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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당전쟁의 시작, 신라의 요동 선제공격>


문무왕 10년

정월(1월) 봄

당고종이 김흠순의 귀국을 허락하고

김양도는 억류해서 가두었습니다

그(김양도)는 결국 원옥 圓獄 (둥그스름하게 지은 감옥)에서 죽었습니다


이는 문무왕이

마음대로 백제의 토지와 유민들을 차지하였다는 이유로

당황제가 노하였고

이에 따라 사신을 억류하여 일어난 사건이었습니다


<문무왕>원래 이미 약조상

멸망한 백제는 우리 신라국의 영역일 뿐이다


<신라 관료들>결국 당나라의 본 목적은

나당동맹을 이어가는 것이 아닌

삼한 전체의 지배였다는 사실이 완전히 드러났습니다


<문무왕>모두 당나라와의 결전을 준비하라 !


3월

사찬 설오유가 고구려의 태대형 고연무와 함께

각각 정병 1만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서 옥골(오골성)에 이르렀습니다


<오골성의 위치(11시 방향)>


<신라 설오유>고장군 !

비록 한때 우리가 싸웠지만 우리는 같은 조선(고조선)의 후예 아니겠노 ?


<고구려 고연무>기래 중국도 나라가 하나가 되니 힘이 강해졌는데

우리도 일통삼한 一通三韓 (하나로 통일된 고구려, 백제, 신라 세 한국)

한번 해보자우 !


<신라 설오유>고구려 요동 바람이 이런 느낌이었군요


-신라(+고구려 연합군)의 요동 선제공격으로 나당전쟁의 시작입니다

이때 설오유는 요동을 선제 공격함으로서

당나라의 시선을 북쪽에 집중시켰고

이틈을 타 신라군은 당군이 지키던 백제고지를 영토화 시키게 됩니다

(이는 이전부터 발을 맞춰 준비했던 것이며

치밀했던 당대 문무왕과 신라인들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OOO (삼국사기 원문 3글자 손실) 말갈 군사가 먼저

개돈양에 와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4월 4일 여름

말갈 군사와 싸워 우리(신라) 군사가 크게 승리했습니다

이 전투에서 참획한 것이 이루 셀 수 없었습니다


당나라 군사가 계속하여 도착하자

우리(신라) 군사는 물러나 백성을 지켰습니다


6월

고구려 수림성 사람 대형 검모잠이 고구려의 유민을 모았습니다

그는 궁모성으로부터 패강 남쪽에 도착하여

당나라 관리와 중 법안 등을 죽였습니다


그들은 신라로 오는 도중

서해의 사야도에 이르러

고구려 대신 연정토(연개소문의 동생)의 아들 안승을 만났습니다

(안승은 고구려 왕족 고안승이다

혹은 귀족 연안승이다 설이 있는데

보장왕의 외손자이며 연정토의 아들이라

왕족과 귀족 둘다 맞다고도 합니다)


그들은 안승을 한성(황해도 지역)으로 맞아 들여 임금으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소형 다식 등을 우리(신라)에게 보내 애소(슬프게 하소연)하기를


<다식>망한 나라를 일으키고

끊어진 왕대를 잇는 것은 천하의 공의이니

오직 대국 大國 (신라) 이 이를 허락해주기를 바랄 뿐입니다


우리나라 선왕(고구려 28대왕이자 마지막왕 보장왕)이 도를 잃어 멸망하였으나

이제 저희들이 고구려의 귀족 안승을 찾아 임금으로 모시고

신라의 속국이 되어 영원히 충성을 다할것입니다


라고 애소했습니다


문무왕은 그들을 서쪽지방 금마저 金馬渚 (전라북도 익산) 에

살게 했습니다 (고구려와 전혀 상관없는 전라북도 익산,

백제의 말년 수도격 지역인데 이는 고구려 인들을 이용한

백제인 견제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기부 여자가 한번에 아들 셋과 딸 하나를 낳았습니다

그녀에게 곡식 2백 석을 주었습니다


<신라의 백제지역 흡수>


7월 가을

문무왕은 백제의 유민들이 배반할 것을 걱정하여

대아찬 유돈을 웅진 도독부에 보내서 화친을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도독부는 이에 응하지 않고

곧 사마칭의 군사를 보내 우리(신라)를 정탐하게 했습니다


문무왕이 우리(신라)를 해치려는 그들의 음모를 알고

사마칭의 군사를 억류한 채

군사를 동원해서 백제를 공격했습니다

(설오유가 요동에서 시간을 번 동안

신라인들은 당군이 지키던 백제고지를 영토화시키게 됩니다)


품일, 문충, 중신, 의관, 천관 등이

63개 성을 공격해서 빼앗고(신라의 백제 지역 흡수)

그 곳 사람들을 내지로 옮겨 살게 했습니다


천존, 죽지 등은 일곱 성을 빼앗고

적의 머리 2천 개를 베었으며

군관, 문명은 열 두 성을 빼앗고

적병을 공격하여 머리 7천 개를 베었고

말과 병기를 매우 많이 노획했습니다


문무왕이 돌아와 중신, 의관, 달관, 흥원 등이

OOO (삼국사기 원문 3글자 손실) 사영으로 퇴각한 일이 있으므로

마땅히 사형에 처해야 할 것이나

죄를 사면하여 면직만 시켰습니다


창길우 OOOO (삼국사기 원문 4글자 손실) 일에게

각각 급찬의 작위를 주고

공훈의 정도에 따라 벼를 주었습니다


사찬 김수미산을 보내서 안승을 고구려왕에 책봉했습니다

그 책명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신라 문무왕의 안승 고구려왕 책봉 책명문>

함형(당고종의 연호) 원년  세차 경오 가을 8월 1일 신축에

신라왕은 고구려의 후계자 안승에게 책명을 보낸다


공의 태조 중모왕(주몽왕, 고구려 시조이자 1대왕 동명성왕 고주몽)이

북쪽 땅에 덕을 쌓고

남해 南海 (남쪽 바다) 에 공을 세워

위풍이 청구 靑丘 (동방세계, 한국의 별칭) 에 떨쳤고

어진 교화가 현토를 덮었다


자손이 뒤를 잇고

본계와 지계가 끊이지 않았으며

(本支不絶 본지불절, 본지 = 줄기와 가지, 자손이고

불절 = 끊임 없음)

개척한 땅이 천리가 되고

역사가 8백년 가까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남건 남산(연개소문의 둘째아들 연남건,

연개소문의 셋째아들 연남산) 형제에 이르러

집안에서 화란이 일어나

골육이 갈라지고

집안과 나라가 망하고

종묘와 사직이 사라졌으니

백성들이 동요하여 마음을 붙일 곳이 없었다


공(안승)은 산야에서 위난을 피하다가

홀로 이웃 나라(신라)에 귀순하였으니

그 유랑의 고통은 진 문공의 행적과 같고


멸망한 나라를 다시 일으켰으니

이는 위선공의 행적과 같다고 할 것이다


무릇 백성이란 임금이 없어서는 안되며

하늘은 반드시 운명을 돌보아 주시나니


선왕(고구려 마지막왕 보장왕)의 정통 후계자도

오직 공(안승)일 뿐이오


제사를 주관할 사람도 또한 공이 아니면 누구이겠는가 ?


이제 삼가 일길찬 김수미산 등을

사신으로 보내어 책명으로 정하고

공을 고구려 왕으로 명하노니(당의 연호를 쓰면서도

신라왕의 권위를 내세운 책명문입니다)


공은 마땅히 (고구려) 유민들을 위로하여 안정시키고

옛 전통을 일으킬 것이며

길이 선린이 되어 형제와 같이 우리(신라)를 공경하고 섬겨야 할 것이다


이에 멥쌀 2천 석, 무장마(갑구마 甲具馬 , 갑옷을 갖춘 말) 한 필,

능직(비스듬한 무늬) 비단 다섯 필,

견직(비단)과 베 각 열 필,

면화 열다섯 칭을 보내니

(고구려) 왕 (안승) 은 이를 받으라 !


12월

토성이 달에 들어가고

서울(신라 수도)에 지진이 있었습니다


중시(오늘날 국무총리격) 지경이 퇴직했습니다


왜국(옛 일본)이 나라 이름을 일본 日本 으로 고치고

'해돋는 곳과 가끼이 있다 ( 해 일 日 근본 본 本) ' 는 뜻으로

이름을 지었다고 스스로 말했습니다


(그러나 현재 2011년 발견된 예군 이라는 사람의 묘지명[무덤 비석]에서는

일본 日本 은 한국 백제의 다른 이름으로 나오고 있고

이에 일본 日本 이라는 말은 한국 백제를 가르키는 말이었는데

백제 멸망후 왜[일본]으로 건너간 백제인들이

다시 백제라는 이름으로 나라 이름을 하기도 그렇고 해서

백제를 부르는 다른 이름인 일본이 마침 이름 뜻도 좋고

또 동쪽에 가까운 왜였기에 이치에 합당해

왜를 일본으로 한게 아닐가 싶습니다)


<왜의 사신>우리 왜 倭 는 앞으로 나라 이름을

'일본 日本' 으로 고치겠스무니 ~ 다  !


<신라 관료들>그거 백제 별명이잖아


<일본 사신>음,, 이는 해돋는 곳과 가까이 있다는 뜻입니다 !


<신라 관료들>하긴 뭐 백제애들이 왜를 만들다 싶이 했지


한성주 총관 수세가

백제의 OOOOOO (삼국사기 원문 6글자 손실) ... 나라를 ... 약취하여

그 곳으로 가려다가 일이 발각되었습니다


문무왕이 대아찬 진주를 보내서 그의 목을 베었습니다


<김부식>주석 부분은 빠진 자가 많아서 의미를 알 수 없다


十二□□□賁書所六□□僵事同異可(十二□□□賁書所六□□강사동이가)


-삼국사기 문무왕 상 文武王 上 끝-


<라봉봉>나당전쟁 기록은 분명 자료가 많으면서도 또

정세 상황과 신라의 치밀함 등 여러 모습을 봐야하기에

여태 글을 쓰면서도 가장 어려웠고

실제 나당전쟁은 최전성기 한국(신라)과

최전성기 중국(당나라)의 맞대결이기도 하고

동아시아의 질서 재편등 상당히 중요한 의의가 있음에도

나당전쟁은 의외로 연구나 논의가 활발하게 이루어 지지 않다고 합니다,,

그것 말고도 당대가 온갖 첩보전에

교란(혼란책), 계략들이 다방면으로 펼쳐져 있어서 읽기가 어려운 편이고

저도 잘못 해석하며 쓰는게 아닐까 싶기도 했고

일단 최대한 신중하게 글을 썼습니다,,


저가 옛날에 나당전쟁을 자세히 읽으면서 가장 충격적이었던게

신라가 요동을 공격했다는 것인데

정말 뜬금없는 느낌이고 이에 일제강점기 일본 식민사학자는

신라가 요동까지 갈리가 없다고 했으나

신라군이 기병위주로 편성할 경우와 당대 닦여진 도로를 타고 올라가고

또 고구려 안마당이 요동이기에 고구려 유민,세력들의 지원을 받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 할 수 있고

애초에 설오유의 요동공격의 목적은 요동 수복이라기 보다

빠르게 정예기병으로 올라가서 당의 시선을 분산시키며

그틈에 신라 본진에서 백제 영토를 흡수하려 했기에

'시선끌기용', '위장 혼란 전술' 등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로 생각됩니다


일단 위 이야기의 상황들을 요약하자면

당나라의 간섭과 야심 - (화난) 신라 문무왕의 요동 선제공격 -

그틈을 탄 신라군의 백제 지역 병합 이었다고 할 수 있고

오늘날 나당전쟁을 이야기할 때 나오는 비유가


'한국이 미국을 싸워 물리친 것'


과 비견될 수 있는 전쟁이라 하는데

실제 당나라가 당시 오늘날 미국같은 지위에 있었고

실제 당나라는 중국 왕조중에서도 매우 강력한 왕조였습니다


(이런 초강대국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경우는

베트남이 미국을 이긴 베트남 전쟁이 있는데

근데 나당전쟁은 베트남 전쟁과는 다른게

베트남은 압도적으로 약한 상황에서 미국을 게릴라 전술로 괴롭히며 승리했고

신라는 당나라와 격차는 있었지만 신라 역시 최전성기의 시절이었고

당나라에 비해 압도적으로 약한 상황은 아니었고

또 베트남 민중과 소수민족의 지지를 받은

베트남 지도자 호치민과 달리

신라 문무왕은 멸망한 백제 세력과 고구려 세력은

일반백성이라기도, 소수민족이라 보기도 어렵고

백제와 고구려는 오랜 기간동안의 수준높은 문명국이었기에

이들의 부흥운동을 견제하고 또 통합해야할 상황에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대신 여러 불리한 상황에서

여러 지혜들을 끌어모아 승리한 전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신라가 삼국중에서 가장 사대주의적이었으나

일단 그 사대도 나라를 유지하기 위한 사대였는데

당나라는 노골적으로 신라에 대한 야심을 들어냈고

결국 신라인들의 선제공격으로 '나당전쟁'이 발발하는데

신라인들은 당나라와의 국력차를 치밀한 준비 등으로

지혜롭게 극복하며 나당전쟁에서 승리합니다


근데 나당전쟁 이야기가 저가 어려움을 느낀게

이 전쟁이 전면전, 총력전이면서도 또

의외로 신라와 당나라가 한때 나당동맹을 맺었던 만큼

서로 명백하게 적국으로 인식하지도 않았고

신라 역시 당나라에 맞선게 고구려같이 당나라와의 결전으로

동아시아의 패권을 다투기 위함이라기 보다

그냥 일단 원래 나당동맹때 약속대로 백제땅은 신라거였는데

당나라가 이후 말을 바꿔서 백제와 신라에까지 욕심내니

분노한 문무왕의 공격이었다고 할 수 있기에

명분적으로도 신라에게 유리한 입장이었고

결국 당나라도 사방의 이민족들, 신라군과 고구려 유민의 강력한 저항들에 밀려

신라의 백제 지배를 인정하고 물러났다고 할 수 있기에

총력전이면서도

고구려와 중국 수나라와 당나라의 전쟁같이 거센 느낌도 아니고

되게 애매한 모습도 있는 전쟁이라 할 수 있는데

중국 당나라의 한국 지배의 야욕이라는 상황에서

최선의 방향으로 지혜롭게 국력차를 극복하며

당나라에 맞서 자주권을 지켜냈던 신라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나당전쟁 이야기는 다음 이야기로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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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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