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진덕여왕 3년

정월(1월) 봄

처음으로 중국의 의관(옷)을 착용했습니다


(나당동맹때 김춘추가 당태종에게 말한대로

이 때부터 신라 관료들은

중국식 관복을 입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8월 가을

백제 장군 은상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석토 등의 일곱 성을 공격해서 점령했습니다


진덕여왕은 대장군 김유신과 장군 진춘, 죽지, 천존 등에게

나가서 대항하도록 명령했습니다


그들은 장소를 옮겨가며 열흘이 지나도록 싸웠으나

백제군을 물리치지 못하고 도살성 밑에 진을 쳤습니다


김유신은 군사들에게 말했습니다


<김유신>오늘은 틀림없이 백제 사람이 정탐을 하러 올 것이다

너희들은 이를 모르는 체 하고

절대로 누구인가를 묻지 말라 !


김유신은 곧바로 사람을 시켜서

진중을 여기저기 돌아 다니면서


<김유신>결연한 자세로 움직이지 말라

내일 구원병이 온 후에 결전을 하겠다 !


라고 말하도록 했습니다

백제 첩자가 이 말을 듣고

돌아가서 (백제 장군) 은상에게 그대로 보고했습니다

은상 등은 증원병에 온다고 생각해서

두려운 마음을 품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 때


김유신 등이 진격해서 적을 크게 쳐부수고

장령(장군) 백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으며

군졸 8천 9백 80명의 머리를 베고

군마 만 필을 얻었습니다

노획한 병기 종류는 셀 수 없을 만큼 많았습니다


진덕여왕 4년

4월 여름

교서를 내려서 진골로서 현직에 있는 자는

상아홀 (코끼리 송곳니인 상아로 된 홀 笏 인데 홀은

관료들이 들고있는 넙적한 직사각형

판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원래는 임금앞에서 아뢰거나 명을 받들때

메모용으로 쓰던 당대의 판수첩이라 보면 되는데

점점 그러지 않고 의례적인 것으로 변했다고 합니다)


6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서

백제를 이긴 사실을 보고 했습니다


진덕여왕은 비단에 5언시 태평송을 써서

(여왕이 비단에 직접 수놓았다고 합니다,,)

이를 김춘추의 아들 김법민(김춘추의 첫째아들로

후의 신라 30대왕 문무왕)으로 하여금

당나라 황제에게 바치도록 했습니다


그 글은 다음과 같습니다


<진덕여왕의 치당태평송>

위대한 당나라 왕업을 열었으니

높고 높은 황제의 앞 길 번창하여라


전쟁을 끝내 천하를 평정하고

학문을 닦아 백대에 이어지리라


하늘의 뜻 받드니 은혜의 비 내리고

땅의 만물 다스려 빛나는 이치 얻었네


어질음 깊고깊어 일월(해와 달)과 어울리고

시운(운수)도 따라오니 언제나 태평하네


큰 깃발 작은 깃발 저리도 빛나며

징소리 북소리 어찌 저리 쟁쟁한가 ?


외방의 오랑캐 황제 명령 거역하면

하늘의 재앙으로 멸망하리라


시골이나 도시에나 풍속이 순박하고

멀리서 가까이서 좋은일 다투어 일어나네


빛나고 밝은조화 사계절과 어울리고

해와 달과 오성이 만방을 도는구나


산신의 뜻으로 재상이 보필하고

황제는 충신 인재를 믿으시니


삼황과 오제의 덕이 하나가 되어

우리 당나라를 밝게 비추리로다


(여기서 마지막 '우리 당나라를 밝게 비추리로다'

구절은

'길이길이 빛나리 우리 당나라'나

'우리[신라]에게 비추리라 당나라의 빛이여' 라는

뜻으로도 해석된다는데 정상적 해석이나

문맥적으로는 '우리[신라]에게 비추리라

당나라의 빛이여'가

맞다고 이야기 됩니다)


당고종이 이 글을 아름답게 여기고

김법민에게 대부경을 제수해서 돌려 보냈습니다


이 해에

처음으로 중국의 연호인 영휘를 사용했습니다


(진덕여왕의 치당태평송은

당대 백제[+왜]와 고구려의 압박에

절박했던 신라의 눈물겨운 외교책이라고도

이야기 되나 막상 신라인들 입장에서는

그냥 좋은 말 한번 하고 많은 이익을 얻어오겠다는

심산이었던거 같습니다


신라는 당대 삼국에서 결코 만만한 나라도 아니었고

백제의 대공세에도 쉽게 무너질 나라는 아니었지만

또 백제의 격렬한 공세에 대한

위기감 역시 있었던 시기였다 할 수 있기에

당나라와의 외교에 집중했던 시기라 할 수 있습니다)


<김부식>논평한다

삼대 三代 의 정삭 正朔 (달력) 을 고치고

후대에 연호를 칭한 것은

모두 통일을 크게 여기고

백성들의 이목을 새롭게 하려는 까닭이었다


이 때문에

때를 타서 나란히 일어나 나라를 세워 가지고

천하를 다투든지

또는 간웅(간사한 영웅)들이 틈을 타 일어나서

임금자리를 엿보지 아니하며

편방 偏邦 (멀리 떨어져있는 나라) 의 소국으로서

천자의 나라에 신하의 나라로 속한 나라는

본래 사사로이 연호를 지어 쓰지 못하는 법이다


신라같은 나라는 한 뜻으로 중국을 섬겨

사신의 입조와 조공하는 길을 그치지 않았으면서도

법흥왕이 스스로 연호를 칭하였으니

이는 미혹(정신이 헷갈려 갈팡질팡 헤맴) 되다


그 뒤에도 그 허물을 이어 되풀이하여 여러 해를 지내고

당태종의 꾸지람을 듣고서도

오히려 이를 고치지 아니하고 머뭇거리다가

지금에 이르러서야 당의 연호를 받들어 행하게 되니

이는 비록 부득이한 데서 나온 것이라 하더라도

또한 과실이 있는 것을 능히 고친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이거는 아무래도 딱히 두둔하기 어려운 말인데

사대주의자적 모습의 사론이라고 생각됩니다

사실 삼국사기를 편찬한 김부식은 현실주의자적 관료였으나

사대주의자 오명도 있는 인물이고

그런 논란이 아예 이유없이 나온 것은 아닙니다)


진덕여왕 5년

정월(1월) 초하루(달의 첫번째 날, 1일) 봄

진덕여왕이 조원전에 나가서

백관들의 신년 하례를 받았습니다


신년 하례의 예식이 여기에서 시작됬습니다


2월

품주 稟主 (집사부의 전신, 원조 집사부)를 집사부로 고치고

파진찬(신라 4등벼슬) 죽지를 집사중시로 임명해서

기밀 사무를 관장하게 했습니다


OOO (삼국사기 글자 손실) 파진찬(신라 4등벼슬) 김인문을

당나라에 보내서 조공하고

이어서 숙위(임금[당황제] 곁에서 모시는 직)로

머물러 있게 했습니다


진덕여왕 6년

정월(1월) 봄

파진찬(신라 4등벼슬) 천효를 좌리 방부령으로 삼았습니다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서 조공했습니다


3월

서울에 큰 눈이 내렸습니다


왕궁의 남문이 이유없이 저절로 무너졌습니다


진덕여왕 7년

11월 겨울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서 금총포(옷감)를 올렸습니다


진덕여왕 8년

3월 봄

진덕여왕이 붕어, 사망했습니다


시호를 진덕이라 하고 사량부에 장사지냈습니다


당고종이 이를 듣고

영광문에서 추도식을 거행했습니다


그리고 대상승 장문수를 사절로 삼아서

황제의 신임표를 가지고 와서 조문케 했으며


진덕여왕에게 개부의동삼사를 추증하고

비단 3백필을 부의로 주었습니다


<김부식>시조 혁거세 (신라 1대왕 혁거세 거서간 박혁거세) 부터

진덕왕(신라 28대왕 진덕왕[진덕여왕])까지 28대왕을

성골 聖骨 (성스러운 뼈) 라고 불렀으며

무열왕(신라 29대왕 태종 무열왕 김춘추) 으로부터

마지막 임금까지를

진골 眞骨 (진짜 뼈) 라고 불렀다


당나라 영호징의 '신라기'에는


'그 나라에서는 왕족을 제 1골이라 부르고

나머지 귀족을 제 2골이라고 불렀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라봉봉>선덕여왕 김덕만은 첫번째 여성임금이었기에

당대 여러 이야기가 나왔겠지만

그래도 아버지가 진평왕이었고

그래도 진평왕이 딸을 위해서 권력승계작업도 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에 어느정도 왕권을 행사한 인물이기는 했으나


진덕여왕 김승만은 첫번째 여성임금은 아니었기에

신라 신하들이 이번에는 그러려니 했겠지만

문제는 김승만은 진평왕의 동생이었던 김국반의 딸이고

왕의 딸 출생도 아니었고 그냥 성골왕이라 불렸지만

딱히 정통성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이미 '비담의 난' 이후부터 국정을 장악한

김춘추, 김유신 세력에게 옹립된 허수아비 여왕이었으나

나름 본인 스스로도 본인이 어떤 처지,위치에 있는 지를 잘 파악하고

조용히 지내며 김춘추에게 권력을 양위하다 사망한거 같고

진덕여왕대의 개혁정책들은 실세였던 김춘추의 주도하에 이루어 졌다고

이야기됩니다


사실 김춘추도 진지왕의 손자였고 아버지 김용수(김용춘)도 신라에서

진지왕의 아들 출신으로서 좋은 대우로 살던 입장이었기에

실권 뿐만 아니라 정통성에서도

김승만에 비해 결코 꿀릴게 없는 상황이었는데

게다가 김승만이 당대 여인의 몸으로 태어났다는 점까지 생각하면

더 그랬을 것인데

'비담의 난'이 일어나지 않고 선덕여왕이 그냥 조용히 죽었다면

아마 김춘추가 바로 왕위를 이을 수도 있었겠지만

하필 선덕여왕이 죽기 직전에,,

'비담의 난'이 일어나게 됬고

이 비담의 난으로

신라 구귀족세력들이 신귀족세력인 김춘추, 김유신에게

모조리 숙청되다 싶이 했기에

만약 김춘추가 곧 왕위를 잇게 되면

다소 '구세력들을 숙청하고 왕위에 오른 잔인한 인물' 이라는

오해를 쓸 수도 있었고

이에 특히나 백제같은 나라가 신라를 공격하기에

좋은 명분을 제공했다고 할 수도 있고

이에 김춘추는 먼저 한번더 여왕을 그것도 선덕여왕같이

그나마 세력이 강했던 인물이 아닌

세력도 딱히 없다 싶이했을 김승만을 왕위에 옹립하면서

이때부터 주변 세력을 자신의 사람들로 채우며

철저하게 권력승계 작업을 시작했던거 같고

김승만, 진덕여왕도 김춘추와 김유신의 이런 모습들을 눈치채고

현명한 처신을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랬기에 비록 선덕여왕이나 진덕여왕이

진짜 이름같이 정치를 잘한 인물들은 아니었으나

이때 김춘추, 김유신 세력이 급격히 성장했던 시기라 할 수 있고

두 여왕들도 나름 미약한 왕권에도

김춘추와 김유신을 밀어줬다 할 수 있기에

이후 김춘추와 김유신 세력에게

'착한 착한 여왕(선덕여왕)' , '진짜 착한 여왕(진덕여왕)' 이런 좋은 칭호의 이름을

받게 된 거 같고

저는 나름 역사에서 여성의 활동이나 그런 글들도

의의가 있다 생각하고 흥미롭게 읽은 글들도 있고

나름 두 여왕들이 '능력은 부족했지만 주변에 좋은 인물들이 있었다' 라고 할 수 있고

사실 그역시 능력이라면 능력일 것입니다


또 나름 두 여왕들에게는 김춘추와 김유신이라는 두 나라의 기둥같은

인물들이 있었기에 정치적으로는 김춘추의 도움을,

나라가 위급하거나 할 때는 김유신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고

김춘추와 김유신이라는 두 신라의 거인은 당대 두 여왕들 뿐만 아니라

신라인들에게도 정신적 지주같이

크게 의지가 되었던 인물이었다고 할 수 있기에

두 여왕의 정치력과는 별개로 신라는 그럼에도

강성하게 잘나가던 시기였다고 할 수 있고

이에 이후 통일신라 후기쯤에

신라인들은 그런 점은 생각하지 않고


'옛날 두 여왕시절때는 우리가 잘나갔는데,,'


'여왕이 다스려야 나라가 잘된다(이는 엘리자베스, 빅토리아 여왕 시대때

잘나갔던 영국인들의 미신입니다)'


이런 근거없는 향수들이 생기며

진성여왕이 즉위하게 된 거 같고

문제는 진성여왕은 지방세력을 통제할 능력도 부족했고,

딱히 진성여왕을 보호할 인물들도 없던 시기였고,,

이에 이후 신라는 더 큰 혼란으로 가게 된 거 같고

근데 반대로 보면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은

남녀를 떠나서 평범한 군주인데도

'시대를 잘타고난' 군주였다고

이야기 할 수 있겠습니다,,


또 마지막 글의 성골과 진골 구분은

딱히 성골이 높고 진골이 낮다기보다

이후 왕이된 태종 무열왕 김춘추는 삼한일통(삼국통일),

새로운 시대를 직감하고 있었으며

기존 신라와는 전혀 달랐던 통일된 신라를 연 임금이었기에

(실제 삼국통일은 그의 아들 김법민,

문무왕때 이뤄지나 김춘추와 김유신은

삼국통일의 기반을 닦았고 주역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기존 선왕들을 성스러운 뼈, 성골로 높이고

자신대부터는 진짜 뼈, 진골로 부르게 된 같고

딱히 누가 높고 낮았다기보다 또 당대 애초에

신라에 김춘추 세력보다 강한 세력은 존재하지 않았기에,,

성골이니 진골이니 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고

근데 진짜 아무런 의미가 없는게

그렇게 치면 초기 신라의 박씨,석씨들도 모두 성골이기에

아마 통일전 신라와 통일 신라의 구분점을 나누기 위해 만들어진게

성골과 진골이 아닐까 싶습니다


반응형
Posted by 라봉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