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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전설의 전투 황산벌 전투, 신라 김유신과 백제 계백의 대결>


태종 무열왕 7년

정월(1월) 봄

상대등(신라 최고위 벼슬, 신라 귀족들의 대표직) 금강이

사망했습니다


이에 따라 이찬(신라 2등벼슬) 김유신을

상대등에 임명했습니다


<신라 귀족 1>김장군이

대각찬(대각간, 신라 최고위 벼슬로

신라 1등벼슬 이벌찬[각간]보다 높은

김유신 장군을 위해 만들어진 특수직 벼슬로

정확히는 이전에도 있었으나

아무튼 유례가 없다싶이한 특수벼슬)에 이어

상대등까지 하게 되셨군,,


<신라 귀족 2>이미 그에게 벼슬이란

아무런 의미가 없지,,


3월

당고종(당나라 황제)이  좌무위 대장군 소정방을

신구도행군대총관으로 삼고

김인문(태종 무열왕 김춘추의 둘째 아들)을

부대총관으로 삼아

좌효위 장군 유백영 등 수륙군 13만명을 거느리고

백제를 치게 했습니다


이와 동시에 칙명을 내려서

태종 무열왕을 우이도행군총관으로 삼아서

장병들을 거느리고

그들을 지원하도록 했습니다


5월 26일 여름

태종 무열왕이 김유신, 진주, 천존 등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서울(신라 수도 금성[경주])을 출발해서

6월 18일 남천정(경기도 이천시 쪽)에 머물렀습니다


<백제 첩자들의 보고>아따 건길지(왕) !

시방 큰일났당께요 ~~~~~ ;;;;;


<백제 의자왕>뭔일인디 ? 찬찬히 말해보랑께 ~


<백제 첩자들>시방 신라왕 김춘추가

김유신이랑 우리나라(백제) 북쪽까지

대군을 몰고 왔당께요 !!


<백제 의자왕>음,, 고구려를 공격하려는게 아닐까 ?


<백제 신하들>어라하(왕) ! 일단 대비를

철저히 해야 할 것입니다


(당나라 장수) 소정방은 내주에서 출발했습니다

그는 천리에 달하는 병선을 이끌고

수로를 따라 동쪽으로 내려왔습니다


(6월) 21일

태종 무열왕이 태자 김법민(훗날 문무왕)으로 하여금

병선 1백척을 거느리고

덕물도에 가서 소정방을 맞이하게 했습니다


소정방이 김법민에게


<소정방>나는 7월 10일 백제 남쪽에 도착하여

대왕의 군사와 만나

의자(의자왕의 이름, 부여의자)의 도성을 격파하려 한다


김법민은


<김법민>우리 대왕(태종 무열왕) 께서는

지금 대군이 오기를 고대하고 계십니다


만일 대장군의 도착 소식을 들으신다면

틀림없이 잠자리에서 식사를 하시고라도

달려 오실 것입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소정방은 기뻐하며

김법민을 돌려보내서

신라의 병마를 징발하게 했습니다


김법민이 돌아와서

소정방의 군세가 매우 성대하다고 말했습니다


<신라 장군들>오오 ! 이거 진짜

백제가 멸망할거 같은데요 ??


<태종 무열왕 김춘추>드디어 원한을 갚을때가 왔구나 !


태종 무열왕은 기쁨을 금치 못하고

태자(김법민)와 대장군 김유신,

장군 김품일(화랑 관창의 아버지,

백제의 공격으로 사망한 대야성 성주 김품석의 동생)과

김흠춘(=김흠순, 화랑 반굴의 아버지,

김유신 장군의 동생) 등으로 하여금


<김부식>(김흠)춘을 (김흠)순이라고도 한다


정병 5만을 거느리고 가서

응원하게 했습니다


태종 무열왕은 금돌성(경상북도 상주시)에 머물렀습니다


7월 9일 가을

김유신 등이 황산벌로 진군했습니다


백제 장군 계백은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먼저 중요한 지형을 차지하고

세 곳에 군영을 설치한 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신라 김유신 장군은 5만대군,

백제 계백 장군은 5천명의 군사였고,,

(5000 vs 50000)


<계백>옛날 구천은 5천명으로

오나라 70만 군사를 격파하였다


나는 이곳에 나서기 위해

내 처와 자식들을 죽였다

살아서 욕을 보는것보다는

차라리 쾌히 죽는 것이 낫다


<비장한 백제 오천 결사대>,,


<계백>오늘은

마땅히 각자 용기를 다하여 싸워 이겨

국은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자 !


<백제 오천 결사대>와아아아 !! 백제 만세 !

계백 장군 만세 !


백제 입장에서는 황산벌이 밀리면

곧 수도 사비성이 뚫렸기에

백제 병사들은 전력을 다해 싸웠고

한 사람이 천 사람을 당해낼 정도였습니다,,


신라장군 김유신 등은 군사를 세 갈래로 나누어서

네 번 싸웠으나 승리하지 못했고

신라 병사들도 기진맥진했습니다


<김유신 장군>큰일이다,, 이렇게 되면

당군과의 합류가 늦어지는데,,


<신라 장군들>방법이 없십니더 !

쟤네도 지금 작정했십니더,,


그러자 신라 장군 김흠순(김유신 장군의 동생)이

그의 아들 김반굴에게


<김흠순>신하가 되어서는 충성이 제일이요 !

자식이 되어서는 효도가 제일이니 !

이러한 위기를 당하여 목숨을 바친다면

충성과 효도를 모두 다하는 것이다 !


라고 말했습니다


반굴이 대답하기를


<김반굴>삼가 분부 말씀을 알아 들었습니다


라고 말하면서

곧 적진(백제군 진영)으로 달려들어서

최선을 다하여 싸우다가 전사했습니다


이렇게 되자 좌장군 김품일이

아들 김관창을 불러서


<김부식>관장이라고도 한다


말 앞에 세우고

여러 장수들에게 보이며 말했습니다


<김품일>내 아들이 나이가 겨우 열여섯이지만

기백이 자못 용감하다


네가 오늘 전투에서

삼군 三軍 의 모범이 될 수 있겠는가 ?


관창은


<김관창>예 !


라고 말하고는

갑옷을 입고 말을 탄 채

창 한자루를 들고

적진에 달려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적군에게 생포되서

산 채로 백제 계백 장군 앞에 서게 됬습니다


계백이 갑옷을 벗겨보고는


<계백>아직 어린 소년이로다,,


계백 장군은 관창의 나이가 어림에도 불구하고

용감한 것을 가상하게 여겨서

차마 죽이지 못하고

탄식하면서 말했습니다


<계백>신라와는 대적할 수 없겠구나

소년도 오히려 이런 정도이니

황차(하물며) 장정들은 어떻겠는가 ?


(실제 계백장군이 이런 말을 했으면

백제군의 사기가 떨어질 거 같은데

약간 신라측에서 후대에 조작한 느낌이 있는거 같습니다)


계백은 관창을 죽이지 않고 돌려 보냈습니다


돌아온 관창이 아버지 김품일에게 말했습니다


<김관창>제가 적진에 들어가서

장수의 목을 베지 못하고

깃발을 뽑아오지 못한 것은

죽음이 겁나서가 아닙니다


관창은 말을 마치자마자

손으로 우물물을 떠 마시고

다시 적진으로 나아가 힘차게 싸웠습니다


계백은 관창을 붙잡아 머리를 베어서

말 안장에 매어 보냈습니다


김품일이 그 머리를 쳐들자

피가 흘러 소매를 적셨습니다


그는,,


<김품일>내 아들의 얼굴이 살아있는 것 같구나

나라를 위해 죽을 수 있으니 다행이로다 !


라고 말했고

신라 삼군 三軍 의 병사들이 이를 보고

비분강개 悲憤慷慨 (슬프고 분한 느낌이

마음속에 가득 차있음) 해서

죽음을 각오하고

북을 치고 함성을 울리며 진격했습니다


이 전투에서 백제 군사들은 대패했고

계백 장군도 전사했으며

좌평(백제 1등벼슬) 충상, 상영 등 20여 명이

포로가 됬습니다


<김유신 장군>곧 백제가 멸망하겠구나,,


이 날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부총관 김임문(태종 무열왕의 둘째아들)과 함께

기벌포에 도착해서 백제 군사와 마주쳤습니다

그는 백제병과의 전투에서 크게 승리했습니다


김유신 등이 당나라 군영에 도착하니

소정방은 김유신 등이

늦게 왔다는 이유로 군문에서

신라 독군 督軍 (지방군 사령관 같습니다) 김문영의

목을 베려 했습니다


<김부식>(김문)영 潁 을 (김문)영 永 으로도 쓴다


김유신은 군사들 앞에서


<김유신>대장군은 황산(벌) 전투를 보지도 않고

늦게 온 것을 죄주려 하는구려


나는 죄도 없이 치욕을 당할 수는 없으니

결단코 먼저 당나라 군사와 결전을 한 후에

백제를 쳐부시겠소


라고 말하고

(김유신 장군은) 곧 군문에서 도끼를 집어 들었습니다

김유신 장군은 몹시 노해서 머리카락이 뻗뻗히 섰고

허리에 찼던 보검이 칼집에서 저절로 튀어나왔습니다


<당나라 장수들>소정방 대장군,,

신라군사들도 힘들게 온거같은데

그냥 넘어갑시다 ;;,,


소정방의 우장 동보량은 발을 구르며


<동보량>신라 군사들의 마음이 장차 변할 것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이리되자 소정방은 김문영의 (늦게 온) 죄를

문제삼지 않았습니다


백제왕자가 좌평(백제 1등벼슬) 각가로 하여금

글을 당나라 장군에게 보내서 철군할 것을

'애걸 哀乞 (소원을 들어달라고 애처롭게 빎)' 했습니다

(그냥 표현도 아니고 애걸이라는 표현이

나올 정도로 어지간히 급했던 당대 백제인들입니다,,)


<라봉봉>당대 황산벌 전투는 백제 이야기때 자세히 썼고

백제인들의 시각에서가 아닌 이번에 태종 무열왕대의 기록,

신라인들의 시각에서는 백제를 멸망시키려 대군을 보냈는데

당군과 합류하려 한시도 지체할 수가 없었고

작정한 백제 5천 정예 결사대에

4번 패했으나 이후 반굴과 관창 두 화랑의 자살돌격으로

신라군들은 '비분강개'해서 전력을 다해 싸웠고

결국 백제군은 5000 대 50000 이라는 압도적인 숫적 열세와

신라 지휘부 자제들의 자살돌격 등에

신라군 역시 작정한 것을 알았을 것이고

양국의 운명을 건 전투에서 결국 끝내 황산벌에서 백제 정예군이 몰살되며

육지는 황산벌, 바다는 기벌포라는 백제는 최후의 방어라인이 모두 뚫리게 됬고

결국 나당 연합군의 칼날은 백제의 심장부, 도성을 향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신라와 백제의 두 영웅, 김유신 장군과

계백 장군이 맞섰던 '황산벌 전투' 는 한국사 전설의 전투로 이야기 되며

그냥 싸운 것도 아니고 '비분강개' 한 마음으로 싸웠다는 것을 보면

당대 전투가 얼마나 격렬하고 치열했는지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황산벌 전투 이후 신라군이 합류하자

당나라군이 이때 늦게온 김유신 장군과 신라군을 벌주려 하자

분노한 김유신 장군의 모습에 결국 형벌을 물리게 됬고


이 때 소정방의 부하 동보량이


'신라 군사들의 마음이 장차 변할 것이다'


라는 말을 했는데 이는 당대의 상황뿐만 아니라

이후 고구려 멸망후 결국 신라와 당나라가 '나당전쟁'을 했던 것을 보면

상당히 의미심장한 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당나라가 신라를 동맹이 아닌 속국으로 인식하며

신라를 간섭하려했다고 했다고도 볼 수 있고

신라 역시 점점 당나라의 야심에 분노하다가 이후

'나당전쟁'으로 삼국통일전쟁이 끝나게 되는데

삼국통일 시기를 '백제와 고구려 멸망'이 아닌

'나당전쟁 종료 후'로 이야기 되는 것 역시도

이런 간섭과 야심 등까지 모조리 물리치고

고구려,백제,신라 삼한 백성들의 통합을 이루었던

시기여서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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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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