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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루왕의 *내정>


(*내정 內政 안살림살이, 국내의 정치)


백제 2대왕 다루왕

재위기간 49년 28~77년


다루왕은 온조왕의 맏아들입니다


그는 도량이 넓고

명망이 높았습니다

(그릇이 크고 넓으니

위망[위세와 명망]이 있었습니다)


온조왕 재위 28년에

태자가 됬고

온조왕 46년

온조왕이 붕어(사망)하자

그 뒤를 이었습니다


다루왕 2년

정월(1월) 봄

다루왕이 시조 동명왕의 사당에

배알했습니다


백제 시조는 다루왕의 아버지인

백제 1대왕 온조왕이나

다루왕은 할아버지 주몽,동명왕을

시조로 모셨다는게 특이한 기록 같습니다


2월

다루왕은 남쪽 제단에서

천지신명에게 제사를 지냈습니다


다루왕 3년

10월 겨울

동부 흘우가 마수산 서쪽에서

말갈과 싸워서 승리했습니다


이 전투에서 죽이거나 생포한 자가

매우 많았습니다


다루왕이 기뻐해서

흘우에게 말 열필과

벼 5백석을 상으로 주었습니다


다루왕 4년

8월 가을

고목성 곤우가 말갈과 싸워서

크게 이겼습니다

2백여명의 머리를 베었다고 합니다,,


9월

다루왕이 횡악(서울 삼각산의 백제시대 이름)

아래에서 사냥하다가

두마리의 사슴을 연이어 적중시켰습니다


<백제 신하들>오오,, 할아버지 동명왕(주몽)을

꼭 빼다닯으셨군요,,


많은 사람들이 감탄하고 칭찬했다고 합니다,,


다루왕 6년

정월(1월) 봄

다루왕은 맏아들(첫째아들) 기루를

태자로 삼고

죄수들을 크게 사면했습니다


2월

남쪽 주군 州郡 (주와 군, 즉 지방)에

명령해서

처음으로 논에서 쌀농사를 짓도록

했습니다 始作稻田


쌀농사는 다루왕 이전부터

시작됬지만

땅에 물을 가둬놓고

벼를 재배하는 논농사는

기록상으로는 백제 다루왕 6년대부터

시작된거 같고

논농사는 이후 일본으로 전해진것으로

보인다고 합니다


고대사회부터 근대시기 이전인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쌀은 곧 국력이었고

다루왕대의 이 기록은

백제가 철제생산 도구의 확대로

노동력 절약,

경작지 확대로 이로인해

생산력 증가가 되었고

이로인해 잉여(남는)생산물이

축적됬다고 본다고 합니다


실제로 백제가 자리잡은 마한땅은

비옥한 땅이 많았고

바다로 진출하기도 쉬웠고

이는 백제가 삼국중에서

가장 먼저 전성기를 맞게되는

요인으로 작용하게 됬습니다


다루왕 7년

2월 봄

우보 해루가 90세의 나이로

사망했습니다


<다루왕>아아, 해루는

부여출신으로 아버지대의 명신이었다


다루왕은 다음 우보(백제 최고위직)에

동부 흘우를 우보로 삼았습니다


현존하는 우리나라 최초의 족보

'전씨세보' 에는

흘우는 백제 시조 온조왕이

남쪽으로 옮겨가서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백제를 개국할 때 공을 세운

10명의 십제공신 十濟功臣 중

한명이라고 합니다

(온조왕과 백제를 건국한

10명의 신하, 십제공신은

전섭,마려,오간,을음,해루,

흘간(흘우 같습니다,,),곽충,한세기,범창,조성)


4월 여름

동방에 붉은 기운이 나타났습니다


9월 가을

말갈이 마수성을 침공해서

함락시키고 불을 질러서

백성들의 가옥을 태웠습니다


10월 겨울

그(말갈)들이 또 병산책을 습격했습니다


다루왕 10년

10월 겨울

우보 흘우를 좌보에 삼고

북부 진회를 우보로 삼았습니다

(좌보,우보는 백제 최고위 관직,재상직)


11월

지진이 났는데 우레(천둥) 같은 소리가 났습니다


다루왕 11년

가을

곡식이 잘 익지 않았기 때문에

백성들이 사사로이 술빚는 것을 금지했습니다


술은 예로부터 백성들의 애환이 서려있는

친구라고도 할 수 있었지만,,

또한 술을 빚으려면(만들려면)

곡식이 많이들어서

예로부터 흉년이 들거나 할때는

나라에서 금지하기도 했습니다


10월 겨울

다루왕이 동서 양부를 순회하며

백성들을 위무하고

가난해서 자력(스스로의 힘)으로

살 수 없는 자들에게는

일인당 곡식 두 섬을 주었습니다


<백제 백성 1>아버지 온조 건길지(왕)같이

성군이시구만 !


<백제 백성 2>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여 ~


<라봉봉>백제 2대왕 다루왕 역시

아버지 온조왕 같이

말갈과 싸우면서도

계속 내정을 살피려 했던 왕이라 하고

아버지가 건국왕 온조왕이기에

아버지의 명성에 묻히는 감은 있는거 같으나,,

무려 49년(50년)이나 재위했고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백성을 위하고

내정을 착실히 다져서

700년 백제의 기틀을 다지신거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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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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