라 국력이 급격히 고꾸라지고
신라의 멸망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참 안타까운 인물이긴 합니다
일단 장보고가 왜이리 강했냐면
우리가 당장 동네장사보다 서울에서 장사하는게 수익이 몇 배가 크듯이
국제무역으로 버는 돈은 서울에서 장사하는거보다 수익이 몇 배 , 몇 십배 혹은
몇 백배 크기 때문에
(대항해시대때 금값이던 후추가 유명했고
증기기관 발명 전 운송이 어려웠던 근대 이전엔 이게 더 심했음)
장보고의 청해진군은 일반 사병집단에서 넘어
가히 국가권력급 군대로 일어나게 됬고 (사실 장보고는 국가권력을 넘어 지구권력급임 ;;)
한국사에서 나라를 뒤집어 엎을만한 사병집단 하면
장보고의 청해진 , 송악호족 왕건의 사병 , 고려말 이성계의 가별초가 유명한데
이 셋의 공통점이 모두 국제군이었단 점이고
세계사에서도
일반 군대들과 달리 국제군은 '황제의 군대' 가 보통 이런데
사실상 왕국군이 아니라 제국수준의 군대였고
(왕건이랑 이성계도 이미 제국수준은 찍고 신라나 고려 합병시킴)
굳이 한국만 그런게 아니라
전세계 역사가 다 동일하고
일반 동네사병들은 이렇게 강하지 못하지만
이제 외국물 먹고 외국과 교류한 국제군이 되버리는 순간 질이 갑자기 상승하는 법이라
당장 한국군도 보급품말고 미군 싸제무기 , 연장들 껴서 장착하는 순간
전투력이 갑자기 수직상승하는 법이고
일반 국가 중앙군에서 병사 한 명 양성하는데 1년에 천만원을 쓴다면
국제해상무역 , 국제무역으로 번영한 집단에서는
돈이랑 재화가 그냥 창고에서 넘쳐 흐르기 때문에
병사 한 명 양성하는데 1년에 5천만원을 쓸 수가 있는 법이고
당연 병사들 영양섭취상태 , 피로도 상태나
피복상태 , 장비상태도 싸제로 더 좋은거 쓰는 법이고
역사적으로 군대의 힘은 '돈' 에서 나오는 것도 있고
당장 월급 50만원 주는 놈한테 돌격하라 하면 안하고 프래깅(반란)할 확률이 큰데
월급 500만원 주는 놈한테는
사회 나가봤자 이만한 직업 구하기 쉽지 않은거 알기때문에
돌격하라하면 진짜 목숨걸고 돌격하는게 있고
이게 현대전에서는 과학기술력이 더 강해서
월급 50만원 미군무기 가진 군대가 월급 500만원 아프리카무기 가진 군대
개 처바르지만
냉병기 시대에서는 아무래도 풍요롭고 부유한 국가 군대가
기강만 제대로 잡힌다면 그냥 초강대국 먹는 법이고
(몽골은 좀 예외같아 보일 수 있는데
부자나라 송나라가 거지나라 몽골한테 털린 이유는 예외같아 보이지만
몽골전사들이 부자나라 송나라를 멸망시키면 그 돈 , 땅 , 섹시걸들이 다 자기 주머니로 갈거 알기에
역사적으로 이렇게 막대한 보상이 있으면 ㄹㅇ 사기가 ㅈㄴ게 올라감 ;;)
이렇게 사제군 , 사병집단들이 국제무역으로 압도적 지원을 받고 무장하는 순간
국가 중앙군보다 힘이 더 강해지는 법이고
(태종 이방원도 이걸 너무 잘 알아서 왕되기전까진 자기 사병들때매
사병혁파 반대하다가 왕 되자마자 사병혁파함 ㅋㅋ)
장보고는 중국과 일본 무역까지 장악해서
동아시아 해군력 1등 찍은 인물인데
당시 전세계 1위국가가 당나라였기에
당시 동아시아 해군력 1위란 말은
한국 신라가 잠깐이나마 세계 해군력 1등을 찍어보긴 찍어 봤단 의미고
(비록 대영제국 해군이나 오늘날 미해군과 달리 찍먹이지만 ㅎㅎ)
지구권력급이었던 장보고 청해진 군대는 언제든지 서라벌로 진격해서
나라를 바꾸거나 왕을 바꿀 수 있을 정도로
국가권력급이었던 왕건군이나 이성계군보다 더 강하면 강했던 군대고
장보고 사후부터는 점차 신라인들 기가 꺾였지만
지증왕대부터 시작된 , 통일후 백제 항해술을 흡수한
신라인 조선술 짬밥은 어디가지 않아서
신라 말기에도 이런 신라인들의 해상력 의지는 꺾이지 않아서
왕건 가문 역시 장보고의 의지를 이어받아
예성강에서 해상무역으로 부를 축적해 호족으로 대두한 가문이고
이성계 가문 역시 동북면에서 가별초라는 사병집단을 이끌어서
일반 고려인으로 구성된 군대가 아니라
동북면 토박이 , 여진족 , 한족 , 몽골족이 섞인 국제군단이어서
일반 국가 중앙군에비해 그냥 존~~~~나 강한 군대였고
괜히 이성계가 가별초 이끌고 만주 쓸고다녀서 잠깐이나마 요동수복시키고
고려 중앙군이랑 맞다이 떠서 고려 멸망시키고 새국가 건설한게 아니고
장보고 역시 맘만 먹고 명분만 확실하다면
언제든 통일신라 멸망시키고 장씨왕조 열어낼 수 있었는데
왕건 , 이성계보다 군사력이 강했지만
장보고는 6두품 지식인 , 신진사대부라는
먹물쟁이들이 합류한 왕건 , 이성계집단과 달리
오로지 해양상인 , 활쟁이 , 칼쟁이로만 이루어진 집단이었고
명분이란건 사실 힘있는 놈들이 만들면 그만인데
장보고 주변은 다 근육맨들만 있었고
너무 책읽는 놈들이 부하들에 없었기 때문에
왕건 절망편 , 이성계 절망편 엔딩으로 끝났고
(반대로 왕건이랑 이성계는 장보고 희망편임 ㅋㅋ)
고려 무신정권기에도
머리좀 돌아가는 최씨무인가문 같은 경우는
이규보같은 탑클래스 먹물쟁이 놈들 데려와서 나름 형식을 갖췄기에
4대 장기집권이 됬는데
경대승 이의민 김준 이런 케이스는 순수무력으로 집권하다
짧은 생을 마감한 정권 , 인물들이고
그만큼 국가권력 찬탈때는 순수무력이 갑이지만
장기정권유지부터는 먹쟁이 , 사대부들 포섭이 굉장히 중요한 법이라
왕건이나 이성계의 경우가 무력집단이 지혜를 갖춘 격이라 할 수 있어서(문무겸비)
당대 사회에 불만을 느낀 육두품이나 신진사대부 선비놈들 포섭(및 협박)을 제대로 했기에
500년 국가를 열 수 있었고 모범적인 무력집단의 케이스라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장보고가 쿠데타를 일으켜 신무왕 김우징을 왕위에 올릴때도
청해진군사 5천이 무주(광주광역시) 에서 진격해서
달벌(대구광역시) 까지 신라 중앙군을 그대로 밀어버렸고
달벌에서 신라 정부군 10만이 청해진군 5천이랑 맞다이로 들어갔는데
5만군사 모가지가 다 썰리며 그냥 개 처발렸고
이 소식을 듣고 별궁으로 도망친 민애왕을 추격해 죽이고
김우징을 왕위에 올린것이고
장보고는 그렇게 김우징 신무왕을 왕위에 올리고 국가권력을 잡고
승승장구하는듯 했지만
일단 김우징을 왕위에 올리는 조건으로
장보고의 딸과 신무왕의 혼인을 약속했는데
신무왕은 약속을 지키기 전에 금방 승하해서
아들이었던 문성왕에게 약속을 이행하라 했는데
문성왕도 원래 장보고에 은혜를 갚으려 약속을 이행하려 했지만
골품제 의식이 강해 신분이 미천한 장보고의 딸을 왕비로 맞을 수 없다는
신라 귀족들의 반발로 단념했고
(다른말로 장보고 세력이 혁명 후에 귀족 , 선비계층을 포섭하는데 실패했단 의미)
이에 장보고와 신라 귀족들 사이에 서로 불만이 커지다가 위기감을 느낀 신라왕실에서
장보고를 암살하려 했고
자객 염장을 보내서 장보고와 술을 마시게 하다 장보고가 술에 취한 사이
염장이 장보고의 목을 베어 암살했고
이렇게 동아시아 패권을 주름잡던 해상왕 장보고의 삶은
너무나 허무하게 끝나버렸고
사후 영향도 너무커서
장보고 사후 위기감을 느낀 신라조정에서 청해진을 없애 청해진은 사라졌고
(골품제 개병신 신라조정인게
장보고같은 인물은
그냥 약속만 제대로 지켜주거나 진심으로 잘 달래만 줘도
계속 나라 지키면서 외화 쓸어담아올만한 우직한 인물인데
엘리자베스여왕이 드레이크 제독을 컨트롤 해서 바다패권잡고 초강대국 시대를 연것과 반대로
당시 신라에서는 장보고를 컨트롤할만한 담대하고 지혜로운 왕도 없었을 뿐더러
가만히만 냅둬도 돈복사나 per 2 이상의 수익률을 안겨주는
미친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가름 ;; , 달러 쓸어오는 삼성 이건희 감옥보낸격 ;;)
국제무역으로 번영하던 청해진 백성들은 뿔뿔히 흩어졌고
어쩌면 골품제 최대 희생양이 장보고같기도 하고
통일신라 이전 삼국통일전쟁기땐
계속 전쟁으로 노비 , 평민 , 귀족 , 왕족이 골고루 죽어나가고
인력 하나하나가 귀했던 시기라
전쟁에서 공을 세우면 골품제가 있었음에도 예외적으로 특진시켜주고 그런
훈훈한 지원 , 훈훈한 풍습이 있었는데
통일신라로 접어들며 전쟁이 사라지자 골품제의 모순이 점차 심화되고
그렇다면 통일 이후부턴 왕실과 귀족들 사이에서도
점차 골품제 폐지를 논의했어야
신라가 1000년을 넘어 2000년 가는 국가로 유지됬을 수도 있는 법이었는데
그냥 계속 이어지고 성골이 없어지자 진골들사이에서 왕을 뽑되
끝까지 진골왕들을 성골로 승격시키지 않을 정도로
신라는 위 아래 할 것 없이 꽉 막히고 닫힌 사회였고
그냥 차라리 장보고 딸이 외모나 성격이 싫으면 싫다고 씨팔 이 결혼은 안한다 빼애액하면
대장부였던 장보고도 거시기한거 인정하고 남자끼리 남자들 심리 잘 이해할 법이기에
그도 인정 , 이해하고 정상참작 할 수 있는 법인데
출신이 미천하다며 이런식으로 반대하면
평생 만리타향 외국에서 기술배워와 귀국해서 고생하고
나라지키고 목숨걸고 쿠데타 일으키며 서라벌까지 진군하며
산전수전 다겪은 장보고도 마음이 크게 긁히는 법이라
서로 상처만 남는 의미없는 싸움이 일어나는 법이며
진짜 발암엔딩 오지고
진짜 위연이 중요한 순간에 제갈량 촛불 걷어찬거나
코믹메이플 도도가 1분을 못참고 에아를 살리는 의식을 방해하는 발암엔딩처럼
장보고 죽음이 한국사에서 큰 방향을 바꿨음을 생각해 볼 수 있고
반대로 한국 희망편이 영국이나 미국이라
영미 두 국가는 역사의 중요한 순간에서
고생 , 희생한 영웅들을 대접해주고 그들의 의지를 계속 계승했기 때문에
오늘날까지 전세계를 주름잡는 '초강대국' 이 된 것이며
대부분 문명국가들도 사실 이런 골든타임이나 굉장히 중요한 순간들은
어느나라 , 어느민족이 다 있었을 겁니다
저희 아버지가 제일 좋아하는 찬송가가
'어느민족 누구게나' 인데
('은혜가 풍성한 하나님은' 이랑 '예수께로 가면' 과 함께 우리집안 공식 3대 성경테마곡임ㅋㅋ)
'어느민족 누구게나 결단할 때 있나니'
로 시작하는데
장보고 보면 참 결단 잘못해서 영웅 한명 죽은게
국가쇠퇴 , 신라멸망 , 세계사속 한국의 쩌리화로 이어진 것이라는 생각이며
생각보다 장보고의 죽음이 남긴 영향력이 굉장히 크다 생각됩니다
제가 우리나라가 지금도 민족의식이 굉장히 후진적으로 생각하는 이유가
일반인들이 흔히 말하는 영웅 , 위인들처럼
대놓고 앞서서 싸울 필욘 없어도
뒤에서 소극적이나마 십시일반으로 올바른 일에 기여 , 지원할 수도 있으며
적어도 나서서 희생한 그들을 뒤에서 조롱하거나 비하하거나
반민족행위에 부역한 사람들을 칭송하는 문화는 없어야하는데
독립운동가들 , 한국전쟁용사들 모진 고초겪으며 고생할때
친일반민족행위자 동상은
오늘날까지 버젓히 서울 한복판에 우뚝 서있고
반민족행위 들먹이면 반민족행위로 재산불린 그들의 후손들이
고소드립치면서 적반하장으로 나서는데
대한민국 사법부가 처리할 의지가 없는지 민족정기가 흐리멍텅한건지 아직도
민족정기가 제대로 세워지지 않았다는 생각이고
오늘날에도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젊은 20대 군인들 청년들
희생해서 고생하는거 제대로 대접을 안해준다는 것이고
미국은 사병들 월급 수백만원씩 주면서 온갖 혜택주고 중산층 삶은 보장해주며
군복입은 군인들한테 시민들이 경의를 표하는 문화가 있어
괜히 초강대국이 초강대국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 정도고
우리나라는 군인들 대접안하고 조롱하고 쓰고 부품마냥 버리고
군인들 고생할때 누구는 클럽에서 엉덩이 흔들면서 해외여행 다니면서
군인들 비하나 하고 이런거 보면 참 너무 이 나라가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모를 정도고
장보고가 미국에서 태어났다면
그냥 니미츠나 맥아더같은 영웅대접 받으며 편안하게 살다 죽었을 것인데
장보고나 선조때 이순신 장군들 이런거 보면
암군밑에서 명장이 참 고초를 겪는게
참 약소국이 약소국인 이유가 있는 법이고
대한민국 출산율 바닥치는게 전 이렇게 나라가 불공정하고
민족정기가 제대로 안서서인 점도 있다는 생각이 들며
반대로 우리가 가장 강력하거나 군사력이 강한 시기였던
신라 전성기때는 이사부(지증왕) , 김무력(진흥왕) 같은 장수들을 제대로 대우해주었고
고려 현종때는 현종 이분도 참 골때리는 위인인게 뭐냐면
현종이 본의아니게 반역으로 왕위에 올랐는데
이 사람이 용병을 굉장히 잘한게
반역자였던 강조가 자기를 왕위에 올렸을때
일반적인 쿠데타세력(강조세력)의 허수아비 왕으로 남지 않고
이렇게 된거 강조를 믿어주고 거란침공때 강조에게 전권을 주었고
강조 뿐만 아니라
장수들을 잘 믿어주고 대우해주었기 때문에
강조도 마음을 다잡아 반역자 출신임에도 고려에 충성을 결심하고
거란군에게 붙잡혔을때 끝까지 항복하지 않고 장렬한 최후를 맞았고
양규 , 강감찬 등 수많은 명장이 나와 활약했고
논공행상도 철저했기에 고려인들이 합심해서 외세를 극복하고
현종떄부터 삼국의식이 고려라는 이름아래 하나라 모여
한민족의 민족통합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졌으며
세종때도 김종서 , 이징옥이 온갖 고생하며 북방영토 수복 , 개척했고
세종대왕이 다 믿어주고 대우해주고 호랑이 장수들 컨트롤을 잘 한법이며
선조같은 노답암군이 절망편이면
위에서 말한 세 임금은 군인들 통제 , 대우를 제대로 해주었기에
아이러니하게 대평화시대를 연 사람이며
솔직히 저도 전쟁 극혐하고 전세계 군대 다 없어지고 청년들이
총이 아니라 책과 펜 , 취미활동을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인데
(우리군이나 미군만 없어지면 제가 국가불순세력이지만
중국 , 북한군도 다 없고 전쟁과 군대없는 세상이 오면 좋을듯 ;;)
적어도 세계인들의 의식수준이 같이 높아진 상황에서
서로 대화와 합의를 해가며 점차 같이 줄이는게 맞지
당장 이상주의에 빠져서 우리군만 없애버리면 곧바로 타국가의 침공을 받을 수 있는 법이고
일단 현재 지옥속의 심정속에서 고생하는 군인들에겐
당장 군대에서 고생하는 군인 , 청년들 위로와 감사는 못해줄망정
이렇게 개차반으로 대우하면 안된다는 생각이고
지증왕이나 현종 , 세종때 강력한 안보가 뒷받침 되었기에
태평성대를 열고 국가 최번영기를 맞이할 수 있었던 법이며
이사부 , 강감찬 , 김종서가 명장 희망편이라면 (물론 이후 김종서는 세조 수양쿤때매 절망엔딩 ;;)
장보고랑 이순신은 ㄹㅇ 명장들 절망편인데
위에 삼국사기 열전에 견해를 쓴 김부식의 말이 백번 맞는말인게
'나라에 군자 한 사람만 있으면 그 나라는 망하지 않는다'
'대게 나라가 망하는 것은 사람이 없어서가 아니라
망할 때를 당하여 어진 사람을 쓰지 않기 때문이다
진실로 어진 사람을 쓸 줄 안다면 한 사람으로도 족한 것이다'
라는 말처럼
제가 이전이야기에서 썼듯이
조선 멸망시기때도 고종이 명성황후랑 민씨척족 이혼하거나 단속 제대로 시키고
이완용 꺼지라하거나 통제 제대로 시키고
김옥균 , 김홍집 같은 엘리트 청년개화파들 컨트롤 잘했으면
조선이 멸망을 안했을 수도 있고
진짜 김부식이 이 사람도 비판의 여지가 있는 사람이지만
당대 문돌이 최고 대가리 찍고 고려최고권신으로 삼국사기 집필 지휘한게 아니란 생각이고
왕실국가 관료로서 시대적 한계도 있지만
김부식도 시대를 초월한 , 오늘날 현대 대한민국에도 유효한 평을 남기며
딱 선과 악 , 옳고그름 , 인물평들 세세히 잡아낸거 보면
굉장히 똑똑하단 생각이 들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라봉봉의 결론 : 장보고의 죽음으로 신라사회의 멸망의 카운트다운 시작 or
골품제에 밀려 한국사의 진취적 정신의 후퇴
[부귀영화 김양]
김 양의 자는 위흔이니 , 태종대왕의 9세 손입니다
증조는 주원 이찬이며 , 조부는 종기 소판이고 ,
부친은 정여 파진찬이니 대대로 모두가 장상(장수와 재상)이었습니다
김양은 태어날 때부터 영특했습니다
태화 2년, 흥덕왕 3년(828년)에 고성군 태수가 되었고
얼마 뒤에 중원 대윤으로 임명되었다가 곧 무주 도독으로 전직되었는데 ,
가는 곳마다 정치를 잘한다는 칭송을 들었습니다
개성 원년 병진(836년)에 흥덕왕이 죽고 그를 계승할 적장자가 없자
왕의 사촌 김균정과 김균정의 조카 김제륭(후의 희강왕) 간에 왕위 쟁탈전이 벌어졌습니다
이 때 김양은 김균정의 아들인 아찬 김우징과 김균정의 매부인 김예징과 함께
김균정을 왕으로 세워 적판궁에 들어가 사병으로 숙위케 했습니다
그 때 제륭의 도당(반역자일당)인 김명, 이홍 등이 적판궁을 포위했습니다
김양은 군사들을 궁문에 배치하여 그들을 막으면서 말했다.
<김양>새 임금이 여기 계시는데 너희들이 어찌 이토록 흉악하게 거역할 수 있느냐 ?
그는 드디어 활을 당겨 10여 명을 쏘아 죽였는데 ,
김제륭의 부하 배훤백이 양을 쏘아 다리를 적중시켰고
김균정이 말했습니다
<김균정>저 쪽은 군사가 많고 우리는 군사가 적으므로 그 세력을 막을 수 없다.
공은 물러나는 체하여 후일을 도모하라 !
이에 김양이 포위를 뚫고 나와서 한기시에 이르렀고 ,
김균정은 반란군에게 살해되었습니다
김양은 하늘을 향하여 통곡하면서 태양을 두고 결심을 다진 다음 ,
아무도 모르게 산야에 숨어서 때가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개성 2년(희강왕2년 , 837년) 8월이 되자 전 시중 김우징이 남은 군사를 수습하여
청해진으로 가서 대사 궁복(장보고)과 손을 잡고
불공대천(불구대천)의 원수를 갚고자 했습니다
김양은 이 말을 듣고 참모와 병졸들을 모집하여
3년(838년) 2월에 해중으로 들어가 김우징을 만나
그와 함께 거사할 것을 모의했습니다
3월에 청해진 정예군 5천 명을 거느리고 무주를 습격하여 성 밑에 다다르니
고을 사람들이 모두 항복했고
그들은 계속 진군하여 남원에 이르러 신라군과 싸워 승리했습니다
김우징은 군사들이 오랫 동안 싸워서 피로해졌다 하여
다시 해진으로 돌아가서 병마를 휴양시켰습니다
겨울에 혜성이 서쪽에 나타났는데 광채나는 꼬리가 동쪽을 가리키니
여러 사람들이 서로 축하하며 말했습니다
<여러 사람들>이는 낡은 것을 없애고 새 것을 펴며 ,
원수를 갚고 치욕을 씻을 좋은 징조이다.
김양을 평동장군이라 했는데
그들이 12월에 재차 출동하자 김양순이 무주 군사를 거느리고 왔으며,
김우징이 또한 용사들인 염장, 장변, 정년, 낙금, 장건영, 이순행 등 여섯 장수를 보내
군사를 거느리고 오자 군사의 위풍이 막강했습니다
북을 치며 행군하여 무주 철야현 북쪽에 도착하니 ,
신라 대감 김민주가 군사를 출동시켜 대항하였다.
장군 낙금과 이순행이 기병 3천 명을 거느리고 상대 군중으로 뛰어들어
그들을 모두 살상했습니다
민애왕2년 (839년) 정월 19일,
김양의 군사가 대구에 도착하자 민애왕이 군사를 보내 항거했습니다
김양의 군사가 이들을 역습하니 민애왕의 군사가 패배하여 ,
김양에게 생포되거나 죽고 노획 당한 것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습니다
이 때 민애왕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이궁으로 도망쳐 갔으나 군사들이 곧 찾아서 살해했습니다
김양이 이에 좌우 장군에게 명하여 기사를 인솔하게 하고 널리 알렸습니다
<김양>이 싸움은 본래 원수를 갚기 위한 것이었다.
이제 그 괴수가 죽었으니 의관 , 사녀(레이디) , 백성 모두는 각자 안심하고 살 것이며
망동하지 말라 !
그가 드디어 서울을 수습 정돈하니 , 백성들이 마음을 놓고 살게 되었습니다
김양이 이전 자기에게 활을 쐈던 배훤백을 불러 말했습니다
<김양>개는 저마다 제 주인이 아니면 짖는 법이다.
네가 네 주인을 위하여 나를 쏘았으니 의사로다.
내가 탓하지 않을 것이니 너는 안심하고 두려워하지 말라 !
(예전에 니가 민애왕 부하로서 나에게 활을 쏜건
부하가 해야할 마땅한 일이었으니 용서해주겠다)
여러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 말했습니다
<여러 사람들>배훤백에게도 저렇게 하니 다른 사람이야 무엇을 근심하랴 ?
그들은 감복하며 기뻐하지 않는 자가 없었습니다
(김양이 괜히 통일신라 정치질 만렙이 아님ㅋㅋ)
839년 4월에 왕궁을 깨끗이 정리하고 시중 김우징을 맞아 들여 왕위에 오르게 하니,
이가 곧 신무왕입니다
신무왕이 7월 23일에 죽고 태자가 뒤를 이으니 이가 문성왕이고
문성왕은 김양의 공로를 추가로 기록하여 소판 겸 창부령을 제수하고 ,
다시 시중 겸 병부령으로 전임시켰습니다
당에서 빙문(예를 갖추어 방문)하고 동시에 김양 공에게 검교 위위경을 제수했습니다
대중 11년(857년) 8월 13일에 김양이 자기 집에서 죽으니 향년 50세였습니다
부음이 알려지니 왕이 슬퍼하며 서발한(신라 최고벼슬)을 추증하고 ,
부의와 염장을 모두 김유신의 장례 때와 같게 하여 ,
그해 12월 8일에 태종대왕의 능에 배장했습니다
[김양의 사촌형 김흔]
김양에게는 사촌형 김흔은 자가 태이며 부친 장여는 벼슬이 시중 파진찬에 이르렀습니다
김흔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영특하였으며 학문을 좋아했습니다
장경 2년(헌덕왕14 , 822년)에 헌덕왕이 당에 사신을 보내려 했으나
적당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김흔을 추천하면서 말하기를
<어떤 사람>이는 태종의 후예요 , 두뇌가 총명하며 , 도량이 깊고 침착하니
뽑아 보낼 만합니다
고 하므로
드디어 그를 당에 보내 숙위하게 했습니다
그가 한 해 남짓 당에 있다가 귀국하기를 청하니
당황제가 조서로써 금자 광록 대부 시태상경을 제수했습니다
그가 귀국하자 국왕이 그가 왕명을 욕되게 하지 않았다 하여
특별히 남원 태수를 제수하였고,
그 후 여러 번 자리를 옮겨 강주 대도독에 이르렀으며,
얼마 안 되어 이찬 겸 상국 벼슬을 더 주었습니다
그는 개성 기미(신무왕 원년 , 839년) 윤 정월에 대장군이 되어
군사 10만을 거느리고 대구에서 청해진의 군사를 방어하다가 패전했습니다
김흔은 스스로 생각하기를 전쟁에서 패하였고 또한 전사하지도 못하였다 하여
다시는 벼슬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소백산에 들어가 칡옷을 입고 나물밥을 먹으며 중들과 함께 지냈습니다
(일단 줄 잘못타서 줄 잘탄 사촌동생 김양과 달리
청해진군이랑 싸우다 졌는데 자기때매 5만명 목날라간거 보고
충격이 커서 귀족에서 승려생활로 간듯)
대중 3년(문성왕11 , 849년) 8월 27일에 김흔은 병으로 인하여 산재에서 죽었습니다
향년 47세였습니다
그 해 9월 10일에 나령군 남쪽 언덕에 장사하였다.
아들이 없어서 그의 부인이 상사를 주관하였는데
그녀는 후에 비구니가 되었습니다
(삼국사기 본기에서는 김흔은 849년 김식이 반란을 일으키자 호응하다
반란실패후 처형당했다함)
이처럼 신라왕실은 다들 김씨일가로 서로 엮여있어서
반란이 일어나도 다 한다리건너 가조쿠들이었고
김양과 김흔을 보면 사촌끼리도
누구는 장보고군 줄을 잡고 대권을 잡고
누구는 민애왕에 충성하다 권력에서 밀린후 죽었고
통일신라 왕위쟁탈전은 골품제의 모순은 그대로 유지한채
골품들끼리의 싸움이었으며
백성들의 지지를 받지 못한 김씨들의 권력쟁탈전이라
참 허망한 일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라봉봉>참 장보고가 생각보다 더 저평가 된 인물같고
다들 고구려 멸망때문에 한민족의 진취적 기세가 꺾였다 하지만
멸망 이후에도 여러 기회들이 많이 , 충분히 있었고
여튼 이런 대단한 사람들이 나오면 적극 보호를 해줘야 하는데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은 해적출신이었던 프랜시스 드레이크를
보호하고 기사작위까지 내려주면서 바다패권을 잡고
영국이 해가지지 않는 나라라는 제국으로 가는 길을 열었는데
신라왕실에서 장보고를 더 믿어주고 달래주었다면
전 신라가 바다패권을 잡고 고대 한국인들이 중일을 넘어서
대만 , 동남아 , 인도까지 진출하는 그런 역사가
펼쳐지지 않았을까도 생각이 듭니다
원래 통일신라 후기 인물들 이야기를 다 쓸까 하려다
너무 길어져서 일단 장보고 주변인물들로 끊었고
다음 이야기때 통일신라 이야기가 끝날듯 하고
여튼 가히 해상왕이라 불려도 손색이 없을 인물이었고
이순신과 더불어 참 안타까운 죽음을 가진 인물이고
골품제의 희생양중 가장 큰 인물이
장보고가 아니었을까 싶고
이런 도적들 소탕하고 질서유지한 큰 인물을 죽이니
얼마뒤 신라가 도적떼로 뒤덮히고
국가 멸망테크를 탔다는 생각이고
지금도 대한민국 뛰어난 인물들 굉장히 많지만
그걸 발굴하고 쓰고 달래고 그들 능력 발휘시키는게 지도자의 역할이기에
참 지금도 대한민국 스티브잡스 , 빌게이츠같은 놈들 어디 중소기업이나 구로공단에서 썩고있을지도 모르고
김부식의 말이 참 100번 천번 맞는 말이란 생각입니다
한국 바다수호자 하면 장보고나 이순신이 빠질 수 없는데
이순신도 임진왜란 마지막 전투때
만약 살아남았다면 충분히 한양 진격해서
선조 축출하고 새왕조 건설할만한
군사력은 있었던 인물이기 때문에
역사가들이 이순신이 노량해전에서 죽지 않았다면 어떻게 됬을까 이런 생각들이 많고
장보고나 이순신이 더 살았다면 역사가 어떻게 흘러갈지 참
여러 생각이 드는 인물이고
이순신 장군의 고초와 대단함은 이루 말할 것 없이 위대하고 숭고하지만
특히 장보고는 국난극복형 위인인 이순신 장군과 달리
국가 최전성기시절 , 질서와 평화유지군을 이끌었단 점에서
역시 안타까운 인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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