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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에니 전쟁 이후의 로마>


그렇게 고대 지중해 세계의 운명을 바꿨던 대전쟁

포에니 전쟁은 로마의 승리로 끝나면서

옛날 지중해 바다를 호령했던 카르타고는 멸망했고

그 지역들은 로마의 세력에 편입됬는데

카르타고는 매우 풍요롭고 비옥했던 부국이었고

이런 카르타고의 자원들은 로마로 흘러들어가게 됩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


라는 말은 결코 비유적 표현이 아니라

실제였고 그렇게 로마는 세력권이 매우 넓어지게 되며

당대 지중해 세계 곳곳의 자원들이 로마로 향하게 됬습니다


<라티푼디움 대농장 경영으로 인한 풍요와 사회양극화>


더이상 지중해에서 견제 세력이 없어진 로마인들은

또 카르타고에서 나오는 풍부한 자원 이외에도

카르타고 명장 한니발 장군을 상대할 때 습득한 한니발의 전략,전술을

그대로 흡수한 로마인들은 이 전술들을 토대로

주변 국가들을 제압하며 인간병기,전쟁기계화 되며,,

영토를 확장해 나가기 시작했고


'땅 짚고 헤엄치기' 라는 말 같이

귀족들은 풍요롭고 넓어진 영토들을 바탕으로

재산을 증식해나가던 시기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로 인해 생겨난 것이 대농장, 라티푼디움인데

수많은 정복전쟁으로 땅이 넓어지자

또 카르타고의 영향을 받아서

다수의 노예를 이용한 농장경영을 시작했고

이를 '라티푼디움'이라고 합니다


원래 로마는 이탈리아에 양치기 청년들이 모여 건국한 나라로

그렇게 시작한 나라답게 상당히 검소하고 건전한 기풍이 있었고

농업 형태는 중산층이 자신이 소유한 땅에서 농사를 짓는

'자영농'의 형태였는데

포에니 전쟁 이전 로마에서 이 '중산층'의 역활은 농업 이외에도

전쟁시기에는 농업을 제쳐두고 나가서 싸우는

중요 전력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로마 주요 전력이었던 '중장보병'은

바로 로마 자영농,시민들이였습니다

시민들이 자신의 돈으로 무장했고 귀족들은 기병,

하층시민은 간단한 투구나 늑대 가죽을 쓰고

투창이나 돌팔매 등 [교란용] 경장보병이 됩니다,,

[철저한 계급화 군대,,]>


포에니 전쟁 이후 대규모의 영토와 값싼 노예들이 로마로 밀려들어왔고

중산층 자영농들은 농사를 포기하고 전쟁에 참여했는데도

전쟁 승리에 대한 분배가 없이 귀족들에게만 영토와 노예등의 보상이

집중됬다고 할 수 있고

그러면서 건강하고 건전하며 소박했던 기풍의 로마는

점점 풍요와 사치스러운 기풍으로 바뀌게 됬고

'중산층의 몰락'이 시작되고 중산층,자영농들은 몰락하고

라티푼디움, 장원영주는 성장하며

사회적으로 양극화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


이때 등장한 인물이 바로 그라쿠스 형제이고

형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와

동생 가이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를 같이 해서

'그라쿠스 형제' 라 부르고

이런 형제들이 같이 세계사에 업적을 남긴 경우에는 이외에도

독일 '그림(사람 이름이 그림입니다) 형제의 동화 집필' 나

미국 '라이트 형제의 비행기 발명' 등이 있는데

의외로 혼자 나온 위인 말고도

프랑스 퀴리 부부의 라듐발견도 그렇고 가족들이 같이 역사에

이름을 남기는 경우도 의외로 꽤 있는데

역사적으로 혈연 상속,가족 경영 등은

고질적인 문제가 있었다고도 할 수 있지만

또 대신 가족이기에 편안하게 오랜 시간동안 함께하며

같이 연구를 한다거나 하는 그런 점도 있기도 하고

아무래도 가족중에 한명이 특출난 모습을 보이면

자연히 집안에 그런 연구자료나 흔적들이 가득해지기에 

자연히 영향을 받아서 이런 모습들이

나타나는거 같기도 한데,, 아무튼 그라쿠스 형제 역시

이런 모습을 보였던거 같습니다


<그라쿠스 형제>


당대 로마는 법이 발달한 나라 답게

정치 역시 발달한 나라였는데

당대 로마의 정치 체계는

왕이 없는 대신 선출직인 집정관이 오늘날 대통령 같은 역활을 했고

또 원로원이라는 귀족 회의기구가 있어서

오늘날 국회격을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정치 시스템과도 비슷한

상당히 민주적 체계의 시스템이라 할 수 있는데


여기서 특이한 로마의 시스템은 '호민관'이라는 존재였는데

집정관이 대통령 격이고 원로원이 국회의원 격이었는데

당대 로마는 집정관보다는 원로원의 영향이 컸던

사실상 귀족 국가였다 할 수 있고

원로원은 귀족들의 이권,이익에 집중했는데

이에 '평민'들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한 '호민관'이라는 직책이 있었는데

이 호민관이라는 직책은 오늘날에도 딱히 뭐라 비유하기 어려운 직책으로

중간 관리직의 성격을 띄고 있기도 하면서도

굳이 비유하면 기업,자본가(당대로 치면 귀족)들의

횡포를 막는 '고용노동부 장관'격이 아닐까도 싶고

대신 장관정도라 해도 매우 강력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던

직책이 호민관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근데 장관이나 중간관리직이라고만 보기엔

그 권한이 매우 쎘는데

대통령 격인 집정관에 대한 거부권과

사실상 독립된 입법,사법권을 가진 막강한 관직인데

아무래도 집정관이나 원로원처럼 대표적인 느낌이 없어서인지

비인기 직종같고

딱히 당대에도 그냥 그러려니 한 직책으로

생각했던거 같은데

점점 강력해지고 거대해진 로마에 양극화 문제나 자영농의 몰락,

라티푼디움 대농장 확대 등 새로운 사회문제들이 발생하자

이 호민관 직책에 막강한 권한을 발견하고

호민관 직위를 적극적으로 이용해서 로마사회를 변혁시키려 한

두 형제가 등장하게 됬고 그 형제가 그라쿠스 형제입니다


그라쿠스 형제는 유서깊은 평민 귀족 출신으로

어머니는 카르타고 명장 한니발을 이긴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둘째딸이었고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로마사회에서 차지하는

영향력이 엄청나게 컸다고 할 수 있고

그 역시 그런 집안에서 태어나서 형 티벵리우스 그라쿠스는

3차 포에니 전쟁시 전쟁 장교로 참전해 뛰어난 통솔력을 보여주고

가장 먼저 카르타고 성벽을 오르며 공을 세웠고

이런 재능과 배경들은 곧 원로원 귀족들이 눈에 띄었고

이들 형제가 성장하며 원로원 귀족들의 교우는 점점 두터워집니다


<원로원 귀족들>(음,, 집안도 좋고 ~ 뛰어난 젊은이로군,,) 우리가 남이가 ?

마 ! 필요한거 있으면 말만 하라 !


<형 그라쿠스>(좋은 사람들이군 ~ ) 예 ~


이후 형 그라쿠스(티베리우스)는 집정관 가이우스를 따라

스페인 동북부 도시 누만티아 전쟁에

참전했는데 가이우스의 실책으로 로마군이 포위되자

형 그라쿠스가 휴전협상을 해서 2만 로마군을 살려돌아왔고

로마 원로원은 누만티아와의 휴전을 반대해서

형 그라쿠스등을 누만티아에추방하려 했으나

민중들의 협상으로 병사들을 살려온 형 그라쿠스를 높이 평가해서

가이우스만 추방되고 형 그라쿠스 등은 남기로

민회에서 표결됩니다


이때 형 그라쿠스는 민중들이라 할 수 있는 로마군을 살려왔고

또 그 민중들은 그런 형 그라쿠스를 로마 원로원에게서 보호해줬다고

할 수 있는데

또 이당시 형 그라쿠스는 누만티아로 가는 길에

이탈리아 중부의 에트루리아 지역에서 현지 자영농들이

모두 땅을 잃고 노예등이 농사짓는 대농장을 보며

로마의 심각한 상황을 파악했다 하고


민중들의 지지에 힘입어

호민관에 당선되게 됩니다


<형 그리쿠스>나라를 위해 싸웠던 자영농들이

몰락하고 있습니다,, 이게 나라냐 ?


<로마 민중들>와아아아아 !


<형 그라쿠스>가난하고 소외된 농민들을 보호할 수 있게

호민관의 직책을 사용해 저가 ! 이 나라를 개혁하겠습니다 !!


<로마 민중들>와아아아아 ! 그라쿠스 만세 ~

로마 만세 ~


또 형 그라쿠스는 호민관에 당선되자

토지 문제를 공격하며 불법 토지강탈을 반환시키는

농지법을 입안하고 이에 민중들의 엄청난 지지를 받게 됩니다


<형 그라쿠스>들에서 풀을 뜯는 짐승조차 쉴 곳이 있는데,

로마를 위해 싸우고 죽는 병사들은 공기와 햇빛 말고는

아무것도 누리지 못하고,

집도 안식처로 없이 처자식과 함께 거리를 떠돌아 다닙니다.

(중략). 다른 사람의 부귀와 사치를 위해 싸웠지만

그들은 한 뼘의 땅도 없습니다


결국 호민관 형 그라쿠스는

분배를 늘리기 위해 농지법을 발의하고

토지 소유를 500유게라(125 헥타르)로 제한하고

500 유게라 이상의 땅을 가진 사람(사실상 귀족)들의 땅을

국가가 받아서 이를 가난한 농민들에게 나누어 주자는 방안이었고

실제 자영농민의 몰락은 곧 로마의 군사력 약화로도 이어졌기에

형 그라쿠스의 의도는 당대 로마사회의 문제점을 파악하고

이에 대한 분배와 개혁을 실시하려 했다고 할 수 있으나,,


<로마 귀족들>응 싫어 ~


형 그라쿠스의 개혁은 독단적이었고

기존 원로원에 우선 법안제출을 해서 원로원 귀족들의

의견을 묻고 민회에 제출하는 호민관의 관례를 깨고

바로 직접 민회에 가져가게 됬고

이에 형 그라쿠스와 원로원과의 관계는 더 멀어지게 됩니다,,


원로원은 형 그라쿠스의 동료 호민관 옥타비우스를 보내서

형 그라쿠스의 개혁에 거부권을 행사하게 했으나 실패했고

형 그라쿠스를 몰아내려 하다

옥타비아스는 형 그라쿠스에게 역으로 쫒겨나게 됬고

이에 형 그라쿠스는 더 거리낌 없이 농지법을 통과시키게 되고


원로원의 공격에도 형 그라쿠스는

법과 시스템들을 이용해 잘 빠져나가게 됩니다,,


결국 점점 위기감을 느낀 원로원 의원들은

자신들의 토지가 줄어드는 것에 반발했고

결국 형 그라쿠스는 원로원 의원들에게

로마 포럼 한복판에서 살해당하게 됬고

원래 현직 호민관은 신체불가침권을 법적으로 인정받고 있었지만

또 법의 나라 로마였지만


'법보다 주먹' 이나


마키아벨리의

'칼 없는 예언가는 반드시 살해당한다

(힘없는 개혁가는 반드시 실패함)'


라는 말같이

이권들이 위협받던 귀족들의 대표였던 원로원은

이를 대놓고 무시했고 이에 로마사회는 큰 경악에 빠집니다


결국 농지법은 흐지부지 해졌고 형 그라쿠스는 그렇게 살해당했는데

이후 조용히 지내던 동생 그라쿠스 가이우스 그라쿠스가 10년 뒤

호민관에 당선되게 됩니다,,


동생 그라쿠스 역시 형 그라쿠스가 농지법을 개혁할때

농지법 작성에 참여했다 하고 형이 암살당한 후

조용히 지내다가(원로원에 복수의 칼날을 갈다가) 결국

호민관에 당선되고 호민관이 되자마자

원로원에 반기를 들며 농지법을 적극적으로 실시했는데

이후 호민관 선거에서 낙선하고

이후 결국 원로원의 반발로 '원로원 최종 권고(최종 결의)' 즉

오늘날로 치면 '긴급조치'. '계엄령'이 선포되는데

이는 결국 공화정의 가면을 쓴

로마 공화정의 본색이 들어났다고 할 수 있으며

결국 이는 로마 공화정이 표면적으로는 공화정이나

사실상 철저한 귀족정이라고 할 수 있는 사건으로 이야기 됩니다


그렇게 '원로원 최종 권고'를 발의한

원로원은 로마법을 완전히 무시하는 권한을

집정관 오피미우스에 주었고

오피미우스는 군사들을 이끌고 동생 그라쿠스와

그의 지지자들을 모두 체포하고

동생 그라쿠스는 달아나가 스스로 목숨을 끊고

3천명의 그의 지지자들은 모두 처형당하며

원로원에 의해 동생 그라쿠스의 법안은 모두 폐기되며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은 그렇게 끝나게 됬다고 할 수 있습니다,,


형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와 동생 가이우스 그라쿠스,

그라쿠스 형제는 로마에서 가장 유명하고 부유한 집안 출생이었음에도

현실 문제와 사회적 문제들을 파악하고 평민의 권리를 수호하다 죽은

인물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었던 인물이고

포에니 전쟁 이후 급변하는 사회변화와 새롭게 생겨나는

자영농,중산층의 몰락등의 상황에 평민과 민중을 위하다

죽은 인물이라 할 수 있는데 그라쿠스 형제는

법률적 지식과 교양을 무기로 기존에 별 의미없는 직책이었던

호민관 직책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이 문제를 극복하려 했다 할 수 있는데

그 둘의 문제는 독단적인 개혁을 무리하게 시행하려 했다는 점과

귀족과 평민들의 이권 사이에서 적절한 균형점을 찾지 못했다는

점이라 생각되고


사실 당대 로마 역시 포에니 전쟁이나 외부 정복등

겉으로는 공화정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실질적으로 제국주의 국가화 되가고 있던 시점이었고

사회적 여러 모순들이 많아서

로마 공화정이 몰락하는 로마 공화정 말기 형태라 볼 수 있습니다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 실패 이후로는

로마 귀족층 내부에서도 큰 분열이 일어났으며

민중파가 등장했고

점점 원로원은 지지들을 잃어가게 됬고 결국

카이사르라는 인물이 등장하며 로마 원로원은 힘을 잃고

로마는 공화정이 아닌 황제가 다스리는 제정으로 가게 됩니다,,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은

당대 모순적인 사회구조와 크게 변화하는 시대에

새로운 의의를 남겼다고 할 수 있고

오늘날 그라쿠스 형제는 사회주의적 정책을 입안했다는 의의가 있기도 하나

결국 실직적인 해결방안을 제시하지 못했다는 점 등

대중 영합주의인 '포퓰리즘'으로도 이야기 되고


결국 호민관 직책은 제대로 작동할때에는

평민,민중 보호와 민주주의 원칙을 유지하는

큰 직책이라 이야기 할 수 있지만

이후 호민관 직책에 대한

막강한 권한을 발견해 낸 그라쿠스 형제 이후부터는

호민관과 원로원의 대립 등과

정치 입문직이었던 호민관에 막강한 권력이 부여되었다는 점

등 때문에 이후에는 그라쿠스 형제같은 역량있는 인물도

나오지 않았고 점점 마 공화정의 혼란과 몰락을

가속화시켰다고 하고

결국 로마사회가 거대하게 팽창해나가던 시기

내적 성숙이 따라잡지 못한 임시방편적 직책이었을 뿐

공화정 말기의 혼란상을 야기한 주범들 중 하나라는 점에서

그 한계는 명확하다 하고

대신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은 로마사회에 커다란 충격을 줬던

사건이었기에 그라쿠스 형제 개혁 이후 수많은 사회 사상,

사회 운동들에 영향을 주게 됩니다

(상당히 과도기적이고 급진적인 인물들이기도 해서

딱히 옳거나 옳지 못하다고 하기는 그러나

당대 사회문제를 정확하게 파악했던 인물이라고 생각됩니다)


결국 그라쿠스 형제의 죽음은 제정 로마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고 할 수 있고 이후부터 로마 공화정은

사실상 철저한 귀족정이었기에 점점 민중들의 신뢰를 잃어가며

민중파(평민파, 포풀라레스) vs 귀족파(원로원, 옵티마테스)로

나뉘게 되는데

그러다 훗날 그의 이름 자체가 황제라고 이야기되는

어느 젊은 청년,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등장하게 됩니다,,

(카이사르라는 그의 이름은 서양에서는 곧 황제로 불리게 됩니다)


<라봉봉>이당시 로마는 옛날 건전한 공화정에서

아프리카의 부국 카르타고를 흡수함으로서

카르타고의 노예,농장 시스템이 로마로 흘러들어오고

또 값싼 농작물 유입 등으로

사회 양극화, 빈부격차가 심화되는 시점이라 할 수 있고

상당히 과도기적 모습을 보이고 혼란이 계속됬고

'철저한 귀족정'이었음에도 명목적인 공화정은 유지되다가

결국 독재자,황제가 출현한다고 할 수 있는데

문제는 그럼에도 로마의 '공화정은 공화정'이었고

참주 僭主 (주제넘을 참, 주인 주)의 출현을 경계했던

당대 로마인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허울뿐이더라도 일단 허울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은 큰차이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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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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