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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 무열왕 8년

2월 봄

백제의 잔적(남은 도적)들이 사비성(백제 마지막 수도)을 공격했습니다

태종 무열왕은 이찬(신라 2등벼슬) 품일(김품일)을

대당장군 大幢將軍 으로 임명하고

잡찬(신라 3등벼슬) 김문왕(태종 무열왕의 셋째아들)과

대아찬(신라 5등벼슬) 양도와

아찬(신라 6등벼슬) 충상 등으로 하여금 그를 돕게 했습니다


또 잡찬 문충을 상주 장군으로 임명하고

아찬 진왕으로 하여금 그를 돕게했으며

아찬 의복을 하주 장군,

무훌, 욱천 등을 남천 대감

문품을 서당 장군

의광을 남당 장군으로 임명해서

사비성을 구원하게 했습니다


3월 5일

중도에 이르자 김품일이 자기 군사의 일부를 나눠서

먼저 가게해서

두량윤성의 남쪽에 머물러서


<김부식>'윤'을 '이'라고도 한다


진지를 만들 곳을 살펴 보도록 했습니다

백제 사람들은 우리(신라) 진영이 정리되지 않은 것을 보고

갑자기 예상하지 못한 급습을 해왔습니다

우리 군사들이 놀라서 패주했습니다


3월 12일

대군이 고사비성 밖에 와서 진을 치고 있다가

두량윤성을 공격했으나

한달 엿새(6일)가 되도록 승리하지 못했습니다


4월 19일 여름에

군사를 철수하면서 대당과 서당을 먼저 보내고

하주의 군사를 뒤따라 오게 했습니다

그들이 빈골양에 이르렀을 때

백제 군사를 만나서 싸웠으나 패배했습니다


사망자는 비록 적었으나

병기와 군수품은 상당히 많이 잃었습니다


상주 낭당은 각산에서 적을 만나서

공격해서 승리하고

마침내 백제의 진중으로 들어가서

2천명을 참살했습니다


태종 무열왕은 군사가 패배했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놀라서

장군 김순, 진흠, 천존, 죽지, 제사를 보내서 구원하게 했습니다

그들이 가시혜진에 도착했을 때

적군이 가소천까지 퇴각했다는 소식을 듣고

가시혜진에 도착해서 되돌아 왔습니다


태종 무열왕이 여러 장수들의 책임을 물어서

정도에 따라서 벌을 주었습니다


5월 9일


<김부식>11일 이라는 설도 있다


고구려 장군 뇌음신이

말갈 장군 생해와 군사를 합쳐서

술천성을 공격했으나 승리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방향을 바꾸어서 북한산성을 공격했고

그들은 포차 抛車 (투석기 차)를 벌려놓고 돌을 날려 보냈습니다

그 돌을 맞은 담장과 집은 번번히 무너졌습니다

성주인 대사 동타천은 성 밖에 마름쇠(끝이 송곳처럼

뾰족한 네게의 발을 가진 표창같은 쇠)를 던져 놓아서

사람과 말이 다니지 못하게 하고

또 안양사 창고를 헐어서

그 재목을 가져다가 성안의 무너진 곳마다

망루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곳에 굵은 밧줄로 그믈울 얽고

마소(말과 소)의 가죽과 솜옷을 걸어매고

그 안쪽에 노포(쇠뇌, 석궁)를 설치해서 성을 지켰습니다


이당시 성안의 남녀가 2천 8백명 뿐이었는데

성주 동타천이 어린이와 힘못쓰는 자들까지도 격려해서

강한 적과 대치하기를 무릇 20여일동안 했습니다

그러나 식량이 떨어지고 힘이 다했고

그는 정성을 다해서 하늘에 기도했습니다


<동타천>하늘이시여 신라를 지켜주십시오 !


그때 돌연 큰 별이 적진에 떨어지고

우레(천둥)가 울리고 비가 오면서 천지가 진동했습니다

적들은 겁이 나서 포위를 풀고 돌아갔습니다


태종 무열왕은 동타천을 가상하게 여기고

대내마(=대나마, 신라 10등벼슬)로 발탁했습니다


압독주를 대야로 옮기고

아찬(신라 6등벼슬) 종정을 도독으로 임명했습니다


6월

대관사의 우물물이 피로 변하고

금마군에서는 땅에 피가 5보 넓이로 흘렀습니다


태종 무열왕이 붕어, 사망했습니다


<태종 무열왕 김춘추>아직 고구려가 남았다

삼한 三韓 (고구려, 백제, 신라)을 하나로 만들어라 !


시호를 무열이라 하고

영경사 북쪽에 장사지냈으며

태종이라는 시호를 올렸습니다


당고종이 부음(사망 소식)을 듣고

낙성문에서 추도식을 거행했습니다


<라봉봉>그렇게 신라 삼한일통,삼국통일의 주역이자

백제를 멸망시킨 신라의 거인 태종 무열왕은 사망했고

약간 태종 무열왕이 삼국통일을 했다는 이미지도 있는거 같으나

정확히는 그의 아들 문무왕 김법민때 삼국통일이 완성됬고

그러나 그가 백제를 멸망시키고 삼국통일의 방아쇠를 당기며

신라 삼국통일의 기반을 마련했다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기에

'삼국통일의 주역(주인공)'이라는 표현은 맞고

'삼국통일을 한 왕'이라는 표현은 틀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신라 태종 무열왕 김춘추, 그는 특히나 다른 신라왕들에 비해

본명으로 불리는 경우가 많은거 같은데

이는 중국 당나라 태종 이세민도 그렇고 한국 조선 태종 이방원도

그렇고 태종이라는 묘호가 아무래도 큰 조상이라는 의미로

큰 업적을 남긴 만큼 그에대한 그림자도 크기에

태종이라는 칭호를 가진 인물들은 보통 그렇게

본명도 같이 불리는 경우들이 있는거 같고


삼국통일의 기반을 닦은 인물이라 할 수 있으나

또 당나라를 끌여들여서 대동강 이남(고구려 영토 남쪽)의

불완전한 통일이었기에 비판받는

인물이라는 그림자도 존재했던 인물이라 할 수 있고


아무튼,, 김유신 장군과의 특별했던

우정,관계는 이야기 마다 틈틈히

한 거 같은데

당대 김춘추와 김유신은 신라의 두 거인으로서

당대 신라인들이 크게 의지하고 따랐다고 할 수 있고

그렇게 700년 왕조의 백제를 멸망시키고

삼국통일의 시작을 알린 인물이었고

그만큼 한국사, 신라사에서는 그 상징성이 큰 인물,왕이라서

그에 대한 여러 이야기도 있고

또 그를 기준으로

그 이전 시조 혁거세 거서간부터 진덕여왕까지 신라왕은 성골,

태종 무열왕 그부터 마지막왕 경순왕, 멸망까지 신라왕은 진골로

구분되며 이는 성골이 높고 진골이 낮다기 보다

태종 무열왕대부터 신라는 정말 크게 바뀌기에

그것을 구분하기 위해 예의상 선대 왕을 성골로 높이고 자신대부터

진골로 구분한게 아닐까 싶다고 이전 이야기때 썼고


그렇게 태종 무열왕 김춘추, 그의 대부터 신라는 정말

아주, 크게 바뀌고 삼국은 하나가 됬고

또 그로 인해 신라인들과 당대 한국인들의 민족통합적 과제와

삼국통일전쟁으로 불러들인 외세였던 당나라와의 외교문제 등

여러 시대적 과제들이 있었다고 할 수 있고

이런 이야기들은 삼국통일을 완성한 신라 문무왕대에 자세히 쓰겠습니다

문무왕은 아버지의 이미지에 밀리는거 같기도 하나

삼국통일을 완성했다는 상징성이 매우 큰 인물이고

그의 시대때 신라 기록은 역시 아버지 같이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전설)'라는 요즘말같이

전설적인 기록들이 많고

과연 호부호자(호랑이 아버지와 호랑이 아들)가

태종 무열왕과 문무왕이라 할 수 있으며

하여튼 이때 당시의 신라는 고구려 멸망,

세계 초강대국 당나라와의 결전인 나당전쟁,

삼국통일의 완성, 신라의 대번영 등 대단했던 시기라 할 수 있고

그만큼 기록도 매우 깁니다,,

문무왕은 삼국통일을 완성한 왕답게 특별하게

기록이 상,하로 나뉘어 있고 다음 이야기때 쓰도록 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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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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