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위례성을 수리한 온조왕>


온조왕 40년

9월 가을

말갈이 술천성을 침공했습니다


11월 겨울

말갈이 다시 부현성을 습격해서

백여 명을 죽이고 약탈했습니다


왕이 2백명의 정예 기병을 보내서

방어했습니다


온조왕 41년

정월(1월) 봄

우보 을음이 사망하자

북부의 해루를 우보로 임명했습니다


해루는 본래 부여 사람이었습니다


그(해루)는 도량이 넓고 식견이 깊으며

70세가 넘었으나

체력이 강해서 등용한 것이었습니다


2월

한수 동북의 모든 부락의

15세 이상되는 장정을 징발해서

위례성을 수리했습니다


<라봉봉>당시 백제 위례성일 가능성이

가장 유력하다는,가장 높다는

서울 송파구의 풍납토성은

최대 높이 13.3m의

아파트 5층 높이의 거대한 성벽이었고

이 성벽을 쌓기 위해 모인 인원만

1년에 138만명에 달했을 정도로

엄청난 규모였다고 합니다,,


너비 43m에 3.5km 둘레의 규모의 당시 동아시아

최대 규모의 초거대 토성으로

이는 백제가 그런 노동력을 확보할 수있는

행정조직,정치 체계,경제력등이 있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백제인들은 오늘날 서울특별시 송파구 지역의

풍납토성을

거점으로 해서

한강에 배를 띄워서 넓은 바다를 항해하며

무역을 하고 해양 대국으로 발전하게 됬습니다


또 근처의 몽촌토성은 평상시에는

풍납토성을 수도로 삼다가

전쟁시에 몽촌토성으로 피했다고

생각되고 있고


풍납토성,몽촌토성은 말그대로

돌로된 성인 석성이 아닌

흙으로 만든 토성으로


판축공법으로 만들었습니다

판축공법은

모래와 점토 등

토양의 여러 성분들을 혼합해서

꾹꾹 눌러 다져 흙이 달라붙어서

콘크리트 같이 단단하게 만든 기법으로

당대 최고 과학기술 공법이었고

이는 백제의 우수한

과학기술력을 보여줍니다

백제에서 주로 사용된

고대의 중요 토목기술이었습니다

이렇게 기본적인 백제의 방어벽이었던

토성과 목책(나무 울타리)는 왜국,

일본에 전해져서 일본 성들의

축조에 영향을 끼쳤습니다

일본 사극이나 일본 역사 만화등에도

흔히 나타나는거 같습니다


<온조왕의 죽음>


온조왕 43년

8월 가을

온조왕이 5일 동안

아산벌(벌판이나 언덕 ??)에서 사냥했습니다


9월

1백여마리의 기러기가

왕궁에 모였습니다


점치는 자가 말했습니다


<점쟁이(점치는 자)>기러기는

백성의 상징이므로

장차 먼 곳에서 귀순하여 오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


10월 겨울

남옥저의 구파해 등

20여 명이 부양에 와서

귀순했습니다


온조왕은 이들을 받아들여서

한산 서쪽에 거주하도록 했습니다


온조왕 45년

봄과 여름에 큰 가뭄이 들어서

초목이 말랐습니다


10월 겨울

지진이 발생해서

백성들의 가옥이 기울거나

쓰러졌습니다


온조왕 46년

2월 봄

온조왕이 붕어(사망)했습니다


<온조왕>쓸모없는 사람같이

답답하고 우울하게 지내지 않고

고구려를 나와서

찬란한 백제를 세웠으니

이 또한 멋진일이 아니겠는가 ?


<라봉봉>그렇게 백제의 시조,건국왕 온조왕의

이야기였고

역사 기록에서는

그의 유능한 능력 이외에도

진심으로 백성을 사랑하고

위했던 애민정신이 느껴집니다


반응형
Posted by 라봉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