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로마 평민파와 귀족파의 대립에서 승리한 귀족파 술라>


그렇게 포에니 전쟁 이후

급격히 팽창한 영토, 식민지에서 들어오는

값싼 자원들과 중산층의 몰락 등 여러

급격한 사회변화가 있던 로마에서는

그라쿠스 형제가 토지 배분등 개혁정책을 시도했으나

형과 동생 모두 암살당했고,,(동생은 자결이나 압박속에

사실상 암살)

일단 그런 반발등에 로마 원로원(지배계급)은

그라쿠스 형제를

죽게 해서 급한 불은 껐지만

점점 평민파의 대두 등이나

몇명의 호민관들이 원로원에 도전하다 죽는 일들도 있었고

그 와중에 누미디아 왕국 왕 유구르타가 로마에

반기를 들어서 유구르타 전쟁이 일어났는데

평민파 인물인 가이우스 마리우스는 이 전쟁을 진압하며

새로운 로마의 인물로 나타났고


(이때 마리우스는 병사들과 같은 음식을 먹고

같은 곳에서 자며 병사들이 참호파기나 목책 세우기 등의

고된일을 할 때에도 손수 도우며 환심을 샀다고 하고

전장에서 앞장서서 지후해서 병사들에게 신임받게 됬다고 합니다)


가이우스 마리우스는 군제를 징병제에서 모병제로 개혁함으로서

무산자 계급, 몰락한 재산없는 중산층 등 로마 시민들을

로마 군단으로 흡수했는데

이는 당시로서 적절한 방향이었음에도

문제는 이때에도 역시 그라쿠스 형제가 주창했던

'토지개혁'은 쏙 빠져있어서 (그라쿠스 형제의 최후가 끔찍했던거로

보아 함부로 건들이기 어려운 문제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모병제임에도 재원 마련등 문제로

사병화가 되었다고 할 수 있고

이에 로마에 쿠데타 등 월권행위들이

나타나며 점점 로마 공화정이 무너져가고

제정(황제 국가)으로 가게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로마는 징병제에서 모병제로 변환되나

마리우스는 병사들의 퇴직금으로 지급해야 되는

농토 배급 문제로 원로원과 마찰을 겪고

마리우스 파의 호민관 사투르니누스가

그라쿠스 형제가 발의한 것과 같은

국유지를 퇴직금으로 나눠주자는 농지법을

통과시키려 하다

절대로 토지를 줄 수 없다는 원로원의 반발로 목숨을 잃게 되고

마리우스 역시 현직 집정관으로 이러한 사태를 수습하지 못하고

실각하게 됩니다


그러다 다시 마리우스가 정권을 잡으려다

술라라는 귀족파 인물과 내전을 벌이게 되고

술라는 마리우스 파(평민파)를 진압하고

마리우스 파,평민파를 살생부를 만들어서 대거 숙청하고

임기가 정해지지 않는

독재관이 되는데 즉 제정으로 가는 길을 터놓게 됩니다,,

그리고 술라는 원로원 정원을 300명에서 600명으로 늘리고

로마 원로원 귀족의 독재는 계속되다가

술라는 나름 귀족파(옵티마테스)의 대표로서 끝까지

옵티마테스적 모습을 보이며 독재관을 은퇴하고

다시 집정관직을 복원시키는데

이는 나름 끝까지 독재관에 집착하지는 않는

귀족적인 모습을 보였다고 할 수 있고

술라는 이후 만성적인 알코올 중독에 빠지다

급성 간경화 혹은 위출혈로 사망하는데(추정)

그의 묘비에는 그가 생전 생각한 문구인


'동지에게는 술라보다 더 좋은 일을 한 사람이 없고,

적에게는 술라보다 더 나쁜 일을 한 사람도 없다'


라고 기록된 것으로 보아

비록 민중파의 요구를 진압, 묵살한 인물이나

자신의 사람들은 팍팍 밀어 주려 하고

나름 원칙은 지키려 했던

귀족정의 대표로서 군림했던 인물이었다고 할 수 있고

나름 그가 정권을 잡고 개혁을 하기는 했으나

역시 귀족의 대표로서 귀족,원로원 권력강화,유지에 급급했고

별다른 개혁은 없고 오히려 생전 그에게 권력이 집중됨으로서

로마 공화정이 붕괴되고 제정으로 가는 길을 열게 했던

인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귀족파(옵티마테스) 술라의 집권기동안 큰 타격을 입은

평민파(민중파, 포풀라레스) 세력에서는

평민파 대표였던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조카이며

'로마가 낳은 유일한 창조적 천재' 라고 불리는

또 전설적인 이름이 된 어느청년인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등장하게 됩니다


<카이사르의 등장>


로마의 전설적 인물인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평민파 대표였던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조카였는데

술라가 정권을 장악하고

살생부를 만들어 대숙청을 벌일때 역시

집안이 평민파,마리우스파였던

그도 피해갈 수 가 없었고

당시 카이사르는 19살의 나이였기에

(카이사르의 아버지는 카이사르가 16살때

신발을 신다가 별 이유도 없기 갑자기 죽었다고 합니다,,)


술라는 카이사르를 숙청 대상으로 지목하지는 않았는데

술라는 카이사르에게

정적이었던 민중파의 우두머리인 루키우스 킨나의 딸

코르넬리아와 이혼하라는 지시를 내리나

젊은 카이사르는 술라의 이혼 명령을 거부해버립니다


<로마 시민 1>저나이에 술라한테 거역하다니 배짱보소,,


<로마 시민 2>카이사르 쟤 저럴줄 알았다 이기야,,


당대 로마는 주변에 맞설 세력이 없던

당대 최강의 나라였는데

그런 나라의 독재자의 명을 거부했던

패기의 젊은이 카이사르였고

이때부터 카이사르는 보통의 인물로 여겨지지 않고

로마 사회에서 제대로 '찍히게' 됩니다


술라도 처음엔 카이사르를 죽이려다가

카이사르 집안 역시 마리우스파였으나

카이사르 역시 유력가문이었던 외가가 귀족파의 일원이었고

(역사에서는 귀족들끼리 내부 다툼이 일어나도 상류층 자체가

서로 사돈지간 등 엮여있는 모습들은 흔했던거 같습니다

저는 그래서 여당, 야당 국회의원들이

카메라 앞에서는 싸우다가

카메라가 꺼진 후 같이 밥먹거나 사우나간다는 이야기들이

뭔지 알거 같습니다)


결국 사람들의 사면요청에 못이겨

술라는 카이사르를 사면해주는데

결국 술라는 카이사르를 살려달라는 탄원을 수락하며


<술라>카이사르의 속에는 백명의 마리우스(평민파 대표)가

들어있다


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아마 이는 술라는 카이사르가 비범한 인물임에

비록 반대파격 위치에 있었음에도

죽이기에도 아까운 인물이라고 생각한 면도 있었던거 같고

(또 거물은 거물을 알아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젊은 카이사르가 로마 독재자 앞에서

이런 배짱을 부릴 수 있었던 이유는

기본적으로 카이사르는 민중의 마음을 잘 헤아리는,

읽는 인물이었고

술라가 그냥 트집한번 잡으려

카이사르에게 이혼을 명령했는데

나름 카이사르는 이거를 거부해

순정파 인물이라는 이미지와

독재자의 명령을 거부한

배짱있는 대단한 인물임을 어필 할 수 도 있고


특히 강제 이혼 거부명령은 순정파 이미지로

나름 여성들,여성계의 지지를

얻을 수도 있었기에 실제 이 때

당시 '베스타 신전의 여사제'들도 카이사르의 사면을 요청해서

결국 술라도 그의 사면을 허용했고

단순히 배짱있거나 용기도 다 원래

철저하게 계산한 자들이 하는 것이지

만약 계산 실패로 잘못 배짱을 부리거나 헛된 용기를 내면

이미 역사에서 사라졌다고 할 수 가 있는 것이고,,

역사에서 다 배짱있거나 대범하고 용기내는 인물들은

기본적으로 되게 계산적이고 똑똑합니다,,


즉 카이사르는 단순히 어린 마음에 술라에 맞선 것도 아니고

모두가 술라에게 길때,, 혼자 NO 하며(죽지는 않을 정도에서,,)

맞서며 로마 사회에 관심, 요즘말로 어그로를 제대로 끌었고

상당히 계산적으로 명성을 얻으려 맞섰던 사건으로 보여집니다

당시 술라도 10대 청소년이 자신의 요구를 반대했다는 것에

어처구니 없음과 동시에 큰 인상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카이사르는

술라의 사면을 받지만 안전을 확신하지 못해 로마에서

술라를 피할겸 로마군에 입대합니다


그렇게 야심있고 또 매력적인,

인기있는 젊은이엇던 카이사르는

이후 군대에서 동성애 소문이 나는데

진짜던 가짜던간에 이는 그의 큰 매력에서 나왔다고 할 수 있고

그는 기본적으로 민중, 사람들의 마음을 잘 헤아리고 읽었던

인물이라 할 수 있기에 아마 이런 소문들 역시

자신의 유명세에 활용했던게 아닐 까 싶습니다


기원전 80년 술라는 독재관에 오른지 2년만에

사임하고 로마는 다시 집정관제를 복원했고

술라는 집정관에 재직하고 정계에 은퇴한 후

일반 사람으로 돌아오는데

나중에 카이사르는 술라가 독재관직을 포기한 일을 두고


<카이사르>술라는 정치의 가나다도 모른다


라고 비웃었다고 합니다,,


술라는 그렇게 정계 은퇴 2년 뒤 사망했고

국장이 열립니다

술라의 사망소식을 들은

안전을 확신하고 로마로 돌아오고

유산이 몰수당해서 재산이 없던 그는

하층민들이 사는 수부라에 평범한 집을 얻고

변호사 일을 시작하는데

실력도 좋고 부패나 비리를 저지른 고위 관료들도

거리낌없이 비판,고발하며 명성을 얻게됩니다


키케로는 카이사르의 변론을 보고


<키케로>이제 나와보라, 어느 웅변가가 그대를 능가하겠는가 ?


라고 높게 평가합니다


카이사르는 엄청나게 책을 많이 읽었다고 하고

'패기있는 어린 애송이' 카이사르가 젊은 시절에 승승장구한 인물은

아니지만 장년기에 대단한 행보를 보일 수 있었던 것은

어릴 적 부터 쌓아온 학문적인 기반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런 유형의 인물을 대기만성 大器晩成 (큰 그릇은 늦게 이루어진다,

크게 될 인물은 오랜 공적을 쌓아 늦게 이루어짐)

형 인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직 카이사르는 정치에 본격적으로 입문하기 전

단계의 젊은 어린 '애송이'였다고 할 수 있으나

젊었을때에도 여러 비범하고 독특한 모습을 보이며

로마인들에게 그를 각인시키던 단계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라봉봉>율리우스 카이사르, 영어로는 쥴리어스 시저라고 불리는

그는 로마의 개혁가이자 독재자였고

민중의 마음을 헤아린 인물이면서도

사람들의 환심을 사려 돈을 뿌린

인기 영합주의적 인물이기도 했으며

비범한 재능으로 로마를 혼란에 빠트리거나

혹은 개혁했던 인물이고 여러 이야기를 남긴 인물이기에

그의 이름 자체가 곧 황제가 되었다고 할 수 있는거 같고

젊은 시절부터도 되게 배짱있고 비범한 모습을 보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 유명한 그의 이야기로는

그의 이름이 곧 카이사르, 카이저 즉 황제가 됬는데

카이사르는 최초의 제왕절개로 태어났다는 설이있고

이 때문에 산모의 배를 갈라 아이를 꺼내는 수술을

제왕절개 帝王切開 Caesarean section 이라 부른다고 합니다

(물론 후세에 만들어진 전설로 실제로는

절개라는 독일어가 카이사르의 이름과 비슷해서

영어로 번역될때 와전됬다고 하고 당대 마취도 없는시절

제왕절개를 하면 곧 산모의 죽음이었고 카이사르의 어머니가

이후 등장하기에 이는 전설일 뿐이라고 합니다)


반응형
Posted by 라봉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