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사실 멸망하지 않은 고구려, 고구려 이야기 끝>


의봉(당나라 고종의 9번째 연호로

고구려 멸망후 기록에는

나라가 없기에,, 당고종의 연호가 붙습니다,,) 2년

2월 봄 정축


항복한 고구려의 보장왕을

요동주 도독으로 삼고

조선왕으로 봉했습니다

그리고 그를 요동으로 돌려 보내서

남은 백성들을 수습해서

안정시키게 했습니다


이때 동방 사람으로서

이전부터 여러 주에 살고있던 자들을

모두 왕과 함께 돌아가게 했고

안동 도호부를 신성으로 옮겨서

통할하게 했습니다


보장왕은 요동에 도착해서

당나라에 대항하고자

비밀리에 말갈과 내통했습니다,,


개요(당고종의 12번째 연호) 원년

보장왕은 양주로 소환됬고

영순 초에 붕어,사망했습니다


고종이 그,보장왕에게

위위경을 추증하고

조서를 내려서 영구를 서울로 오게해서

돌궐왕 힐리(힐리 가한)의

무덤 왼쪽에 장례를 지냈습니다

묘 앞에 비를 세웠다고 합니다


그렇게 고구려 마지막 왕

28대왕 보장왕은

나라를 잃고 먼 타향에 묻히게 됬습니다,,


그 백성은 하남,농우의 여러 주에

분산 거주케 됬습니다


그 가운데 가난한 자들은

안동성 부근의 옛성에서

머무르게 됬습니다


그러나 일부는 신라로 도주하고

남은 사람들은 흩어져서 말갈과

돌궐로 갔습니다


마침내 고씨의 왕통의 끊어졌다고 합니다,,


수공(당예종 3번째 연호) 2년

항복한 보장왕의 손자 보원(고보원)을

조선군왕으로 삼았다가


성력(측천무후의 10번째 연호)에

좌응양위 대장군으로 승진시키고

다시 충성국왕으로 봉해서

안동의 구부를 줘서

통치하게 했으나

부임하지는 않았습니다


이듬해(다음해)에

아복한 보장왕의 아들

덕무(고덕무)를

안동 도독으로 삼았는데

후에 조금씩 스스로

나라의 기틀을 세우고

원화 13년에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서

악공을 바쳤다고 합니다,,


<김부식>논평한다

현토와 낙랑은 원래 조선의 국토로서

기자가 봉해졌던 곳이다


기자는 백성들에게 예의와 농사와

누에치기와 베 짜는 법을 가르치고

8조의 금법을 만들었다


이리하여 이곳 백성들은

서로 도둑질하지 않고

대문을 닫지 않고

부녀들이 정조와 신의를 지켜

음란하지 않고,

음식을 먹을 때 그릇을 사용하였다


이는 어질고 현명한 사람의

교화가 미친 탓이었다


또한 그들은 서,남,북방의 오랑캐들과는

달리 천성이 유순하였다

이리하여 공자는 자기의 도가

중국에서 행하여지지 않음을 슬퍼하고

바다에 배를 띄워 이곳에 살고자 했으니

이 또한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주역의 괘가

효이 爻二 를 다예 多譽

효사 爻四 를 다구 多懼

라 한것은

군위 君位 에 가깝기 때문이다


고구려는 진,한 이후로

중국의 동북방의 한 쪽에

끼어 있었다


북쪽 인근 지역들은

모두 천자가 관리를 보내서

통치하고 있었다


그러나 혼란의 시기에는

영웅들이 나타나

참람되게도 황제의 이름과

지위를 차지하려 하였다


그러므로 고구려는 실로

다구 多懼 (직역하면 많은 두려움, 다사다난)

의 지역에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고구려는 겸양하려는 생각없이

천자의 영역을 침노하여

원수를 맺었으며

천자의 군현에 들어가 살기도 하였다


(김부식님은 당대 부족한 자료와

한국,중국의 역사서등을 참고하시며

삼국사기를 쓰셨기에

오늘날 밝혀진 것같이 동이족,

한국인 조상들의 분포지역이

북경,산동지방이었다는것을

모르고 이렇게 기록했다고 할수있습니다


즉 중국 황제의 땅에 들어가서

우리가 산게 아니라

원래 우리영토였습니다,,


사대주의적으로만 보기보다는

현실주의적,당대 시대의 한계적인

논평이라 할수있습니다)


이에 따라

전쟁이 계속되고 화근이 맺어졌으므로

평안한 해가 거의 없었다


평양으로 도읍을 옮긴 때는

수,당이 중국의 통일을 이루었던

시기에 해당한다


이때 고구려는 오히려 불손하게도

중국의 조서와 명령을 거역했으며

천자의 사신을 토방에 가두기도 하였다


고구려는 이와 같이 고집스럽고

겁이 없었기 때문에

여러 번이나 죄를 묻는 정벌의

군사를 부르게 되었다


그리하여 비록 어떤 시기에는

기묘한 계책으로

대군에게 승리를 거두었던 적도 있었으나

결국은 왕이 항복하고 나라가 멸망하였다


고구려 전체의 역사를 살펴보면

임금과 신하가 화평하고

백성들이 서로 화목했을 때는

비록 대국이라 할지라도

고구려를 빼앗지 못하였지만


나라에 정의가 사라지고

군주가 백성들을 사랑하지 않아

그들의 원성이 일어난 뒤에는

나라가 붕괴되어 스스로 일어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맹자는


'전쟁의 승리에 있어서

시기의 이로움과 지형의 이로움이

인심의 화목함만 못하다'


라고 말했으며

좌씨는


'국가는 복으로 흥하고

화로 망한다


나라가 흥하려면

군주가 자기 몸에 난

상처를 보듯이

백성을 보살펴야 하나니

이것이 복이다


나라가 망하려면

백성을 흙먼지 같이 여기나니

이것이 화이다'


라고 하였다


이 말은 의미심장하다


이 말들은

그렇다면 무릇 나라를 맡은

군주들이

횡포한 관리들을 풀어놓아

백성을 구박하게 하며,

권문세가들로 하여금

가혹한 수탈을 일삼게 하여

인심을 잃게 되면


비록 정치를 잘하여

혼란을 제거하고

나라를 유지하여

망하지 않게 하려고

노력할지라도

이것이 또한 억지로 술을 권하면서도

취하는 것을 싫어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


<라봉봉>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보장왕 하 下 까지 끝났습니다

고구려 왕조의 시작부터 마지막 왕

보장왕,고구려 부흥운동까지 쓰며

고구려 이야기가 끝나게 됬고


시조 주몽부터 대무신왕까지는

빈약하게 기록한게 있는거 같아서

다시 쓰고 이후 백제 이야기를

할거 같습니다,,


비록 망국의 왕이었고

연씨일가에 주도된 정치에서

숨죽여 지내야했던

허수아비왕 보장왕이었으나


그 역시 마지막 고구려인답게

멸망 이후 요동에 가자

고구려 부흥운동을 계획하려다

당나라에 들켜서

유배보내진거 같습니다,,


김부식님의 사론은

중화 중심적인것도 있으나

당시 역사적 자료들이

많았던 시대도 아니었고

당시의 기술력과 자료,자본등의

한계에서는 최선을 다한

평이라고 생각됩나다


그러나 중국의 영토에 우리가 무례하게

침입해서 산것은 사실이 아니고

옛날 동이족의 분포 범위는

북경과 산동반도 일대까지 펼쳐져 있었으며

원래 우리의 영토였고

고구려인들은 끊임없이

중국에 뺏긴 조선,고조선 선조들의

영토를 되찾으려 했습니다


김부식님의 평 마지막 같이

나라가 멸망하지 않고 후손들이

계속 이 땅에 살아갈 수 있게 하려면

백성을 사랑하고 어진 정치를 해야한다는 것이고

이는 기본중의 기본이라 할수 있습니다


그렇게 고구려 마지막 이야기는 끝났으나


고구려의 장수왕대부터 사용한 국호인

고려라는 이름은 이후

태조왕건이 건국한 고려의 국호로 사용하며

계승되었고


고려와 무역을 했던 이슬람,서역 상인들에게

고려는 코리아라는 이름으로 세계로 알려지게됬고


코리아 KOREA는 오늘날에도

대한민국의 영어 국호이며

한국인들을 영어로 코리안이라고 부릅니다


코리아는 즉 고구려,고려이며

고구려는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역사입니다


즉 오늘날에도 대한민국은 코리아기에

사실 고구려는 멸망하지 않았습니다 !! ^*^


반응형
Posted by 라봉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