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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마지막 성골왕 진덕여왕>


신라 28대왕 진덕왕(진덕여왕이라 하나

역시 정식명칭은 진덕왕입니다)


재위기간 7년 647~654년


진덕(여)왕이 왕위에 올랐습니다


<신라인 1>또 여왕이시라는데 ?


<신라인 2>그건 명목적인 거고

사실상 김춘추, 김유신 세상이지 ,,


<신라인 1>쉿,, 사실을 말하지 말게,,


그녀의 이름은 승만(김승만)이며

진평왕의 동복아우인 갈문왕 국반


<김부식>국분이라고도 한다


의 딸입니다


어머니는 박씨 월명부인입니다


(진덕여왕) 김승만은 자태가 곱고 아름다웠으며(풍만하고 고왔으며)

키가 7척 (진덕여왕때부터는 당소척이 사용됬는데

이때부터는 1척 = 23cm가 아닌 1척 24.5cm이어서 171.5cm 키의

여왕이었습니다) 이었고

팔을 늘이고 있으면 그 길이가 무릎을 넘었습니다


<라봉봉>또다시 신라에 여왕이 즉위했는데

이는 점점 신라사회에서 성골들은 씨가 마르기 시작했고,,

이에 마지막 성골이 두 여인 김덕만(선덕여왕)과

김승만(진덕여왕)이어서 두 여인이 왕위에 올랐고

그만큼 성골이라는 혈통이 대단한 것이다 라는

해석도 있으나

사실 진골이었던 김춘추도 똑같은 혈연적으로

결코 꿀리지 않는 정통하다 할 수 있는 왕실출생이고

성골과 진골 구분도 딱히 뚜렷하지 않았기에

성골과 진골 구분에 대한 여러 논란,여러 해석도 있으나

김춘추가 왕위에 오르고 제대로 굳히기 위해

자신이 성장하던 시기의 두 여왕을 성골로 높이고

자신을 진골로 낮춰서 겸양의 의미로 했다는 해석도 있는거 같고


저 생각에도 그냥 단순 구분의 의미로

신라 시조 혁거세 거서간부터 진덕여왕까지는 성골로 부르고

삼국통일의 주역이었던 태종 무열왕 김춘추부터

신라 마지막왕 경순왕까지는 이를 구분하려

진골로 부르게 된 거 같습니다


(근데 만약 구분이 아닌

혈통적 성골이라면 김승만이라는 여인이 왜 왕위에 오를만큼

성골이 대단하냐고도 의문이 생길 수도 있고

또 만약 겸양의 의미로 낮춘 것이라면

어짜피 왕이 된 순간부터 성골이나 진골이나 하는 것들은

사실상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기에 대충 낮춰서

겸손과 또 자신을 키워준 여왕들에

대한 감사표시라 할 수 있겠습니다)


하여튼 성골은 이때를 마지막으로 사라지나

이후에도 신라사회에 이런 골품제는 멸망 전까지

계급제도의 상징으로서 신라의 발목을 잡고

이로 인해 신라 지식인들이 지방 호족들과 붙어버리거나 하며

신라 사회를 이탈해갔다 할 수 있고


오늘날에도 특히 성골, 성스러운 뼈라는 의미는

비유적인 표현이 되서 어느 집단에서 철저하게

순혈 엘리트 테크를 탄 경우를 성골이라 비유하기도 하고

이 역시 인간의 오만에서 나온 말들이라 할 수 있으나

그렇게 '성골'이라는 말은 '순혈주의'를

대표하는 용어가 됬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나당동맹의 체결>


진덕여왕 원년(1년)

정월(1월) 17일 봄

(선덕여왕 말년에 반란을 일으킨) 비담을 목베어서 처벌했습니다

이에 연루되어 죽은 자가 30명이었습니다


(이전 선덕여왕때 신라 최고위 벼슬 '상대등'이었던

비담이 반란을 일으킨

'비담의 난'은 신라의 신 세력이라 할 수 있는

김춘추, 김유신 세력과 구 세력이라 할 수 있는

비담 세력의 대충돌이었다고 할 수 있고

김춘추, 김유신 세력이 승리함으로서

비담 세력은 모조리 숙청되고

더이상 견제세력이 없어진

김춘추, 김유신의 독주가 시작됬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영리한 김춘추는 먼저 왕위를 한번 사양해서

성골이지만 여인이었고, 또 세력이 없어서 조종하기 좋은

김승만, 진덕여왕을 허수아비 왕으로 앉히고

점점 정권장악, 왕위 계승작업을 시작했다고 생각됩니다


김승만, 진덕여왕도 어짜피 왕위를 사양하던

이으려 하던 어짜피 모두 김춘추의 뜻대로 할 수 밖에 없기에

나름 영리하게 처신하며[김춘추의 뜻대로 하며]

조용히 지냈던거 같습니다,,)


2월

이찬(신라 2등벼슬) 알천을 상대등(신라 최고위직, 신라 귀족들의 대표직)으로

임명하고 대아찬(신라 5등벼슬) 수승을 우두주 군주로 임명했습니다


당태종이 지절사를 보내서

전왕(선덕여왕)을 광록대부로 추증했습니다


<당나라 사신>또 여왕이 즉위했군,,

신라는 참으로 특이한 나라다,,


그리고 진덕여왕을 주국 柱國 (직역하면 나라의 기둥) 으로 삼아

낙랑군왕으로 책봉했습니다


7월 가을

사신을 당나라로 보내서 은혜에 사례했습니다


연호를 태화로 고쳤습니다


8월

혜성이 남쪽에 나타나고

또한 별 무리가 북쪽으로 흘러갔습니다


10월 겨울

백제 군사가 무산성, 감물성, 동잠성의 3성을 포위했습니다


진덕여왕은 김유신 장군을 파견해서

보병과 기병 1만을 거느리고 대항하게 했습니다

신라 군사들은 악전고투 惡戰苦鬪 (어려운 싸움과 괴로운 다툼) 으로

기운이 다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김유신의 부하 비녕자와 비녕자의 아들 거진이

적진(백제군)에 들어가서 격렬하게 싸우다가 전사했습니다

이에 여러 (신라) 군사들이 용감하게 공격해서

3천여 명의 머리를 베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백제 이야기를 쓸때 했고

이후 또 쓸 것 입니다)


11월

진덕여왕이 직접 신궁에 제사를 지냈습니다


진덕여왕 2년

정월(1월) 봄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서 조공했습니다


3월

백제장군 의직이 (신라) 서쪽 변경을 침범해서

요거 등 10여 성을 점령했습니다


진덕여왕이 이를 걱정해서

압독주 도독 김유신에게 이 문제를 해결하도록 명령했습니다


(선덕여왕, 진덕여왕은 위기가 발생하면 일단 김유신을 부르는게

그녀들의 보편적인 위기 해결방법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완전 불끄는 소방관같이 일종의 119 버튼같이

위기 발생시 김유신 장군을 불렀다고 할 수 있고,,


그만큼 김유신이라는 인물과 '김 유 신' 이 세글자가

신라 사회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어마어마 했고

김유신 장군은 한국사 위인이며 당대 신라사회에서

'영웅'이라고 여겨졌던 인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진덕여왕>(비록 내가 허수아비여왕이지만,, 일단 선덕여왕을 따라하자,,)

김장군은 당장 이 문제를 해결하시오 ~~~~~ !!


<김유신>이미 나라에 충성을 바치고자 결심한 몸입니다

전력을 다하겠습니다 !


이에 따라 김유신 장군이

군사들을 격려해서 작전을 시작하려 하자

(백제 장군) 의직이 저항했습니다

김유신이 군사를 세 갈래로 나누어서

협격 夾擊 (좌우에서 공격)하자

백제 군사가 패주했습니다


김유신은 도망가는 백제 군사를 추격하여

거의 모두 죽였습니다


진덕여왕이 기뻐하면서

군사들에게 공훈에 따라 상을 주었습니다


겨울

감질허를 당나라에 보내서 조회하도록 했습니다

당태종 이세민이 어사로 하여금 다음과 같이 묻게 했습니다


<당태종>신라가 신하의 자격으로 대국을 섬기면서

어찌하여 당과 다른 연호를 사용하는가 ?


질허는,,


<감질허>(슬슬 갑질이 시작되는군,,) 일찍이

대국 조정에서 정삭 正朔 (달력)을 반포하지 않았으므로

선조 법흥왕이래 우리 나름대로의 연호를 사용한 것입니다


만약 대국 조정의 명령이 있었다면

우리나라 어찌 감히 다른 연호를 사용하겠습니까 ?


,,


<당태종>그리 말하더냐 ?

역시 동이 東夷 (한국의 낮춤말) 는

보통의 오랑캐와는 다르다

인물들 하나하나가 학문에 밝고 논리적이구나,,


<당나라 신하들>어찌할까요 폐하 ?


<당태종>신라를 적국으로 만들어서는 안된다

일단 내버려 두라


당태종이 이를(신라가 연호를 사용한 것을) 수긍했습니다


이찬(신라 2등벼슬) 김춘추와

그의 아들 문왕(김춘추의 셋째아들 김문왕)을

당나라에 파견해서 조회케 했습니다


당태종은 광록경 유형을 교외까지 내보내서 맞이하며

그들을 위로했습니다


그들이 도착하자

당태종 이세민은 김춘추의 풍모가

영특하며 늠름한 것을 보고 후하게 대우했습니다


<당태종 이세민>(대장부는 대장부를 알아보는 법,,

기이하고 훌륭하게 생겼구나) 대장부답게 생기셨구려 !


<김춘추>(역시 듣던대로 보통 인물이 아니다) 폐하 역시

마찬가지시옵니다 !


김춘추는 당나라 국학에 가서

석전(제사)과 강론을 참관하기를 요청했습니다


당태종이 이를 하락하고

당의 황제가 지은 온탕(온천에서 세운 비석에 새긴 글)

및 진사비의 비문과 새로지은 '진서'를 주었습니다


당태종이 하루는 김춘추를 연회에 불러서

황금과 비단을 더욱 후하게 주면서 물었습니다


<당태종>(아나 얘 마음에 들어,, ♡) 그대에게

무슨 소원이 있는가 ?


라고 물었습니다


김춘추가 무릎을 꿇고


<김춘추>신의 나라가 멀리 바다 한 구석에 있어

대국을 섬긴 지 여러 해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백제가 강성하고 교활해서

침략을 일삼아 왔습니다


더구나 지난 해에는 대군을 거느리고

대대적으로 침입하여 수십개의 성을 점령하여

대국에 입조할 길을 막았습니다


만약 폐하께서 군사를 보내

그 흉악한 무리들을 없애지 않는다면

우리나라 백성들은 모두 포로가 될 것이며

육로와 수로를 거쳐 술직(조회)하는 일도

다시 기대할 수 없을 것입니다


당태종이 크게 동감하고

군사의 파견을 승락했습니다


<당태종>(하 예절까지 바르구나 그래그래)맞다

백제는 남녀가 난잡하게 뒤섞여

놀고 있는 실정이라 들었다

그러나 백제가 신라를 공격한 이유는

너희 나라 임금이 여자여서 그런 일이지


그러나 짐은 이에 크게 동감하는 바이며

군사의 파견을 승락할 것이다 !


김춘추는 또한 관리들의 휘장과 복식을 바꾸어서

중국의 제도를 따르겠다고 청했습니다


이에 당태종은 내전(궁중)으로 하여금

진귀한 의복을 김춘추와 김춘추의 수행원들에게 하사했고

당태종은 조칙을 내려서 김춘추를 특진에,

(김춘추의 셋째아들) 김문왕을 좌무위장군에 제수했습니다


김춘추가 귀국할 때

당태종이 3품 이상의 관리들을 모아서 연회를 베풀고

그들과 전별(잔치를 베풀어 작별)했습니다


당태종이 그들을 우대하는 예절이 이와 같이

극진했습니다


(당대 신라의 관복까지 바꾸는

눈물겨운 사대외교라고도 이야기되나

당나라 입장에서도 고구려,백제보다는

신라와 더 말이 통했던 상황이었고

또 당태종이 어지간히 김춘추의 인품을 마음에

들어 했던거 같습니다)


김춘추는 황제(당태종)에게


<김춘추>저의 자식이 일곱입니다

원컨대 그중의 하나인 문왕(김문왕)이로 하여금

성상(임금, 여기서는 당태종을 말함)의

곁을 떠나지 않는 숙위(모시는 사람)가

되게 하여 주소서 !


라고 말했습니다


당태종은 곧 그의 아들 문왕(김문왕)과

대감 OO (삼국사기 글자 손실) 에게

숙위를 명했습니다


김춘추가 신라로 귀국하던 도중

바다에서 고구려의 순라병(순찰병)을 만났습니다

이렇게 되자 김춘추의 시종인 온군해가

고관과 대의(고위층 옷들)를 입고 배 위에 앉아 있었습니다


<온군해>춘추공은 아직 살아서 하셔야 할 일이 있으십니더 !

저와 옷을 바꿔입으시옵서서 !


<김춘추>아아 ! 미안하구나 !


고구려 순라병은 그를 춘추로 알고 잡아 죽였습니다

김춘추는 작은 배를 타고 신라로 돌아왔습니다


(김춘추 역시 비담의 난 이후

신라 최고 실권자가 됬음에도

김유신 장군이 전선에 나갔던 거처럼

직접 발로 뛰어다니며

외교를 했던 모습을 보여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당대 신라인들은 왕족,귀족들

역시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발벗고

나가던 모습이 있고 전성기 로마와도 비슷합니다,,)


진덕여왕은 이 소식을 듣고 슬퍼하며

군해(온군해)에게 대아찬(신라 5등벼슬)을 추증하고

그의 자손들에게 상을 후하게 주었습니다


<라봉봉>그렇게 당대 동아시아의 운명을 바꾼

전설적인 '나당동맹'이 두 태종, 당태종 이세민과

이후 태종 무열왕이 되는 김춘추의 만남으로 체결되게 됬습니다

오늘날 상당히 비굴하고 사대적인 모습으로 비춰지고

이야기 되는 나당동맹이지만

신라는 백제,고구려,왜의 포위에서 벗어나야 했고

당나라는 당나라 역시 사방으로 외국에 둘러쌓여있었는데

특히나 동쪽의 고구려는 매우 강성하며 학문에도 밝아

상대하기가 어려운 적이었고 바로 전 나라였던 수나라 역시

고구려 원정의 실패로 멸망했기에 특히나 동쪽 지역 정세에

예민했던 시기였는데 마침 신라 사신으로 온 김춘추는

당태종 그와 죽이 잘맞기도 하고 또 신라는 고구려,백제,왜의 견제에서

풀어나려 했기에 양국의 이해관계 역시 잘맞아서

결국 그렇게 당대 동아시아 세계의 운명을 바꾼

'나당동맹'이 체결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나당동맹과 신라의 삼국통일은 외세였던

당나라, 중국의 도움을 받았기에

한국사 치욕의 시작이라고도 이야기되나

당대 여러 이해관계와 실정등 여러 상황을 간과해서도 안되고

또 반쪽짜리 통일이다 할 수 있을정도로

고구려 영토의 상실로 비판되는게 신라인들의 '나당동맹',

당나라의 도움을 받은 통일이라 하나

당나라도 사실 백제, 고구려 멸망 이후

다시 백제, 고구려 유민들과 손잡은 신라인들과

나당전쟁을 벌이다 패배했고,, (이때 신라인들은

정말 장난 아닌 정치력,군사력을 보여줍니다,,)

이후 고구려 유민 대조영의 발해건국으로 다시

고구려 영토에서 쫒겨나게 됬다는 점 등

함부로 비굴한 역사로 해석해서도 안되고

그렇다고 애초에 신라와 백제,고구려는 전혀 다른 나라였고

당대는 민족개념도 없었으며

단지 신라는 그 두나라를 멸망시키려 최선을 다했다고 봐서도 안되는게

엄연히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은 조선(고조선)의 후손들이 건국한 나라로서

언어가 통하고 동질적 의식은 분명히 있었고

나당동맹은 신라는 민족개념도 없던 당대에

생존을 위해서 합리적인 판단을 했을 뿐이라고

해석해서도 안됩니다


단지 그게 당대 신라인들의 최선이었고

옆나라이자 전통적인 강대국이었던 중국이 또다시 통합되자

한국 삼국인들은 옛날 중국 한나라에 한국 조선(고조선)이 멸망된 것처럼

위기 의식을 크게 느꼈을 것이고

이에 한국도 민족통합의식이 점점 생겨나던 시기라 생각되고

이에 당나라의 도움을 받았지만 끝내 당나라와 결전을 벌여서

자주적인 삼국통일을 이뤄냈던 당대 신라라 할 수 있고

당대 신라,한국인들의 노력 등을 함부로 사대주의적 모습이다라고

낮춰 보아서도 안되는 이유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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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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