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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덕여왕 14년

정월(1월) 봄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서 특산물을 바쳤습니다


김유신 장군은 백제를 치고 돌아와서

아직 선덕여왕도 만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백제군이 다시 변경을 침범했습니다


선덕여왕은 김유신에게 출정을 명했습니다


<선덕여왕>김유신은 짐을 알현하기보다

먼저 ! 말발굽을 돌려 백제를 쳐라 !


김유신은 집에도 가보지 못한 채

출정해서 백제군을 격파하고

2천명의 목을 베었습니다


3월에 김유신 장군이 돌아와서

선덕여왕에게 복명 復命 (명령을 받고 일을 처리한 사람이

그 결과를 보고함) 하고 아직 집에도 돌아가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다시 선덕여왕을 알현한 김유신>충성을 다하겠습니다 !


<선덕여왕>수고했네 김장군 !


,,


그 때 백제가 다시 침노(침공)했다는 급보가 왔습니다

선덕여왕은 사세(상황)가 급하다고 판단하고

김유신에게 말했습니다


<선덕여왕>나라의 존망이 (김유신) 공의 한 몸에 매였으니

노고를 마다하지 말고

가서 대책을 도모하라 !


(근데 진짜 선덕여왕이 개인적으로는 무능한 인물같으나,,

인복자체는 좋았던 인물입니다)


김유신은 또다시 집에 돌아가지 않고

밤낮으로 군사를 훈련시켰습니다


그가 서쪽으로 행군하는 도중에 자기의 집 앞을

통과하게 됬습니다


김유신 장군의 가족들은 모두 문 밖에서

그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고

온 집안 식구들이 나와서 유신을 바라보고 눈물지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돌아보지 않고 싸움터로 갔습니다


,,


<김유신 장군의 부관>장군 그래도 가족들을 뵙고 가시는게,,


<김유신>현재 뒤에 있는 우리 병사들은 가족이 없겠는가 ?

내가 만약 가족들을 본다면

군기가 문란해 질 것이다

일을 끝내고 돌아와도 늦지 않다 !


그러다 집에서 50보 가량 떨어진 곳에 이르렀을 때

말을 멈추고

김유신 장군은 자기 집의 물을 떠오게 했습니다


김유신 장군은 그 물을 마시며 말했습니다


<김유신>우리집의 물맛이 아직도 옛 맛 그대로구나


그 때 신라 군사들이 모두


<신라 군사들>대장군도 이러한데

우리가 어찌 가족과 헤어지는 것을 유감스럽게 여길 것인가 !


라고 했습니다


국경에 이르르자

백제인들이 우리 군사의 진영을 보고

감히 접근하지 못하고 물러갔습니다


선덕여왕은 이 소식을 듣고 매우 기뻐하며

김유신에게 상과 벼슬을 주었습니다


<선덕여왕>하여튼 든든하군 내가 인복이 있다 이기야 ~


<신라 신하들>,,(여자왕은 아니꼽지만 유신이는 너무 무서워,,)


3월

황룡사 탑(황룡사 구[9]층 목탑) 을 세웠습니다

이는 승려 자장의 요청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자장 스님>아아 ! 부처님의 공덕으로 우리 신라는

큰 번영을 이룰 것입니다


탑이 9층으로 된 이유는

각각 우리 신라가 신라 중심으로

주변 9개 국가를 제압한다는 의미로서


1층은 왜국 (일본)

2층은 중화 (중국)

3층은 오월 (남중국)

4층은 탁라 (탐라, 제주도)

5층은 응유 鷹遊 (응유 해석은 놀이매, 사냥매 같은데

백제의 낮춤말로 백제의 상징이 매였다고 합니다

신라의 상징 동물이 '닭' 이었다면

백제가 자리잡았던 마한지역에서는

'매'를 많이 키웠다고 이야기됩니다)


6층은 말갈

7층은 거란

8층은 여진

9층은 예맥 (고구려)


을 뜻하옵니다


(신라가 중국에 무조건적으로 사대했다는 이미지가 있는데

실리에 의한 사대외교였다고 할 수 있고

백제,고구려 멸망 이후 신라는 당나라와 나당전쟁을 했고

또 이렇게 당대 초강대국, 최선진국이었던

중국을 제압한다는 의미의

탑을 지은 신라인들입니다)


<선덕여왕>참으로 뛰어난 탑이로구나 !


5월 여름

당나라 태종 이세민이 집적 고구려를 공격했습니다

선덕여왕은 군사 3만을 동원해서 이를 도왔습니다


백제는 이 틈을 타서 신라를 습격해서

서쪽의 일곱 성을 빼앗았습니다


11월 겨울

이찬(신라 2등벼슬) 비담을

상대등(신라 최고위직, 신라 귀족들의 수장)으로 임명했습니다


선덕여왕 16년

정월(1월) 봄

(상대등) 비담과 염종 등이

여주 女主 (여자 주인, 여왕 즉 선덕여왕)가

정치를 잘못한다는 구실 

(女主不能善理 여주불능선리) 로

군사를 동원해서 반역을 도모했으나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선덕여왕은 몹시 두려움에 떨고 있었고,,


<선덕여왕>다,,당장 김유신 장군은 반란을 진압하라 !


<김유신>악은 선을 이길 수 없으며

요사함은 덕을 이길 수 없습니다

폐하께서는 근심하지 마시오소서 !


1월 8일

선덕여왕이 붕어, 사망했습니다

(반란은 10일 이상 지속됬다 하고

선덕여왕은 1월 8일에 사망했기에

반란 진압을 끝까지 보지 못하고

사망한 인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시호를 선덕 善德 (착할 선 덕[착함, 큰] 덕) 이라

하고(공식 이름은 선덕여왕이 아니라 선덕왕입니다)

낭산에 장사지냈습니다


<김부식>'당서' 에서는

'정관 21년에 죽었다' 고 하고

'통감' 에는

'25년에 죽었다' 고 하나

본사 本史 로서 이를 고찰하면 '통감'의 사실은 잘못되었다


<김부식>다음과 같이 논한다


내(김부식)가 듣기로는

옛날에 여와씨가 있었으나

그녀는 천자가 아니라 복희를 도와 9주를 다스렸을 뿐이며

여치와 무조 같은 경우에는 어리고 약한 임금을 만났기에

조정에 나와 정사를 보았으므로

역사서에서는 공공연히 임금이라 일컫지는 못하고

다만 고황후 여씨, 측천황후 무씨 로만 기록하고 있다


이를 하늘의 원리로써 말한다면

곧 양은 강하고 음은 부드러운 것이며

사람으로써 말하면


엣헴 ~


곧 남자는 높고 여자는 낮은 것이니

(과학적 근거는 없고 김부식님이

당대 고려 최고 지식인 격이었음에도

당대 선비들의 한계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찌 가히 늙은 할미로서 규방 閨房 (안방)을 나와서

국가의 정사를 결단하랴 ? (실제 선덕여왕은

젊고 당당한 이미지와 다르게

40대 초반 정도부터 60여세 까지 즉위한 인물이라 합니다

[정확한 출생 년도는 알 수 없습니다])


신라는 여자를 모셔

왕위에 않게 하였는데


이를 살펴보면 이는 정말 난세의 일이며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다


'서경'에 말하기를


'암탉이 새벽을 알린다(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


하고


'역경'에 말하기를


'약한 돼지(혹은 암퇘지)가 껑충거리고 뛰논다'


(군자를 해치려는 소인의 마음을 자꾸 뛰려고 하는

돼지에 비유한 것이라 하고

요즘말로 '나댄다', '쿵쾅된다[살찐 사람들이

이상한 주장을 할 때 살찐 사람들을 비하하는 용어]'

이런 말 같고,,

이런 용어들이 옛 조상님들이 썼다는 사실이 신기하고

유행어들도 사실 역사에서 있었던 말들이

유행하는 경우들도 있습니다,,)


하였으니

그를 가히 경계하지 않을 일이겠는가 ?


(요약하면 여자가 왕이되서 이모냥[이모양] 이꼴임 ㅉㅉ,,)


<라봉봉>선덕여왕은 그녀가 일반 보통 남성이었어도

그냥 평범한 군주로 남았을 인물이라 생각되고

문제는 당대 한국 백제와 고구려, 중국에서는 각각

여러 인물들이 나오고 크게 국제 정세가 변동하던 시기였는데

선대로부터 이어진 강력한 나라를 이어온 그녀가 감당하기에

신라라는 나라는 너무 크고 버거웠지는 않았나 라는

생각도 들고 실제로 그녀는 한국사 최초의 여성왕이라는

큰 의의가 있는 인물인데도 그럼에도

평 자체는 좋은 인물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녀의 아마도 최대 업적이라하면

사실 황룡사 구층목탑 같은 대규모 토목공사는

당대 할만한 상황이라 보기도 그래서

업적이라긴 그렇고,,

첨성대를 쌓았다고도 하는데

아마 가장 최대 업적은 김춘추와 김유신 두 인물을

'키운게' 아닐까 싶습니다


그녀는 여인의 몸으로서

능력역시 딱히 뛰어났다 보기엔 어려운 인물이었다

할 수 있고 가진거라곤 돈밖에 없는 무식한(,,) 재벌 2세녀

라는 생각도 드는거 같은데,,


이에 신라 신하들은 여러 불만등도 생겨났을 거 같은데

김춘추와 김유신은 사실 선덕여왕이 굳이 지원하지 않았더라도

알아서도 잘 성장했을 큰 인물이라고도 생각되나

선덕여왕이 이 두 큰 호랑이같은 인물들을

적극적으로 지원함으로서

빠른 속도로 김춘추와 김유신 장군은

큰 성장을 하며 세력을 키울 수 있었던거 같고


또 김춘추는 진짜 뼈다귀인 진골,

김유신 장군은 신라계가 아닌 가야계라는

출신 성분의 약점이 있었고

선덕여왕은 성스러운 뼈다귀인 성골출신 이었지만

또 여성의 몸이라는 성별의 약점이 있었기에

이런 약점들을 가진 서로를 서로 밀어주고 끌어주며

당대 신라사회를 이끌어가게 된 거 같고


선덕여왕 자체로는 솔직히

선덕여왕이 불지르면 김유신 장군이

헐레벌떡 수습하는 소방관 역활을 했던거 같고

신라 최고위직이었던 비담이 난을 일으킬때

여주(여자주인, 여왕)가 정치를 잘못했다는 명분으로

반란을 일으켰는데 비록 명분이란 어떻게던 지어냈겠으나

실제 정치를 잘한 왕은 아니었던거 같고


나름 딸바보 아버지인 진평왕의 큰 사랑을 받는

맏딸(첫째 딸)로 태어난 김덕만, 선덕여왕은

진평왕에게 배웠던 것처럼

김춘추와 김유신이라는 두 큰 인물들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게 된 게 아닐까 싶고

나름 이런 면에서는

유능한 왕은 아니었더라도

콜롬버스 선장을 지원했던

카스티야, 스페인의 이사벨 여왕이 생각나기도 하고


근데 그점 외에는

완전 김유신 장군을 죽을때까지

호위무사 격으로 쓴 철없는 여왕의 모습이 있었던거 같고

마지막에 죽었을 때에도

비담의 공격에 '몹시 두려워했다' 라는 기록이 있었다는 것 처럼

하여튼 정치는 별 신경안쓰고

여러 왕답지 못한 철없는 모습을 보이다가

비담의 난때 충격으로 사망한 인물 같고,,


이런 점때문에 옛날 사람들이

'여자가 왕이 됬으니 이모양이지' 이런 소리들이

나온게 아닐까 싶습니다


당대 김유신 장군은 (정치를 놔버린,, 선덕여왕 때문에,,)

집에도 잘 들어가지 못하고

온갖 전선들을 다니며 고생을 했던 시기로 보이고

고생했던 만큼 또 그의 평생의 친구 김춘추와 함께

신라 사회의 주류계로 떠올랐고

점점 여왕과 새로 떠오른 진골 김춘추, 가야계 김유신을

견제하는 구 귀족 세력이라 할 수 있었던

비담 세력과 마찰이 생기다가 결국

비담이 상대등이 되고 곧 반란을 일으켜서

김춘추, 김유신 세력과 한판 붙다가

모조리 비담 세력이 숙청됨으로서

김춘추, 김유신 세력으로 신라 정계가 채워졌고

이로 인해 '비담의 난' 은

선덕여왕 사후부터는

김춘추와 김유신은 거의 왕과 다름없는

신라 최고의 실세화가 되었던 사건이라 할 수 있고

신라 정치계가 대거 '물갈이'되는 시점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직 김춘추는 명분이 부족해서였는지

선덕여왕 사후 바로 왕위에 오르지는 않았고

먼저 선덕여왕의 사촌자매였던 마지막 성골혈통이자

(조종하기 좋았던 인물인) 여인인

김승만을 왕위에 옹립했던거 같고

이에 또다시 신라에는 여왕이 들어서게 됬고

선덕여왕 사후 그녀의 사촌자매 진덕여왕이 왕위에 오르게 됬고

비담의 난 이후 더이상 견제할 세력이 없어진

김춘추와 김유신은 이시기부터 권력 승계작업과

굳히기 작업을 철저하게 했던 시기로 보여집니다


또 김춘추와 김유신 장군에게 있어서

선덕여왕 김덕만은 적어도

자신들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키워준 인물이었기에

착할 선 착할 덕자를 쓰고 그녀 주변의 사람들을

후하게 대접했을 거 같고


이에 선덕여왕이 실제역사에서는

여러 비판과 논란이 있는 인물임에도

'지혜롭고 덕이 뛰어난 여성임금' 이미지가 생겨났던거 같고

나름 두 호랑이같은 김춘추와 김유신이라는

신라의 큰 거인들을 키운 인물로서

당대 성장기였던 김춘추와 김유신 장군을

'거느렸던' 여인이라는

모습에서는 멋있는 모습들이 많이 나왔을거 같은데

그외에는 사실 안습(눈물나는)한 기록들이 많습니다,,


또 이야기하자면,,

선덕여왕은 대한민국 첫 여성대통령이었던

박근혜 전 대통령이 생각나는 인물이기도 하는데

실제로 박근혜 대통령 재임기간동안

여러 아부성 멘트로 박근혜 대통령을

선덕여왕에 비유한 일들이 있었는데

아부성 멘트가 아니라

실제로 비슷한 모습들도 있었다고 생각되나

박근혜 전 대통령은 헌정사상 최초의 탄핵된

대통령이었고,, 당시 국정농단 사건이나

사고 수습에 실패했다는 점,

그녀를 보호할 김춘추와 김유신 같은 인물들이

없었다는 점 등에서는 같다고 보기는 어려운 거 같고


쓰면서도 박근혜 전 대통령이 생각나기도 했고

현재는 수감되있는 인물이나

박근혜 전 대통령도 한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으로서의

상징성은 있었던 인물이고 여러 겹치는 부분들이 많기에

이야기를 쓰면서도 생각나기도 했고

역시 선덕여왕과 마찬가지로 여러 혹평도 있는

박근혜 전 대통령인데,,

개인적으로는 이미 수감되어 옥살이를 하고 있는 인물을

비난하기만 하는 것도 옳은 일은 아니라 생각하고

언론은 '죽은 권력보다 살아있는 권력'의 부패를 더

주의깊게 봐야되는거 같고 하여튼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붙은 별명 '선덕여왕'은 처음엔

'지혜롭고 뛰어난 여성 지도자'라는

아부성 멘트로 시작됬지만

권력 말년이 안좋았다는 점 등

실제 비슷한 길을 가게 된 인물이었던 거 같습니다,,


하여튼 선덕여왕이 한국사 최초로

여성의 몸으로 왕이 되었다는 점에서는

의의가 있는 인물이라 할 수 있고

여왕이 나오는게 한번이 어렵지 두번, 세번은

더 쉽게 가능한 법인거 같고

이에 신라는 여왕만 3명인 당대 기준으로는

상당히 특이한 정치체계를 보여줬다 할 수 있고

비록 성골과 진골, 골품제, 신분제의 엄격함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김씨,석씨,박씨가 다른 성씨임에도 왕위에 오르고

여왕이 3명이나 나타나는 등 오늘날 민주주의 정치와도

일맥상통,비슷한 모습들을 보여주고 있고

신라가 당대 기준으로는

상당히 특이한 정치체계의 나라였음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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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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