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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왕 6년

2월 봄

서울(수도)에 지진이 있었습니다


4월 여름

영묘사에 불이 났습니다


죄수들을 크게 사면했습니다


천존의 아들 한림과

김유신 장군의 첫째 아들 김삼광이

모두 내마(=나마, 신라 11등벼슬) 로서 당나라에 들어가서

숙위(황제를 모시는 직)가 되었습니다


문무왕이 이미 백제를 평정했으므로

고구려를 멸하고자

당나라에 군사를 요청했습니다


12월 겨울

당나라가 이적(=이세적)을 요동방면행군대총관으로 삼고

사열소상 백안륙과 학처준을 보좌관으로 삼아

고구려를 공격했습니다


고구려의 대신 연정토(연개소문의 동생)가

12성, 7백 63호, 3천 5백 43명을 데리고 와서

투항했습니다


연정토와 총관 24명에게 의복, 식량, 주택을 주어

서울과 부주에 안줏켰습니다


그 중 8개 성이 함락되자

군사를 파견해서 수비토록 했습니다


문무왕 7년

7월 가을

사흘 동안 큰 연회를 베풀었습니다


당황제가 칙령으로 지경과 개원을 장군으로 삼아

요동 전투에 참전하게 하자


문무왕은 즉시 지경을 파진찬(신라 4등벼슬),

개원을 대아찬(신라 5등벼슬)으로 임명했습니다


또한 당황제가 대아찬 일원을 운휘장군으로

임명하는 칙령을 보내니

문무왕은 일원에게 대궐 뜰에서 그 명령을 받도록 했습니다


대나마(신라 10등벼슬) 즙항세를 당나라에 보내서 조공했습니다


당고종은 유인원, 김인태를 비열도로 가게하고

또한 우리(신라) 군사를 징발해서

다곡, 해곡의 두 길을 경유하여

평양에 모이도록 명령했습니다


9월 가을

문무왕이 대각간 大角干 (신라 1등벼슬 각간[이벌찬]보다

높은 특수관직) 김유신 등 30명의 장군을 거느리고

서울(신라 수도)을 출발했습니다


9월

한성정에 도착해서 영공(당나라 장수 이적)을 기다렸습니다


10월 2일 겨울

영공이 평양성 북쪽 2백 리 되는 곳에 도착했습니다


영공은 그 곳에서 이동혜 촌주 대내마(대나마) 강심으로 하여금

거란 기병 80여 명을 거느리고

아진함성을 경유하여 한성에 이르러

편지를 전달하게 했습니다

그 편지는 군사의 동원 기일을 독촉하는 것이었습니다


대왕(문무왕)이 이에 응했습니다


11월 11일

문무왕이 장새에 도착해서 영공이 돌아갔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에 따라 문무왕의 군대도 역시 돌아왔습니다


강심에게 급찬(=급벌찬, 신라 9등벼슬)의 작위와

곡식 5백 석을 주었습니다


12월

중시(왕을 보좌하는 국무총리격의 벼슬) 문훈이 사망했습니다


당나라 유진장군 유인원이

고구려 정벌을 도우라는 천자(황제)의 칙명을 전달하고

문무왕에게 대장군정절을 주었습ㄴ다


8년 봄

아마가 와서 항복했습니다


원기와 연정토를 당나라에 보냈습니다


연정토는 당나라에서 돌아오지 않았고

원기는 돌아왔습니다


이후로는 여자를 바치는 것을 금한다는

황제의 칙명이 있었습니다


3월

파진찬(신라 4등벼슬) 지경을 중시로 임명했습니다


비열주를 설치하고

파진찬 용문을 총관으로 임명했습니다


4월 여름

혜성이 천선 성좌에 나타났습니다


6월 12일

요동방면 안무부대사 요동행군 부대총관

겸웅진 방면 안무대사 행군총관

우상 검교태자 좌중호

상주국 낙성현 가국남 유인궤가 황제의 칙지를 받들고

숙위 사찬(신라 8등벼슬) 김삼광(김유신의 첫째 아들)과 함께

당항진에 도착했습니다


문무왕이 각간(=이벌찬, 신라 1등벼슬) 김인문(태종 무열왕의

둘째아들이자 문무왕의 동생) 으로 하여금 성대한 예우로

그를 맞게 했습니다


(근데 이렇게 문무왕대 기록은 점점

태종 무열왕 김춘추와 김유신 장군의

자식 세대들이 출현하며 세대교체화 되는 것도 있고

이는 김춘추와 김유신 세력의 아들들이

신라 요직에 등장하기에 김춘추, 김유신 세력의

신라 장악을 의미함이라고도 표현 할 수도 있으나

또 대신 그의 자식들, 다음세대 역시

부모 못지 않는 호부호자, 호랑이 부모에 호랑이 아들같은

모습을 보였다고 할 수 있고

이는 고구려 집권자이자

마지막 불꽃, 호랑이라고 할 수 있었던

연개소문의 세 아들들이

다투며 호부견자, 호랑이 아버지에 개의 자식 같은 비유의

행보를 보였던 것과는 반대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날 우상 유인궤는 약속을 끝내고 천강으로 떠났습니다


21일

대각간 김유신을 대당 대총관


각간 김인문, 김흠순(김유신의 동생),

천존, 문충과 잡찬(신라 3등벼슬) 진복

파진찬 지경, 대아찬 양도, 개원,

흠돌을 대당 총관,


이찬 진순,


<김부식>'순'을 '춘'이라고도 한다


죽지를 경정 총관,


이찬 품일, 잡찬 문훈, 대아찬 천품을

귀당 총관


이찬 인태를 비열도 총관


잡찬 군관, 대아찬 도유, 아찬 용장을

한성주 행군 총관


잡찬 숭신, 대아찬 문영, 이찬 복세를

비열성주 행군 총관,


파진찬 선광, 아찬 장순, 순장으로

하서주 행군 총관,


파진찬 의복과 아찬 천광을 서당총관으로 삼고


아찬 일원과 흥원으로 계금당 총관을 임명했습니다


22일

부성의 유인원이 귀간(신라 지방관직) 미힐을 보내서

고구려의 대곡성, 한성 등 2군 12성이 항복해서 귀순한 것을

보고했습니다


문무왕이 일길찬(신라 7등벼슬) 진공을 보내서

이를 치하(칭찬)했습니다


인문,천존, 도유 등이 일선주 등 7군과

한성주 군사를 거느리고 당나라 군영으로 갔습니다


27일

문무왕이 서울(수도)을 떠나

당나라 군영으로 갔습니다


29일

각도의 총관들이 출발했습니다


그러나 김유신 장군은 풍병(=중풍, 뇌졸증,,)을 앓았으므로

문무왕이 서울에 머물러 있게 했습니다


김인문등이 영공(당나라 장수 이적)을 만나서

영류산 아래로 진군했습니다


<김부식>영류산은 지금(고려[김부식이 살던 시대])

서경(평양) 북쪽 20리에 있다


7월 16일 가을

문무왕이 한성주에 행차해서

모든 총관들에게 가서 당나라 군대와 연합하도록 지시했습니다


문영 등이 사천벌에서 고구려 군사와 마주쳐 싸워서

크게 승리했습니다


9월 21일

당나라 군대와 연합하여 평양을 포위했습니다

(평양성 전투)


고구려 왕(고구려 28대왕이자 마지막왕 보장왕)은

우선 천남산(=연남산, 연개소문의 셋째 아들) 등을 보내서

영공(당나라 장수 이적)을 방문하고 항복하기로 했습니다


이 때

영공(이적)이 왕 보장(고구려 보장왕)과 왕의 아들

복남, 덕남과 대신 등 20여만 명을 당나라로 보냈습니다


-668년 9월 21일 고구려 멸망-


<신라군들>고구려가 정말 멸망하다니,,

이제는 고구려보다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나라의 위세가

더 무섭구나,,


<당나라군들>고구려는 정말 대단한 나라였지,,

그들이 다시 일어서지 못하게

요동에서 고구려인들의 씨를 말려야 한다

모두 당나라로 데려가라 !


<끌려가는 고구려인들>꺼이꺼이

우리 고구려가 당나라 오랑캐한테 무너지다니 !


(당나라의 적극적인 압송정책으로

이후부터 한국 고유,근원의 영역이자 본거지였던 만주영역의

한국인[고구려인]들은

중국이나 남쪽 한국인 신라로 뿔뿔이 흩어졌고

비록 고구려 멸망 이후 고구려 출신이었던 대조영이

'발해'를 건국하며 고구려 영역을 수복하나

이때는 이미 고구려영역의 고구려인들, 한국인들이

뿔뿔이 흩어져 있던 상황이라

발해 내부에서는 지배계층인 고구려인들이 소수였고

피지배계층인 말갈계가 다수가 됬고

즉 [만주지역의] 한국인들은 이때를 기점으로 만주에서

중국 당나라나 남쪽 한국 신라로 밀리게 된 것입니다,,


만주는 조선[고조선]과 고구려의 주요지역이자

한국인들이 가꾼 삶의 터전이었는데

만주를 영유하던 한국인들은 기본적으로 농경민족이었고

고구려 멸망 이후부터 농경민족 한국인들이

뿔뿔이 흩어지자 만주는 곧 황폐화 됬고

곧 유목민족들이 자리잡게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각간 김인문과 대아찬 조주가 영공(당나라 장수 이적)을 따라 돌아가고

인태, 의복, 수세, 천광, 흥원도 그들을 수행했습니다


이보다 앞서 당나라 군대가 고구려를 평정하려 했을 때

문무왕은 한성을 떠나서 평양으로 향하다가

흘차양에 머무르고 있었습니다


그 때 당나라의 여러 장수들이 이미 귀국했다는 말을 듣고

한성으로 되돌아 왔습니다


10월 22일 겨울

김유신에게 태대각간 太大角干 ,


(태대각간은 신라 1등벼슬 각간[이벌찬]보다

높은 벼슬이 대각간이면 태대각간은 대각간 앞에

태 太 자를 더 붙여서 기존 '큰 각간'에서

'매우 큰 각간'으로 높여 불렀다고 할 수 있고

이는 신라 역사상 가장 최상위의 임시 관등이며

한국 고구려의 '대막리지'나 중국의 '상국'과 비슷한

전설의 관직이고

김유신 단 한사람을 위해 만든 특별관직이자

신라 천년역사상 살아있던 태대각간은 김유신 한명 뿐이었습니다

[죽은 뒤 추증 된 김인문 제외])


김인문에게 대각간의 직위를 주고,


이 밖에 이찬, 장군 등은 모두 각간의 직위를 주었으며

소판 이하에게는 모두 위품 한 급씩을 올려 주었습니다


(상당히 이례적인 일로

이는 고구려라는 천하대국, 북한식 표현으로는

'천년강국'이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에게 무너져 버렸기에

이례적으로 신라 신하들의 특별 승진이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대당소감 본득은

사천 전투에서 전공이 제일 높았으며


한산주 소감 박경한은

평양성 안에서 군주 술탈을 죽인

전공이 제일 높았으며


흑악령 선극은

평양성 대문 싸움에서 전공이 제일 높았으므로

모두 일길찬(신라 7등벼슬)의 직위를 주고

벼 1천 석을 주었습니다


서당 당주 김둔산은

평양 군영 전투에서 전공이 제일 높았으므로

사찬의 직위와 벼 7백 석을 주었습니다


군사 남한산 사람 북거는

평양성 북문 전투에서 전공이 제일 높았으므로

술간(신라 지방관직)의 직위와 곡식 1천 석을 주었습니다


군사 부양 사람 구기는

평양 남교 전투에서 전공이 제일 높았으므로

술간의 직위와 곡식 7백 석을 주었습니다


가군사 비열홀 사람 세활은

평양 소성 전투에서 전공이 제일 높았으므로

고간의 직위와 곡식 5백 석을 주었습니다


한산주 소감 김상경은

사천 전투에서 전사했는데 전공이 제일 높았으므로

일길찬의 직위와 벼 1천 석을 주었습니다


아술 사찬 구율은

사천 전투에서 다리 아래로 내려가 물을 건너서

적과 싸워 크게 이겼으나

군령없이 임의로 위험한 길로 들어갔으므로

전공은 비록 제일 높았으나 공신록에 등록되지 않았습니다


그(구율)은 이를 분하게 여겨서 목매어 죽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옆에있던 사람이 그를 구해서 죽지 못했습니다


<구율>분하도다 ! 분하도다 !


(이는 상당히 용맹하고 나라를 위해 싸우거나 싸우다 죽는 것을

의로 여겼던 당대 신라인들의 기풍이었다고 할 수 있고

당장 백제 멸망시기의 황산벌 전투에서 싸우다 죽은

신라 화랑 반굴과 관창, 두 화랑의 이야기만 봐도 알 수 있고

당대 구율도 공을 세우긴 했으나

군령없이 위험한 길로 가서 공을 인정받지 못해서

자존심이 상해 자결하려 했던 모습 등 상당히 상무적인 기풍의

당대 신라인들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25일

문무왕이 귀국하는 길에 욕돌역에서 묵었습니다

그 때 국원(충청북도 충주)의 지방관인 대아찬 용장이

개인적으로 연회를 열어서

문무왕과 여러 시종들을 접대했습니다


음악이 시작되자 내마 긴주의 아들 능안이

나이 15세로서 가야의 춤을 추었습니다


문무왕이 그의 얼굴과 거동이 단정하고도 고운 것을 보고

앞으로 불러 등을 어루만지면서

금잔으로 술을 권하고

폐백(선물)을 후하게 주었습니다

(고전유머지만 '완벽한 남자는 게이'라는 말이 떠오릅니다,,)


11월 5일

문무왕이 고구려 포로 7천 명을 이끌고

서울(신라 수도)로 들어왔습니다


6일

문무왕이 문무 文武 (문관과 무관) 신하들을 거느리고

선조의 사당에 참배하고

다음과 같이 고했습니다


<문무왕>저 신라 30대 국왕 김법민은

조상님들에게 고하옵니다 !


삼가 선왕(신라 29대왕 태종 무열왕 김춘추)의 뜻을 이어서

대당(당나라를 높여 부르는 말)과 함께

정의의 군사를 동원하여

백제와 고구려의 죄를 묻고 그 괴수를 처단하였습니다


이리하여 국운이 태평하여졌기에

감히 고하오니


신이여 들으소서 !


-(일단 나당전쟁 이전의 형식적인) 신라의 삼한일통, 삼국통일 완료

(신라의 삼국통일은 나당전쟁을 끝으로 이루어 집니다)-


18일

전쟁중의 전사자에게 폐백을 내렸습니다

소감 이상은 10 OO (삼국사기 원문 2글자 소실) 필,

종자에게는 20필씩을 주었습니다


12월

영묘사에 불이 났습니다


<라봉봉>장엄(씩씩하고 웅장하며 위엄 있고 엄숙하다)한 당대의 기록이라 할 수 있고

비록 신라군은 백제 멸망때같이 국력을 집중하지 않고

고구려 원정은 당나라의 공격때 막타를 치러 갔다고도 이야기 되기도 하나

만약 애초에 신라군이 당나라군에 합류하지 않거나 고구려의 편을 들었다면

중국 당나라 입장에서도 고구려 멸망은 매우 어려워지는 상황으로 이어졌다고 할 수 있고

고구려 멸망때도 신라군은 온나라 장수들이 싸그리 총동원 됬고

당나라군 50만 이외에도 신라군이 20만이나 출동하였기에

신라군이 소극적인 역활을 했다고만 보기도 어렵습니다


고구려 입장에서는 당나라만 상대한다면 이야기가 또 달라졌겠지만

남쪽의 신라역시 상대해야 했기에 전선을 둘로 나눌 수 밖에 없었고

그렇기에 강군으로 유명했던 고구려군 역시 여러 부담을 느꼈다고 할 수 있고

나당연합군의 적극적인 공세에 항복을 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고구려가 멸망했는데

한국인들에게 고구려는 보통의 한국사 왕조라고 할 수가 없기에

고구려 멸망은 비록 신라사에서는 크게 이야기 될지라도

상당히 아쉬운 것은 사실입니다,,


이런 이야기들은 고구려 이야기때에도 썼고

비록 이후부터 한국사는 잠시 한국왕조 발해가 등장하기도 하나

보통 고구려의 시작점이자 안마당이었던 만주지역에서 만주 남쪽지역으로 

축소되기도 하나 이후에도 한국인들은 끊임없이 북방으로 진출하며

옛 땅을 수복해나갔고 이 이야기는 이후에 하겠습니다


다시 문무왕 이야기로는,,

문무왕은 삼국통일전쟁 당시에 논공행상,

공을 따지고 상을 주는 일 등을 철저히 한 것으로 보이는데

초고위직 뿐만 아니라 구석구석 여러 공있는 신하들의 관직을 높여주었다고 할 수 있고

이런 것들을 철저하게 함으로서 신라 내부의 결집과 결속등을 이끌어 냈던 것으로 보이고

상당히 글을 쓰면서 피로감이 느껴질 정도지만,,

문무왕의 성격상 이런 일들을 섬세하게 챙기며 했던 거 같고

과로로 인한 병을 앓았다는 그의 유언으로 보아서는

워커홀릭, 일중독적 증세도 있는 인물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다시 글을 보면서도

고구려 멸망은 신라에게도 기쁜 일만은 아니었고

당대 신라인들도 앞으로 당나라와의 충돌 등

기쁘다기 보다는 여러 고민과 생각들이 들었을 것입니다,,

고구려는 백제 뿐만 아니라 신라와 동족이자 동질의 나라였고

같은 조선(고조선)의 후예였고 북방을 호령하며

중국을 떨게한 대국이었고

오늘날 고구려인들의 후예이자 영어로 고구려(고려)에서

따온 코리아 KOREA 라는 국명을 쓰는 한국인들에게 특히나

고구려 멸망은 큰 의미와 숙제를 남겼다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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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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