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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이왕 29년

정월(1월) 봄

고이왕은

명령을 내려서

관리로서 뇌물을 받거나

도적질한 자는

그 세 배를 배상하며

종신 금고형(終身禁錮 종신금고(삼국사기 기록에는

금고종신),

죽을때까지 금고함,

죄를 지은 사람은

한평생 벼슬에 등용하지 않음)

에 처하라 했습니다


<고이왕>관리는 마땅히

백성들에게 모범을 보여야 할 것인데

권력을 이용해 사리사욕을 채운다면

내 그 어떤 관리도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뇌물을 받은 자는 모두 3배로서 배상하게하고

다시는 벼슬에 오르지 못하게 하라 !


<백제 귀족들>(뜨끔);;;;;;


고이왕 33년

8월 가을

군사를 보내서 신라의 봉산성을

공격했습니다


봉산성 성주(성의 주인,성의 우두머리)

직선이 장사 2백명을 거느리고

반격해서 우리 군사가 패배했습니다


고이왕 36년

9월 가을

혜성이 자미궁 성좌에 나타났습니다


고이왕 39년

11월 겨울

군사를 보내서 신라를 침공했습니다


고이왕 45년

10월 겨울

군사를 출동시켜서 신라를 공격해서

괴곡성을 포위했습니다


고이왕 50년

9월 가을

군사를 보내서

신라의 변경을 침공했습니다


고이왕 53년

정월(1월) 봄


<고이왕>아아,, 나도 결국

죽을때가 오는거 같구나,,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게 인생이거늘,,


신라에 사신을 보내서

화친하도록 하여라


고이왕은 신라에 사신을 보내서

화친을 요청했습니다


11월 겨울

고이왕이 붕어,사망했습니다


<고이왕>내가 백제의 기틀을 다졌기에

이후 백제는 찬란한 전성기를 맞을수 있었다네 ~


<라봉봉>그렇게 백제의 중앙집권화를 시작한

고이왕의 이야기였고

그의 집권 중후기에는 귀족,관리들이

뇌물을 받거나 도적질 한 자에게

엄격한 모습을 보여줬고


귀족들의 부정부패는

곧 백성들의 생활고,

극심한 피해로 이어지기에

이는 그의 백성을 위하는 마음인

애민정신이 느껴지고


그런 귀족들을 견제할 수 있었을 정도로

고이왕 당시의 왕권이 강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이야기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에게도

충분히 본보기,귀감이 될 이야기입니다


지도자가 이끄는 집단을 견제할 수 있으려면

스스로 부터 부정부패와

거리가 멀어야 하는데

그렇기에 유능하다는 것은 곧

도덕성과 비례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또 고이왕 집권 후기에

계속 신라를 공격하다가

재위 말년(일생의 마지막 무렵)에는

갑자기 신라에 화친을 요청한 이야기는

그가 집권 초기에 여러 사냥과

무력적인 모습을 보여주다가

죽음 직전에 전쟁으로 인한

살생이나 그런것에 대해

고민했던 흔적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와 별개로 고이왕대의

6좌평 제도같은 제도는

같은 시대 중국의 제도보다

발전된 것이기에

백제 26대왕의 성왕대의 것을

백제 8대왕 고이왕대로

앞당겨진게 아닌가 보는 학자들도

많다고 합니다


그러나

한국에서도 중국보다 앞서

발달한 기술이나 제도들이

나타나기도 했는데

굳이 거짓말을 상세히

기록했을지도 모르겠고

앞서 우리가 시작하고

중국과 활발히 교류한 백제의

정치,문화들이 중국에 영향을

끼친 경우도 배제할 수 없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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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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