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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왕 3년

정월(1월) 봄

남산신성에 길다란 창고를 지었씁니다


부산성을 쌓았습니다


2월

흠순과 천존이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백제 멸망후 남은 백제 세력, 백제 부흥군 세력)의

거열성을 공격해서

7백여 명의 머리를 베었습니다


또 거물성과 사평성을 쳐서 항복케 했으며

덕안성을 쳐서 1천 70명의 머리를 벴습니다


4월 여름

당나라가 우리나라(신라)를 계림대도독부로 삼고

문무왕을 계림주대도독으로 삼았습니다


<신라 신하들>이게 무슨 일입니까 !

드디어 당나라가 야심을 드러낸 것입니다 !


<문무왕>아직 고구려가 남았다,,

일단 기다려 보자꾸나,,

기다려야 한다,,


5월

영묘사 문에 벼락이 쳤습니다

백제의 옛 장군 복신과 승려 도침이

(복신[귀실복신]과 도침은 백제 부흥운동으로 유명한 인물입니다)

예전 임금(백제 31대왕이자 마지막 왕[풍왕 제외시] 의자왕)의 아들

부여풍(백제 32대왕, 마지막 왕 풍왕)을 왕으로 세우고

유진 낭장 유인원을 웅진성에서 포위했습니다


당황제는 당나라 장수 유인궤에게 검교대방주자사를 시켜

전 도독 왕문도의 무리를 통솔하고

우리(신라) 군사와 함께 백제 진영으로 향하게 했습니다


이들은 도처에서 싸울 때마다 진지를 점령했으니

가는 곳마다 앞을 막는 자가 없었습니다


백제 부흥군 대장 귀실복신은 유인원에 대한 포위를 풀고

퇴각해서 임존성을 수비했습니다


그로부터 얼마 후 복신이 도침을 죽인 후에

그의 무리를 병합하고(즉 백제 부흥군의 내분이

일어난 것입니다) 또 그를 배반하고 도망했던 자들을

불러 모아서 큰 세력을 이루었습니다

유인궤는 유인원과 군사를 합친 후

무장을 풀고 군사를 쉬게 하면서

군대의 증원을 요청했습니다


당황제는 조서를 내려서 우위위장군 손인사로 하여금

군사 40만을 거느리고 출병하게 했습니다


그는 덕물도에 도착했고

그곳에서 웅진부성으로 진군했습니다


문무왕은 김유신 등 28명의 장군을 거느리고


<김부식>30명이라고도 한다


이들과 합쳐서 두릉


<김부식>'릉'을 '량'이라고도 한다


윤성, 주류성 등의 여러 성을 공격해서

모두 항복시켰습니다


부여풍은 도주하고

왕자 부여충승과 부여충지 (의자왕의 두명의 왕자라 합니다) 등은

그의 백성들과 함께 항복했습니다


그러나 백제 부흥군의 지수신 장군만은

마지막까지 혼자 임존성에 웅거(일정한 지역을 차지하고

굳게 막아 지키다)해서 항복하지 않았습니다


<백제 마지막 충신 지수신>700년 사직을 이대로 끝낼 수 없다 !

백제 만세 !


<신라 군사들>꼭 황산벌의 계백을 다시 보는거 같구나,,


10월 21일 겨울부터 공격을 시작했으나

이기지 못했습니다


11월 4일에는 회군해서 설리정으로 왔습니다


<김부식>'설'을 '후'라고도 한다


공훈의 정도에 따라 논공행상(공로를 조사해서 상을 줌)을 했습니다


죄수들에게 대사령(죄를 감형하거나 풀어줌)을 내리고

진영에 머물고 있는 당나라 군사들에게 의복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당나라 군사들>아아 ! 계림주대도독 김법민이

우리 당나라에 예의를 다하는구나 ~


<신라 군사들>우리 '대왕'께서 보내신 의복이옵니다

(착각은 자유셔 ~ 아직은 니들이 필요할 뿐,,)


문무왕 4년

정월(1월) 봄

신라의 영웅이자 명장이며 백전노장이었던

김유신 장군이 은퇴를 요청했으나

문무왕이 이를 허락하지 않고

안석(벽에 세워놓고 앉을 때 몸을 기대는 방석)과

지팡이를 하사했습니다


<김유신(당시 70세,,)>신은 이미 늙었기에

다음 세대들에게 자리를 넘기고

은퇴를 하는게 마땅하다 생각하옵니다


<문무왕>외삼촌 ! 아니 김장군은

나라의 기둥인데

이런 상황에서 어찌 은퇴를 하려 하시겠단 말이오 ?


당장 김장군이 피로하지 않게

안석과 지팡이를 제공하여라 !


<신라 신하들>예 !


<문무왕>김장군은 아직 하셔야 할 일이 있으시오

짐은 신라국왕으로서 김유신의 은퇴를 불허한다 !


<김유신>폐하 ! ,,


아찬(신라 6등벼슬) 군관을 한산주 도독으로 임명했습니다


문무왕이 교서를 내려서

부인들도 중국의 의복을 입게 했습니다


2월

유사(관리)에게 명해서 역대의 왕릉에 능을 지킬

백성 20호(집)씩을 이사시켰습니다


각간(=이벌찬, 신라 1등벼슬) 김인문(문무왕의 동생)과

이찬(신라 2등벼슬) 천존이

당나라 칙사 유인원,

백제의 (백제 의자왕의 장남이자 태자였던) 부여융과

웅진에서 맹약을 맺었습니다


3월

백제의 잔당이 사비산성에 웅거해서 반란을 일으키자

웅주 도독이 군사를 보내서

이를 격파했습니다


지진이 있었습니다


성천과 구일 등 28명을 웅진부성 熊津府城 에 보내서

당의 음악을 배우게했습니다


7월 가을

문무왕이 장군 인문, 품일, 군관, 문명 등에게 명령해서

일천주와 한산주의 군사를 거느리고

웅진부성의 군사와 함께

고구려의 돌사성을 공격케해서

그들을 격멸했습니다


8월 14일

지진이 발생해서 민가가 무너졌고

남쪽 지방이 더욱 심했습니다

백성들에게 재물과 토지를 함부로 절에 시주하는 것을

금했습니다


<라봉봉>되게 별다른 기록이 없는거 같은데도

되게 길고 지루한 감 + 모범적 느낌이 있는 기록으로

문무왕의 평소 성격과 행실이 그대로 반영되는

기록 등이라고 생각됩니다,,


문무왕은 위기의 상황에 대한 수습력,대처력이 있었으며

자칫 당나라의 계림대도독부 설치 등에도

분노했을 수도 있겠지만 아직 당나라가 필요하다는 것을

생각하고 당나라 군사들에게 옷을 보내는 등

냉정하고 차분한 대응을 했던 것으로 보이며


큰 불이 나기 전에 불씨를 초장에 진압한 느낌들이라

지루한 감도 있지만 상당히 기록들이 순탄합니다

실제로 문무왕이라는 그의 이름답게

문약하지만도 않고 공격형 인물만도 아니었고

조화롭게 문과 무적 능력치게 배분되있는 느낌으로

백제 멸망과 삼국통일전쟁시기라는 엄중한 상황속에

왕위를 이은 그였음에도

그런 상황에서도 침착함을 잃지 않고

백제 부흥군 세력과 고구려 세력들을 제압하고

내적으로는 신라 장수,신하들을 통합시키며

(+김유신 장군의 은퇴를 막고,,)

단결을 공고히 했다 할 수 있고

단지 너무 교과서적인 느낌이라 그런지

뭔가 인간으로서의 매력같은 것은 부족하다고 생각되지만,,

(인간미는 아버지 태종 무열왕이 컸습니다,,)


상당히 급변하는 정세속에 왕위를 이은 그였고

아버지,선대왕만 못한 왕들도 많이 나오는 와중에

그런 엄중한 상황속에 아버지만한 큰 인물이 나왔다는

사실은 분명하며 적어도 말아먹거나 그런 인물도 아니고

신라 사회와 고구려,백제,신라

삼한,삼국을 통합한 대업을 이루는 유능한 인물이고

그런 인물답게

이 역시 당대 신라인들의 큰 복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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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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